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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1/12 23:47:09
Name 스타슈터
Subject [일반] 완벽함보다 중요한, 타이밍이라는 것.


사진을 찍는 취미가 생긴 것은 약 2년 전.
지인이 과제를 위해 장만해둔 DSLR 카메라가 더이상 필요가 없다며 중고 거래를 제안했다.
딱히 카메라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였지만,
대학교 졸업여행을 떠나기 직전이라 그랬을까,
좋은 사진을 찍고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기에 길게 생각하지 않고 거래를 승낙했다.

(그때만해도 이게 그렇게 돈이 많이 들어가게 될 취미일지 몰랐다... 부들부들...)

아무튼 아주 좋은 카메라는 아니였지만,
그래도 카알못이였던 나에게 DSLR은 엄청난 신세계였고,
이것저것 시험해보고 시행착오를 즐기는 나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좋은 장난감이였다.

그렇게 나는 사용법도 잘 모르는 그 카메라를 들고서 졸업여행을 떠났다.



많은 사진을 찍었고,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마냥 좋은 추억만 있었던 졸업여행은 아니였다.
고등학교 시절의 첫사랑이 같이 참여했던 졸업여행이였고,
그녀석이 다른 사람과 연인이 되어버린 바로 그 졸업여행 이기도 했다.

무려 17일동안의 장기 여정속에서,
눈을 마땅히 둘 곳이 없었던 나는 카메라 뷰파인더에 눈을 숨겼다.
정말 눈을 둘 곳이 없었던 것인지, 프레임 밖의 놓인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그때 그시절, 초보 사진사의 신분으로 떠난 여행에서 찍은 사진중,
아직까지도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는 사진이 한장 있다.



이 사진이 찍힌 뒤의 지금은 1년 반 정도가 흘렀고,
그동안 내 장비도, 기술도 한단계 나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좋은 테크닉을 사용해도, 화질이 좋은 렌즈를 장착해도,
그당시 그저 운빨이 충만해서 우연히 찍게된 이 사진이,
나에게 있어서는 내가 찍어본 모든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이였다.

내가 일출을 보려고 새벽에 일어나는 날이 얼마나 있겠으며,
때마침 태양만한 크기의 구멍이 나있는 구름이 떠있을 확률은 얼마였겠으며,
그 구멍 사이로 태양이 지나갈 확률은 얼마였겠으며,
때마침 외로워 보이는 배가 그 옆을 서행하고 있을 확률은 또 얼마였을까.

그 작은 확률로 일어난 사건속에서 별볼일 없는 초급형 DSLR으로 찍은 이 사진은,
완벽한 장비가 있는 지금의 나에게도 다시는 찍을수 없는 사진이 되었다.
그 아무리 완벽한 상태라도, 기회가 오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 여행 속에서,
난 최고의 타이밍에 찍은 그 사진 한장을 대가로,
첫사랑이 다른 사람과 떠나버리는 염장질을 바라보는 최악의 타이밍이 되어버린 졸업여행을 맛보았다.

물론 이미 오래전에 차였었고, 결론이 나와있었던 첫사랑이라 딱히 후회는 없었다.
다만 그때 그시절의 내가 자신의 부족함을 완벽함으로 채우려 하기보단,
그 순간뿐인 타이밍을 잡고 내가 할수 있는 일부터 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지금와서 후회하는건 아니다.
다만 다음에도 비슷한 기회가 있다면, 완벽해지기 위한 강박관념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완벽함을 위해 타이밍을 놓치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지 않으면 좋겠다.
기대하는 미래는 불확실하고, 눈에 보이는 현재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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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12 23:52
수정 아이콘
사진 정말 멋지네요.
아수라발발타
15/01/13 00:00
수정 아이콘
볼수록 이상한 분위기의 사진이네요

말씀하신대로 뭔기 기막힌 타이밍이었던 것 같습니다
스타슈터
15/01/13 09:33
수정 아이콘
근데 신기한건 저 풍경을 카메라 프레임에 담기 전까지는 저도, 친구들도, 저런 사진이 나올거라는 생각을 못했죠.

다들 최대한 넓은 화각으로 넓은 화면을 캡쳐하는데 몰두하다 봐서 그랬나봐요. 타이밍도 중요했지만 그순간 "클로즈업 해서 찍어볼까?" 한게 이 사진이 나온 계기가 아닌가 싶어요.
15/01/13 00:00
수정 아이콘
일단 추천
사과씨
15/01/13 00:26
수정 아이콘
브레송이 울고갈 타이밍이었군요. 사진도 멋지고 글도 왠지 마음에 와닿네요.
스타슈터
15/01/13 09:39
수정 아이콘
그래도 브... 브레송님은 범접할수 없는 영역이라... ㅠㅠ
스웨트
15/01/13 00:26
수정 아이콘
와.. 태양 사진 진짜 멋있네요. 정말 환상의 타이밍입니다
王天君
15/01/13 00:35
수정 아이콘
만화책 지뢰진에서 사진사 에피소드가 있는데, 거기서 그런 말 한게 생각납니다. 바로 그 순간을 건졌다!! 고 셔터를 누른 직후 말하는 놈들은 다 일류가 아니라고요. 셔터를 누르는 순간이 자기가 담고 싶은 순간인지 아닌지는 인화하고나서야 안다고(요즘이야 디지털이니 의미가 없겠지만)...
순간을 담는 예술이라는 말이 어렴풋이 와닿네요
스타슈터
15/01/13 09:38
수정 아이콘
디지털이여도 당장 작은 프리뷰 화면에서 보기 좋은것과, 나중에 큰 화면에서 봤을때 보기 좋은 사진은 좀 차이가 있더라고요.

찍어놓고 컴퓨터에서 보니 이걸 내가 왜 삭제하지 않았지? 싶은 사진이 더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돌아봐야 가치가 보이는 사진도 많은것 같아요.
여자친구
15/01/13 19:16
수정 아이콘
공감x2
겨울삼각형
15/01/13 14:55
수정 아이콘
사진은 다작입니다.
손바닥만한 LCD로 확인해봐야 초점이 맞는지 안맞는지는 모니터로 띄워봐야 확실하죠.

LCD상으로는 왁벽해보이던 사진도 실제 화면에 띄워보면 초점이 안맞아있는경우가 많고,
LCD상으로 망했네... 라고 생각했던 사진이 실은 완벽하게 초점이 맞아있을 수가 있습니다.

결국 수백 수천장 찍다보면, 그 중 1~2장은 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와이프님아.. 사진 지우지 말라고!!
스타슈터
15/01/13 16:43
수정 아이콘
마지막줄이 인상깊군요...크크크
아직 사진 지울 와이프님이 없어서 다행....은 아니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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