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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3/24 11:36:07
Name 언뜻 유재석
Subject [일반] [잡담] 기억상실증...

이런 증상에 대한 정확한 병명을 알지 못하여 일단은 기억상실증 이라고 해둡니다.

증상은 이렇습니다.

20년전 일은 또렷이 기억하는데 2년전 일은 잘 기억이 안납니다.

20년전 일이 기억에 오래 남을 기분 좋은 기억인것도 아니고 2년전 일이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딱히 기분 나쁠일도 아닌데 말이죠.






2005년 겨울. 그 해 호남지방은 유래없는 폭설이 내렸습니다. 하루 이틀 내린게 아니라 일주일에 5일은 매일 눈이 내렸어요.

당시 전남 모지방에서 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눈이 얼마나 왔는지 사단에서는 혹한기 훈련을 취소했고 전 부대원이 매일 대민 지원을

나가야 했습니다. 나중엔 인력이 모자라 대구쪽 어딘가에 특전사 분들이 파견도 왔었어요. 당시 우리는 눈뜨면 방한 용품과 제설장비등을

챙겨 육공에 올라타 어딘가로 이동해 그곳의 무너진 비닐하우스들을 정비, 철거하고 제설 작업하는게 일과의 전부였습니다.

밥도 매일 식사추진을 통해 먹었고 상태가 심각한 지역은 야간까지 작업해야 했습니다. 전역이 100일 정도 남은때라서 단순한 일과가

반갑기도 했지만 여튼 몸은 좀 고된 기억이 있습니다. 너무 같은 패턴의 일과가 반복되니 저녁때 티비를 보면서 우리는 진짜 눈 치우는

기계가 아닐까 하는 우스갯소리도 하곤 했습니다.




그날은 2006년 1월의 첫날이었습니다. 1일인지, 휴일지나 2일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여튼 제 기억에선 새해의 첫날이었습니다.

보통 우리는 중대장의 지휘하에 대민지원을 나갔는데 그 날은 우리가 가는 지역에 대대장이 따라오더라구요.

아이씨.. 저 돼지는 왜 따라오고 ...라고 잠깐 생각하며 우리는 육공에 올랐습니다. 초점 잃은 눈빛과 함께요.

20여분 달려 어느곳에 내려졌고 저희는 평소와 다름없이 하우스 철거작업을 했습니다.

1시간이나 했을때 저 멀리서 초조하게 있던 대대장이 중대장과 속닥속닥하고 중대장은 대대장의 열곱절을 더 초조해 하며 우리쪽으로

왔습니다.

"야! 모여봐. 대통령이 10분뒤 도착하신대. 여기에 계급순서로 도열하고 악수할때 관등성명 존나 크게 대라. 목소리 좆같이 내는 새끼 있으면
아주 뒤진다 진짜."


평소에 형 같이 자상하게 대해주던 중대장 입에서 욕이 나온 사실은 다들 뒤늦게 알아챘습니다.

『원래, 대통령이 이렇게 오나? 누구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거 아닌가..』가 그 때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모두의 생각을 지배했으니까요.

여튼 까라면 까야하니 도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대통령이 오셨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새해 첫날에. 부대도 아니고 대민지원 현장으로요.

별다른 훈화 없이 그냥 우리쪽으로 오더니 악수를 청하셨습니다. 제 생에 가장 큰 목소리를 냈던 순간이 아닐까 싶네요.

추운데 다들 고생이 많습니다. 한마디 하시고 대대장, 중대장과 몇 마디 나누시고 저를 포함한 병장들 몇명에겐 전역 몇일 남았냐 물어도

보시고.. 여튼 그렇게 가셨어요.10분정도 계셨었나. 저녁에 복귀하니 내무실에는 대통령 노무현 증 이라는 스티커가 붙은 치킨이

와있었습니다. 조금 아쉬었던건 1인1닭이 아니라는건데 그건 아마 보좌진의 실수 였겠죠. 그렇게 어안이 벙벙하게 치느님을 영접하며

뉴스를 보는데 저희 방문하시고 전북지역 대민지원 현장으로 바로가셔서 그곳 장병들도 격려하시고 가셨다고 하더군요.

새해 첫 일정을 부대방문으로 했다. 뭐 이런게 뉴스에 나오고 그러더라구요.


저는 이 하루가 너무 생생합니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떠올릴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몇몇 임팩트 있는 사건 대신 지극히 개인적인

이 일이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곤 합니다. 우습게도 저는 이 이유때문에 노무현이란 사람을 좋아합니다.

"개고생하고 있었는데 와서 악수해줬잖아. 난 그래서 노무현이 좋아."


그 날 이후로 노무현 대통령에겐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고 그냥 일정 중 하나 정도였을 부대방문과는 차원이 다를 많은일들을 겪으시고

지금은 우리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악수해준 날 이후로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퇴임하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 때도

분명 뉴스도 열심히 찾아 읽고 여러 글도 읽고 했는데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아요. 돌아가신 그 날도 그냥 뉴스 틀어놓고 먹먹하니

그냥 멍하게 있던 기억밖에 없고 그 전후 일들이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냥 악수해준 날 말고는 다 흐릿해요.





코흘리개 시절에 흑석동에 살아서 최루탄 냄새정도는 아주 익숙합니다. 그게 30년이나 되었네요...

『엄마, 왜 대학생 형아들이랑 경찰들이랑 싸워?』

『대학생 형아들이 대통령 욕해서 그래.』


그 때는 대통령 욕하면 경찰들이랑 싸우고 감옥가고 그랬습니다.

10년쯤 지나니 대통령을 소재로한 유머책이 발간 되더라구요. 못말린다고요...

10년쯤 더 지나니 대통령은 그냥 술안주가 되었어요. 그냥 다 노무현, 노무현.

10년이 더 지났는데 지금은 대통령 욕하면 감옥은 가는지 모르겠는데 여튼 경찰들이랑 싸워야 합니다.




누구 하나 개인의 문제인지 집단의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어떤 기억상실증에 빠진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 태평양 한가운데도 아니고 내 나라의 아름다운섬의 봄을 느끼려 배를 타고 가던 무고한 생명 300여명이 아직 냉기 가득한

4월의 바다에서 명을 달리 한지 이제 1년이 되어갑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계셨다면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하다 그 와 얽힌 일화 하나를 두서 없이 나열해 보았습니다.





주말엔 광화문에 나가 그 때 악수를 청하시면서 했던 말씀 돌려드려야 겠습니다.

『추운데 다들 고생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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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D.루피
15/03/24 11:38
수정 아이콘
예고 없이 갔네요.. 보통 대통령 행차였으면 당연히 대민지원에 휴가 때나 입는 그 아까운 A급 입고 나갔겠죠.. 아무도 신경도 안 쓰는 A급..
15/03/24 11:43
수정 아이콘
노통이 군부대에 갈 때면 어지간하면 사전 예고를 최대한 늦추고(아예 안 할 수는 없으니...) 갔다고 들었습니다. 미리 알리면 사병들 고생한다고요. 사병 출신이라서 높은 양반 온다고 했을 때 그 생고생은 잘 알고 있었겠지요.
15/03/24 12:04
수정 아이콘
저도 그때 상근으로 무안에서 군생활 했었습니다

정말 눈이 토나오게 왔었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온다는 소식은 저도 들었지만 지역이 달라서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그날 저녁 빵을 주더군요

2006년 1월의 눈 풍경은 아직도 가끔 생각이 납니다
언뜻 유재석
15/03/24 12:34
수정 아이콘
어라.. 저도 무안.. 04군번 6중대 였는데 아는 사이일 수도 있겠네요.
15/03/24 12:39
수정 아이콘
헐 저도 04군번 입니다 96연대 2대대 셨나요
언뜻 유재석
15/03/24 12:51
수정 아이콘
헐...네 96연대 2대대 6중대요. 저는 현역이었지만;; 부대 상근이시라면 백프로 알겠네요. 헐,,,
15/03/24 13:00
수정 아이콘
저는 면대 상근이었죠

그래도 부대 출근해서 대기한 적도 있고 훈련 받을 때 6중대 소속이라서 얼굴은 봤을 확률이 높겠네요
그나저나 엄청난 우연이네요
15/03/24 14:03
수정 아이콘
헐 동일연대 동일대대 동일중대..... 상근-현역이라 다행이지, 잘못하면 악독선임-괴롭힌당한 후임의 만남이 이루어졌을 뻔했네요. 흐흐.
15/03/24 17:56
수정 아이콘
제가 부대 상근이었으면 아마도 그런 만남이 이뤄졌겠죠

세상 참 좁네요
이쥴레이
15/03/24 12:51
수정 아이콘
2002년 12월 대선이 끝나고 생각나네요. 당시 군부대 있었는데 사단부터 난리가 났죠. 우리 사단 출신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하면서 1월쯤이었나 부대 방문할거라고 그때 준비하면서 기분이 묘하더군요.
내손으로 첫 투표를해서 처음으로 뽑은 사람이네 하는 감정요. 전 그때 상병 짬밥되면서 뭔가 즐겁게 준비했던 기억이 나네요.
외노자
15/03/24 13:07
수정 아이콘
오 같은 사단분이...
옆 연대였는데 나무 뽑아다가 심고 난리도 아녔다는...
톨기스
15/03/24 13:41
수정 아이콘
전 03년에 입대했는데 와서보니 대통령이 있었던 부대였더군요.
15/03/24 13:09
수정 아이콘
그때 인터넷 리플들 특히 뉴스 베스트댓글은 전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였죠.. 요즘 미국의 thanks obama 를 듣다 보면 그 리플들이 생각납니다.
근데 지금이라고 뭐 다른거 있나요? 쥐박이니 닭근혜니 하는건 이제 하도 들어서 귀엽기까지 하네요. 일베 들어가보셨나 모르겠지만 일베조차 박근혜 욕이 어마어마합니다. 일베가 싫어하는 노무현에 빗대서 '레이디 무현', '노근혜'라고도 부르더군요.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의 음담패설도 많고요.

이번 불법전단지 배포로 시민이 조사받은 사건을 생각하고 적으신 거겠지만 뭉뚱그려서 '욕하면 경찰이 잡아감'이라고 옛날하고 비슷한 것처럼 기술하시면 좀 그렇네요.
15/03/24 13:51
수정 아이콘
일베에서 레이디 가카는 아이돌 아니었나요? 왜 갑자기...?
15/03/24 14:10
수정 아이콘
대략 댓글들을 보면 담배값 인상, 단통법, 음란물유통법(딸통법), 유체이탈 화법, 다문화정책(일베는 다문화, 외노자 혐오정서가 있음) + 여성혐오, 미혼이라는 사실(일베에선 상폐녀라고 지칭) 등이 겹친 듯 합니다. 써놓으니 많기도 하네요.

엊그제 일베에 박정희의 가장 큰 실수 라는 뉘앙스의 제목으로 글이 올라왔길래 '왠일?'하고 읽었더니 본문에 박근혜 사진을 올려놓고 '자식 교육에 실패함'이라는 한 문장으로 추천을 몇백개 받았더군요.
절름발이이리
15/03/24 20:37
수정 아이콘
갑자기는 아니고 문창극 낙마시켰을 때 부터 참보수를 버렸다고 욕먹기 시작했습니다.
마이클조던
15/03/24 19:53
수정 아이콘
지금은 모르겠는데 mb때는 정말로 대통령 비방에 대해서 강하게 나갔었죠. 개그 프로에서도 정치 풍자 코너 다 사라지고요. 그때 말이 많아서인지 현 정부는 그때보다는 나은것 같긴 합니다.
15/03/24 20:18
수정 아이콘
맞아요. mb때는 그런 경향이 있었죠. 실제로 노무현 시절에 비해 언론자유를 떨어뜨렸다는 순위표도 있고요.
본문에는 노무현을 술자리 안주로 삼았다는걸 예로 들었는데 mb나 박근혜나 안주로 삼는 사람들 널렸거든요. 비교가 잘못됐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tannenbaum
15/03/24 13:26
수정 아이콘
95년 해사 졸업식 앞두고 대통령 방문을 앞두고 부대내 미화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토나오게요.
해사 졸업식 한참 전부터 영내도로에 차선, 주차장에 주차라인을 새로 그리고 건물 옥상마다 방수페인트를 새로 칠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겨울에 나무를 옮겨다 심고 허구헌날 도로에 먼지 하나 없게 쓸고 쓸고... 또 쓸고....
영내가 매우매우매우 넓었던 1스타가 부대장이었지만 군무원과 하사 위관 영관들이 5천명 넘게 바글대는 좀 특수한 부대라 병이 70명 내외로 매우 적었습니다.
그 넓고 넓은 영내와 수많은 건물들 전체를 꼴랑 병 70명으로 미화작업하는데 징글징글했습니다.

대통령이 부대를 방문했냐고요?
아니요 헬기타고 해사 가는 루트에 우리 부대가 있어서 위에서 내려다 봤을 때 깔끔해야 된다고 저 짓거리를 한달 넘게 했던겁니다.

각종 군비리도 군비리지만 이런 쓰잘데기 없는 짓거리만 안해도 군장병들 복지가 몇 배는 개선될거라는데에 제 커피숍을 걸겠습니다.
20년 전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쌍욕나오네요
아리마스
15/03/24 13:44
수정 아이콘
이번에 총리대신 어느분이 설연휴에 군부대 방문해서 국방과 안보를 외치셨던게 뜬금없이 떠오르네요 크크 군대를 안가셨던 분이셨는지라 분명 국방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연휴에 친히 방문하신거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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