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책을 하나 읽고 있습니다. 그 책을 읽고 정조와 정약용만큼이나 언어유희에 능한 분이 조선 후기에 한 분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 유명한 방랑시인 김삿갓(金笠), 김병연입니다. 김삿갓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 야사에 가까운 여러 일화들을 본 것이 전부였는데, 철든 후에 보는 김병연의 이야기는 슬프면서도 웃음이 나게 하는 희비극 그 자체였습니다.
김병연은 조선조의 명문가 중 하나인 안동김씨인데도 어릴 적부터 가난을 면치 못했습니다. 홍경래의 난 때 반군에 투항한 데다 김창시의 목을 벤 것을 자기 공으로 꾸민 죄로 조부 김익순이 사형당함으로서 김삿갓의 집안이 멸문지화의 길을 걷게 되었기 때문이죠. 젊은 김삿갓은 집안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과거 시험장에 나아가게 되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문제로 하필이면 이런 주제가 나옵니다.
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 (논정가산충절사 탄김익순죄통우천)
"정가산의 충절한 죽음을 칭송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닿음을 탄하라"
이 글은 한시가 아니라 산문이기에 상당히 깁니다만,
끝부분의 두 부분을 가져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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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吾王庭下進退膝 背向西城凶賊脆 魂飛莫向九泉去 地下猶存先大王
오왕정하진퇴슬 배향서성흉적취 혼비막향구천거 지하유존선대왕
임금 앞에서나 꿇던 무릎을 서쪽의 흉적에게 꿇었으니
네 혼은 죽어서도 황천에 못 가리니 지하엔 선대왕의 영혼이 계신 까닭이다.
忘君是日又忘親 一死猶輕萬死宜 春秋筆法爾知否 此事流傳東國史
망군시일우망친 일사유경만사의 춘추필법이지부 차사유전동국사
임금을 저버린 동시에 조상을 잃어버린 너는 한번은 고사하고 만번은 죽어야 마땅하다.
도대체 역사의 준엄함을 아느냐 모르느냐. 치욕적인 이 일은 역사에 길이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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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천하의 명문인지라 장원 급제하였고 진사위를 얻은 김병연은 어머니에게 합격 소식을 알리게 됩니다. 그런데 웬일인가요. 천하의 역적이라 욕한 김익순이 사실은 자신의 할아버지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역적놈의 자식이라 놀림감이 되고 위축될 것을 우려한 어머니가 집안의 수치로 숨겨왔던 것이지요. 김삿갓은 충격을 받고 식음을 전폐한 끝에, 조상을 욕한 자신은 하늘을 볼 자격도 없다 하여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서게 됩니다. 이 때 김삿갓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도로망과 숙박시설 등 사회간접시설이 잘 갖춰진 시대가 아닙니다. 돈벌이 수단이라고는 글짓기뿐인 김삿갓은 거지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으리라 예상됩니다. 오늘은 이 집에서 밥을 청하고, 내일은 저 집에서 잠을 청하는 떠돌이 생활. 스무 살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고단한 생활이었습니다. 그와 관련된 일화는 민간에서 설화처럼 전승되며 실제 그가 한 말이 아닐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러나 일화와 달리 글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요. 민간 이곳저곳에서 써서 남긴 글들이 일제시대 학자들에 의해 수집되며 차츰 김삿갓의 문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방랑하던 도중 겨울날에 서당을 찾아 잠자리를 청하는데, 훈장은 초라한 행색을 보고 그저 귀찮아 내쫓으려고만 합니다. 화가 났지만 내색하지 않고 '기왕 들어는 왔으니 시를 한 수 드리고 가겠다'며 지필묵을 청하고, 훈장이 아랫목에 드러누운 틈을 타 아래의 시를 써붙여 남기고 가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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辱說某書堂 욕설모서당
모 서당을 욕함
書堂來早知 서당내조지
서당을 미리 알아 일찍 왔는데
房中皆尊物 방중개존물
방안엔 모두 귀한 것들 뿐이고
生徒諸未十 생도제미십
학생은 모두 열 명도 안 되는데
先生來不謁 선생내불알
훈장은 와서 뵙지도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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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아름다움(?)이 구구절절 드러난 충격적인 시입니다. 비슷한 예가 있는데요. 함경도의 어느 제사에서 술 한잔 안 주고 박대를 하자 자신이 축문을 지어 주겠다며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축문 비슷하게 지은 한시가 있습니다.
헌관과 집사 모두 정성을 다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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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시에서 두 번째 줄부터 한시를 읽는 방식으로 음을 읽으면 이런 뜻이 됩니다.
"니 집 제사는 내 X이고,
제사에 올릴 음식에 용두질을 하며,
헌관과 집사는 모두 개X알이다."
허허, 인터넷에 다는 악플 같군요. 어쩌면 세계 최초의 악플러는 김삿갓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단순한 욕설이 아닌, 보다 흥미로운 것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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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문풍월(諺文風月)
天長去無執 花老蝶不來 천장거무집 화로접불래 (천장 거미집 / 화로에 접불 내)
菊樹寒沙發 枝影半從池 국수한사발 지영반종지 (국수 한사발 / 지령(간장) 반 종지)
江亭貧士過 大醉伏松下 강정빈사과 대취복송하 (강정 빈사과 / 대추 복숭아)
月利山影改 通市求利來 월이산영개 통시구리래 (워리 사냥개 / 통시(변소) 구린내)
하늘은 멀어서 가도 잡을 수 없고
꽃은 시들어 나비가 오지 않네.
국화는 찬 모래밭에 피어나고
나뭇가지 그림자가 반이나 연못에 드리웠네.
강가 정자에 가난한 선비 지나가다가
크게 취해 소나무 아래에 엎드렸네.
달이 기울어 산 그림자 바뀌니
시장에 다녀와 이익을 얻어 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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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문풍월이란 언문(한글)을 오언이나 칠언절구 같은 한시 형식에 때려맞춘 것을 뜻합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한시형식으로 정리된 한글 메시지(딴
지일보에서 잘 하죠?)의 원조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느 주막에서 주인과 탁주를 건 한시내기를 하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주인이 부른 시제는 '동銅, 웅熊, 공蚣'이었습니다. 구리, 곰, 지네라니. 참 이런 시제를 가지고 저라면 어떻게 시를 지을까 고민되네요. 하지만 김삿갓은 이렇게 멋진 시를 지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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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주래기(濁酒來期)
主人呼韻 太環銅 주인호음태환동
주인이 운자를 너무 구리(銅)게 부르니
我不以音 以鳥熊 아불이음이조웅
나는 음으로 짓지 않고 새김(새곰.鳥熊)으로 짓겠네
濁酒一盆 速速來 탁주일분속속래
탁주 한 동이 어서 가져오게
今番來期 尺四蚣 금번내기척사공
금번 내기는 '자네가 지네(尺四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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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의 '척사공'은 '자' 척尺, 넉('네') 사四, '지네' 공蚣 의 뜻만을 모아 만든 것으로 '자네가 지네' 라는 뜻이 됩니다. 아쉽습니다. 이 절묘한 언어유희를 단지 탁주 한 사발에 들려주기는 아까운데 말입니다. 그는 위대한 시성으로 추앙받아 마땅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한시와 우리말을 합쳐 멋진 퓨전요리 컬렉션을 선보인 언어의 쉐프, 김삿갓의 한시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아참, 제가 읽고 있는 책은 양기원씨가 지은 '방랑시인 김삿갓'입니다. 김삿갓의 주옥같은 시편들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ps.
할아버지를 욕했다고 하늘 볼 낯이 없어 삿갓을 쓰고 평생 방랑했던 김삿갓. 오늘의 눈으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미련한 사람입니다. 3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는 아프리카 방송에서 부자간에 욕설을 하며 싸움박질을 하는 것이 전국에 생중계되며, 아버지를 죽여 보험금을 타내려는 아들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부족할 것 없는 풍요를 누리며 살면서도, 옛사람들의 바보스러운 낭만에 아련한 눈길이 가는 것은 그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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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초기에 욕설모서당 글이 실렸지요.
"언문풍월이란 언문(한글)을 오언이나 칠언절구 같은 한시 형식에 때려맞춘 것을 뜻합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한시형식으로 정리된 한글 메시지(딴지일보에서 잘 하죠?)의 원조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가 아니라 말그대로의 원조인 셈이지요... 김삿갓의 그것을 보고 딴지일보에서 따라한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