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걸음으로 회랑을 걸어 내려가며 요안네스는 생각했다. 지금은 친남매이지만 어차피 안나는 자신의 아내가 될 여자였다. 조금 앞당겨 관계를 맺은 것으로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단순히 쾌락을 위해 힘으로 제압하여 강제로 순결을 빼앗고 영혼을 갈가리 찢어 버리는 겁간과는 달랐다. 만일 그랬다면 그토록 공을 들여서 최대한 안나가 아프지 않게 하느라 진땀을 빼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힘과 신경을 쏟아 부어서인지 마침내 절정을 느낀 그는 몸이 부서질 정도의 극렬한 쾌감에 휩싸였다. 천둥이 휘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평상시였다면 기분에 휩싸여 바로 다음 관계를 격렬하게 맺었겠지만, 그 와중에도 요안네스는 날뛰는 감정을 억누르고 간신히 빠져나왔다. 한 번뿐이라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자위할 수 있지만 두 번째부터는 사욕이기 때문이다. 또한,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누군들 축복받은 혼인 후의 합궁을 원치 않겠는가? 이번만 예외를 둔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한 가지 문제라면 안나 자신인데, 그녀는 틀림없이 기억을 지우는 것을 택할 것이라 요안네스는 확신했다. 조금 전의 일을 모두 잊고, 예전처럼 스스럼없이 자신을 대하게 될 그녀에게 적당한 기회를 잡아서 잘 일러주면 큰 문제 없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리라 믿었다.
그러나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놈은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의 날개 밑으로 들어온 듯 행동하더니 뒤에서 통수를 치는 칼리스토에게 강한 분노가 치솟았다. 이 두 손으로 흠씬 두드려 패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때마침 저 멀리 칼리스토의 거처가 보였고 덩달아 그의 걸음도 빨라져 갔다. 문을 벌컥 열어젖힌 그는 안에 있던 칼리스토가 미처 예를 올리기도 전에 달려들어 다짜고짜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홱, 고개가 돌아가며 뒤로 떠밀려진 칼리스토는 벽장에 부딪혔고 집기며 유리병들이 쏟아져 내려 와장창 깨져 버렸다. 뭔가 이상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도 있었고, 심지어 바닥을 태울 듯이 타들어 가는 것도 언뜻 보였다.
“이게 무슨…….”
뭔가 말을 하려는 그 입에 다시 한 번 주먹을 날린 요안네스는 얼굴을 감싸고 뒤로 물러서는 칼리스토에게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연달아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아쉽게도 세 번째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뒤로 휙 밀려나 간 요안네스는 자빠질 뻔한 것을 간신히 추스르며 눈을 부릅떴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감사 인사치고는 꽤 폭력적이시군요.”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고 찢긴 뺨을 어루만진 칼리스토는 퉤 하고 피가 섞인 침을 내뱉었다. 요안네스는 지금 저 녀석이 날 밀친 건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자신이 똑똑히 보았다. 칼리스토는 손가락 하나 까딱한 적이 없다는 걸.
“좌정하시지요. 차를 내오겠습니다.”
“집어치워라! 내게 또 무슨 독약을 먹이려는 것이냐!”
두 개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다가 칼리스토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자 균형은 곧 깨어져 나갔다. 스르르 시선을 돌리며 주전자를 든 칼리스토는 잔에 차를 가득 부어 자신이 앞에만 내려놓았다. 노려보는 요안네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없이 자리에 날름 앉아 차를 음미했다.
“네놈은…… 도대체 누구의 편이냐.”
“저는 콤네노스 황실의 편입니다.”
“그래서 안나에게 약을 주었느냐? 날 몰아내기라도 할 속셈으로?”
“왜요, 몰려나기라도 할 짓을 저지르셨습니까?”
요안네스는 옆에 있던 것을 아무거나 집어 들어 그대로 던져 버리려 했으나 뭔가가 촤아악, 하며 자신에게 끼얹어지자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칼리스토는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눈을 깜빡였다. 아직까지 열려 있던 문이 쿵, 닫혔고 요안네스는 누가 떠밀기라도 한 듯 앞으로 밀려와 의자에 앉혀졌다. 어떤 놈이 감히 내 몸에 손을, 이라는 말을 하려고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요안네스의 눈동자에 의혹이 가득 서렸다. 그러나 이내 그것은 곧바로 차갑게 변해 버렸다.
“그렇군. 네놈 역시, 네놈의 스승이 그러했듯 이상한 능력을 갖추고 있구나. 인제 보니 이교도 주제에 아닌 척 연기를 하고 있었던 거군 그래.”
“제가 이교도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이 이상한 능력들은 무엇이냐!”
“그건 신의 총애를 받아 얻게 된 것입니다.”
“네놈이 뭘 잘했다고 그분의 총애를 받는단 말이냐?”
“적어도 남동생의 고환을 눌러 터트리고 여동생을 겁간한 사람 보다는 잘한 것 같습니다만?”
저 요망한 주둥이를 그대로 찢어발기고 싶었으나 조금 전 자신에게 일어난 몇 가지 일들로 인해 함부로 행동할 경우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음을 요안네스는 인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러기보다는 뭔가 저 녀석의 약점이 될 만한 것을 붙들고 위협하거나 회유하는 편이 효과적일 것이었다. 이교도라는 말에도 그래서 어쩌라고요? 라고 쳐다보는 걸 보니 그것은 그다지 유용한 패는 아닌 듯했다. 아니, 그것보다는 방금 그가 한 말이 더 중요했다.
“내가 여동생을……, 네놈이 어찌 아느냐?”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신의 총애를 받는 몸이라.”
“그러니까, 네놈은 다 알고 있었다 그 말이냐?”
“많은 미래의 다양한 가능성을 흘끗 엿보았을 뿐입니다. 그 흐릿한 형태의 미래를 현실로 바꿔 놓은 것은 전하의 의지입니다. 아직까지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그것으로 강제로 밀고 들어간 것은 전하이시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을, 그것도 여동생을, 어쩔 수 없다 자위하며 즐기지 않았습니까?”
“그 입 닥치지…….”
“전하의 씨앗에서 흘러나온 냄새가 코를 역하게 하는군요. 잠시 환기를 시켜야겠습니다.”
그의 손짓에 닫혀 있던 창문이 활짝 열렸다. 눈송이가 섞인 바람이 안으로 타고 들어와 주위를 휘감았다. 요안네스는 짓씹어버릴 듯한 얼굴로 칼리스토를 바라보았고, 그는 주전자를 가져와 그제야 요안네스의 앞에도 차를 한잔 내 주었다.
“드시지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너 같은 놈의 명령을 따를 것 같으냐?”
“명령이라니요. 전 한 번도 전하께 명령을 내린 적이 없건만 어인 말씀이십니까? 혹시 저의 조언을 명령이라 착각하셨다면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다 말씀드리고 싶군요. 모든 것은 전하께서 원하셔서 전하의 의지로 일어난 일입니다. 제가 동생의 고환을 두 손으로 터트리라 말했습니까? 여동생을 겁탈하라고 말씀드렸습니까? 아예 콤네노스 황가의 대를 끊어야 한다며 전하 자신의 고환을 짓눌러 터트리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실 겁니까?”
이 빌어먹을 녀석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나불거리는지 요안네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갔으나 그보다 먼저 드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까지 보건대 칼리스토는 결코 헛소리할 놈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순식간에 생겨난 의혹이 그의 머리를 가득 메웠다.
“우리 가문의 대가 끊긴다니…… 무슨 뜻이냐.”
“아, 이런, 어리석게도. 말실수였습니다. 없었던 것으로 하시지요.”
“말하라! 무슨 뜻이냐!”
테이블을 쾅 내리친 요안네스의 음성이 방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불어오던 바람조차 놀랐듯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나는 것만 같았다. 칼리스토는 앞으로 쏟아져 내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들으신 대롭니다. 콤네노스 가문에 더 이상의 후사는 없습니다.”
“내가, 죽기라도 한다는 것이냐? 안나와 아그네스도?”
“나중에 그분의 곁으로 가시기야 하겠지요. 하지만 전 그것을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이런, 지금은 그 미래가 보이지 않는군요. 죄송하지만 저를 그렇게 죽을 듯 노려보셔도, 어떻게 추궁하셔도 지금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미래가 다시 보이면, 그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는…….”
자리에서 일어난 칼리스토는 옷걸이에 걸어 놓은 망토를 몸에 걸쳤다. 단도와 약초 주머니도 끄집어내 허리춤에 매달더니 말을 이었다.
“안나 공주님께 가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슨 뜻이냐.”
“전하께서 벌이신 일이 예상치 못한 결과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있을 겁니다.”
수수께끼처럼 말하는 칼리스토에게 이골이 난 요안네스는 갑자기 찻잔을 들어 올리더니 집어 던졌다. 이마에 부딪힌 찻잔이 쨍그랑하며 깨져 버렸고 흘러내리는 찻물과 범벅이 된 핏물을 닦으며 칼리스토는 숨을 골랐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전하…… 계속 이러신다면, 아무리 저라고 한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오늘은 이만하시고 안나 공주님께 가보시지요. 전하를 필요로 하고 계실 겁니다. 저는 제약에 필요한 약초를 따러 가봐야겠습니다.”
그를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요안네스는 요망한 짓을 한 번만 더 할 경우 그대로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은 뒤 방을 나섰다. 열린 문을 통해 눈발이 흩날려 들어왔다. 칼리스토는 말없이 사라진 요안네스의 뒷모습을 좇다가 마음을 안정시키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을 뜨니 부서진 것들이 난잡하게 놓여 있어 혼란만 가중되었다. 그랬기에 눈을 감고 그대로 방을 나섰다. 원래는 시약 제조에 필요한 약초들을 캘 생각이었으나 지금은 조금 마음이 바뀌었다. 물론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살짝 바라보고 싶을 뿐이었다.
발을 내디뎠다. 천천히 눈길을 걸어 성문의 병사와 몇 마디 주고받은 뒤 황궁에서 빠져나왔다. 그대로 남쪽을 향해 걸었다. 드넓은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한겨울의 바다는 쓸쓸해 보일 정도로 시리게 빛났다. 그러나 칼리스토가 보고 있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시야를 확장 시켰다.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하늘 높이 나는 새들에게나 의미가 있을 정도로 먼 거리를 간 뒤에야 망망대해에 홀로 솟아 있는 작은 섬들이 보였다. 아이게아 제도. 오래된 종교의 성지였다.
수많은 신이 돌보던 이 세상에 아타나시우스가 탄생하며 모든 신은 그 강력한 권능에 놀라 스러져갔다고 전해졌다. 최후까지 버티던 신들마저 모조리 사라져 버렸을 때, 그들의 잃어버린 이름 속에서 탄생한 잃어버린 이름의 신은 아타나시우스와의 결전에서 패해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그러나 다른 신들과는 달리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그가 남긴 파편 하나가 바다에 떨어지며 부서져 작은 섬들이 되었다. 그것이 저 멀리 바다 너머에 있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이름의 신이 잠든 곳이며 오래된 종교가 탄생한 곳이었다. 칼리스토가 가진 힘의 근원이었으며 그로 인해 세상을 바꾸게 될 곳이었다. 자신의 자리를 되찾은 뒤 저곳을 방문하리라 생각한 칼리스토는 시야를 거둬들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얼핏,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짝 열린 창문을 통해 미래가 보였다. 그 미래에 있는 자신이 보였다. 그 뒤로 콤네노스 가문의 몰락이 그려지고 있었다. 타오르는 황궁의 자줏빛 탑에서 누군가가 떨어져 내렸다. 두 번이나 보였다. 그 뒤에 보이는 것은…….
“길어야 1년…… 천 년의 시간이 종말을 맞이하리라.”
혼잣말하듯 하늘을 향해 가만히 말을 내뱉은 칼리스토는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위해, 아직은 쉴 수 없었다.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원하는 것을 손에 움켜쥘 수 있을 것이었다. 눈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그가 밟고 지나가 생겨난 발자국 위로 눈이 쌓여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낮잠을 자고 있다고? 이 시간에?”
“그러하옵니다, 공주님. 실은 저희도 그래서 아직 들어가 보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터?”
시녀들의 말에 아그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찬을 먹은 뒤부터 내리 잤다면 이미 반나절은 지나 있었다. 활기찬 오후 일과를 위해 잠깐씩 낮잠을 즐기기는 했으나 이렇게 늘어지게 잔 적은 없었던지라 아그네스는 시녀들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섰다.
“언니, 인제 그만 일어…… 언니!!”
안으로 들어선 아그네스는 테이블이 난장판이 되어 있고 바닥에 안나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달려갔다. 고개만 빼꼼히 들어 안을 쳐다보던 시녀들도 덩달아 안으로 쏟아져 왔다.
“언니, 언니! 이게 무슨 일이야, 언니 정신 차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너희 눈에는 이게 낮잠을 자는 것으로 보인단 말이냐?”
“소, 송구하옵니다. 저희는 아드리아 공작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셔서…….”
“오라버니께서?”
아그네스의 눈에 의아함이 떠오르는 순간,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안나가 으음, 하며 몸을 뒤척였다. 아그네스는 반가워하며 그녀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았고 잠시 숨을 고르던 안나는 가만히 눈을 떴다. 몇 번 깜빡인 뒤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정신이 드느냐 말을 하려던 아그네스는 갑자기 펼쳐진 안나의 팔에 밀려 뒤로 발라당 넘어지고 말았다.
“누, 누구냐! 너, 너는 누구지?”
“누구냐니, 언니 동생이잖아.”
“내 동생이라니, 누가, 네가?!”
앙칼진 안나의 고함에 아그네스는 적잖이 놀랐으나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이내 약간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야, 언니.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동생을 못 알아볼 수 있어? 나 아그네스잖아. 언니의 어여쁜 동생. 얼른 정신 차리고, 산책하러 가자. 눈이 많이 와서 정말 예쁘다고.”
아그네스는 부드럽게 안나의 팔을 이끌려 했으나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아그네스의 얼굴에 일순 그림자가 졌다.
“언니,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네가 아그네스라고? 그럴 리가 없어. 내 동생이 나 보다 어른일 리가 없어! 넌 누구야? 내 동생 어딨어? 어디에 데려갔어? 밖에 아무도 없느냐!”
시녀들은 이 불가해 한 상황에 우왕좌왕하며 서로 눈치만 보다가 안나의 앙칼진 고함이 연이어 울려 퍼지자 보초를 서던 호위병들을 급히 불러들였다. 무장한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오자 마침 잘 됐다는 듯, 안나는 이 이상한 여자를 당장 끌고 가라고 소리쳤으나 호위병들은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이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마구 손사래를 치며 옆에 떨어져 있는 집기들까지 집어 던지는 안나의 난폭한 행동에 아그네스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뒤로 물러났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집기들을 호위병으로 막으면서 입을 앙다문 채 안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지시를 내렸다.
“지금 당장 내의를 불러 오거라. 아니, 칼리스토를 불러와! 어서!”
“네, 공주님!”
“공주라고? 나와 내 동생 외에 이 제국에 공주가 또 있더냐? 난 이 여자가 누군지 모른다. 당장 쫓아내라니까?! 그리고 내 동생을 데려와!”
뒤돌아 나가는 호위병들의 뒤에 대고 안나가 악을 썼다. 아그네스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안나가 소리치며 아그네스를 밀치는 바람에 잠시 휘청거렸지만, 그녀는 다시 달려들어 안나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리고 화장대로 끌고 갔다.
“봐! 이게 언니야! 이게 언니라고!”
“무슨……!!”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안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서둘러 손을 올려 뺨과 입술을, 머리를 만져 보았다. 기억 속에 있던 자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웬 나이 든 여인이 공포에 물들어 있었다.
“이, 이게 뭐지?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이 여잔 누구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언니, 왜 그래? 마누엘이 저렇게 된 것으로도 힘든데 갑자기 언니까지 왜 그러는 거야? 응?”
답답함에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치던 아그네스는 아, 하며 비틀거렸다. 설마, 혹시 언니까지 기억을 잃어버린 걸까? 마누엘이 저리된 것과 갑자기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충격 때문에?
“아드리아 공작 전하께서 드십니다.”
때마침 요안네스가 당도했다. 안나와 아그네스의 시선이 자동으로 그쪽으로 돌아갔다. 당혹스러움과 안도감을 가득 품은 눈으로 아그네스는 그에게 달려갔다. 손을 맞잡으며 서둘러 안나가 있는 곳으로 그를 이끌었다.
“오라버니, 큰일 났어요. 언니가 아무래도 기억을 잃은 것 같아요.”
“기억을…… 잃었다고?”
기억을 없애는 약물을 건넨 것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에 요안네스는 순간적으로 움찔했으나 정신이 없는 아그네스는 미처 그런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안나의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읽어낼 수 있었다. 낯선 남자의 등장에 잠시 놀란 듯했으나 이내 맑게 빛나는 푸른 창에 발그레한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저……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라티움 제국의 첫째 공주, 안나 데 콤네노스입니다. 영주님은 어디에서 오셨나요?”
“아, 안나…… 날 몰라보는 것이냐?”
“네?”
“언니, 오라버니야. 오라버니도 모르겠어?”
안나는 말이 없었다. 내 오라버니라고? 그분이 분명 나보다 나이가 많고 수려하긴 하지만 소년일 뿐 이런 멋진 청년이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을 하던 그녀는 다시 한 번 거울을 바라보았다. 비록 멍한 표정이긴 했으나 기품이 묻어나오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히 성년의 모습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 남자가 정말 성년이 된 자신의 오라버니란 말인가? 이렇게 멋진 분이?
“아, 안나! 정신 차리거라!”
갑자기 안나가 요안네스의 품에 안기듯이 앞으로 푹 고꾸라지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부축했다. 이미 정신을 잃은 듯했다. 번쩍 들어 올려 침대에 그녀를 데려 놓으려던 요안네스는 순간 움찔했다. 조금 전에 이곳에서 자신이 했던 짓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까닭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뿜어냈던 것의 일부가 조금 남아 있는 것도 보였다. 아그네스가 다가오기 전에 서둘러 이불을 걷어내 그것을 시야에서 치워 버린 뒤, 조심스럽게 안나를 침대에 눕혔다. 아그네스는 눈물이 글썽이는 얼굴로 다가와 요안네스의 팔에 기댔다.
“언니, 괜찮을까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고 있느냐?”
“모르겠어요. 낮잠을 아까부터 자고 있다고 해서 깨우러 들어왔더니 이렇게 난장판이 되어 있었고, 깨웠더니 절 못 알아보더라고요. 제가 동생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를 못 하길래 직접 거울에 비친 언니의 모습을 보여주던 와중에 오라버니께서 오신 거에요.”
“으음…….”
요안네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칼리스토가 말한 게 이거였던 모양이다. 약물이 부작용을 나타낸 것이 틀림없었다. 조금 전의 기억만 지워야 하는 것이 어쩌다 보니 엄청난 시간을 통째로 날려버린 것이 분명했다. 아그네스가 말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마누엘을 모르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열 살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듯싶었다. 그랬으니 스물에 가까운 아그네스를 보고 동생이 자기보다 더 클 리가 없다고 말을 한 것이겠지.
요안네스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지금 자신의 처지에서는 어떻게든 빨리 안나와 혼인을 해서 제위에 대한 정통성을 취득해야 하는데, 열 살도 안 된 꼬맹이한테 그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언니 괜찮겠지요? 요사이 안 좋은 일이 계속 일어나서 잠시 충격을 받은 거겠지요? 네? 그렇다고 말씀해 주세요, 오라버니.”
요안네스가 답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으나 아그네스는 누구에게라도 기대고 싶었다. 믿음직한 오라버니가 그 대상이라면 더할 나위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요안네스였기에 걱정하지 말라며 그녀를 다독였으나 그 누구보다도 걱정이 드는 것은 바로 그였기에 다독임은 건성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의 입 밖으로 괜찮다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아그네스는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몸을 바로 세우고 옷매무시를 하던 그녀는 방문이 열리자 반가운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칼리스토?”
대단히 죄송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호위병을 보는 순간 아그네스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도 사라졌다.
“칼리스토는?”
“저, 그것이…… 내의관으로 가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칼리스토가 없다고?”
“네, 공주님. 게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것저것 부서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호위병의 말에 아그네스가 안 좋은 쪽으로 상상을 펼치려는 순간, 요안네스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제기랄, 당한 건가?’
안나에게 가보라고 말하며 약초를 따러 간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분명히 자신이 나선 순간 불이 나게 어디론가 튀어 버렸을 것이다. 분노에 휩싸여서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자신이 어리석었으나 그것보다 칼리스토를 쫓는 것이 우선이었다.
“지금 즉시 칼리스토를 쫓아라. 수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라버니?”
“반드시 생포해 와야 한다. 포박해서 내 눈앞에 대령하라!”
“네, 전하!”
느닷없는 명이었지만 호위병은 그 즉시 방을 나섰고 이내 뒤에 대기하고 있던 호위병들의 달려가는 소리가 흔적을 남기며 사라졌다. 아그네스는 어서 빨리 설명해 달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뜬 채 요안네스의 팔을 잡아당겼다.
“너무 염려 말거나 아그네스.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래도…….”
“자자, 이 방은 난잡스럽게 변했으나 안나를 다른 방으로 옮기자꾸나. 시녀들이 그래야 정리를 할 수 있겠지.”
자신이 이곳에서 안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려 줄 증거물이 당장에라도 사라지길 바랐던 요안네스는 안나를 들어 올렸고 아그네스는 군소리 없이 그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펼쳐지며 순식간에 주변을 정리하는 것을 본 아그네스는 고개를 돌려 살며시 주위를 살폈다. 복도에는 시녀들이 드문드문 있었으나 멀리 있었기에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오라버니, 언니와 식사하실 때는 별일 없었나요?”
하마터면 안고 있던 안나를 떨어뜨릴 뻔했으나 요안네스는 무슨 말이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는 것으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까 마누엘이랑 같이 식사하려고 언니를 찾았는데 시녀가 알려주기를, 오라버니와의 오찬이 예정되어 있다고 했거든요. 아까도 그러는데 오라버니께서 언니가 낮잠을 자야 하니 깨우지 말라고 했다면서요. 어땠어요, 그때도 좀 이상한 점이 보였나요?”
아그네스는 단순히 걱정 반 궁금함 반에 물어본 것이었으나 지은 죄가 있는 요안네스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식사를 다 마치고 후반에 일어났던 일만 빼면 화기애애했다는 것을 계속해서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 일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무척이나 즐거운 식사를 했을 뿐. 음, 특이한 점이 있다면 옛날에 안나와 네가 인형 놀이를 하며 아일라노레라는 이름을 붙인 적이 있었다는 것을 얘기한 정도밖에 없는데.”
“아일라노레요?”
“그런 것이 있다. 이 방으로 가자꾸나.”
별일 없는 척 행동하고 있었으나 요안네스는 본인이 저지른 일을 아그네스가 알게 될 경우에 대한 두려움과 칼리스토에 대한 분노 때문에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랬기에, 괜히 말이 길어질 경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므로 적당히 대화를 끊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그네스는 늘 자상하던 오라버니도 어째 좀 쌀쌀한 것 같자 살짝 기운이 빠진 듯했으나 침대에 눕혀진 안나가 으음, 하며 소리를 내자 반색을 하며 다가갔다.
“언니, 정신이 들어, 응?”
잠시 눈을 깜빡이던 안나는 아그네스를 보고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좁혔으나 바로 옆에 있는 요안네스를 보고는 얼굴이 살며시 물들었다. 손을 뻗으니 요안네스가 예상했던 대로 잡아주었고 그의 도움을 받으며 몸을 일으킨 안나는 요안네스의 손을 가볍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이렇게 품위 없는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부디 넓으신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안나, 정말 괜찮으냐?”
“오라버니…… 라고 하셨지요? 왜 저만 어려졌는지 믿기지는 않지만…… 아무튼 정말 제 오라버니신거죠?”
“그렇다. 내가 네 오라버니인 요안네스다. 너는 내 첫째 여동생인 안나 공주고, 이쪽이 둘째 여동생인 아그네스 공주다. 혼란스럽겠지만 너무 염려하지 마라. 오라버니가 네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할 것이니.”
황홀한 표정으로 요안네스를 바라보던 안나는 문득 무엇인가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한데,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말은…… 제가, 이 여인의 진정한 언니가 된다는 건가요? 모습뿐만이 아니라…… 제가 아는 모든 것이?”
여전히 아그네스가 자신의 동생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그녀였다.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를 보고는 바라보기 힘들었는지 고개를 휙 돌렸으나 때마침 시야에 들어온 거울에 자신들의 모습이 비치자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바라보았다. 손을 들어 올려 다시 한 번 더 발갛게 상기 된 뺨을 어루만지고 머리를 매만져 보았다. 꽃잎을 머금은 듯한 입술을 따라 말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아그네스를 응시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미처 몰랐으나 이렇게 바라보니 정말 자신과 흡사한 외모를 가진 그녀였다. 누가 봐도 그녀와 자신은 같은 가문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법했다.
“네가 정말…… 내 동생 아그네스라면…… 물어볼 게 있어.”
“뭐를? 물어봐봐, 내가 다 말해줄게.”
아그네스는 언니가 드디어 자신에게 마음을 여는 것 같자 기뻐하며 얼른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예의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두 손을 모아쥔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단, 원래는 나는 몇 살이지?”
“언니는 스무 살이야. 나보다 한 살 많지.”
“그럼 나는, 오라버니와 혼인을…… 했니?”
“응?”
아그네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요안네스를 바라보았다. 그도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예상치 못했기에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왜 대답이 없어? 간단한 질문이잖아. 혼인을 했니? 아니면 혼인을 할 예정이었니?”
“그게, 언니…….”
“안나, 나를 봐라. 내가 얘기해주마.”
아무래도 이런 이야기는 당사자가 직접 하는 것이 좋았기에 요안네스는 난 아그네스에게 물은 거라며 고집을 피우던 안나를 잘 타일렀다. 더 버틸 것 같았던 그녀는 의외로 알았다며 순순히 요안네스를 바라보았고 아그네스는 떨려오는 가슴을 한숨과 함께 쓸어내렸다.
요안네스는 안나에게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으나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에 다른 잡생각들을 싹 비웠다. 그리고 가장 필요한 말만 들려주었다.
“혼인하기로 나와 약조한 상태였다.”
“역시! 그렇군요. 언제 하기로 되어 있었나요?”
갑자기 오라버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의아했던 아그네스는 나도 그것이 매우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요안네스를 보았다. 혼인이라니? 자기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요안네스는 그런 아그네스의 시선을 외면했다. 지금은, 최악의 경우, 기억과 정신은 열 살 미만인 안나와 혼인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잠자리를 같이 한다든가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잘 구슬리고 가르치기만 한다면 혼인성사 정도는 문제없이 치를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천만다행으로 외적으로 보이는 몸은 스무 살 그대로이지 않는가? 비록 그녀가 자신에게 격하게 보내고 있는 호감 어린 시선이 연인 간의 사랑이 아니라 꼬맹이가 누구나 다 좋아하는 단순한 호감임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튼 대놓고 싫은 기색인 것보다 천 배는 더 좋은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가만히 안나의 손을 끌어당겼다. 고개를 숙이며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예상대로 안나의 뺨이 조금 더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기억하느냐? 옛날에 우리가 소꿉놀이하던 시절이.”
“물론 기억하죠. 얼마 전에도 우연히 인형을 발견해서 같이 놀았었잖아요. 아, 그때 정말 즐거웠어요.”
“그래. 나는 황제였고, 너는 황후였지. 혹시 이것도 기억하느냐? 네가 아주 어릴 적에 인형에 붙였던 이름인데. 나는 요안네스였고, 너는…….”
“아일라노레. 제가 어떻게 잊겠어요. 오라버니를 생각하면서 얼마나 생각해서 만든 이름인데.”
빙긋 웃으며 한 걸음 더 다가온 그녀는 그대로 부드럽게 요안네스의 품에 안겼다. 요안네스는 일이 아주 잘 되어 간다 생각하면서도 이질감을 느꼈다. 오찬을 함께 할 때의 그녀는 당연히 기억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의 안나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열 살 정도가 아니라 더 어린 상태인지도 몰랐다. 어린아이들은 특히 변덕이 심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안나가 그렇게 천방지축은 아니었음이 떠올랐으나 그때는 자신도 어렸다. 그 기억을 믿을 수는 없었다. 쐐기를 박아 넣을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최대한 빨리 혼인을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네가 잠시 기억을 잃은 듯하니 아무래도 더 미뤄야 하겠구나.”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여전히 오라버니를 사랑해요. 미루지 마시고 원래대로 진행하세요. 그렇게 해 주세요.”
“안나.”
“저를 위해서요. 네? 오라버니.”
요안네스가 한 걸음 물러서는 순간 두 걸음 다가와 그를 와락 끌어안는 그녀였다.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난데없는 상황극에 아그네스가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안나는 어서 자신을 받아달라는 얼굴로 간청했다. 영락없이 안아달라고 칭얼대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요안네스는 잠시 고민하는 척했으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더는 튕길 필요가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승낙을 담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약초를 캐려고 나왔다가 바다 구경이나 잔뜩 하게 된 칼리스토는 이제는 자신의 목 앞에 들이밀어 진 창칼을 구경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으나 병사들은 아드리아 공작 전하의 명이라며 그를 단번에 포박했다. 이딴 포박 같은 거야 떨쳐내면 그만이긴 하지만 칼리스토는 마음을 다스리며 그들의 요구에 응했다.
“전하, 칼리스토를 붙잡아왔습니다.”
호위병의 의기양양한 목소리와 함께 칼리스토는 그대로 방으로 밀쳐 넣어졌다. 하마터면 자빠질 뻔했으나 간신히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호위병이 그를 찍어 눌러 무릎을 꿇게 하였다. 저려 오는 무릎의 비명을 들으며 고개를 드니, 저 앞에는 요안네스 뿐만 아니라 안나와 아그네스도 함께 있었다.
“수고했다. 모두 나가보거라.”
“네, 전하.”
호위병들이 물러가자 요안네스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안나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얼굴이 발개진 그녀는 이내 끄덕끄덕하며 손을 놓았고 자유로워진 그는 천천히 칼리스토를 향해 다가갔다. 입꼬리에 차가운 미소가 서렸다.
“그래, 도망가는 게 실패한 모양이지?”
“도망이라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내 여동생에게 이딴 사악한 짓을 해 놓고도 발뺌을 하는 것이냐?”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그것을 쓰신 것은 분명 전…… 컥!”
칼리스토의 입에서 어디 한번 사실을 까발려 볼까? 하듯 약병 얘기가 나오려는 순간 요안네스의 발이 날아들어 그의 머리를 걷어찼다. 켁, 하고 옆으로 고꾸라진 그에게 연달아 발길질이 가해졌다. 너무 놀라 가만히 보다가 이내 고음의 비명을 지르며 달려온 아그네스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기절해 버렸을지도 모를 정도로 흉포한 모습이었다.
“오라버니! 이게 무슨 짓이에요? 칼리스토가 마누엘의 최측근 내의인 걸 모르세요?”
“아그네스, 비켜라!”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지만 안돼요. 아무리 오라버니라고 해도 이건 안 돼요! 그가 언니를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쓰러진 칼리스토를 일으켜 세우며 아그네스가 자꾸만 달려들려고 하는 요안네스를 온몸으로 막았다. 여동생까지 걷어차는 불상사가 생기면 안 되기에 결국 요안네스는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고, 칼리스토의 포박을 풀어 주며 손수건으로 피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닦아주는 아그네스의 모습을 그저 바라봐야만 했다. 핏물이 닦여지자 안광이 번쩍였다. 아그네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지 그녀는 연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으나 요안네스는 자신을 향해 쏟아져 들어오는 태양과도 같은 강렬한 빛에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사아아아아-
그리고 보았다. 칼리스토의 등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뻗어지며 사방을 잠식하는 것을. 순식간에 방사형으로 펼쳐진 그림자에 모든 것이 녹아 버렸다. 아그네스는 물론이고 뒤편에 있던 안나도 사라졌다. 세상은 완전히 어둠에 휩싸인 채 오직 요안네스와 칼리스토만이 빛나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있던 그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촤앗- 하며 어둠을 가르고 핏빛 날개가 펼쳐졌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핏물이 흘러내렸다. 강을 이루며 뒤편으로 흘러내려 갔다.
- 네가 기어이 나를 분노케 하는구나.
사방에서 칼리스토의 음성이 쏟아져 들어왔다. 고막이 터지고 뇌가 뒤집어질 것만 같은 충격에 요안네스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더 이상의 압박은 가해지지 않았다. 살며시 고개를 돌리니 칼리스토의 입가와 눈에서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괴로운 듯한 표정이었으나 여전히 듣기에 섬뜩한 정도의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 명심하라. 콤네노스 황실이 이 손아귀에 놓여 있음을.
그리고 어둠이 걷혔다. 칼리스토는 여전히 피떡이 된 상태였고 아그네스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시녀들을 호출했다. 바람처럼 안으로 들어온 그녀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린 뒤 아그네스는 너무하다는 듯 요안네스를 응시했다. 뭔가에 홀린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였다. 안나 역시 요안네스가 조금 전에 벌인 일을 보고는 충격에 빠졌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칼리스토. 내 말이 들리나요?”
혹시 구타당해서 정신이 어떻게 되거나 한 건 아니겠지. 걱정을 가득 담아서 그를 불러보는 아그네스였다. 다행히 칼리스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 공주님.”
“정말, 정말로 미안해요. 우리 모두 요새 안 좋은 일들만 가득해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아요. 오라버니의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이 공주는 뭐 때문에 자신에게 이렇게 상냥한지 칼리스토는 의문이 들었으나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기에 깊이 생각할 수 없었다.
“……망극하옵니다, 공주님.”
“저, 이렇게 된 당신한테 말하긴 좀 그렇지만, 지금 내 언니의 상태가 좀 좋지 않아요. 혹시 당신이 봐 줄 수 있을까요?”
칼리스토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나를 보기는커녕 아그네스만 바라보았다. 아픈 건 내가 아니라 우리 언니예요, 라고 그녀가 말했으나 칼리스토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속삭이듯 들려왔다.
‘안나 공주님께서는 기억을 잃으셨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닐곱 살 때의 기억을 가지고 계시지요.’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소리가 들려오자 흠칫 놀랐으나 왠지 모르게 칼리스토가 쉿, 하고 말하는 것만 같아 가만히 있었다. 그가 희미하게 웃는 것만 같았다.
‘공주님의 바람대로, 저는 그것을 원래대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얼른 고쳐줘요. 부탁해요.’
아그네스가 눈을 빛내며 칼리스토에게 조금 더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자 요안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그네스, 물러나라. 가까이하기엔 위험한 자다.”
그러나 귓등으로도 그 소리를 듣지 않은 그녀는 칼리스토에게 더욱 은근한 눈빛으로 말했다.
‘오라버니는 무시하세요. 지금 오라버니도 제정신이 아니에요. 기억을 잃고 지금 어린애가 되어 버린 언니한테 청혼할 정도라고요. 그러니 부디, 언니를 원래대로 돌려주세요. 네?’
‘진정으로…… 원하십니까?’
‘물론이에요.’
칼리스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뜬 그는 입술을 가만히 깨문 뒤 속삭였다.
“공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후회하실 겁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의자에 앉아 있던 안나가 풀썩 쓰러졌다. 의아해 하며 뒤를 돌아본 요안네스는 바닥에 널브러진 안나를 보고는 놀라며 달려갔다. 아그네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에 자신이 후회할 거라고 말한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으나 언니의 안위가 더 걱정되었기에 미처 마음에 새겨 둘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침실에서 잠을 자던 마누엘이 눈을 떴다. 몇 번 가만히 눈을 깜빡인 그는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 흘러내린 침을 닦아주기 위해 바로 옆에서 대기 중인 시종이 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른기침을 한번 하자 깜짝 놀라 깨어난 시종은 서둘러 마누엘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형님은 어디 계시느냐.”
아주 오랜만에, 또박또박 말을 하는 황태자를 보고 시종은 조금 놀란 듯하였으나 이내 기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황태자님께서 정신을 차리셨나 보다! 하며 그는 고개를 숙였다.
“지금 즉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칼리스토를 찾아라. 그리고 내 휠체어를 가져와라.”
“네, 전하.”
시종은 서둘러 다른 시종들을 불렀다. 이내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휠체어를 가져와 마누엘을 태웠고, 지금 황실 가족들은 모두 안나의 방에 있으며 그곳에 칼리스토가 있다는 것도 빠르게 알아왔다.
“가자. 그곳으로.”
“네, 전하.”
앞으로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 채 시종들은 그저 황태자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그에게 자줏빛 망토를 둘러준 뒤 안나가 있는 방으로 휠체어를 몰아갔다. 마누엘의 눈이 핏빛으로 타오르고 있는 것도 알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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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이옵니당. (__)
부디 즐겁게 읽으셨기를 바라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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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모두 행복하셔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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