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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2/24 01:25:28
Name The xian
File #1 20150222_184941329.JPG (75.1 KB), Download : 62
Subject [일반] 2월 22일. 두 잔째. 커피.


연휴의 마지막 날 저녁. 집에 있는 것도 조금은 지겹겠다 싶어 밖에 나갔지만 영양가 많은 밥에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뒤섞이고 나니 나는 적잖이 지쳤고, 결국 그 자리를 파했을 때에는 - 겉으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속으로는 - 적잖이 풀이 죽고 말았다. 하늘을 올려다 봤다. 겨울이 점점 물러가며 이젠 해가 조금씩 늦게 떨어진다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어둠이 빠른 저녁. 이대로 집에 들어가 봤자 할 것은 조금 많이 뻔했기 때문에,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잠시 돌려 이 근처에 오면 가끔 가는 가게에 들렀다. 30분 혹은 한 시간여 정도 앉아 있을 곳이 필요했고, 과도한 영양가를 조금 달달한 것으로 씻어내고 싶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내가 커피나 차를 파는 가게에 혼자 가서 30분 혹은 한 시간 이상 있었다고 한다면 나를 아는 다른 사람들은 놀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차나 음료, 커피 등을 파는 가게에서 무언가를 앞에 두고 몇 시간이고 앉아있지 못한다. 아니. 몇 시간이 뭔가. 몇 분이나 버티면 다행이고 눈 앞에 무언가 없으면 자리를 뜨든가 아니면 추가 주문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나는 커피 전문점 같은 데에 한 번 들어가면 20분을 넘기지 못하고, 일단 앉아서 먹기 시작하면 커피와 사이드 메뉴를 거의 식사 수준으로 먹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게의 매상을 올려주는 데에 도움이 되는 손님일지는 모르겠지만, 차나 커피의 풍미, 운치 같은 것을 중시하고 무언가를 먹기보다는 담소를 즐기는 이들이 보면 차와 음료를 대하는 나의 조급한 습관은 그저 야만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뭔가 인연이 있으려는지. 아니면 하필 그 날이 2가 세 번 겹친 어떤 날이어서 그랬는지. 뭔가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가게 점원이 막 들어온 나에게 갑자기 드립 커피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드립 커피를 드시러 오신 분인 줄 알았다고 하더라. 이상한 착각이었지만 그 때는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본래의 목적대로 따뜻한 계절 한정 음료와 달달한 조각 케이크를 주문한 다음. 자리에 앉아 휴대폰 전원을 꽂아 충전하면서 게임을 켰다. 주문한 음료와 케이크의 맛에 감탄하면서 게임을 하고 인터넷을 하던 도중.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에서 커피를 마셔 본 적이 있던가?'

그러고 보니 나는 이 가게에서 커피를 제대로 주문한 적이 없었다. 더운 날 아메리카노 한 번 정도 주문했던가. 그 이외에는 커피를 주문한 일이 없었을 것이다. 맛있어 보이는 차나 음료, 여름의 빙수, 달달한 케이크 같은 것을 먹으면서 잘 터지는 WiFi 아래 게임을 조금 즐기고, 그러면서 근심을 날리는 곳인 이 가게에서 나는 굳이 '커피'를 마시려고 한 적은 없었다. 커피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지겨웠기 때문이다. 거의 2년의 시간 동안 야근이라 부르기도 과분한 일과 스트레스에 쩔어서 졸도까지 할 정도로 건강을 해쳤던 나에게 커피를 비롯한 카페인 음료는 '약품'이었지 '음료'가 아니었다. 식생활은 또 어떠했던가. 조미료와 나트륨이 그득한 짠 찌개 아니면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는 그 무언가들이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점점 둔감해졌다. 피곤했다. 조금 뺐던 몸에 군살도 다시 붙고 정신은 흐리멍텅해졌다. 뭐. 그렇게 건강을 해치면서 했던 일이 잘 풀렸다면 모르겠지만 잘 안 되고 말았다. 상처만 남았다. 일이 안 된 거야 어쩔 수 없다 치고, 찐 살이야 노력해서 다시 빼야 하겠고, 망친 건강이야 다시 챙기면 된다지만, 지금 내가 그런 건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다. 왠지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상심한 상태에서, 지칠 대로 지친 몸에 혀는 납덩이가 되어 버린 내가 아무리 정성어린 손길로 내린 커피라 한들 그 풍미와 운치를 느낄 수 있겠는가 싶었지만, 귀가 얇아서일까? 드립 커피 즐기는 손님으로 잠시나마 오해를 받은 김에, 두 잔째 음료로는 커피를 한 번 마셔보고 싶었다.

무슨 원두가 있는지 보았지만 써 놓는다 한들 내가 뭘 알겠나. 어차피 내 수준이라고 해봤자 아이러브커피 70레벨 찍으면서 과테말라니 코스타리카니 콜롬비아니 하는 식으로 원두의 원산지만 엄청나게 들었지 원두에 대해 실제로 아는 건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어설픈 지식으로 누굴 곤란하게 하거나 허세를 부릴 필요가 없었고, 어떤 맛을 고집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특정한 맛보다는 밸런스가 좋은 원두를 추천해 달라고 했고, 추천 받은 두 원두 중에 하나를 골랐다. 주문을 한 뒤 자리에 앉아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카운터 너머로 조금씩 봤다. 흥미가 생겼다. '과연 어떤 맛일까'같이 구체적인 부분에 대한 흥미가 아니라... 미지의 존재를 대할 때, 표현하기 어렵지만 관심이 간다. 그런 느낌.

눈 앞에 이른 커피 잔은 꽤 선명한 빛을 띠고 있었지만 겉보기에는 여느 따뜻한 커피와 다를 바 없는 듯한 색인 것 같기도 하고. 과연 어떨까 싶었다.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우와아.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순간 궁금했다. 왜냐하면 내 속에서는 웃음이 만개했기 때문이다.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그 짧은 순간에 느낀 감정은 이랬다. 재미있다. 커피가 재미있다. 한두 모금에 다 마셔버리고 싶지 않을 만큼 재미있다. 머리와 몸의 뻣뻣한 그림자가 가시는 것 같다. 달달한 차와 케이크를 즐겼을 때 마음이 즐거워진다면, 이 커피를 마시니 몸이 나른해지는 느낌이다. 적당히. 기분 좋게. 지금 생각해 보니, 내게 그 때 요리만화 같은 데에서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마셔 왔던 건 대체 뭐란 말야' 따위의 식상하지만 매우 괜찮은 표현 대신 다른 멋진 경구를 떠올릴 수 있는 순발력이 있었다면 어떨까 싶다. 어쨌든. 커피가 다시 약품이 아닌 음료가 되고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는 순간은 그렇게 내게 찾아왔다.


그 동안 이 가게를 들르며, 했던 말인지 하지 않았던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가게를 나가며 한 마디를 남겼다.

'잘 마셨습니다.'


- The xi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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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e Street
15/02/24 01:37
수정 아이콘
라이트하게 볶아서 무겁지 않고 무리하게 열로 이끌어낸 것이 아닌 원두 고유의 단맛과 고소한풍미
거기에 산듯함을 얹혀주는 센스까지..
정성이 들어간 질좋은 커피는 정말 재미있습니다^^
VinnyDaddy
15/02/24 02:01
수정 아이콘
어느순간부터인가 정말 맛있는 커피를 맛보는 것이 기쁨인 동시에 걱정이요 고통이기도 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기능성음료로서 커피를 찾는 일이 많을 것인데, 이 맛있는 커피로 높아진 입맛으로 인해 기능성음료로서의 커피를 마시는 행위가 지겹고 지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뒤부터요.
그래도 한 잔의 맛있는 커피만큼 나를 몸과 마음 양면으로 고양시켜주는 것도 없더군요. 잘 읽었습니다.
MelanCholy
15/02/24 02:39
수정 아이콘
항상 별다른 이야기 없이 서로 알아봄을 인사로 안부를 건낸채 메뉴를 준비해 드리곤 했는데,
즐겨주신 한잔에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__)

p.s 퍼드를 하다보니 우연찮게 하시던걸보고 말을 걸어볼까 하는 생각을 한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안님이셨다니...^^;
중년의 럴커
15/02/24 08:55
수정 아이콘
헐. 커피 드신분과 가게 주인분이 전부 pgr러 였다니.
15/02/24 08:58
수정 아이콘
오 알고보니 피지알러 소모임후기...
15/02/24 09:35
수정 아이콘
오... 세상은 역시 좁군요
핑핑아결혼하자
15/02/24 09:49
수정 아이콘
두분 예쁜 사.. 아 이건 아닌가요?
15/02/24 10:51
수정 아이콘
헐랭 깜짝 놀랐네요
스타슈터
15/02/24 11:41
수정 아이콘
그래서 이 가게 어딥니까! 크크크
15/02/24 12:14
수정 아이콘
아나 크크크크크크크킄
마스터충달
15/02/24 11:09
수정 아이콘
헐! 두분 예쁜 사...
챠밍포인트
15/02/24 14:07
수정 아이콘
글만으로도 커피한잔 마신듯한 필력에 감탄하네요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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