2012년 출간되어 큰 이슈가 되었고, 지금도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읽히며 논의되고 있는 한병철의『피로사회』를 읽었습니다. 기라성 같은 사상가들의 논리를 시원하게 한계 지으면서 자신의 논지를 펴는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거장의 이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지요.
한병철이 주장하는 논지의 핵심은 우리의 사회가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전환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규율사회’를 분석했던 이론을 가지고 오늘날을 규정하는 것은 맞지가 않다는 것이지요.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오늘의 사회가 아니다.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사회가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23(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
이제는 외부의 권력이 개인을 감시한다기 보단, 사회의 주민 스스로가 자기를 감시한다는 것이 한병철의 진단입니다. 여기서 감시자는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라고 믿는 개인에 의해 탄생된 ‘이상 자아’입니다. ‘이상 자아’는 끊임없이 ‘현실 자아’를 압박하고 그 간극을 메우기를 강요합니다. 이상 자아에 비하면 현실의 자아는 온통 자책할 거리밖에 없는 낙오자죠(103).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깊어 화해할 수 없게 되는 지점에서 우울이 도래합니다. ‘이상 자아’를 탄생시키는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라는 메시지는 물론 사회적인 것이고요.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우울증 환자는 이러한 내면화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28
한병철은 ‘규율사회’와 ‘성과사회’는 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배후에 동일한 원리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산성의 향상’입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더욱 가속화된 발전을 위해 타자에 의한 착취에서 자기 착취로 전환합니다. 자기 착취는 기만적인 자유의 느낌을 동반하는 한에서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효율적입니다(110).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하나의 층위에서만큼은 연속성을 유지한다. 사회적 무의식 속에는 분명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 있다. 생산성이 일정한 지점에 이르면 규율의 기술이나 금지라는 부정적 도식은 곧 그 한계를 드러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대체된다. 생산성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금지의 부정성은 그 이상의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보다 더 빠르고 더 생산적이다. 그렇다고 능력이 당위를 지워버리는 것은 아니다. 성과주체는 규율에 단련된 상태를 유지한다.(···) 능력은 규율의 기술과 당위의 명령을 통해 도달한 생산성의 수준을 더욱 상승시킨다. 생산성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당위와 능력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한다. 25
힐링 바람이 불기 전에 오랜 시간 출판계를 주름잡았던 테마가 자기 계발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직장을 잃으면 다른 치즈를 찾아가라고 조언해주는 책도 있었고, 새벽이나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설계하라는 내용도 있었죠. 누구는 유대인처럼 살라고 했고, 또 누구는 7가지 습관을 몸에 베이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하튼 방법에서의 차이는 있지만 핵심은 같았습니다. “지금 네 삶은 시궁창일지 모르지만, 너도 큰 성공을 할 수가 있어. 나의 가이드를 쫓아오기만 한다면.” 저도 자기 계발서를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마음에 안 들지만, 책에서 나왔던 성공모델을 쫓아가면 영광의 날이 올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다 보니,
‘아··· 안되잖아.’
누구나 영광을 차지 할 수 있을 것 같이 묘사되어 있지만, 사실 영광의 자리는 한정적입니다. 평가의 룰이 상대평가 방식이라면 학우들이 다함께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하더라도 소수만이 A+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계의 구성 방식이 소수에게만 영광의 자리를 내어 주는 식이라면 우리는 성공담의 주인공이 되기보단 성공담의 소비자에 머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이상 자아’는 무한한 가능성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중심에는 ‘너와는 다른 나’라는 일말의 자족적 개성(나는 평범하지 않아)이 있습니다.
근대가 낳은 노동하는 동물에 대한 아렌트의 서술은 오늘날 성과사회에 대한 관찰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다.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노동을 통해 인류의 익명적 삶의 과정 속에 용해되어버릴 만큼 자신의 개성이나 자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노동사회는 개별화를 통해 성과사회, 활동사회로 변모했다.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거의 찢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수동성과는 정말 거리가 먼 것이다.(···)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정확히 말해서 전혀 동물적이지 않다. 그는 과도하게 활동적이고 신경과민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40~41
한병철은 이러한 자기착취적 굴레 때문에 인류의 문화적 성취의 힘이 되었던 ‘깊은 심심함’이 상실되어 간다고 개탄합니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32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 속에 빠집니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파국으로 끝날 뿐입니다(101).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병철은 니체를 인용해 ‘사색적 삶’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사색적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순수한 활동성은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연장할 뿐이다. 진정 다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려면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잠시 멈춘다는 부정적 계기를 매개로 해서만 단순한 활동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볼 수 있다.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 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오늘날 우리는 중단, 막간, 막간의 시간이 아주 적은 시대를 살고 있다. 48~49
이상 자아를 살찌우는 사회 메시지는 신비화된 자유입니다.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긍정의 힘은 의심을 억누르며, 무한한 세계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리게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긍정적인 사고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정도에 있습니다. 새가 두 날개를 통해 날듯이 긍정적인 사고와 부정적인 사고는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지나친 긍정성의 과잉이 목격되고 있습니다. 이상 자아는 부정적 사고를 불순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부정적 힘이 없다면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집니다. 긍정적 힘, 긍정성의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나가기만을 허용하기 때문입니다(53).
사색적 삶이 개인적인 제스처라면 “깊은 피로”는 하나의 대안 공동체를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깊은 피로는 정체성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사물들은 반짝이고 어른거리며 가장자리가 흔들린다. 사물들은 더 불분명해지고 더 개방적으로 되면서 확고한 성질을 다소 잃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특별한 무차별성으로 인해 우애의 분위기를 띠기 시작한다. 타자들과의 사이를 가르는 경직된 경계선은 거두어진다. “그런 근본적인 피로 속에서 사물은 결코 그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것들과 함께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사물들이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은 모두가 함께 어깨를 맞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피로는 깊은 우애를 낳고 소속이나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한트케는 내재적 성격을 지닌 피로의 종교를 구상한다. “근본적 피로”는 자아의 논리에 따른 개별적 고립화 경향을 해소하고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그 속에서 어떤 특별한 박자가 일어나 하나의 화음을, 친근함을, 어떤 가족적 유대나 기능적 결속과도 무관한 이웃관계를 빚어낸다.(···) 무위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저 “오순절의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 한트케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언제나 피로한 상태”라고 상상한다. 그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피로한 자들의 사회이다. “오순절-사회”가 미래사회의 동의어라고 한다면, 도래할 사회 또한 피로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70~73
한병철은 이상 자아에 의해 고갈되는 피로가 아닌,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는 계기가 되는 ‘근본적 피로’를 현 세태에 대한 대안적 힘으로 봅니다. 그것이 행해졌던 역사적 사례로 “오순절 모임”을 들고 있죠. 오순절 모임은 초기 기독교 운동이 가능하게 했던 피로의 공동체였습니다.
<2>
정말 오늘날 규율사회의 성격이 완전히 사라졌는가? 라고 질문하고 싶지만, 경향성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볼 때 한병철의 논의 중 가장 허술한 부분은 마지막입니다. 그는 ‘오순절-사회’를 미래사회와 같은 선상에 두면서 대안적 피로사회에 대해 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순절’ 모임이 가능할 수 있었던 맥락에 대해서는 어물쩍 넘어가고 맙니다. 그는 그저 ‘근본적 피로’라는 신비로운 개념을 활용하여 오순절 모임의 결과들만 나열하고 있죠.
오순절 모임이 혁명적인 기독교 운동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라는 카리스마적 존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두 차례의 집단적 신비체험을 통과한 후에 가능했죠.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 그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들이 모일 수 있었던 이유는 부활한 예수를 만나는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응집력이 극대화 된 계기는 오순절 성령 체험을 통해서였습니다. 부활한 예수는 ‘성령을 받아라’라는 지시를 끝으로 승천하게 됩니다. 남겨진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예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밤낮 기도했고 성령의 임재라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를 오순절 사건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저 ‘“근본적 피로’는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라며 손쉽게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오순절 모임이 탈국가적이고, 탈민족적이며, 탈혈연적 공동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라는 카리스마적 존재의 진리 설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유대교 사상과 달리 예수는 모든 인류가 구원의 대상이며, 신 아래 평등하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이를 믿는 모든 사람은 국가, 민족, 혈연과 상관없이 형제, 자매라고 선언했죠. 가난하고 핍박받는 이웃이 있는데 호의호식하고 있다면 자신의 형제를 외면하는 파렴치한이 되고 맙니다. 신은 특정 민족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인류 모두를 자녀로 삼았고, 그렇기에 모두가 서로 아끼며 사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예수는 복음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러한 주장 때문에 결국 예수는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을 달고 처형당하지만, 그 진리에의 선포 때문에 오순절 모임은 대안적 공동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한병철은 오순절 모임에 대해 언급하고 근본적 피로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맥락을 세심히 다뤄주지 않습니다. 한병철은 오순절 모임을 “개별적 고립화 경향을 해소하고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호출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사건은 거의 2000년 전 사건이고 그 때 살았던 사람과 지금의 우리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오순절 모임이 하나의 혁명적 사건이자 혁신적 공동체의 도래였다는 점에서 지금의 우리에게 하나의 소중한 참조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나이브한 연결은 막연함만을 남깁니다. 오늘날의 세태에 대해 도전적인 철학적 테제를 가지고 명쾌하게 정립한 것에 반해 대안적 공동체에 대해서는 신비롭게 처분하는 모습은 많이 아쉽습니다. 우리의 ‘깊은 심심함’이 필요한 지점이 바로 여기인 것 같네요.
<3>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32
저는 성공한 자영업자의 아들입니다. 남들 잘 때 깨어 일을 시작했고 남들 쉴 때 한 번 더 뛰셨죠. 시대적 흐름도 부모님을 응원했겠지만, 그 수고의 강도는 더 없이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도 이것이죠.
“잠은 잘수록 늘기 마련이다.”
부모님의 수면시간은 여간해서는 5시간을 넘기지 않았고, 저에게 지속적으로 했던 훈육은 이 같은 성격의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부모님의 영향 아래서, 그리고 자기계발에의 강요라는 시대적 요구 속에서 강박적으로 자기계발서 및 잠언집들을 탐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잠시라도 그냥 허비되는 시간이 생기게 되면 무엇을 해서든 그 공백을 메워야만 안도가 되는 사람이 되었죠. 하루를 마무리하며 이부자리에 누웠을 때 만족감과 실망감을 결정짓는 잣대도 공백의 시간을 얼마나 철저하게 제거했느냐에 달렸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성실한 숨죽이기가 창의를 낳아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속된 건 오히려 소비였고 창의는 자기 자리를 잃어갔습니다.
언젠가 작가 박민규의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창작의 동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심심함’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놀랐습니다. 심심함이라니. 그는 심심해야만 온갖 생각들을 하게 되고, 거기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심심함이라는 것이 ‘깊은 심심함’이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타인들의 세계를 강박적으로 학습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창의가 발생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건 그들의 세계를 나의 세계가 어떻게 조작하여 흡수하고 갱신의 계기로 삼는가가 아는가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기 세계에만 침잠해서는 안 되겠죠. 박민규 작가도 고전 탐독과 폭넓은 다독을 부연하기도 했으니까요. 다만 심심함의 강박으로 타인의 세계를 삼키기만해서는 자신의 이름이 모호해지는 경향성을 막을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심심함을 견디고 나의 세계에 침잠된 이름들을 건져내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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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 재밌게 읽었습니다. 아쉬운 점도 제가 읽으며 느낀 바와 유사하네요. 섣불리 '긍정적 피로'를 말하는 것 같아서 조금 '읭?'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아마 대중서를 목적으로 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진단 자체가 가벼운 에세이에 그친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피로사회> 이후 <투명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느낀 점인데(후자는 심지어 칼럼집이라 더 그런 느낌이 강하죠), 사회에 대한 진단들이 툭툭 던져지는 느낌이라 허망한 점이 있습니다. 저는 사회학 내지 사회철학 서적들이 대안을 훌륭하게 제시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는 문제 자체가 무엇인지를 잘 진단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성과주의'와 '긍정'이라는 키워드가 여기저기 수사적으로 쓰일 뿐 개념적으로 더 깊이 파고들질 못합니다. 물론 두꺼운 철학서가 아니니 이와 같은 태생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조금 더 길어져도 좋으니 이 개념들을 수사 이상으로 분석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렇죠. 개인적으로는 한병철의 긴글들이 좀 번역됐으면 좋겠더라고요. 논문도 괜찮고. 지금은 관뒀지만 한 때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면서 많은 인문 연구 작업물들을 읽어왔는데, 한병철의 글을 읽으면서 놀랐습니다. 진짜 철학자처럼 말하더라고요. 주석가가 아니라. 엄밀성의 여부를 떠나서 시원한 느낌이 들어 인상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