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가 후반에 접어들며 처음 생각한 건 앞으로 몇번이나 연애를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더불어 나는 얼마나 드라마틱한 이야기거리를 만들었을까 하는 돌이킴이었다. 그 생각의 맨 앞에는 언제나 당신이 있긴 했다. 그다지 탐탁치는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내 20대가 지니고 있던 드라마의 대부분은 당신과의 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돌이켜 보면 찌질하고 뭣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청춘 태그라도 붙여서 미화해야 하는 이야기일런지도 모르겠다. 나도 찌질했고 당신도 찌질했다. 그 찌질함을 밑천 삼아서 난 소설을 썼고 당신은 극본을 썼겠지. 어차피 둘 다 글로 밥 벌어먹긴 틀렸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당신 때문에 내가 꽤나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거다. 정신적으로다가.
신입생 시절에 처음 봤던 당신은 외모로 따지자면 나름 인생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예뻤지만 허튼 생각을 하기에 나는 너무 너드였고 연애 같은 건 포기한 지 오래였다. 학교 주변 호프집에서 열린 환영회에서 당신이 내게 소주를 강권하던 걸 기억한다. 난 신입생 그 해가 끝나도록 술을 입에 대지 않았었다. 알코올로 뇌를 혼란시키는 것이 허접한 꼴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지금 맥주 1000cc를 그대로 들이키고 이 글을 쓴다. 그게 그때와의 차이다. 종종 알코올에 침식당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걸 꽤나 늦게 알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당신은 작은 집단 내에서 벌어진 파국 ㅡ 늘 작은 집단 내에서는 애정 문제를 가지고 파벌이 갈리고 난 늘 그걸 못 마땅해했었다 ㅡ 에 떠밀려 집단 밖으로 밀려났고, 나는 피규어나 모으면서 행복했다. PVC 조각들을 모으는 건 퍽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당신은 학교를 옮겼고, 언젠가 갑자기 나를 부를 일이 있었다. 이사 때문이었던가. 난 가서 만화책 옮기는 걸 도와줬었다. 그리고 떡볶이를 얻어먹었던 것 같다. 탈색한 머리가 생경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뒤로 종종 당신은 나를 불렀고, 나는 고기 조각으로 꼬드긴 멍멍이마냥 쪼르르 달려가기 일쑤였다. 나는 종종 허튼 생각을 했지만 그걸 실천할 의지는 없었다. 당신과 나는 그렇게 가끔씩 술잔을 기울였고, 때로는 그 자취방에서 밤을 지샜다. 몇번인가는 잠들었다가 첫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들이, 당신에게는 어떤 밤이었나. 난 늘 그게 궁금했다. 다른 이들도 그렇게 거기서 잠들었다가 돌아오곤 했었던 건가 하는 궁금증과 함께.
우스꽝스러운 일도 있었다.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브에 난 멋도 모르고 자취방에 불려가 술을 마셨다. 차가 끊긴 시간에 당신이 불렀고 난 비싼 할증 택시비까지 내가며 또 달려갔던 걸로 기억한다. 술잔을 주고 받다가 도어락이 갑자기 삑삑삑삑하며 열렸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 내 고환이 터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실감을 그때 했다. 원주에 내려가 있을 거라던 남친과 나는 순간 눈이 마주쳤고 남자는 곧장 뒤돌아서 뛰쳐나가 버렸다. 그 심약함에 감사를. 우스운 걸로 치자면 산 지 5분 된 와인을 ATM기 위에 올려놨다가, 병이 경사로를 타고 내려와 깨져버린 것도 빼놓을 수 없을 거다. 바닥이 피 같은 색깔로 가득 얼룩졌고, 이미 취해있던 나와 당신은 어쩔 줄 모르며 부스를 빠져나왔다. 다음 날 아침 고생했을 직원에게 사죄를.
그리고 내가 첫번째 차였을 때 나는 H2를 읽던 중이었고, 두번째 차였을 때엔 각자 와인을 한 병 마신 채였다. 당신이 내 첫키스를 앗아간 날 나는 새벽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나는 당신이 왜 내 눈을 가리고 입 맞췄는지 그 동정심을 이해할 수 없었고, 택시에서 내려 토했고, 스니커즈에 보랏빛 얼룩이 묻었었다. 나는 그 뒤로 그런 색의 토악질을 본 적이 없었다.
이 쯤 쓰다가 문득 지루해진다. 그 뒤로 당신은 심심하면 한번씩 나를 흔들었고, 그건 문자의 형태로 올 때도 있었고 소식의 형태로 올 때도 있었다. 당신이 등단했다는 건 멀찍이서 들었고, 그 판에서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없게 되었다는 건 직접 들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이야기다. 당신을 극복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젠 더 이상 관심 가지고 싶지 않다. 내 20대의 기억 속에 그저 박제되어 있었으면 한다. 당신이 좋아라 하던 조휴일이 썼던 가사가 오늘 참 마음에 든다. 그러니 난 더 이상 쓰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돈도 안 되는 글감, 대강 마무리나 지어버리라지. 아마도 난 당신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온기로 채워졌던 밤. 그리고 알 수 없는 말들로 가득했던 우리 누워 있던 방. 믿기 힘든 행동들이 교환되고 받아들여졌던 밤. 길고 검은 니 머리카락이 내 얼굴 위로 쏟아지기만을 기대했던 밤. 돌아온 건 기대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너의 속맘.'
아냐아냐. 이건 적당한 인용이 아니다. 이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나는 글 쓰는 여자는 징그러. 시집이나 보면서 뒹굴어 아가씨.'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