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작가 살만 루슈디에 대한 엉성하기 짝이 없는 글을 하나 올린 후, 구밀복검님으로부터 밀도 높은 좋은 덧글(
https://ppt21.com../?b=8&n=55492&c=2072375)을 받았습니다. 저는 대학에서는 화학을 전공했지만, 한 교양강좌에서 우연히 철학자 김영민의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라는 책을 접하고 그의 오랜 독자로 남았습니다. 그는 문사(文士)로서 우리 말 글쓰기의 섬세한 장을 열었으면서도, 그의 글에는 무사(武士)로서의 강인한 정신이 칼날처럼 번득입니다. '인문학의 위기'를 운운하는 인문학자들중 인문학을 '하는 것'과 인문학에 '취직하는 것'을 구분하는 자가 얼마나 될까요. 얄팍한 자신의 지식의 말을 삶으로 '끄을고(김영민)' 오는 지난한 과정이 없이는 아무도 그들의 말을 귀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면 좋겠습니다. 이글은 김영민의
[공부론] 중 한 꼭지의 글인데, 아마도 구밀복검님이 올려주신 덧글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PGR에 좋은 글을 써주시는 분들이 암약함을 전해듣고 두 달을 기다려 글쓰기 권한을 얻었더니 좋다고 남용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차붐, 적지(敵地)에서 배우다]
그간 이런저런 학술모임에 초청받아 강의나 강연을 한 것이 줄잡아 수백 건은 되겠다. 1990년대에는 이른바 '심층근대화'를 위한 인문학 운동의 차원에서 열심을 부리기도 했던 것인데, 막 개화되고 있던 대중들의 문화적 활성을 인문학적 가치와 연계시키려고 애를 썼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낯선 학인들과의 대화적 만남과 그 창의적 긴장 속에서 내 공부를 점검할 수 있는 '현장'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 숱한 강연들의 풍경, 그 명암과 득실을 일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강연들을 돌이켜 볼 때 가장 의미심장하게 남는 인상으로는 아무래도 '오인과 어긋남'일 것이다. 한마디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부분의 강연장은 늘 오해의 잔치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로티(R. Rorty)나 블룸(H. Bloom)등이 말하는 오인의 역설적 창의성도 있었을 테고, 라캉(J. Lancan)의 말처럼 대화적 관계 그 자체의 조직 속에 각인된 어쩔 수 없는 오인도 있었을 테다. 그러나 강연장에서 횡행하는 의사소통적 오해는 이런 식으로 변명할 수 없는 병통들로 들끓었고, 그것은 명백한 인재(人災)였다.
((중략))
내가 특별히 주목하려는 것은 학술행사나 강연에 참가하는 학인/지식인들의 행태다. 그리고 그 요점은, 결고 적지 않는 수의 문사들은 유독 학술적 대화에 만연한 오해와 오인 속에 덤으로 묻힌 채 스스로의 무능과 나태를 손쉽게 숨길 뿐 아니라, 아예 왜장치듯(쓸데없이 큰 소리로 마구 떠들다) 실없이 떠벌리기만 좋아한다는 것이다. 대화술에 대한 몽테뉴의 고전적 권면과는 달리, 강연자를 위협하는 정신의 힘을 만나는 쾌락(!)은 점점 드물어만 간다. 인문학적 대화는 그 속성상 꼼꼼한 준비와 섬세한 접근, 죽도록 경청하기와 아는 것을 다 말하지 않기, 그리고 동정적인 혜안과 합리적인 대화술이 필수적이기에 일회성의 극장식 만남에 따르는 한계는 만만치 않다. 우선 강연의 형식 자체가 비인문학적이기도 하려니와 강사를 대하는 문사-청자들의 태도에도 그 같은 실천적 지혜와 배려, 혹은 근기를 찾아보기 차마 어렵다. 발표할 문건을 미리 숙독하고 참가하는 이들조차 소수인데다, 그저 제시간에 자리를 지켜 주는 이들 마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일본 최고의 무사였던 미야모토 무사시가 그의 병법서에서 '차림새가 없는 듯이 차림새가 있는'이치를 거듭 강조한 것은 무사의 삶이란 곧 일생일대사의 승부의 현장이고, 상대를 놓치는 순간 곧 죽음은 임박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수없이 많은 학술행사를 겪으면서 뼈저리게 자탄하는 것은 우리 문사들의 세계에서는 긴박하고 위태로운 만남의 현장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무사들이 정직한(!) 피를 뿌리면서 스스로 무능을 자인하며 죽어가는 순간에도, 문사들은 좀비처럼 끝없이 부활한다. 자신의 실수와 더불어 죽을 수밖에 없는 냉혹한 무사들/스포츠인들의 세계와 달리, 문사들은 '(나쁜) 모방적 상호성의 메커니즘(R. 지라르) 속에서 오해의 잔치와 실수의 파티를 벌이면서도 단 한 사람 죽었다는 소식이 없다. 물론 칼과 펜의 이치 사이에 놓인 어떤 심연을 모른 체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말(어휘)'로 행복해지는 세상(R. 로티)'은 커녕 각자의 실력조차 제대로 점검할 수 없는 문사들의 제도화된 학술행사와 그 곤경을 더불어 성찰하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먼 이국에서 낭보를 띄워 주곤 했던 갈색폭격기 차범근의 활약을 기억한다. 적지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뛰고 피하고 부딪히고 넘어지면서 이룬 그의 정직한 성취를 기억한다. 적들을 기민하게 공대해야만 살아남는 승부의 현장 속에서 온몸으로 공대했던 그의 정직한 몸을 기억한다. 오직 실력만이 통하던 그 현장의 열기를 여태 생생히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