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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11/10 22:28:27
Name 유유히
Subject [일반] 조선시대의 언어유희 - 정조대왕과 다산 정약용의 문답

"빵에서 나오는 끈이 뭐게~요? 따끈따끈~" -모 아이돌의 언어유희.


오늘날 단순한 언어유희는 살의를 불러일으키는 저질 개그 정도로 취급받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런 형태의 말놀음은 상당한 수준의 지적 유희로 평가받았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기록에 남아있는 정조대왕과 다산 정약용 선생의 문답을 소개할까 합니다.
규칙은 간단합니다. 공격측(?)인 정조대왕이 특정한 형식의 언어유희를 하면 수비측(?)인 정약용 선생이 같은 형식으로 받아치는 문답입니다.



정조 : 말이 마치(馬齒. 말의 이) 하나둘 일이(一二)

- 말이 마치 한두마리 이리처럼 보인다는 뜻. 같은 뜻을 가진 두 가지 단어만으로 온전한 문장을 만들었습니다.

정약용 : 닭의 깃 계우(鷄羽) 열다서 시오(十五)

- 닭의 깃이 겨우 열다섯 개라는 뜻. 같은 형태의 문장입니다.

정조 : 보리 뿌리가 맥근 맥근(麥根 麥根)

- 보리 뿌리가 매끈매끈 하다는군요. 앞부분의 주어가 의태어로 변했습니다.

정약용 : 오동 열매가 동실 동실(桐實 桐實)

- 마찬가지로 멋지게 방어(?)해 냈습니다. 오동나무 열매가 동실동실 열렸다고 합니다.

정조 : 까치 여덟이 팔작 팔작 (八鵲 八鵲)

정약용 : 송아지 다섯이 오독 오독 (五犢 五犢)

-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제일 재미있었습니다. 까치 여덟이 팔짝팔짝 뛴다고 표현한 재치나, 송아지 다섯이 오독오독 거린다고 표현한 유머 감수성이나, 정말 김동수해설 말마따나 스타급 센스입니다.

정조 : 술 먹고 수란(水卵)먹고

정약용 : 갓 쓰고 갓모(帽.모자 모)쓰네

- 술 먹고 술 안 먹고, 갓 쓰고 갓못 쓴다는 모순된 문장을 한자로 표현했습니다.

정조 : 창(槍)으로 창(窓) 뚫으니 창(槍)구멍인가? 창(窓)구멍인가?

정약용 : 눈(雪)으로 눈(目) 씻으니 눈물(雪水)입니까? 눈물(淚)입니까?



이런 문답이 끝나고 나서 정조께서는 껄껄 웃으며 '다산(정약용의 호)의 재치가 하늘에 닿으니 오늘은 짐이 졌도다' 라고 치하하셨고, 정약용 선생은 '아닙니다 소신이 전하를 당할 재간이 없사오니 소신이 졌사옵니다' 라고 답했다 되어 있습니다.
임금과 신하가 주고받은 재치있는 대화이자 우리말의 재미를 일깨워주는 귀중한 사료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ps.
엄격한 군신의 격의를 벗어두고 신하와의 농담을 즐긴 정조대왕이야말로 탈권위란 말이 나오기도 전에 탈권위적이었던 인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역시 다산 선생과 같은 위대한 학자를 알아보고 곁에 가까이 하신 분답습니다. 반면 200년이 흘렀는데도 예전의 나랏님 지위에 앉은 분이 유난히 권위를 찾으시고, 영의정께서는 백성들을 모두 자기 가마꾼 정도로 알고 계시니 정조대왕 보기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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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앙앙
09/11/10 22:35
수정 아이콘
캬~~~ 이 맛이로구나~!!
영웅의물량
09/11/10 22:37
수정 아이콘
와.. 급이 차원단위로 다르네요.
물론 주어는 없..죠.
09/11/10 22:39
수정 아이콘
오오, 이런 좋은 글이라니, 호호(好好)하면서 보게 되는군요.
09/11/10 22:45
수정 아이콘
굉장히 재미(在味)있네요!
저도 말장난 개그를 좋아해서, 학원에서 종종 써먹다가 주위를 썰렁하게 만들곤합니다..ㅠ_ㅠ


일본어 아시는분들이 보시면 재미있으실만한 말장난 하나 적어봅니다~!


벚꽃나무 아래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고백을 합니다.
하지만 여자는 고백을 받아주지않죠.
그리고 1년뒤, 소나무 아래에서 다시 남자는 여자에게 고백을 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자가 남자의 고백을 받아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답은..




気(木)が変って。。
항즐이
09/11/10 22:46
수정 아이콘
전하와 "저" "나"하며 신나하는 신하로니
이런 전하와 신하가 있어 천하에 신화로다.
항즐이
09/11/10 22:47
수정 아이콘
슈슈님//

내용은 들어본 적이 있어 아는데 일본어를 몰라 정확히 감탄하기 힘드네요 ^^ 일본어는 하이쿠도 그렇고 한 줄, 한 마디의 재미가 있는 듯 합니다. 참 배워보고 싶네요.


.. 그래도...

세종대왕님 승리.
09/11/10 22:49
수정 아이콘
항즐이님// 포인트는 마음과 나무 입니다. 맨처음에는 벚꽃나무 아래에서 고백을 했다가 두번째는 소나무 아래에서 고백을 했으니
木が変って(나무가 바뀌었고) , 그리고 처음에는 고백을 안받아주었다가 두번째는 고백을 받아주었으니 気が変って(마음이 바뀌어서)
입니다.

木(나무)의 발음이 키 이고 気(마음,기운)의 발음이 키 라서

한마디로 키가 카왓테 로 발음하면 마음도 바뀐것이 되고, 나무도 바뀐것이 되죠 ^^


.. 그래도...

세종대왕님 승리(2)
09/11/10 22:57
수정 아이콘
정조는 저런 문답을 하기 위해 미리 준비를 좀 했을 것 같은데 그걸 임기응변으로 방어해내는 정약용 선생에 역시~라는 말이 나오는군요.
별헤는밤
09/11/10 23:00
수정 아이콘
출처를 명기해주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퍼플레인
09/11/10 23:02
수정 아이콘
진정 고수들의 일합이로군요. 눈도 머리도 즐거워지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D
유유히
09/11/10 23:02
수정 아이콘
별헤는밤님// 제 기억속입니다.
더 정확히는 '맹꽁이 서당'이라는 만화책이죠.
큐리스
09/11/10 23:03
수정 아이콘
우연인지 모르겠는데...
몇 가지는 김삿갓에 대한 얘기를 읽을 때 본 것 같네요.
김삿갓 이야기쪽이 약간의 픽션을 가미했을 지도 모르니 저기서 따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기도 하구요.
한 편으로는 원래 좀 유명한 댓구라서 정조나 정약용이 서로 인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어느 쪽이 사실일지는 알 수가 없군요.
ROKZeaLoT
09/11/10 23:06
수정 아이콘
이야...
이정도는 되어야 후세에 대대로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 되는거군요.
ROKZeaLoT
09/11/10 23:13
수정 아이콘
유유히님// 어 맹꽁이 서당 저도 읽었습니다. '생각쟁이'라는 어린이 잡지에 연재됬었던 만화죠. 흐흐

어렸을적 적잖은 역사사실을 재미있게 가르쳐주던 맹꽁이 서당. 어머니께서 맹꽁이 서당 부분만 1년치를 모아두신 게 아직 집 책꽂이에 있으려나.

방학되면 가서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아 참, 글좀 퍼가려고 하는데 괜찮나요?
유유히
09/11/10 23:16
수정 아이콘
ROKZeaLoT님// 물론입니다. ^^;
DeadOrUndead
09/11/10 23:19
수정 아이콘
이야 감탄이 절로 나오네요
가야로
09/11/10 23:23
수정 아이콘
맹꽁이 서당 정조 편에 나오는 재밋는 구절이네요~
간만에 다시 읽었습니다.
근데 제 책에는 신하가 윤행임으로 나와있네요......?
유유히
09/11/10 23:24
수정 아이콘
가야로님// 어라, 그런가요?
초등학생 때 읽었던 책이라, 기억이 잘못된 건지도 모르겠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더니
정약용 선생으로 나오네요.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레이니선
09/11/10 23:24
수정 아이콘
더불어 김삿갓 김병연의 언어유희 한시인 욕설모서당이 생각나네요;

書堂乃早知
學童諸未十
房中皆尊物
訓長來不謁

음... 뜻과는 전혀다른... 독음... (소리내 읽지는 마세요...)^^
유유히
09/11/10 23:28
수정 아이콘
레이니선님//
서당을 미리 알아 일찍 와 보니
학동은 채 열 명이 못 되는구나
방 안에는 존귀한 것들뿐이고
훈장은 와서 뵙지도 않네

아름다운 한시로군요.
별헤는밤
09/11/10 23:37
수정 아이콘
유유히님// 아, 저도 '맹꽁이 서당'에서 이 문답을 본 적이 있어서 혹시나 해서 여쭤봤어요. 맹꽁이 서당은 어디에서 문답을 따왔을까요?
ROKZeaLoT
09/11/10 23:43
수정 아이콘
레이니선님// 제가 중학교시절 밀던 개그로군요. 이것역시 맹꽁이서당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김삿갓님의 주옥같은 시하나더 추가해보자면 (역시 맹꽁이서당에서 읽었던 시입니다)

스므(스물,20)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

망한(마흔,40) 놈의 집에서, 쉰(50) 밥을 먹었구나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오

집에 돌아가서, 설흔(서른,30) 밥을 먹는게 낫지......
웨인루구니
09/11/11 00:08
수정 아이콘
제가 아는 건
개나리가 만발하구나
스반힐트
09/11/11 01:01
수정 아이콘
명군에 명신이군요
언어유희
09/11/11 01:19
수정 아이콘
유유히께서 언어유희를 소개하시니 유유히 거닐던(逍) 언어유희가 끼어듭니다(介).

뭔가 남겨야 한다는 강박증이 낳은 무리수ㅠㅠ
09/11/11 01:31
수정 아이콘
레이니선님// 습관적으로 한자라 대충 훑던중 皆尊物이 보이길레...;
뭔가 해서 다시 읽어봤습니다.
유유히님이 뜻풀이는 해주셨으나 이거참, 독음은 난리군요^^;
09/11/11 09:33
수정 아이콘
저도 언어유희는 꽤 즐기는 편인데...(덕분에 제 주변은 항상 서늘합니다.)

윗 글은 언어유희의 최상급..이라고 할 정도네요..
09/11/11 09:58
수정 아이콘
이..이거슨 조..좋은 군신이다!! 중고등학생 국어교과서에 넣고 싶어지네요..
.. 그래도...
세종대왕님 승리(2)
슈슈님// 나름 재밌군요..
레이니선님// 아 날카로운 '주옥'같은 김삿갓님이군요 크크크크크-
나이트해머
09/11/11 11:53
수정 아이콘
뭐, 세조의 경우 공신들과 술판에서 팔씨름도 했다고 하고...
의외로 우리 생각보다 조선시대의 군신관계는 가까운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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