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0/01/19 14:51:18
Name 그러려니
Subject [일반] 어느 부부이야기11 - 도시락




반말체 글임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오빠 이거"
"뭐야 이게?"
"으응..;;"
어울리지 않게 좀 쑥스러워 한다.
"전엔 뭐.. 그냥 그랬는데.. 남자 둘이 밥 시켜 먹는다 생각하니까 좀 안됐어서.."
내 일 시작하고 1년여 동안 늘 여자 사람을 직원으로 하다 남자 사람을 처음 직원으로 두고 며칠 지난 어느 날 아침 출근 길,
점심을 쌌다며 꽤 묵직한 쇼핑백 하나를 들려준다.

"보온병에 국 든거 흔들어서 종이컵에 따라 먹어요"
"밥이 식어서 너무 차면 어떡하지"
"모자르지 않을라나"
볶음밥이든 샌드위치든 간식거리든 간단한 걸 들려 보낸적은 있어도 제대로 밥 국 반찬을 싸 줘 보내는 건 처음인지라 걱정이 많다.

아내 말대로 - 위아래로 말고 옆으로 둥글게;; - 보온병을 흔들어 종이컵에 따르니 뭔지 모를 정체불명의 국인데, 개운하고 담백하니 맛은 좋다.
단단하게 말은 계란말이에, 메추리알 소고기 장조림, 김치볶음, 오뎅볶음도 등장이다.


아무리 요즘 먹거리가 많고 다양해도 일터에서 시켜먹을 수 있는 끼니는 결국 거기서 거기인지라 그저 시간이 돼서, 혹은 그래도 배는 고프니,
뭘 먹어도 상관이 없고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는 판국에 또 뭘 시켜 먹나 고민 하나 덜어 주는 것도 고마운데 반찬에도 꽤 신경이 쓰여진 듯 보여 목이 메이는도다.


"진짜 맛있었어 ㅠㅠ"
"어떻게 그렇게 맛있니 ㅠㅠ"
"정말 너무 맛있었어 ㅠㅠ"
듣기 좋으란 소리가 아니라 정말 너무 맛있었다는 얘기를 절절히 해대니 아내도 신이 났는지 재잘재잘 또 늘어놓는다.
"갑자기 국물 뭐 할 게 없어서 그냥 멸치국물에다 계란 푼 거야. 계란국."
"김치는 싸주려고 보니까 좀 시잖아. 그래서 급하게 볶았어"
"응응 그래그래 잘 했어. 증말 맛있었어 진짜. 또 좀 싸 줘"
"힘들어서 일주일에 한번 밖에 못 싸"
세상에 1초도 고민을 안 하고; 참 야멸차기도 하지.
"ㅡㅡ;; 응 알았어 한번이라도 싸 줘(안싸준다고 할라 일단 깨갱이다)"

지지난 일요일에는 어머니 생신이 있어서 아내가 집에서 조촐하게 상을 차렸다.
원래 잔치 음식이란게 다음 날 남은 거 먹어 치우는 맛이 또 기가 막힌지라, 하루가 다 가기 전 또 비굴한; 목소리로 눈치를 살폈다.
"내일 점심 싸 줄거지?"
"그럼!!"
이미 국이니 반찬이니 다 돼 있는데 이 기회를 놓칠 수 있냐는 듯 아내가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어 대답한다.

다음 날 점심.
미역국, 잡채, 불고기, 전, 김치가 가지런히 담겨져 있는데,
얼씨구나 담겨있는 그릇 좀 보시게!!!
흔한 락앤락인가 뭔가 그 스타일이기는 한데, 큰 그릇 하나가 꼭 식판 모양으로 나뉘어져 있어 정말 '도시락' 기분이 물씬 풍겨 나온다.

"으헝, 그 그릇 뭐니? 꼭 식판같이! 거기다 먹으니까 더 맛있었어!!"
"그지그지, 커피를 사는데 어떤 거에 사은품으로 그게 두개 붙어 있더라구. 그래서 일부러 그거 샀어. 진짜 좋지 그지"
"으응!!ㅠㅠ 정말 맛있었어 씨 크흑 ㅠㅠ"
"퀘헤헤헤헥"
예상한 반응이 나왔는지 쾌재의 웃음을 또 걸쭉하게 쏟아낸다.

지난 주말에는 아내가 또 탈이 나서 토요일 일요일을 내리 누워 있다시피 했다.
여느 일요일처럼 좀 일찍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이틀 새 눈에 띄게 얼굴이 헤쓱해진 아내가 퀭한 눈으로 나를 반긴다.
"어지러워.."
"이틀을 못먹으니 당연히 어지럽지.."
참 고약하기도 하지.
한번 체하면 머리부터 아프기 시작해서 아무 것도 입에 넣지를 못하고 종일을 힘들어 하고, 하루만 그러면 오히려 다행, 이틀을 그렇게 보낼 때도 있다.
속은 진정 기미인 것 같아 먹고 싶다는 것을 사 먹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일은 점심 못 싸주겠다.."
"그래.. 다음에 싸 주면 되지.."
사람이 아파 넘어가는데 점심이 문제니.
그까짓거.
쿨럭.

어쨌거나 자기 입장에서는 싸주기로 한 날 못 싸줘서 내심 미안했는지,
퇴근해서 함께 TV를 보다가 슬쩍 말을 건넨다.
"점심 뭐 먹었어요?"
"응 도시락 시켜 먹었어. 네가 싸주는게 훨씬 맛있더라"
"페헤헷 뻥치시네!!!"
"이놈아.. 오빠한테 말이 그게 뭐냐.."
"왜! 존대했잖아 뻥 '치신'다고. 파하학"
쿨럭.

.
.
.



"보온병 흔들어 먹어요"
아침에 나갈 준비로 바쁜데 또 부엌 쪽에서 의기양양한 한마디가 들려 온다.
"어어 그래 흐흐. 벌써 쌌어?"
"응 오늘은 된장찌개야."
"응 그래그래"

종이컵으로 마시기 편하라고 파, 호박, 두부가  참 쫑쫑히도 썰어져 들어 있다.
가지런히 채썰어진 감자볶음에,
달달한 단무지 무침,
깨소금 팍팍 뿌려져 있는 계란찜,
직원 녀석 좋아한다고 했더니 다시 곁들여진 오뎅볶음까지,
또 맛있어서 눈물이 폭포를 이룬다.
어떻게 매일 좀 먹을 수 없나.


"돈 내놔"


맛도 맛이거니와 시켜먹는 일이 갈수록 고역이라,
언젠가 또 한번 일주일에 몇번 좀 더 싸달랬더니 대충 내뱉은 아내의 한마디가 귓가에 웽웽 울린다.
참 그녀다운 대답이로다.

하긴.
매일같이 아무거나, 반찬이나 국 없이도 뭐 먹을 수만 있게 싸주기만 해도 된다 그래도 극구 싫다 일주일에 한번이다 돈 내놔라 소리까지 하며 말문을 막는 걸 보니,
대충 뭐 하나만 보내는 것 보다는 한번이라도 제대로 정성 들여 싸줘 보내고 싶은 욕심이 아닐까 한다.
제대로 보내줘야 자기가 만족스럽고,
그래야 먹고난 뒤의 온갖 찬사도 기쁜 마음으로 여유롭게 받을 수 있겠지.

.
.
.



나는 나대로 일에 지치고,
아내는 아내대로 아이들 방학에 지칠 때 즈음.
혹은 10년 넘게 함께 해온 부부가 또 다시 서로에게 살짝 지칠때 즈음.
때 아닌 도시락 싸주고 먹기로
부모님과 함께 시작했던 결혼생활이었던지라 가져보지 못했던 신혼의 알콩달콩한 기분을 느끼는 요즘이다.

늘 함께라서 재미없다가도,
꼭 함께이기 때문에 이런 재미있는 일도 생기는,
이런게 부부인 거지 새삼 느끼는 요즈음이다.
이러니까 부부가 평생 함께 살 수 있는 거지 그런 생각 드는 요즈음이다.

.
.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달덩이
10/01/19 14:54
수정 아이콘
집에서 도시락 싸주시나 보네요..^^

저도 요즘 도시락 싸가지고 출근을 해서인지 남 이야기 같지 않네요. 밖에서 음식 먹기가 갈수록 고역이라 큰일입니다.
도시락때문에 돈 좀 절약할 줄 알았더니, 그 만큼 딴데다 쓰는게 고민이랄까요.. 하하하
살찐개미
10/01/19 15:06
수정 아이콘
훈훈하네요
10/01/19 15:14
수정 아이콘
오늘의 따스한 날씨처럼, 정말 따스하고 훈훈해요!
괜시리 제가 기분이 다 좋아지네요. 감사합니다^^
가만히 손을 잡
10/01/19 15:25
수정 아이콘
저도 도시락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대학교 가서도 어머님께 도시락 싸달라고 했다가 조인트를 당할 뻔 했죠.
어머니들 도시락 싸는데 스트레스가 심하시더라구요.
대학가서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저를 위해 도시락을 싸주던 후배에 훅~가서
가방만 도서관서 공부를 하고..
그러려니
10/01/19 15:54
수정 아이콘
가만히 손을 잡으면..님//
크흐흐..
그런 역사가 있으셨군요 흐흐
어머니나 아내나 음식 하는 것 보다는 뭘 할까 정하는데 더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더군요.

고등학생때 하루에 매일 두개 싸주신 어머니 도시락보다 지금 울 와이프 도시락이 훨씬 더 좋네요;;
어머니는 맨날 장아찌 멸치 콩장 이런 제가 별로 안좋아하는 류만 싸주셨던 지라;;
어릴때 느껴보지 못한 도시락의 기쁨을 이제 와서 맛봅니다.
엄마 미안해요!! 그래도 그게 사실이에요!!!
욕쟁이 울 어머니 혹 이거 보신다면 바로 '미친XX 지X하네' 제대로 날리시겠네요 흐흐
고요함
10/01/19 16:52
수정 아이콘
부럽군요... ^^
그 흔하디 흔한... 식당 밥이라도... 한식으로 먹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습니다...

뼈다귀 해장국 먹고 싶어라 ㅜ.ㅜ
예전에... 한국 갔을 때 친구들이 머 먹고 싶냐고.. 물어봤을 때..
뼈다귀 해장국을 3일 연속 노래를 부른 적이 있지요... -.-
세이시로
10/01/19 17:39
수정 아이콘
부...럽습니다!
글쓰신 분의 어느 부부이야기 시리즈를 몇 차례 본 거 같았는데 오늘 이 글을 보고서는 순간 '어...신혼이셨나?' 했습니다.
덕분에 제대로 1편부터 다 봤습니다. 하하.
결혼하고 싶어지는 느낌이 절로 들게 만드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면서 한번씩 되돌아보고 싶은, 고마운 글들이군요. ^^
건강이제일
10/01/19 18:22
수정 아이콘
하하. 멋지네요.
전 여자지만. 요리솜씨가 젬병이라. 부인되시는 분이 부럽기도 하고 멋져보이기도 하고 그러네요^^

앞으로도.
알콩달콩 예쁘게, 행복하시길 바랄께요~~^^
10/01/19 20:07
수정 아이콘
사실 그러려니님의 글을 이번에 처음 읽어봤는데 앞편부터 읽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드네요 크크
저도 빨리 결혼해서 그러려니님처럼 알콩달콩 살고 싶습니다 ^^
10/01/19 21:25
수정 아이콘
글에서 행복이 느껴지네요 참 부럽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흑흑...
10/01/19 21:41
수정 아이콘
훈훈합니다. 부럽네요 ^^
10/01/19 22:38
수정 아이콘
결혼 10년차인데 아직도 아내분께서 오빠라고 공대하시나봐요. 사이가 어지간히 좋지 않으면 불가능한...
그러려니
10/01/20 00:31
수정 아이콘
OrBef2님//
'오빠'는 제가 고집하는 호칭이고..
간간히 존대를 하긴 합니다만 결코 공손한 느낌은 아닙..;;
사이야 뭐.. 흐흐*-__-*
10/01/20 01:13
수정 아이콘
아우 좋습니다.
마치강물처럼
10/01/20 13:13
수정 아이콘
그러려니님// 정말 부럽습니다.
저는 집사람이 '요리만' 빼고 다 잘하는지라 두어번 도시락 싸주겠다는거 힘든데 안싸줘도 된다고 했더니 삐쳐버렸습니다.
덕분에 아침이랑 간간히 집에서 먹는 저녁은 제 담당이 되 버리긴 했지만...
전 행복합니다. 뭐 그렇다구요.. 아 내 눈에서 흐르는건 땀인가 눈물인가 크흑..
그러려니
10/01/20 15:17
수정 아이콘
말씀 남겨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9007 [일반] 예비 서울시장 후보들? [16] 굿바이레이캬4175 10/01/20 4175 0
19005 [일반] [인증해피]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96 맥스 이야기 입니다. [18] 해피5064 10/01/20 5064 0
19004 [일반] 최근 다운로드 컨텐츠에 대한 기사입니다... [21] 알렉-손사래4420 10/01/19 4420 0
19002 [일반] 초성체도 안되는데... 피지알 비하는 되는 건지... [68] 노력, 내 유일6191 10/01/19 6191 2
19001 [일반] [WOW] 영웅되고 2천골을 냈습니다. [29] 베컴4856 10/01/19 4856 0
18999 [일반] 스포츠 중계방송시 간접광고가 허용되었다는 반가운(?)소식입니다. [12] Hypocrite.12414.5721 10/01/19 5721 0
18998 [일반] [EPL] 22R Review [20] Charles3514 10/01/19 3514 1
18997 [일반] 어느 부부이야기11 - 도시락 [16] 그러려니3516 10/01/19 3516 6
18996 [일반] 5·18 30주년 기념 말러의 ‘부활’ 서울공연 퇴짜 ‘유감’ [5] Crom3882 10/01/19 3882 0
18995 [일반] 6.2 지방선거 투표율 높이기를 위한 방법? [14] 메모광3438 10/01/19 3438 0
18993 [일반] 도대체... 미생지신은 무엇인가?? [21] Kint4878 10/01/19 4878 5
18992 [일반] 2002 부산 아시안게임 남자농구 결승전 중국 vs 대한민국 [32] Hypocrite.12414.6327 10/01/19 6327 1
18990 [일반] [야구] 이대호 연봉계약 체결했군요 [25] 멀면 벙커링4374 10/01/19 4374 0
18989 [일반] 그린데이 내한공연 후기~ 예이~!! [19] 여자예비역3757 10/01/19 3757 0
18986 [일반] [영화] 아저씨는 가슴에 불을 가졌나요? - '더 로드 (The Road, 2010)' [7] DEICIDE4482 10/01/19 4482 0
18985 [일반] 호화스러운 아방궁과 대조되는 실용주의적 청사 [22] 유유히6532 10/01/19 6532 7
18984 [일반] 아웅의 세상사는 이야기 1월 19일자 단신. [4] 아웅3313 10/01/19 3313 0
18983 [일반] SM "윤서인 작가, 사과 없어 법적 대응할 것" [110] GrayEnemy9654 10/01/19 9654 0
18982 [일반] 축구 국가대표 친선경기 vs 핀란드 ! [29] Bikini5459 10/01/18 5459 0
18981 [일반] X존 올해도 설치 하는군요... [21] 자갈치6818 10/01/18 6818 1
18979 [일반] 아바타 월드와이드 16억달러 돌파. 타이타닉과 2억달러 차이 [40] 이블승엽5667 10/01/18 5667 0
18978 [일반] 아이유... 참 노래 잘하지 않나요? [41] ThinkD4renT6567 10/01/18 6567 0
18977 [일반] 진실은 무엇인가 - 굿네이버스 및 타 단체에 관하여 [91] JHfam13264 10/01/18 13264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