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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3/24 04:41:42
Name OrBef
Subject [일반] (책후기, 스압) 다윈의 위험한 생각 - by Daniel Dennett (완)
마지막 편입니다.

<<< 5. 신체 강탈자의 침입 >>>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들은 전부 진핵세포입니다. 세포 속에 유전정보를 가진 핵이 있고, 에너지 공장인 미토콘드리아가 있습니다. 웃긴 것은, 핵과 미토콘드리아는 각자의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고 번식도 따로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으로부터 유전자를 반반씩 받았다고 보통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받는 것은 핵에 들어있는 정보 뿐이고 미토콘드리아는 어머니로부터만 받습니다. 남성의 세포 속에 들어있는 미토콘드리아는 다리 뻗을 자리를 잘못 찾은 것이고, 다음 세대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이런 괴랄한 현상은 도대체 기원이 뭘까요? 가장 유력한 가설은 두 개 이상의 박테리아가 공생하던 것이 진핵세포로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끼라고 부르는 식물 중 상당수는 사실 하나의 종이 아니라 곰팡이와 조류 두 종이 같이 공생하는 lichen이라는 놈들입니다>



<조류는 (동그란 놈) 몸이 너무 물렁물렁해서 비만 와도 다 씻겨내려 갑니다. 곰팡이는 (덩굴 같은 놈) 어떤 표면에든 잘 달라붙지만
광합성을 못하지요. 이 둘이 서로를 이용해서 뭉쳐 삽니다. 둘을 따로 떼 놓으면 둘 다 죽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생명입니까 두
개의 생명입니까?>





An autogenous model for the origin of eukaryotes.

<원핵세포에서 진핵세포로의 진화: 큰놈이 작은놈을 먹은 것인가 작은놈이 큰놈에 기생하는 것인가 아니면 둘이 같이 사는 것인가?>



위의 그림에서 2 > 3 의 과정이 호기성 (oxygen-using) 박테리아가 더 큰 박테리아 속으로 들어간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작이야 큰놈이 작은 것을 먹으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박테리아의 유전자는 천차만별이고 그중 어떤 조합에서는 소화가 불가능했을 겁니다. 대신 호기성 박테리아가 뿜어내는 에너지! 를 큰 박테리아가 공유할 수 있었고, 작은 박테리아는 자신을 소화하지 못하는 큰놈 속에서 다른 포식자에게 먹히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큰 박테리아는 운동과 사냥을 맡고 작은 박테리아는 미토콘드리아가 됩니다. 공생의 시작이지요. 그리고 이 원시적인 진핵생물은 생존경쟁 2라운드에서 ‘몸도 큰데 에너지 효율도 높아!’ 라는 큰 이점이 있었을 것이고 점차 지구를 덮어나갔을 겁니다. 이 진핵생물 중 몇몇은 4 > 5 번은 같은 과정을 거쳐 남조류 (광합성을 할 수 있는 원핵생물) 를 흡수한 뒤 남조류가 엽록체가 되면서 식물로 진화해 나갔을 것으로 과학자들은 믿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그랬으면 좋겠다’ 라는 수준의 가설이 아니라 원시 대기에 대한 다양한 추정과 유전자의 변화 속도 등에 대한 계산을 통해서 상당한 검증이 이루어진 이야기들입니다. 최근에는 핵의 형성 과정에서 바이러스의 침입도 기여했을 거라는 새로운 가설도 나온 것 같더군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몸 속에는 최소 세 가지의 유전 정보 – 큰 세포를 만들던 원핵세포, 미토콘드리아의 조상인 원핵세포, DNA 만드는 법을 깨우친 바이러스 – 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핵세포는 세 개의 생명체입니까 하나의 생명체입니까? 데닛에게 있어서 그런 것을 구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어차피 하나의 DNA 라고 해봤자 실제로는 여러 개의 유전 단위가 모여있는 것이고 각 유전 단위는 복제 시에 서로 경쟁하기도 합니다. 저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수소 두 개와 산소 하나가 모이면 물이 되지요. 그럼 물이란 것은 환상일 뿐이고 실제로는 세 개의 개체가 있는 걸까요? 아니죠. 세 개의 원자가 모여서 하나의 분자가 된 것이고, 분자는 원자가 가지고 있지 않던 성질을 나타내게 됩니다. 물론 분자의 성질, 큰 돌멩이의 성질, 나아가서 경제학까지를 양자역학 방정식을 풀어서 설명하는 방법도 (그런 것이 가능할 정도로 큰 컴퓨터가 있다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그런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핵세포 세 마리가 모여서 진핵세포가 된 것이고, 진핵세포는 생명체로서 한 수준 높은 기능을 획득했습니다. 이것을 굳이 원핵세포 세 마리가 모인 거니까 진핵세포는 없어! 라고 우길 정도로 극단적인 환원주의자는 없을 겁니다. 여기서 데닛은 다시 크레인의 비유를 듭니다. ‘어떤 유전자가 가장 잘 살아남고 가장 잘 복제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알고리즘을 돌리는데, 이걸 몇억 년 동안 돌리다 보니 ‘유전자 두 개를 따로 돌리면서 그 둘을 협력시키니까 결과가 좋음’ 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었던 디자인 공간이 진핵생물이라는 새로운 크레인을 통해서 접근 가능해진 것이지요.


데닛은 두어 마리의 원핵생물이 모여서 보다 고등한 존재인 하나의 진핵생물로 진화했듯이, 생물로서의 인간과 MEME 이 (= 아이디어) 모여서 문화적 인간이라는 더욱 고등한 존재로 진화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우리가 흔히 ‘인간’ 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그저 생물학적 인간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막대한 양의 MEME 을 습득하고 그를 통해서 다른 동물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높은 수준의 정신력을 보이는 존재라는 얘기죠. 따라서 ‘세뇌되지 않은 진실한 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데닛의 입장입니다. 교육을 받고 MEME 이라는 소프트웨어가 깔린, 어떻게 보면 ‘세뇌된 나’ 만이 ‘진정한 나’ 인 것이죠. 이 얘기를 아래에서 조금 더 자세히 하겠습니다.


MEME vs 인간의 의식, 누가 결정의 주체인가?


우리는 누구나 결정의 주체이고 싶어 하며, 인과율의 원천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두뇌에 MEME 이 들어와서 MEME 이라는 소프트웨어와 뇌라는 하드웨어, 그리고 주변 환경이 상호작용해서 인간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데닛의 주장을 접하고 나면 '응? 그럼 내가 주체가 아니라는 거야? 내가 MEME 의 노예야? 이건 뭐 유전자의 노예인 거랑 뭐가 다름?' 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에 대해서 데닛이 '감정적으로 좀 편하게 접근하라' 는 의미에서 하나의 예를 던지는데, '너희 중 인생의 목적이 최대한 많은 자손을 남기는 것인 사람 있어? 없지? 너희 대부분은 어떤 이상을 추구하면서 살지 않나? 그 이상이라는 것도 하나의 MEME 이거든요?' 이그것입니다. 여기서 도킨스와 데닛이 조금 갈라지는데, 도킨스는 자신의 책인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우리는 유전자와 MEME 이라는 복제자를 저항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라고 이야기하는 반면, 데닛은 '생물학적 인간 + MEME 이 진정한 인간임' 이라는 쪽입니다. 하등동물과 고등동물 그리고 인간이 환경과 투쟁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 지에 대한 데닛의 이해를 조금 더 살펴봅시다.






< 하등 동물의 메커니즘. 환경에 대해 무지한 유전자가 여러 가지 변종을 무작위로 생성한 후, 환경에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는다>



<고등 동물의 메커니즘. 다양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학습 능력이 있고, 주어진 환경에 대한 정보를 모은 뒤 내부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가장 좋을 것 같은 행동' 을 선택하는 능력이 있다. 즉 어느 정도의 선견력이 있으며, 좋아하는 미래, 즉 목표의식이 있다. 다만 학습은 객 개체가 스스로 맨땅에 헤딩함으로써 수행되며, 새 세대는 모든 것을 스스로 다시 배워야 한다.>



<인간의 메커니즘. 인간 역시 여전히 유전자 수준에서 만들어준 기본 OS 위에서 동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어를 통한 인간끼리의 학습이 가능해지면서 '종이 획득한 지식' 을 각 개인이 신속하게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지식, 즉 MEME 을 통해서 환경에 대한 시뮬레이션 능력과 선견력은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모든 사물에 '의미' 를 부여하는 경향, 또한 타인 (타인 또한 경쟁 혹은 협력해야하는 환경이다!) 의 '의도' 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났다>


이 모든 진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하등동물이고 어디서부터 고등동물이고 어디서부터 인간인지 선을 긋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습니다. 하지만, 비록 경계선이 불분명해도 양서류와 파충류가 다르듯이, 경계선이 불분명해도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지요. 데닛은 다만, 그 다름의 원천이 형이상학적인 (예를 들어서 인간에게만 하늘에서 영혼이 뚝 떨어졌다든지)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 (인간은 다른 동물들보다 아는 것이 1000000 배 많고, 우리 후대는 우리보다도 1000000000 배 많이 알 거임) 라는 것을 지적합니다.


마지막 그림을 잘 보면 시뮬레이션된 환경이 있고, 그것을 잘 들여다보는 의식이 있지요. 이렇게 이원화된 도식은 어디까지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이 책에서 자세히 이야기하진 않지만 데닛은 인간의 의식이나 정신 작용 역시 의식이 없는 세포들의 상호 작용을 통해 '아래로부터 나타난' 현상으로 이해합니다. 즉, 우리 뇌 속의 어느 공간에 도사리고 있는 '신비로운 인식의 주체' 는 없다는 입장이지요. 따라서 데닛의 인식 모델에서 시뮬레이션과 인식자는 서로 헝클어져서 떨어질 수 없고, 결국 인간의 의식과 MEME 은 하나의 개체가 (진핵세포처럼) 됩니다. 즉, MEME 이 당신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MEME 이 당신의 일부라는 거죠. 이 이야기는 너무 길어지니까 데닛의 생각이 그렇다는 정도에서 멈추고, 드디어 제가 제일 궁금했던 부분 '그래서 삶의 의미가 뭐라는 거요?' 에 대한 답을 해야겠네요.


<<< 6. 의미의 탄생 >>>


5번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을 돌이켜봅시다.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고등 동물에게는 '생존 본능' 과 '선견력' 과 가장 중요한 '환경을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능력' 등이, 그리고 그중에서도 인간에게는 '다른 인간에게서 배우는 능력' 과 '교감 능력' 과 'MEME, 혹은 문화' 가 생겼습니다. 모든 것이 데닛이 말하는 점진 누적이라는 크레인을 통해서 이루어졌고요. 여기까지는 다 좋은데, '그래서 이게 다 뭘 위한 겁니까?' 혹은 '삶의 의미는 뭡니까?' 라는 질문 역시 떠올리게 되었죠. 이 질문에 대해서 만족스러운 답을 찾지 못하는 인간 (앞으로 인간이라는 단어는 생물학적 인간이 아닌 문화적 인간을 뜻합니다) 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로 이어지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데닛은 다른 사상가들처럼 '이것이 삶의 의미입니다 이견은 받지 않습니다' 라는 식의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데닛의 사상은 진화론에 바탕을 두고 있고, 진화론의 요체 중 하나는 '본질 같은 것은 없다. 변화하는 생명체들이 있을 뿐' 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질이 없는데 불변하는 의미 따위가 있을 리가 없지요.


여기서 잠시 의미라는 단어의 의미를 확실히 하고 넘어갑시다. 물 속에서 포도당의 농도가 불균일한 것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물 속에 대장균을 집어넣으면 대장균은 자기 몸 주변 포도당 농도 분포를 감지하고 농도가 높은 방향으로 헤엄쳐나가게 됩니다. 이 순간부터 포도당 농도의 불균일함은 대장균에게 '이쪽으로 가면 살 수 있다' 라는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즉 '의미'야 말로 그것을 부여하는 '마음' 혹은 '의미의 창조자' 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의미를 부여하는 개체라는 것은 결국 생물뿐이고, 생물이 사물과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목적 (단순한 생존이든 아니면 인간의 복잡한 목적이든) 을 성취하는 것에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의미' 라는 단어와 '목적' 이라는 단어는 밀접한 연관이 있고, 두 단어 모두 그것을 '부여하는 존재'와 '부여받는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이런 식으로요. 진정한 목적을 가진 존재는 '나' 이고, 우리 창조물의 목적은 '나의 목적' 으로부터 파생됩니다. 그리고 그 창조물의 '의미' 라는 것은 창조물의 '목적', 궁극적으로는 '나의 목적' 에 종속됩니다. 이런 것들은 쉽습니다. 문제는 같은 질문을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던질 때 발생합니다:




<5천 년간 인류를 괴롭힌 문제>


'응? 내가 왜 목적이 없어? 난 돈 많이 벌어서 해외여행 가겠다는 확연한 목적이 있는데?' 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분들이 있을까 봐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방금 이야기한 '해외여행을 가겠다' 는 내가 설정한 목적입니다. '망치는 못을 박으라고 있는 것이다' 라는 것은 망치에게 설정'된' 목적이죠. 그리고 망치의 '존재 의미' 는 망치에게 목적을 설정한 존재에게 귀속됩니다. 이 생각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보면, '나에게 목적을 설정해 준 존재가 있어야 나에게 존재 의미가 있다' 라는 결론이 나올 수 있지요.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 자판기 디스플레이에 0.25 라는 숫자가 뜨면, 그 숫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미국 사람이 미국인을 위해서 자판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25센트짜리 동전이 들어올 때마다 카운터의 숫자가 올라가고, 카운터 숫자 * 0.25 를 디스플레이에 표시해줍니다. 그럼 이 미국인 (자판기의 창조주) 가 0.25 에 부여한 의미는 25 센트입니다. 근데 다음의 예는 어떻습니까? 파나마에서 사용하는 동전은 미국의 동전과 거의 같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파나마 사람이 이 자판기를 사서 파나마에서 사용합니다. 파나마의 동전을 넣으면 이 자판기는 0.25 라는 숫자를 표시해주겠죠. 이 숫자는 더는 25 미국 센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25 파나마 센트를 의미합니다. 파나마 달러는 미국 달러보다 가치가 낮기 때문에 25 파나마 센트는 실제로는 10 미국 센트 정도의 가치밖에 지니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0.25 라는 숫자를 25 파나마 센트, 즉 10 미국 센트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의미의 오용입니까? 파나마에 놀러 온 미국인이 이 자판기에 실수로 미국 동전을 다섯 개 넣었다 치고, 실제로 들어간 돈은 1.25 미국 달러인데 자판기에서 표시되는 1.25 는 1.25 파나마 달러라면, 이것은 누가 잘못한 건가요?


비슷한 예를 몇 가지 (종이가 날아가지 않도록 망치로 눌러두었다면 망치의 원래 목적과 의미를 배신한 것인가? 개구리는 파리가 날아다니면 혓바닥으로 잡아먹는데, 동물원 개구리에게 작은 먹이들을 던져주고 그걸 개구리가 혓바닥으로 잡아먹으면... 개구리가 (파리가 아닌 것을 먹었으니) 실수한 것인가?) 들면서 데닛은 '의미' 와 '목적' 이 꼭 처음의 '의미 부여자' 나 '목적 부여자' 에게 종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의미' 나 '목적' 도 점진적으로 진화해나갈 뿐, 불변의 의미나 목적이라는 것은 불변의 생물종만큼이나 잘못된 개념이라는 이야기지요. 이것은 의미나 목적이 부재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토끼는 지금도 진화하고 있고 불변의 토끼 이데아 같은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토끼가 없는 건 아니니까요.


창조주라고 해서 창조물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지닌 것이 아니고, 창조물은 자신의 목적과 의미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다.



<나를 만든 것은 인간이지만, 우주의 신비는 인간이 아닌 내 것이다>


설정: 당신이 500년 뒤의 미래를 보고 싶어서 500년간 동작할 수 있는 동면장치를 만들었다고 칩시다. 근데 그런 동면장치가 설령 동작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500년간 그걸 유지 보수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아들이나 손주까지라면 모를까 500년이나 당신에게 충성을 바칠 사람은 없죠. 그래서 당신은 로봇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로봇을 만들려고 했지만, 당신 말고도 동면장치를 만들 사람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든 뒤부터는 '최대한 똑똑하고,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많은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스스로에 대한 통제 권한도 최대치로 부여하고, 다른 로봇을 만날 경우에는 게임 이론과 커뮤니케이션 기술들을 이용해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투쟁해야 하니까 그런 중요한 결정도 스스로 내릴 수 있도록 자율권도 주자' 라고 결정했습니다. 당신은 결국 그런 로봇을 만들었고, 로봇이 잘 해주리라 기대하면서 당신은 동면에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분명히 로봇의 존재 의미와 목적은 당신이 부여한 그대로입니다. 즉 로봇은 당신에게 온전히 종속되어있습니다. 자, 300년이 지났습니다. 이 로봇은 최첨단 인공지능이 탑재되어 있으므로, 당신이 설정한 궁극의 목적인 '이 캡슐을 500년간 보호한다' 는 머리에 박혀있을지언정, '오늘은 날씨가 흐리군. 내가 녹이 슬지 않게 기름칠 좀 해야겠다' 라던지 '기지의 발전기가 고장 났군. 상점에 가서 부품을 사와야겠다. 근데 난 돈이 없잖아? 옆집에 가서 빌려야겠다' 등의 판단을 합니다. 근데 300년 뒤의 미래에는 화폐로 달러가 이용되지 않습니다. 로봇은 300년 뒤의 화폐인, 이를테면 조개껍질을 빌려옵니다. 당신은 조개껍질에게 화폐라는 의미를 부여한 적이 없습니다. 로봇이 했지요. 즉, 사물의 의미와 목적은, 궁극의 창조주 (그런 게 설령 있다고 해도) 와는 무관합니다.


400 년이 지났습니다. 로봇은 당신을 보호하는 일에 투자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많은 시간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지냅니다. 그러다가 '내 동작 원리는 도대체 뭐지?' 를 궁금해합니다. 자신의 회로도를 분석해보고 자신에게 부여된 궁극의 목적 '이 캡슐을 500년간 보호해라' 라는 것이 자신이 스스로 설정한 목적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왜 이걸 굳이 하지?' 라는 의문을 가진 뒤 당신의 캡슐을 파괴합니다. 인공지능이 가능하다는 가정하에, 이런 시나리오가 불가능할까요?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이후 로봇의 삶의 의미와 목적은 당신과는 무관한 것이고, 로봇의 존재 의미는 그 로봇이 스스로 부여할 부분입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저 일화 속에 나오는 로봇이 바로 우리이고 동면자는 유전자입니다. 진화론은, 유전자가 우리에게 부여한 목적과 (유전자의 복제를 성공시켜라!) 존재의 의미가 (너는 나를 위한 생존 기계다!)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렇다고 그 목적과 의미에 복종해야 할까요? 데닛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유전자가 우리에게 목적과 의미를 부여했으나, 우리는 유전자에 복종할 의무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가고 싶은 길을 갈 것이다.' 가 그것이죠. 부담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동면자의 시나리오와는 다르게, 유전자는 마음이 없고, 유전자가 우리에게 목적과 의미를 부여한 과정은, 목적과 의미가 없는 알고리즘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유전자는 우리의 배신에 대해서 별로 서운해하지 않을 거에요. 여기서 '진화론을 받아들였더니 허무주의자가 되었어요' 라는 사람과 데닛이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성경에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 모세에게 야훼가 '나는 나다' 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제가 매우 좋아하는 장면이지요. 우리는 이제 이 말을 스스로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자는 우리 스스로이고,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도 우리 스스로입니다. 허무주의자가 '삶에는 의미가 없어' 라고 말하는 것은 따라서 50% 만 진실입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은 '나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라는 내용입니다. 삶에 의미가 있을지 없을지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지, 우리의 의견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의미 있음이나 의미 없음 같은 것은 없습니다.


도덕이란?


데닛은, 도덕의 기원에 대해서도 역시 생명의 기원이나 의미의 기원, 목적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도덕이 없는 상태에서 점진적으로 출현했다' 라고 보는 진화론적 해석만이 순환 논증 없이 도덕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이렇게 보는 것만이 '제법 잘 돌아가지만 여전히 많은 딜레마를 가지고 있는 현대의 도덕 철학'을 개선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요. 데닛은 '궁극의 도덕은 이런 방정식을 따릅니다' 라는 개념에서 나온 실용주의나 칸트의 정언 명령 같은 개념들에 대해서는 '뭐 좋은 시도긴 한데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적용하기는 조금 무리임' 이라고 말하며, 롤즈의 정의론 [주: 관심 있는 분은 다음 링크: 궁극의 도덕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지금 주어진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판단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판단들을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라는 끝없는 개선을 해나가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죠.


<<< 7. 맺으며 >>>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데닛이 이 책에서 자주 사용하는 개념 중에서 '바벨의 도서관'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책을 모아놓은 상상의 도서관이죠. 다만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책 중 그야말로 99.9999999999999999% 는 'zjhs89dfyhhpwh1' 같은 문구로 가득한 쓰레기일 겁니다. 유전 정보도 마찬가지죠. DNA 를 구성하는 A, C, G, T 라는 네 글자를 랜덤으로 구성하면 의미 있는 생명체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MEME 들을 모아놓은 도서관도 마찬가지 원리 (쓸모있는 책은 몇 개 없고 대부분이 쓰레기) 가 적용됩니다.


데닛은 진화과정이 어마어마하게 넓은 바벨의 도서관에서 의미 있는 책들을 찾아내는 알고리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수많은 유전자들이 보다 나은 유전정보를 찾기 위해서 경쟁하고 있고 (다만, 그들 자체로서는 아무 의식이 없죠), 현대 사회에서는 수많은 MEME 즉 아이디어들이 보다 나은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변종이 열성으로 판명 나서 죽어버지만, 가끔 보다 나은 생명과 보다 나은 아이디어가 크레인으로 등장해서 우리를 한 단계씩 위로 밀어 올려줍니다.


여기서 데닛은 우리의 의무 (신이 그러라고 정해주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보다 나은 존재가 되려는 열망' 을 성취하기 위해서) 로 MEME 을 잘 선택할 것을 주문합니다. 바하의 음악이 소중한 이유는 그 음악이 아름답기 때문이지만, 그 음악을 낳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신이 아니라 인류가 바하 전 세대까지 쌓아올린 문화였습니다. 고로 내가 나의 가치관을 수시로 재점검하고 '옳은 것과 틀린 것' 을 구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야 말로 나 개인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지만 우리 다음 세대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는 것이 데닛의 결론입니다.


왜 그래야 하냐구요?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이유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인식하는 우주, 그것이 우리입니다 - Carl Sa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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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닛 책을 리뷰해놓고 마지막에는 다른 사람 얘기하는 게 유머포인트. 아 여기는 유게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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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24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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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전 칼세이건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5/03/24 06:44
수정 아이콘
무플 절망 중이었는데 감사합니다. 기독교인이신 것으로 아는데, 긍정적으로 읽어주셔서 감사 한 번 더 드립니다.
15/03/24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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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말씀을요. 무신론자 분들 중 orbef님같은 태도를 보여주시는 분들은 저야말로 항상 감사드릴 따름이죠. 사실, "무신론이 유신론보다 우월하다고 이 그지 깽깽이들아."라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주변에 많아서 불편할 때가 많긴 하지만요. 허허.
15/03/24 11:01
수정 아이콘
사는 곳 좀 바꾸면 안될까요? 여기는 학교 점심 시간에 여기저기서 기도하고 난리입니다. 제 아이에게 '너 진화론 믿으면 지옥가' 라고 하는 아이도 있고, 완전 혼돈의 카오스.....
15/03/24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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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면서^^;; 동부로 다시 오실려구요? 크크.
15/03/24 12:01
수정 아이콘
갈 수만 있으면 좋지요. 근데 그 쪽에서 저를 원하지 않.... ㅠ.ㅠ;;
Pluralist
15/03/24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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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in science를 개인적으로 혼자 공부하면서 인간의 위대함의 원천이라고 생각한 의지력과 의사결정능력이 위협받고 있다는 걸 알고 슬퍼하고 있었는데, 진화론 역시 알면 알수록 허무함을 던져주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허무함 속에서 주어지는 바람직한 도덕적 결론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어찌되었든 진화와 meme은 인간의 삶을 각 개체의 끊임없이 반복되는 의미탐구과정과 투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만..
고민하게 만드는 좋은 글 정말 잘 봤습니다.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15/03/24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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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꽤 오랫동안 말씀하신 그런 '뭐라 설명하기 힘든' 허무함에 시달렸었는데, 데닛의 책을 (이 책 말고도 많이 썼어요) 읽으면서 생각이 많이 변했습니다. 아실 것 같긴 한데, 데닛은 양립가능론자입니다. 의지력과 의사결정능력은 모두 존재하며, 다만 그 메커니즘이 기존에 직관적으로 상상했던 것과 조금 다를 뿐이라는 것이 이 사람의 주장이지요. 처음에는 말장난같다고 생각했었는데, 몇 년 시간을 두고 생각을 묵히다보니 어느덧 이 사람의 주장을 체화하게 된 것 같습니다. Pluralist 님께도 데닛의 '자유는 진화한다' 를 권해드립니다.
Je ne sais quoi
15/03/2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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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잘 읽었습니다!
yangjyess
15/03/24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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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와 관련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속 문장이 있습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중 "삶의 의미 이상으로 삶을 사랑해야 한다" 말의 모양은 조금씩 달라질지 몰라도 삶과 사랑을 다루는 모든 글은 비슷한 결론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15/03/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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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과정이 다를 뿐 결론은 동일한 경우가 많죠. 사실 진화론을 과학적으로 모두 이해해야 신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니, 근대 이후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상당 부분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지니랜드
15/03/24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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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글 요약 감사합니다 출근길이라 오후에 정독해봐야겠네요 ^^
jjohny=쿠마
15/03/24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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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물 잘 읽었습니다!

문외한인 저로서는 Meme이라는 것이 아직은 그 실체를 규정하기 모호한, 개념상의 개념 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글의 서술을 보다 보니 데닛도 그렇고 OrBef님도 MEME 자체가 어떠한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쪽 필드에선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는 건지요?
FreeAsWind
15/03/24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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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실체를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유전적 요소를 제외한 전이되는 현상들을 표현한게 아닌가 합니다.
meme 이라는게 애초에 도킨스가 설명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단어인지라..
http://en.wikipedia.org/wiki/Meme#Origins
15/03/2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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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닛은 사실 memetics 가 제대로 학문이 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입니다. 이 책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 잠시 사용한 것에 가깝죠.
FreeAsWind
15/03/24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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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진지한 글 좋아라 합니다. 데닛의 의미론, 목적론에서 오는 메세지는 결국, 도킨스의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 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네요. 3편 모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켈로그김
15/03/24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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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이거 무서워.. 하지만 저는 유머포인트만 쏙쏙 뽑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크크;;
jjohny=쿠마
15/03/24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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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하나로 보이지만, 사실 유머포인트와 고등의 지식이 공생하고 있는 글입니다. 그렇다면 이 글은 하나의 글일까요 2개의 글일까요?
켈로그김
15/03/24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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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웅동체입니다.
jjohny=쿠마
15/03/24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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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쾌한 설명 감사합니다. :)
몽키.D.루피
15/03/24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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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작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전개방식은 재밌었는데 결말이 좀 아쉽네요. 왠지 도덕적 비난과 허무주의가 두려워서 그런지 어느정도 타협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뜬금없이 인류애와 공동체주의를 꺼내드는게 생뚝맞아 보이네요. 논지를 따라 가다보면 허무주의적인 결론을 예상하게되는데 막판에 우디르급 태세전환을 하는 느낌같은.. 이런 점이 진화학을 기반으로 둔 과학철학자들의 한계이고 극복해야될 점이라고 봅니다.
15/03/2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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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를 극복하려면 의미와 목적을 어떻게든 가져야 하는데, 이걸 외부에서 받지 않으려면 스스로 정하는 수밖에 없죠. 여기서부터는 취존의 영역으로 가는 건데, '스스로 정하는 행위 자체가 더 멋진 거임!'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게 뭐임 불쌍하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가톨릭 신부가 신무신론을 공격하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까뮈같은 실존주의자는 적어도 신 없이는 세상이 무의미하다는 진실을 제대로 맞닥뜨렸지. 신무신론자들은 까뮈보다 한 수 아래야' 라고 하더군요. 저는 데닛을 좋아하고 의견에 동의하지만, 저런 시각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검은책
15/03/24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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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는 정말 재미있네요. [바벨의 도서관]은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 보르헤스의 단편이에요. 보르헤스는 '무한한 세계를 담은 절대적인 한권의 책'을 꿈꾸며 평생을 도서관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보르헤스가 꿈꾸었던 것처럼 우주라는 절대적인 사실을 확증하는 백과사전이 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완벽하게 가공된 허구가 침투하여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행성에 대해 꿈꾸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인 셈이지요. 잠깐 보르헤스를 다시 펴서 [바벨의 도서관]을 다시 읽어보니, 이런 구절이 있네요.

[5백년 전, 위층의 사서장이 어떤 책을 한 권 발견했다. 그 책은 여느 책들과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웠지만, 특이한 것은 꼭 같은 행이 거의 두 페이지나 계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그 책을 떠돌이 암호 해독가에게 보여주었는데, 그 해독가는 그것이 포르투갈어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그것이 이디시라고 하기도 했다. 백년이 좀 못 걸려서 그 언어의 비밀이 마침내 밝혀졌다. 그것은 고대 아랍어의 영향이 섞인, 과라니어의 사모예드-리투아니아 방언이었다. 그 내용도 해독되었다. 그것은 무한히 반복되는 변화들의 예들로써 설명된 조합 분석이었다.]

정말 재밌죠. 똑같은 행이 거의 두 페이지나 계속되는 것, 혼란스러운 판단과 무한히 반복되는 변화를 설명한 조합의 분석이라니 말입니다.
데닛이 보르헤스에게 매료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또 이런 구절도 있어요.

[이러한 예들 덕분에 어떤 천재 사서가 도서관의 근본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천재 사서는 책이 아무리 다양하다 하더라도 모든 책은 일정한 요소(쉼표, 마침표, 띄어쓰기 공간, 22자의 철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는 <거대한 도서관 안에 서로 같은 책은 한 권도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어떤 순례자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뒤집을 수 없는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해서, 그는 결론을 유추해 내었다. 즉 도서관은 전체이며 그 책장들에는 스물 몇 개의 정서법 기호들로써 조합 가능한 모든 것들(그 숫자가 아무리 광대하다 할지라도 무한하지는 않다), 다시 말해 모든 언어로 된 모든 표현들이 다 있다는 것이다. 도서관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미래세계의 상세한 역사, 천사들의 자서전들, 도서관의 믿을 만한 서지 목록, 수백만 개의 가짜 서지 목록들, 그 가짜 서지 목록들의 허구성을 증명한 책, 진짜 서지 목록의 허구성을 증명한 책, 바실리데스의 그노시스적 복음, 이 복음의 주해서, 그 주해서의 주해서, 당신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해명서, 각각의 책에 대한 모든 언어의 번역본들, 모든 책들의 증보판들. 도서관이 모든 책을 다 소장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을 때, 그 첫 느낌은 벅찬 즐거움이었다. 누구나 숨겨진 보물의 주인이 된 것처럼 흥분했다. 도서관에는 모든 개인적, 우주적 문제들에 대한 속시원한 해답이 있었다. 우주는 정당한 것이었으며, 우주는 갑자기 무한정한 희망의 공간이 되었다. 그 무렵에는 筬書. 즉 동서고금의 모든 인간의 운명이 기술되어 있으며 미래 세계의 엄청난 비밀을 담고 있는 해명과 운명의 책들에 대한 논의가 많았다. 수천 명의 탐욕스런 사람들은 그들이 태어났던 육모방을 뛰쳐나와 자신들의 잠서를 찾고자 헛되이 계단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좁은 복도에서 다투고 음산한 저주를 퍼부었으며, 신성한 계단에서 서로를 교살하고 기만적인 책을을 터널 바닥으로 던졌으며, 먼 지방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떨어져 죽기도 했다. 미친 사람들도 있었다.]

Orbef님이 올려주신 이 긴 게시물을 읽으며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비교적 견고한 믿음마저도 허구적이라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는 것처럼, 데닛이 위험한 생각을 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확신들이 사라졌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인간은 어쩌면 바벨에 도서관에 들어간 불완전하고 우연한 사서일 뿐이죠. 바벨의 도서관에 쌓여있는 책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채 긴 복도를 헤매는... 분명한 건, 바벨의 도서관이 존재하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은 언젠가 도서관을 떠날 사서들이고, 아무도 도서관을 찾아오지 않으면 바벨의 도서관은 있어도 사라진 것이라는 점이지요.정말 재미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데닛 맘에 들어요. 결국 보르헤스에게 귀의할 줄 알았다니까요.

데닛이 쓴 책의 리뷰를 읽고 보르헤스를 이야기하는 것이 유머포인트입니다. 크
15/03/2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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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닛도 검은책님이 말씀하신 그런 표현을 책에서 실제로 사용합니다.

[이 도서관에 아무리 의미있는 책들이 많다 한들, 의미없는 책들의 숫자에 비하면 vanishingly, vanishingly, vanishingly small 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속에서 좋은 책들을 찾아낼 수 있고, 그렇게 할 것이다] 라는 표현을 본 것 같습니다.

[ 인간은 어쩌면 바벨에 도서관에 들어간 불완전하고 우연한 사서일 뿐이죠. 바벨의 도서관에 쌓여있는 책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채 긴 복도를 헤매는... 분명한 건, 바벨의 도서관이 존재하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은 언젠가 도서관을 떠날 사서들이고, 아무도 도서관을 찾아오지 않으면 바벨의 도서관은 있어도 사라진 것이라는 점이지요 ]

위의 말씀에 대해서는, 데닛도 거의 같은 논조의 이야기를 한 페이지 꽉 차게 썼어요 ^_^;;; 데닛이 우리보다 똑똑하고 성실할 뿐, 인생을 대하는 감성 자체는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검은책
15/03/24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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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닛을 이야기하면서 세이건으로 마무리지은 것이 유머포인트인데 별로 안웃기는 것처럼,
데닛을 이야기하면서 세이건으로 마무리지은 글을 읽고 보르헤스를 이야기하는 제 유머도 별로 안웃기네요.
안웃긴데 그걸 유머포인트라고 우기는 게 오히려 웃기네요.
세이건으로 마무리를 지은 Orbef님이 이게 웃길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웃기는 것처럼요.
괜찮아요. 여긴 유머게시판이 아니니까. ^^;;;
Orbef님이나 저나 유머에는 별로 적합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것이 제 글의 결론입니당. 크크크크크
잠수병
15/03/24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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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저도 작년부터 교양삼아 장대익 교수의 책들을 읽으면서 했던 생각들이라 너무 재밌엇습니다 .
추가로 도킨스 저서는 좀 읽었지만 스티븐 핑커의 저서만 펼쳐도 너무 어려워서 잘 안읽히더라고요. ㅠㅠ
이참에 대니얼 대닛의 책으로 다시 도전해봐야겠어요.
15/03/24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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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가 워낙에 책을 맛깔나게 쓰죠. 너무 재미있고 이해하기 쉽게 써서 오히려 '뭐여 별 거 없네' 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하는....
롤하는철이
15/03/24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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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도 댓글을 남겼는데, 좋은 글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책을 쓰셔도 되겠어요. 크크. 아직 읽는 중이지만 <이기적 유전자>보다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듣기로는 진화론과는 다르게 MEME이라는 개념은 이제 인정받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 점 혹시 들으셨는지요? 3부는 재미있었지만, MEME이라는 개념이 없이도 설명이 가능할까요? (이렇게 재미지게?)
15/03/24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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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E 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 불가능하다기보다는, MEME 이 우리의 본능과 관계없이 완전 독립적으로 성립할 수는 없고 (예를 들어서, 기쁨과 분노를 표현하는 얼굴 표정은 문화의 차이와 상관없이 모두 동일하지요), MEME 의 복사와 진화가 생물학의 유전자 복사/진화와 단순 비교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라는 (너무 쓸모가 없어서 '쓸모없는 논증의 좋은 예' 로 논리학 101에서 다루는 아이디어를 생존력이 좋은 MEME 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라는 반론들이 많아 나온 것으로 압니다.
AspenShaker
15/03/24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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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끔 범죄나 비윤리적인것에 대한 상상을 하는것도, (지금까지는 다른 아이디어 속에 짓밟혔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긴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체득한 나의 유전자와 MEME때문이지 죄의식을 가질것도 없구만! 이라는 생각에 귀결될 쯔음 저같은 놈을 위해 도덕란도 따로 챙기시는
친절함이라니요..

망치를 종이에 눌러놓는것이 의미와 목적을 변화시킬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사용자의 변경에 의해서지 망치 스스로가 결정할수는 없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사물과 생물(특히 MEME+의식을 가진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이해하면 맞으려나요..?

나의 엄청난 자기애를 위해서라도 사후세계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것이라고 생각중인데 이대로라면 정말 암담하군요..
하다못해 죽고나면 거대한 MEME 혹은 의식의 쓰레기처리장(...)같은거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MEME(아이디어)가 현재 물질적인 측정이
가능할정도로 과학이 발달했는지 모르겠지만 제 멘탈을 위해서라도 그런 연구결과는 나오지 않았으면 하네요

한편으로는 제 유년시절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하는 주제에 현재 인간으로 살고있는 저라는 의식체계가 완전히 하나인 독립된 개체(적어도 정신
적인 부분에서.. MEME나 의식이 되겠네요)로 유지되고 있는가도 불분명하네요.. 아 나를 잃고싶지않아! 하면서 같은 신체였던 과거의 나는
점진적으로 잃어가고 있는데..그런건 별로 무섭지가 않거든요, 역시 지금당장의 내가 제일 중요하죠

나를 멋대로 만들고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근무시간을 낭비시키면서까지(?!)고민하게 만드는 유전자와 MEME에게 제대로 통수를 날리는것도
맘에들지만, 어찌보면 부모보다도 더한 존재이니 자식은 낳아야겠네요, 이 유전자의 끝에 무었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주속에 먼지같은 부분이라도
제 육신(...)의 유전자와 체득된 MEME를 남겨야겠어요

어차피 망치로 태어났으면 종이를 눌러놓는 횟수보다 못질을 하는 횟수가 많을테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종이만 누르는 삶을 살고싶지는 않아요
똑같은 행동이라도 알고하는것과 모르고 하는것은 차이가 있을것이고.. 엄청나게 많은 경험을 토대로 못을 박게 태어났다면 일단 못은 적당히
박아주면서(...) 이왕이렇게된거 지금부터 멋지게 의미와 목적을 찾아내서 이루어야겠다는 진부한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크크

좋은글 감사합니다.
15/03/24 12:05
수정 아이콘
아이를 가지게 되면 죽음이나 소멸같은 것은 별로 두렵지 않게 변하는 것 같습니다. 나의 반이 저 놈 속에서 같이 살아갈 테니 (나선력!!!) 영생이 부럽지 않죠. 하지만 그 댓가는 비쌉니다 - 그동안은 내 삶만 걱정하면 되었었는데 이제부터는 아이의 삶도 걱정해야 하고, 아이 걱정의 파워는 내 걱정 파워의 23 배 정도로 강합니다!
15/03/24 12:11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개인적인 목적으로 운영하는 블로그가 있는데, OrBef님이 쓰신 글 내용중 일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의미와 목적에 대한 이야기)를 이 글의 링크와 함께 제 블로그에 옮겨놓아도 될까요? 기분이 우울할때 보면 기운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15/03/24 12:12
수정 아이콘
예 얼마든지요. 결국 이런 글 쓰는 것도 누군가에게 읽히려고 쓰는 건데 당연히 좋지요.
tannenbaum
15/03/24 12:27
수정 아이콘
댓글을 멋지게 남기고 싶은데 솔직히 말씀드려서 완전히 이해를 아직 못해서 뭐라 하기가 부끄럽네요

쉬우면서 어렵네요. 문과 출신인데 독해력이 왜이럴까요 엉엉
15/03/24 12:39
수정 아이콘
소통이 잘 안되면 보통은 청자가 아니라 화자가 문제죠 엉엉;;;
연필깎이
15/03/24 13:26
수정 아이콘
삼부작 전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역시 내가 정하는게 간지나긴 하죠.
똥눌때의간절함을
15/03/24 13:40
수정 아이콘
다른 질문인데 데닛의 다른 책 <의식의수수께끼를 풀다>는 얼마나 어려운지요?
<주문을 깨다><자유는 진화한다>에 이어서 읽으려고 했는데 <자유는 진화한다>에서 멘붕중이어서
책을 펴보지도 못한....
15/03/24 13:51
수정 아이콘
제가 그 책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 이후에 나온 Sweet dreams (같은 주제를 다룹니다) 는 보았는데요, 개인적으로는 매우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데닛의 논문을 읽어볼 깜냥은 되지 않지만 대중 서적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데닛의 철학은 1. 인간의 의식이란 무엇인가? 와 2. 자유 의지는 무엇인가? 를 진화론을 기반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해서, 무의미한 세상에서 의미가 출현했고 무생물에서 생물이 출현했듯이, 의식이 없는 뇌세포들이 모여서 의식을 출현시킨다라고 접근하지요. 뭐 발상 자체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것을 설득력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ThreeAndOut
15/03/24 15:01
수정 아이콘
짝짝짝! 박수를 보냅니다. 결론까지 그저 비유티풀을 외칠수 밖에 없군요.

마지막은 "스스로를 인식하는 우주, 그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가 더 매끄럽지 않을까요?
15/03/24 22:43
수정 아이콘
오호 그거 좋네요. 제안대로 바꾸겠습니다 :)
시작,끝,다시시작
15/03/24 16:37
수정 아이콘
3편을 읽기전에 댓글답니다.정말 잘읽었어요!!개신
교 사람들과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주제들을 더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을 계속가졌었네요.틈날때마다 여러번읽어서 다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Kurzweil
15/03/25 16:09
수정 아이콘
정말 정말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Orbef님 같은 동네형이 있다면 매일밤 치킨을 사들고 찾아가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를거 같습니다.
번외로 궁금한 점이 하나 있는데,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선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안타까운 상황을 보면 그것에 공감하고 도움을 주고 싶고, 도움을 줄 때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유전자가 우리에게 목적과 의미를 부여했으나, 우리는 유전자에 복종할 의무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가고 싶은 길을 갈 것이다."
부분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하고 이해는 되지만 진화론이 가지는 '일관성'의 측면에서
선행이라는 것이 개인의 생존과 존속에 부합하는 것도 아니고,
집단의 측면에서 봤을 때도 '적자생존'이 가지는 의미와 상충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 궁금해져서 질문드려봅니다.
15/03/25 18:52
수정 아이콘
치킨..!!!!!! 멀어서 아쉽습니다.

적자생존의 단위를 개체로 보지 않고 유전 '정보' 로 보면 개체의 이타심과 유전 정보의 이기심(?)은 상충하지 않습니다. 이게 도킨스가 '이기적인 유전자' 에서 말하는 주요 주제 중 하나지요. 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1. 유전자는 마음이 없고 따라서 죽음도 겁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전자가 자기 복제를 성공적으로 하지 못한다면 그 유전자는 자연도태될 테니, 지금껏 생존한 유전자는 모두 '마치 극단적으로 생존 본능이 강하고 이기적인 것 같이 행동하는 놈들' 밖에는 없습니다.

2. 적자 생존을 통해 유전자가 번성한다는 의미는, 개별 DNA 가 생존한다는 것이 아니라 해당 유전정보를 지난 DNA 의 총량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그렇다면 해당 유전정보에 '이타적인 표현형을 만들어서 이 유전정보를 지닌 다른 개체들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게 제어하라' 라는 것이 들어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요. 표현형은 그야말로 유전자풀을 다음 세대로 보내기 위한 생존기계일 뿐, 그 이상의 아무 의미도 없'었'으니까요.

4. 그래서 우리는 이타심을 가졌고 타인을 도울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개인의 생존과는 아무 상관없지만 인간종의 유전자풀을 다음 세대로 넘기기 위해서요.

5. 이것이 우리 이타심의 '생물학적 설명' 입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어요: 도킨스도 말하는 거고 데닛도 말하는 건데, '밥을 먹는 이유는 에너지를 섭취하기 위해서다' 라는 설명을 듣는다고 해서 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니고, 무지개 색깔의 원리를 알아냈다고 해서 무지개가 아름답지 않은 게 아니듯이, 이타심의 기원이 유전자의 생존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해서 우리가 이타적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전자때문에 노화가 일어나지만 우리 개체들은 노화를 늦추고 건강하게 오래살고 싶은 반면, 유전자때문에 이타심이 생겼지만 이타심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우리가 판단하기로 정한 거지요.
15/03/26 16:27
수정 아이콘
이타심의 가장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예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입니다.
15/03/26 16:45
수정 아이콘
2편 댓글에 다신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의 의미가 딱 안들어 왔었는데, 3편을 보니 raison d'etre를 말씀하신 거군요.

절대자가 내 삶의 목적을 부여해 줬다고는 한번도 믿어본 적이 없는 덕에, 그거 없다고 상실감을 느낄 일도 없어서 좋습니다. 오히려 절대자가 존재한다 하면, 내 존재가 인공 지능을 쬐끔 부여받은 시뮬레이션 게임의 캐릭터란 소리일텐데, 그거 알게 되고 받는 허무감이 훨 크다면 클 거 같네요.




그나저나 다음 책 리뷰는 언제 올리실 거냐능..
15/03/26 22:59
수정 아이콘
예 바로 raison d'etre 딱 맞습니다.

다음 리뷰는.... 한동안 없지 싶습니다. 저도 이제 사회에서 사람 구실 좀 해야죠 :)
15/03/31 00:15
수정 아이콘
pgr에서 읽은 최고의 글이군요..
제가 요즘 많이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세상은 이런데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나?
내가 배우고 가진 사상들이 과연 옳은 것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생로병사를 밀접하게 느끼게 되면서
쓰잘떼기 없는 생각에
잠 못들고 있네요ㅠㅠ
구너구너
15/05/01 23:11
수정 아이콘
나중에 여유가 있을때 읽으려고 즐겨찾기 해놨다가 이제 읽었습니다. 좋은 후기 감사드립니다. 정독하려고 책도 주문했습니다.
비록 탈퇴하셔서 피지알에 안오시겠지만 그동안 좋은글 많이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었습니다. 어디서든 건강하시고 행운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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