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시작 전, 사훈을 외치는 자리에서 선희는 점장에게 공개적으로 정규직 전환을 약속받습니다. 쑥쓰럽지만 뿌듯한 표정으로 선희는 매일 외쳤던 서비스 정신을 크게 외칩니다. “손님은 왕이다! 기업이 살아야 우리가 산다!” 아들내미 딸내미를 생각하면 선희에게 연장 근무를 뛰는 것 따위야 충분히 견딜만한 일입니다. 누군가는 손님의 비위를 맞추지 못해 수모를 당하기도 하지만, 자기 일이 아닌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못본 척 지나칠 수 밖에 없죠. 그러던 어느 날, 탈의실 바깥 벽에 공고가 붙습니다. 현재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을 해고한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웅성거리고, 울먹거리고, 이는 이내 아우성으로 번집니다. 선희는 대리 동준에게 자신의 정규직 여부를 물어보지만, 그의 딱딱한 얼굴을 보며 이내 자신 역시도 예외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막바지에 몰린 아줌마들은 뭉치고 선희는 얼떨결에 노조의 대표가 됩니다.
영화의 가운데에 있는 것은 노동조합, 즉 우리가 “노조”라 불리는 집단입니다. 이들은 대한민국에서 그렇게 편하고 당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누군가는 이들을 국가의 경제를 흔드는 적이라 부릅니다. 누군가는 게으르고 교활한 기회주의자들이라고 하죠. 혹은 과격한 극단주의자들이라고도 합니다. 대한민국의 초중고 과정 교육에서 노조란 집단에 대해 정확히 알 기회는 대단히 희박합니다. 이들을 적으로 규정하진 않더라도, 노조는 선뜻 “우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어딘가에서 싸우고 있을 노조는 어쩌다 저런 처지에 내몰린 안 된 사람들이고, 그건 결국 남의 사정이 됩니다. 노조가 맞서는 불의는 “그들의 문제”이고 아직 목숨줄이 안전하다 붙어있는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거나, 동정을 보내는 데에 그치게 됩니다. 몇 명이 부르짖고, 그 중 몇명이 다치거나 죽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일상의 한 부분이며 바쁜 우리의 발길을 멈추기에는 턱 없이 사소한 일이죠.
영화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노조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건, 선악의 이분법 위에서 서로가 맞서 싸우는 것이 영화의 중심이라 예상하고 봤던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노조를 바라보면서 저지르는 가장 흔한 실수일지도 모릅니다. 제 3자의 눈으로, 우리는 기업을, 때로는 노조를 선이나 악이라 판단하고 이를 비판하니까요. 어떻게 해서 노조가 생기고, 어떤 식으로 갈등이 생기며,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 양 측에서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가. 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뉴스나 기사로 충분히 접하고, 또 지겨워서 눈으로 흝고 넘기는 정도의 사실 여부입니다. 대신 영화는 훨씬 더 중요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이건 바로,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당장 이런 문제가 와닿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자신이 처한 근로 환경이나 노동법에 대한 신뢰의 정도, 개인의 신념이나 이데올로기 등, 누군가에게 노사 문제는 당장 머리띠를 동여매야 할 만큼 시급하거나 정의로운 일이 아닐 수도 있죠. 주인공인 선희 역시도 성실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보상받고, 걱정 없이 일 할 수 있을 거라 믿어온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영화 카트는 이렇게 말하며 시작합니다. 계산대, 밀걸레에 걸고 있는 수십명의 목숨줄 끊는 건 툭 소리도 없이 해치울 수 있는, 그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요. 그렇기에 이 부당함은 결코 선희가 자리한 비정규직, 계약직으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정규직이 연봉 계약직으로 갑자기 바뀌면서, 동준 역시도 노사 활동을 펼치다가 해고당합니다. 심지어 선희의 아들도 알바를 한 만큼의 월급을 받지 못하고 실갱이를 펼치다가 경찰서로 가게 됩니다.이처럼, 우리 모두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노동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 누가 됐고 무엇을 다루며 어떤 일을 하던 우리는 고용주와 나눈 약속에 생존을 걸고 일을 하게 되죠. 나의 고용주가 악덕하지 않다고 해서, 나는 현재의 처우에 참을 수 있다고 해서 이것이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진 않습니다. 영화 카트는 누가 그 자리에 있었든 억울하고 참을 수 없는 이야기인 거지요.
그렇다고 영화가 노조의 울분과 서러움만을 보여주진 않습니다. 분명이 그들이 처한 상황은 답답하고 막막해요. 그럼에도, 선희네 노조는 그 안에서 유대감으로 뭉쳐 그 안에서 웃기도 하고 미소도 짓습니다. 회사가 협상에 응하지 않자 마침내 불법점거를 하게 된 선희네 노조는 그 안에서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또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누기도 하고, 오순도순 밥도 먹고 장도 보면서 일상 생활을 계속 합니다. 노조라는 건, 우리네 생각만큼 퍽퍽하고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아니에요. 노조가 하는 것은 투쟁이 맞습니다. 하지만 노조가 투사로 돌변하진 않지요. 그들도 우리처럼 똑같이 밥 먹고, 수다 떨고, 얘 키우는 걱정하고 팔볼출처럼 자식 자랑하고 그러는 옆집 아줌마, 친구 엄마, 이모들인 겁니다. 영화는 선희네 노조가 처한 상황의 절망감을 보여주며 관객의 화를 돋구는 대신, 그 안에서도 따스함과 믿음을 품고 가는 선희네 노조의 희망을 보여줍니다. 영화를 보며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노조라는 글자 안에는 사나움과 맹렬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평범함과 훈훈함이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노조는 노조가 아닙니다. 노조를 뛰고 있는 “사람들” 이라는 걸 말입니다.
영화는 드라마틱한 승리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영화의 마지막까지도 선희 일동의 투쟁은 기약 없는 먼 길을 향하고 있는 중이죠. 그러나 마지막에 다다를 때쯤, 우리는 영화 속 사람들이 조금 더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확인하게 됩니다. 엄마를 원망만 했던 태영이 제 월급을 선뜻 빌려주는 것은 단순한 가족애가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선희를 이해하는 신호일 것입니다. 선희를 답답해했던 혜미, 혜미를 딱하다며 지나쳤던 선희, 그리고 서로 틱틱대던 미진과 옥순, 다른 직원들까지 이들은 흩어졌었지만 또 다시 뭉칩니다. 그리고 끝난 것 같았던 투쟁은 다 같이 미는 카트에 실려 다시 시작됩니다. 맞아요. 선희와 일행들은 여전히 약합니다. 법적 대응 앞에, 용역 깡패 앞에, 경찰의 공권력 앞에 의지가 꺾이고 희망이 깨집니다. 그래도 주저앉지 못하는 것은 혼자가 아닌, 우리로서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버티고 있기 때문이죠. 선희의 어설픈 연설은 이제 직원이 아닌, 고객들에게 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스크린 너머의 관객들을 향해 울립니다. 다 같이 싸워주라는 게 아닙니다. 남의 일처럼 외면하지 말기를, 무엇을 위해 선희네가 힘겹게 매달리고 버티는지를 알아주면 됩니다. 유대는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유대 안에는 그 누구라도 들어가 더 큰 “우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카트 안에 담은 것은 모두가 함께 행복할 수 있다는 바람과 믿음입니다.
@ 불공정 계약의 대표적 회사인 SM의 디오가 이 영화에 출연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 염정아씨가 외모를 포기하고 연기에 헌신했다는 식으로 부풀리는 기사들은 조금 불편합니다. 연기를 업으로 삼은 여자들은 아직도 배우가 아니라 “여배우”로 불릴 수 밖에 없는 불편한 현실이죠.
@ 여자라서 겪는 노동시장에서의 차별 역시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 문정희씨 엄청 미인이네요.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