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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1/12 13:03:14
Name 구밀복검
Subject [일반] 족구왕 : 관객의 경멸어린 시선이, 영화를 만들어내다.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처음부터 플롯을 공개하니, 혹여 스포일러를 피하시려는 분들은 0번 단락들을 건너뛰시기 바랍니다.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u3Blh

* For A Few Dollars More OST (한국명 석양의 무법자)


0.
<족구왕>의 플롯은 간단 명료하다. 갓 전역한 족구매니아 홍만섭은 전역을 하여 복학을 하지만 1) 이전에 족구장이었던 자리가 테니스장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며 2) 서안나라는 인물을 처음 보고 반해 사랑에 빠진다. 그는 1) 족구장 재건 운동을 하는 와중에 2) 서안나를 두고서 전직 축구 선수인 강민과 족구대결을 하여 탁월한 족구실력을 과시하며 승리한다. 홍만섭이 강민을 박살내는 장면을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고 지켜본 것을 계기로 학교 내에 족구열풍이 불고, 열화 같은 참여 속에 족구 대회가 열린다. 홍만섭은 고난 끝에 족구대회에서 승리하지만, 대회의 결과와는 별개로 서안나는 강민을 택하고, 학교에서는 제적을 당한다. 하지만 홍만섭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며, 홍만섭으로 인해 열기에 고무된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



1.
아마 대부분의 관객은 <족구왕>이라는 제목을 접한 순간에 일정한 편견을 떠올렸을 것이다. ‘뭔 영화 제목이 족구왕이야’ ‘ ‘존나 허섭해보이는데’ ‘아 구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제목을 접하자마자 이 영화를 볼 생각을 잃고 다른 영화로 눈길을 돌렸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을 읽었다는 것처럼,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족구는 사정없이 타작당한다. 영화는 갓 전역을 한 예비역이자 절륜한 족구 실력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홍만섭이 복학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전의 학내 족구장이었던 자리는 테니스장이 되어 있으며, 지인과 족구의 우유팩으로 건물 안에서 족구를 하다가 지나가던 다른 학우에게 찌질하다고 힐난을 당하고, 과사에서는 족구장 재건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가 "음~~족구하는 소리하고 앉아 있네 크크크크크크"라는 조롱을 당한다. 총장과의 대화에서 족구장 재건을 건의할 때에도 분위기는 싸늘하다. 족구장 건립 서명을 받다가도 "족구하고 앉아 있네."라는 비아냥을 받는다.

홍만섭이라는 주인공 자체도 족구의 화신인 것마냥, 족구가 가지고 있는 특성들이나 구성요소들을 형상화한 것처럼 추레하게 그려진다. 어벙한 외모에, 노스페이스를 입고 다니며,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 첫 눈에 반한 서안나에게 대시하겠답시고 전해준 명함은 마치 일부러 허섭함을 연출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만든 것마냥 조악하기 그지 없으며, 데이트 신청을 해놓고 보자는 것이 2년의 시간 동안 과학생회실은 온통 그가 모르는 후배들이 점령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하라는 기숙사 선배의 훈계에도 그저 '연애하고 싶다'는 나사빠진 듯한 소리를 하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회포를 푼답시고 공공장소에서 족구를 하다가 다른 이들에게 무시를 당한다.



이는 홍만섭에 대한 서안나의 일침에서 정점을 찍는다.
"족구하지 말아요. 여자들이 족구하는 복학생 제일 싫어하는 거 몰라요? 축구같은 거야, 선수들도 잘 생겼고, 돈도 잘 벌고, 몸도 좋고. 근데 족구는...더럽잖아요. 복학생들 나시 입고 겨털 다 보이는데 그대로 수업 들어온다니까요 땀내 쩔어가지고. 여기가 무슨 군대도 아닌데 지네들끼리 신나서 찌질하게. 아니 이름도 그래. 족구가 뭐야 족구가. 족발도 아니고. 좆구멍의 약자야?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족구하지 말아요. 그러다 평생 혼자 살겠네. 족구가 재미있건 말건, 여자들은 싫어해요."
"족구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아요?"
"족구가 재미있건 말건, 여자들은 싫어해요."



* 이게 족구나 하는 게 까불어!

여기에서 감독이 족구에 대해 관객들이 가질 법한 경멸감 - 특히 복학생/군대/마초 냄새 - 에 대해 모르고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감독은 오히려 이를 인지했을 뿐만 아니라, 족구에 대해 관객이 갖고 있던 편견을 일부러 불러일으키고, 그 편견에 대해 답변하는 식으로 영화를 이끌고 나간다. 즉, 족구에 대해 관객들이 멸시감을 가지고 있어야만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다. 관객이 영화를 경멸하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부터 영화는 비로소 시작된다. 다음과 같은 답변으로 말이다.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영화의 표피만을 쫓지 않는 관객이라면 홍만섭의 이 대사는 단순한 홍만섭 개인의 족구빠심을 드러내는 대사가 아님을 당연하게 여겨질 것이다. 이미 학자금 대출이라든가 취업, 공무원 시험 등의 소재를 제시하면서 엄혹한 세파와 그 사이에서 젊음이 풍화되어 가는 광경이 충분히 제시되었기에, 족구는 족구 이상의 무언가, 외면받고 경멸받지만 어엿한 낭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관 없게 된다.

작중 족구가 차지하고 있는 이 자리에, <족구왕>이라는 영화를 채워넣는다면? 이것은 관객들의 편견에 맞서 싸우는 영화 자체에 대한 감독의 옹호가 된다.
"족구왕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아요?"
"족구왕이 재미있건 말건, 사람들은 싫어해요."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서안나를 비롯한 극중 인물들의 족구에 대한 경멸감은 <족구왕>이라는 영화에 대한 관객의 경멸감과 같은 궤적을 그린다. 극중 인물들이 족구를 경시하듯, 관객들은 <족구왕>에 대해 경시하는 마음가짐으로 자리에 착석했을 것이다. 따라서 족구와 홍만섭에 대한 극중 인물들의 타박은 족구에 대한 관객의 시각을 대변해주는 것이며, 자연스럽게 족구왕이라는 영화 자체에 대한 관객의 시각에도 대응된다. 말하자면 족구 : 홍만섭 : 영화 내의 세계 = 영화 족구왕 : 감독 : 관객이라는 도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만약, 족구 대신에 독립영화를 끼얹으면? 그 순간 이 영화는 독립영화의 존재의의를 호소하는 영화가 된다. "독립 영화 찍지 말아요. 독립영화가 재미있건 말건, 사람들은 싫어해요." 그리고 답변은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이미 준비되어 있다.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2.
예술이 상품이라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 근본으로 따지고 들자면 만불성설이다. 인류사에 있어, 상품은 아니지만 예술인 것이 너무나도 무수히 많기 때문에, 아니 오히려 상품이었던 예술보다 상품이 아닌 예술이 더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시장 경제가 도래하기 전, 만물의 상품화가 진행되기 전에는 예술이 없었던가? 구석기 시대에 만들어진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는 예술이 아닌가? 예술은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아름다움을 지향해서 표현하면 그뿐, 상품이 되느냐 마느냐는 예술의 본질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 이게 무신 상품...

다만, 이에 대해 시대가 달라졌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정의상으로는 상품이 아니지만, 현대에는 대개 상품의 외피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특히, 진지한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들면 상품이 되지 않고서는 어렵기 때문에, 그저 현실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이념형적인 의미에서조차 상품일 수밖에 없지 않냐는 의문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영화가 될 것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대규모 협업과 그에 따르는 자본의 산물이다. 아무리 허섭한 영화라고 해도 기본적인 제작비는 10자리 숫자를 호가하며, 손익 분기점은 그보다도 높다.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칠 수밖에 없고, 그만치로 생산비용은 무지막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본전과 밑천의 문제를 전적으로 외면하기 어렵다. 이는 그만큼 영화가 상업적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며 포퓰리즘적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돈 없는 사람은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미 영화는 상품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독립영화라는 가능성은 존재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나아가 진지한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인력과 자본이 필요한데, 대개의 독립영화들은 이를 확보하기가 어려우며, 그것은 질의 부족함으로 이어진다. 심지어 독립영화계의 거장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대자본이 만든 영화들에 비하면 엉성하디 엉성한 측면을 쉬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너무나도 명백한 장애물이다. 물론, 따지고 보면 큐브릭의 <샤이닝>도 독립영화고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도 독립영화이다. 그러나 동일하게 독립영화의 범주로 포괄된다고  한들, 실상 체급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기본적으로 저러한 작품들은 제작비가 백만 달러 단위다. 그에 반해 홍상수의 <옥희의 영화>는 고작 2000만 원에 제작되었으며, <무산일기>는 7000만 원이었다. 그나마 대다수의 작품들은 그 정도 제작비조차 확보하기가 어렵고, 그만치로 작품의 수준은 하락하게 된다.

이를 두고 '제작비를 감안해서 평가하면 대단한 것이 아니냐'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은 절대평가의 세계이지 상대평가가 아니다. 창작자의 사정을 참작한다고 치면 초등학생의 백일장 글짓기에는 어마어마한 가산점을 붙여야할 것이며, 해운대는 타이타닉 제작비의 5% 밖에 쓰지 않은 초절정 대작 영화가 되어버릴 것이다. 즉, 격 떨어지는 작품을 창작자의 사정을 감안해서 용인해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술은 오로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지, 온정과 배려를 과시하는 자리가 아니며, 오로지 직관적으로 아름다우냐, 아름답지 않느냐가 관건이다. 창작자가 처한 조건과 상황과 환경이 어드밴티지로 작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돈 없는 범재들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은 전무한 것인가? 영화는 오로지 돈과 사람을 모을 수 있는 부르주아들의 전유물인가? 시쳇말로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먹어야 하는가?



3.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많은 독립 영화들이 비주류와 마이너와 인디의 숭고함을 역설하려 한다. 그러나 실상 비주류라는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 억압하는 타락한 주류와 억압받지만 진솔한 비주류의 도식을 설정하여 대중에게 호소하는 것이 ‘나 상처 받았어 뿌잉뿌잉~’ 식의 피해자 코스프레와 다를 것이 무에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립영화들이 함량 미달의 조야한 작품을 내놓은 다음, 소외나 저항이나 진정성, 키치 등의 마이너한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고는 진부함에 지치고 참신한 것을 갈망하고 있던 대중들에게 진짜 예술인양 가장하면서 선동질을 한다. 다른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 감성팔이다. 그저 대중들로 하여금 '나는 남들과 다른 진짜를 향유하고 있다. 나는 외면되어 온 진짜배기를 알아보고 공감해줄 수 있는 안목 있고 동정심 있는 사람이다'라는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식으로 틈새시장으로 도피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것은 비단 영화만의 현상이 아니며, 음악, 문예, 미술 등 모든 예술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는 문제이다. 예컨대 밑바닥 수준의 수행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그저 인디라는 이름 하나로 모든 부실함을 용서 받고자 하는 허섭한 밴드들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 말도 안 되는 영화 찍어 놓고서 기성품의 틀을 탈피했다고 자위하기엔 이미 <록키 호러 픽쳐 쇼>라는 고전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죠. 무려 1975년에 나왔는데 아직도 이것을 뛰어넘지 못하다니...

비주류의 존재의의가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대중 시장을 지배하는 주류 매체에서는 구조적으로 하기 어려운, 효율은 지극히 떨어지지만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원하는대로 만든, 그리하여 장르의 고유성을 드러내고 장르적 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 도발적이고 극단적이고 실험적인, 다시 말해 매니악한 시도를 할 때만이다. 결국 사람이 예술을 만들고 소비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보다 밀도 있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욕망이다. 소비자는 창작자의 세계관을 원하고 창작자는 자신의 세계관을 남들에게 드러내고 싶어하니까 예술 시장이란 게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대부분의 영화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작업 인력과 제작비가 요구되는 창작물이기에, 상업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때문에 창작자는 만들고 싶은 영화가 아니라 보여지기 위한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으며, 자신의 주관이나 소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포인트를 소비자의 기호에 맞추게 될 수밖에 없다. 자연히 작품 안에는 창작자는 남지 않으며, 상품 이상의 무언가는 소실된다. 남는 것은 오로지 소비자의 기호 뿐이다. 그나마도 실존하고 실재하는 진짜 소비자가 아니라, 창작자가 머릿속으로 상정한, 허구의 소비자의 기호만 남는 것이다. 그러면 소비자들이 영화를 볼 때의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은 엉뚱하게도 [창작자의 상상 속의 소비자]가 된다. 결국 영화관에 500만이 들든 1000만이 들든 그와 관계없이 밋밋하고 시시한 영화가 되는 것이다. 창작자가 아니라 웬 허깨비와 커뮤니케이션 하는 격이니 말이다. 뻔한 이야기를 보며 뻔한 감상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포퓰리즘적인 몰개성한 시장 속에서, 잃을 것이 없는, 상업성이란 것에 발목을 붙들리지 않은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시도를 했을 때에야 비로소 비주류는 존재의의를 띠는 것이다. 이 점에서 <비긴 어게인>은 비판 받을 영화이며, 반면 <액트 오브 킬링>이나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우리시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을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족구왕>의 고유성은 독보적이다. 지극히 독립영화적인 주제를, 독립영화적인 인물이, 독립영화적인 구성 속에서 보여주고, 이를 독립영화적인 방식으로 묘사한다. 인물과 서사와 주제가 동일한 맥락 속에서 포개어지는 것이다. 투박함 그 자체인 인물 홍만섭의 행적이, 투박함 그 자체인 카메라 워킹 속에서 그려지면서, 투박함 그 자체인 서사가 전개되고, 종국에는 투박함이 가지는 미덕을 당당히 외친다. 그야말로 독립영화 그 자체, THE 독립영화라고 할 수 있다. 강민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서안나의 일갈은 결정적이다. "야! 축구도 그렇고 고시원도 그렇고 벤츠도 그렇고 우리 사이도 그래. 좀 쪽팔리면 어떠냐? 만섭이 봐! 존나 볍씨 같아도 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잖아!" 한심해보여도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너무나도 노골적이어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다. 즉, 1000억, 100억, 10억이 없는, 1억원 밖에 없는 사람이 영화를 찍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정면으로 대답한 것이다. 만약 이전에 이러한 시도를 한, 독립 영화의 존재 의의를, 독립 영화로서, 독립 영화적으로 항변해낸 [메타 독립 영화]라고 말할만한 작품들이 있다면 대단할 것이 없겠으나, 과문하지만 내 기억에는 없다. 최소한 한국 영화 중에서는 없지 않나 싶다.

물론 <족구왕>은 허술한 영화다. 그러나, 그에 대해 우리의 홍만섭 군이 이미 결론을 내지 않았는가.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족구왕(영화)의 투박함 자체가 족구왕(홍만섭)의 허술함과 호응을 이루면서 미적 쾌감을 극대화해준다.



4.
펑크락이 처음 태동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락은 코드고 비트고 나발이고 메시지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야 퀸 이 선비종자들아 락 갖다 선비질 하지 마라! 락의 본질은 그딴 게 아니야! 3코드면 충분한데 뭔 잘난 척이야!' 이러한 반지성주의적이고 메시지 지향적인 움직임은, 비록 호오가 갈리기는 하며 많은 매니아들에게 경시되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을 만들어왔다. 그것은 그들의 관점이 과격하기는 했을지언정 부분적으로는 핵심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락의 본질은 연주 수행력의 정교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파괴적인 방식으로 전달되는 메시지에도 있다는 것이다.



* 락은 그냥 세수라능!

마치 항룡십팔장 같은 것이다. 사조영웅전에서 홍칠공은 주인공이자 제자인 곽정에게 자신의 절기인 항룡십팔장을 전수하면서 '네 녀석은 머리가 돌대가리라서 복잡한 기교를 배울 수는 없으니 이거 하나만 마스터해라. 이건 강맹한 무공이기 때문에 상대가 무엇을 하든 간에 이것만 주구장창 반복하면 최소한 상대 술수에 말려들어 지는 일은 없다.'라는 설명을 해준다. 그렇게 항룡십팔장을 마스터하고 나자, 돌대가리 빵셔틀에 불과하여 사부들의 복장을 터지게 했던 무능아 곽정이 오절들과 맞짱을 떠도 호각을 이루는 강자로 성장하게 되며, 뭇 무협빠들 사이에서 영웅문 시리즈 최강논쟁을 하게 만들었다.



<족구왕>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내에서 환기한 문제의식을 다소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인생을 사는 데에 그렇게 갖춰야할 요소들이 많아? 대학? 학점? 토익? 취업? 그래서 기껏 산다는 게 그따위야? 인생은 그런 게 아니야! 조야해보여도 이렇게 사는 게 인생이고 젊음이야!"

여기에서 영화론까지는 한 발자국이다. "영화를 만드는 데에 그렇게 갖춰야할 요소들이 많아? 정교한 연출? 적절히 선택된 편집? 그래서 기껏 만드는 영화들이 그거야? 진입장벽만 졸라 높여놓고 헛짓거리 하고 있네. 야! 영화는 그런 게 아니야! 1억 갖다 투박하게 만들어도 이 정도는 만든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실, 장면만 잘 찍는다고 영화가 된다고 한다면, 슬라이드 사진 묶음도 영화가 될 것이다. 진짜배기 영화란 그런 것이 아니다. <족구왕>은 영화도 결국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고, 이야기에 대한 창작자의 열망 이외의 곳에서 출발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등장한 홍만섭은, 그리고 <족구왕>은, 마치 스파게티 웨스턴을 한창 찎던 시절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아다치 미츠루 만화의 주인공들을 연상케 한다. <페일라이더>에서 이스트우드가 갱들에게 억압받던 촌민들 사이로 홀연히 나타나 단신으로 갱단을 작살내고서는 유유히 사라지며, H2의 흔한 축구부원 쿠니미 히로가 오합지졸 야구부를 이끌고 갑자원을 평정한 뒤 일상으로 돌아간다.



* 뭐, 홍만섭과 외모와 간지 차이는 좀 많이 나지만;

마찬가지로 족구왕(홍만섭)은 겨울왕국마냥 얼어붙어 있던 대학에 잃어버렸던 젊음을 되찾아주고서는 말없이 떠나가며, 관객들의 경멸어린 시선 앞에 갑자기 나타난 족구왕(영화)은 관객들의 편견을 박살낸채 향수와 낭만에 젖게 만들며 엔딩 크레딧을 띄운다. 비록 열정과 노력과 정념만으로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으며, 현실의 관성과 중력 앞에서 일탈을 꾀하는 개인들이 쏘아올린 슈팅은 머지 않아 운동 에너지의 한계를 맞고 제자리에 회귀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이 지상에서 출발했을 때와 공중에서 추락하여 다시 지상으로 떨어졌을 때에 보는 풍경은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 4/5 THE 독립영화



* 이 영화의 베스트 장면으로는 후반부에 홍만섭이 서안나에게 영어강의 발표를 빙자하여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을 꼽고 싶습니다. 이때 홍만섭은 백 투 더 퓨처의 형식을 통해 고백을 하는데, 그럼으로써 초반부에서는 서안나의 냉소의 대상이자 홍만섭의 둔감함을 드러내는 장치였던 백 투 더 퓨처가 이 시점에서 홍만섭의 내면을 표현하고 서안나에게 고백하는 매개물이 되면서 자칫 아웃사이더들의 힙스터 감성팔이나 시덥잖은 현실 풍자물 정도로 전락할 수 있었던 영화에서 서사적 완성감을 부여하게 되죠. 사실 전반부 약 50분 즈음까지 이미 영화의 주제의식은 지독히도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터라 후반부에서 할 말이 많지 않았고, 실제로 그에 발맞춰 영화도 다소간 루즈해지는데, 저 장면을 통해 그럭저럭 커버되었다고 봅니다.

* 팟캐스트 영화계契 3회차 방송에서 <족구왕>을 다룬 바 있습니다. 사실은 이미 한 달 여 전에 올렸던 방송분인데, 호스팅 서버였던 아이블러그가 사망하면서 새 호스팅 서버를 찾고 방송 채널을 이전하느라 잠시 활동을 중단했다가 얼마 전에 재개해서 재차 업로드를 했네요. 본문에서 다룬 이야기와 더불어 한국 독립 영화의 현실 등에 대한 논의를 해봤습니다.  

영화계 3화 : 족구왕 1부
http://www.podbbang.com/ch/8720?e=2159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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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ndris
15/01/12 13:07
수정 아이콘
족구하니까 갑자기 스XX크 걸X 하고 싶어지네요...
15/01/12 13:13
수정 아이콘
매무새가 매끈하지 않았지만 매력있는 영화였어요. 원래 제가 비급정서를 가지긴 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재밌게 봤을 영화에요.
그리고 황승언씨, 사랑합니다. 이번엔 진짜라구요.
구밀복검
15/01/12 13:45
수정 아이콘
아마 이 영화의 최대 수혜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안재홍은 몰라도 황승언은 다 알더라고요.
검은책
15/01/12 13:36
수정 아이콘
지금까지 보아온 영화랑 포맷이 너무 달라서 놀랐지만 적응하고 나니 배꼽 빠지게 웃겼던 영화.
길치 둘이서 영화관 찾다가 길에서 싸운 추억이 있는 영화.
다보고 나니 어 이게 뭘까? 잠시 머뭇거렸던 영화.
방송을 듣고 나니 내가 놓친 코드들이 뭔지 알게 되어 즐거움이 배가 되었던 영화.
그리고 영화에 어울리는 상큼발랄한 음악과 상큼발랄한 리뷰.
다읽고 나니 곰씹어 볼 것들이 넘치는 내용.
잘 봤습니다.
구밀복검
15/01/12 13:55
수정 아이콘
사실 저 코드들이란 것이 PC의 관점에서 심심하면 타작당하는 대상들 - 복학생, 예비역, 해병대, 아저씨, 마초, 족구 등등 - 인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영화 내에서 유의미한 코드들이 되었다 싶습니다. 정치적으로 불건전한 소재들이 사실은 건전할 수 있다는 것을 영화적으로 납득시키지 않았나 싶어요.
검은책
15/01/12 18:45
수정 아이콘
맞아요. 유머러스하게요.
유머도 없이 폼잡는 영화도 싫고
유머랍시고 뻘스럽게 이상한 장면 맥락 안맞게 집어넣는 영화도 싫어요.
유머코드와 소재랑 주제가 묘한 시너지를 일으키고 있구나 방송듣고 알았죠.

만섭이 명함 한장 얻고 싶더라구요.
우울할때보게... 흐
전 저 명함이 제일 웃겼어요.
15/01/12 13:43
수정 아이콘
저희학교가 많이 나와서 실제 장소가 어딘지 유추하는 깨알같은 재미도 있었네요. 그런데 이야기가 대학생들 이야기라 저한테는 더 사실적으로 다가온 면도 있구요. 즐겁게 본 영화라 리뷰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구밀복검
15/01/12 13:51
수정 아이콘
최근에 90년대 추억팔이물의 성격을 가지는 컨텐츠들이 많이 나오고 있죠. 나가수라든가 토토가라든가 응4 응7 같은 것도 그런 것이고...하지만 이것은 대개 과거의 컨텐츠들의 '재탕'의 성격을 갖고 있는 데 반해, 지금의 현실을 90년대적인 방법과 시선으로 표현하는, 그러니까 지금 현재의 컨텐츠임에도 90년대에 나왔다고 하더라도 손색없는 작품들은 별로 없지 않나 싶어요. 족구왕은 그 점에서도 유니크 하지 않나 싶습니다. 자칫 고리타분하고 구닥다리 인상을 줄 수 있는 것을 나름 잘 커버하기도 했고. 뭐, 웹툰으로는 8~90년대 한국 순정만화의 작법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은 <심해의 조각들>이 있을 테고...
주먹쥐고휘둘러
15/01/12 14:07
수정 아이콘
이제는 어디 위원장, 어디 CEO가 된 사람들이 말하는 청춘에 대한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소리들 보다 백만배 나은 청춘에 대한 담론이 담긴 영화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좋은글 잘 봤습니다.
마스터충달
15/01/12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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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라는 거는 참 재밌는 거라고 생각해요.
엉성하다는 것이 매력이 될 수 있다는 거 때때로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 들거든요.
퀸 이나 레드 제플린 들으면서 전율하기도 하지만, 섹피나 이기팝 같은 애들한테도 전율했었으니까요.
2014년 개봉작 중에선 <나를 찾아줘>랑 <족구왕>이 이런 아이러니한 대비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네요.
춘호오빠
15/01/12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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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개봉전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 먼저 본 작품인데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시원한 여름 날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맥주 한 잔하면서 신나게 웃었던 영화라 더 기억에 남네요. 당시 관객 반응도 굉장했고 (무대인사에서 황승언 씨의 아우라는 더 굉장했..) 꼭 성공하길 바랬는데 개봉 후에도 나름 평단과 관객 모두 만족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어요.
동네형
15/01/12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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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여기저기서 얘기 많이 나오든데 괜찮나요? 보고 난 느낌으로 치면 기존에 어떤 영화랑 비슷할까요?
구밀복검
15/01/12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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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축구와 중경삼림 사이의 어딘가일 듯 합니다.
王天君
15/01/12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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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하하하핳하하하 엄청나네요.
15/01/12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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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추억팔이라는 것 때문에 영화가 끝나고 생각해보면 상당히 오그라들긴합니다만 응4나 응7이 오그라듬을 들고도 거부감없이 성공했던 것처럼 홍만섭이라는 캐릭터의 완성도가 영화 내내 오그라듬으로 무장되었음에도 굉장히 매력적이고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임개똥
15/01/12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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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결승전에서 고시준비중인 선배가 준비한 군화를 꺼내 드는 장면은 정말 최고였어요
Rosinante
15/01/12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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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15/01/12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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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황승언.. 최근 몇 년간 본 영화 속 여자 주인공 외모 임팩트 중 최고였네요.
가위바위보해서 따귀 때리는 장면 크크
새강이
15/01/12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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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재미있게 본 영화였습니다 예비역 친구들한테 꼭 권하는 영화입니다.
15/01/12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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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언!!

과장 좀 해서 황승언이라는 배우를 알 수 있었다는 거 하나만으로도 층분히 만족스러웠습니다.
영화도 나름 괜찮았던 것 같구요..

그렇지만 만약에 황승언이 없었더라면 저는 족구왕을 쓰레기 같은 영화.. 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크크

그리고 나쁜 녀석들에 이정문 여자친구로 양유진이 나오는데 얼굴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하고 찾아보니 황승언이더라구요. 앞으로 많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중입니다.
저글링아빠
15/01/12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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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람이 예술을 만들고 소비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보다 밀도 있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욕망이다. 키아~

감탄하고 갑니다~
가장자리
15/01/12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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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영화를 보고싶게 만드는 리뷰네요 흐흐
15/01/13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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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제 친군데...자랑하고 싶습니다...크크.
계속 영화 하더니 젊은 나이에 좋은 작품으로 두각을 나타내네요.
구밀복검
15/01/13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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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상 참 좁네요. 피지알에 친구 분이 계실 줄이야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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