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돌아왔다."
- 여러분의 주인으로부터
1998년. 하이텔 시리얼 게시판에 드래곤 라자를 연재하던 당시,
수많은 이들이 밤잠을 잊고 '오늘은 드라 안 올라오느냐' 며 무작정 기다리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잠들던 시절,
보다 못해 작가가 직접 글을 올려 '오늘은 안 올라오니 그만 주무시라' 고 말해도, '그래도 혹시 모른다(?)'며 꾸벅꾸벅 졸며 밤을 새우던 수많은 좀비들.
이영도. 사람들이 그에게 붙여 준 별명은 드라좀비를 거느린 강령술사, 네크로맨서였습니다.
이영도 작가님의 신작이 나왔습니다. 아실 만한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PGR에 글이 없어 아직 모르고 계신 분들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국 환상 문학 단편집 2 -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 에 수록된 단편 '샹타이의 광부들'은 지난번 '네이버 책'에 소개되었던 '에소릴의 드래곤' 세계관을 따르고 있습니다. 무적의 무사 더스번 칼파랑과 사란디테 양이 재등장합니다.
http://blog.aladdin.co.kr/editors/3087975
(출판사 측에서 공개한 4분의 1분량의 맛보기. 참 감질납니다.)
샹파이 난쟁이들이 조피크 산에 터널을 뚫기로 합니다. 이유는 세계 최장거리 터널을 만들기 위해서죠. 토목공사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을 지닌 난쟁이들에게 세계 최장의 터널을 뚫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명예이고 자존심일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터널을 뚫고 보니 카로당 터널에 모자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아쉬워하고 끝? 물론 아닙니다. 난쟁이들은 터널을 늘려가기 시작합니다. 산을 관통하는 부분부터 지붕과 벽을 만들어 터널을 이어가는 것이죠. 그리고 신기록 작성을 위해 가능한한 길게 지을 생각입니다. 난쟁이들의 앞뒤 안가리는 공사 때문에 왕국이 단절될 위기에 처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고요? 스포일러는 자제하겠습니다.
'국토를 단절시키는 어리석은 토목 대공사' 에서, 어떤 특정한 인물과 특정한 공사를 연관짓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흔히들 난쟁이 하면 떠올리는 고블린의 외모와도 닮았으니 이보다 더 떠올리기 쉽기도 힘들겠군요. 이번 이영도 작가님의 신작을 보면서, 그간 그의 환상소설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사회 비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에서 보여주었던 세포 하나하나까지 박리하듯, 철저하게 인간의 삶과 철학과 태도와 관계의 본질을 탐구하던 구도자 같던 모습도 좋았지만, 이렇게 동화적 세계관 속에서 시사성 짙은 이슈를 던지며 풍자의 화살을 쏘아보내는 그의 능력 또한 보기 좋습니다. '환상문학은 현실과 유리된 헛된 신기루에 불과하다' 고 누가 그랬던가요. 이보다 더 통렬하고 이보다 더 명쾌하게 현실과 맞닿을 수 있는 소설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Q. <샹파이의 광부들>은 어떤 소설입니까?
A. <샹파이의 광부들>은 말이나 종이 위가 아닌 자연 그 위에 얹혀질 수밖에 없는 토목 공사에서 자기 확신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는 글입니다.
- 인터파크 작가 인터뷰 중 -
열린 해석을 좋아하는 작가님답게, 역시 글쓴이가 나서서 소설을 규정하는 것을 싫어하시기에 '일지도 모르는'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위의 말만큼 이 소설을 한마디로 정리하는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영도 작가님의 최근작 '에소릴의 드래곤'과 '샹파이의 광부들' 에서는 '눈물 / 피를 마시는 새'에서 극한으로 치달았던 '환상적 현실성'이 조금 떨어지며, 마치 꿈속 나라의 동화를 읽는 듯한 기분을 줍니다. '환상적 현실성'이란, 제 멋대로 규정한 개념으로, 지어낸 환상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펼쳐지는 가감없는 현실의 한계와 잔인함을 말합니다. 나가들이 케이건에게 저지른 만행과 케이건의 복수, 케이건이 학살하는 두억시니, 시우쇠에 의해 학살당하는 나가들, 2차 대확장 전쟁에서 나가들이 보여주는 잔인함, 발케네에서 레콘에 의해 학살당하는 인간들, 엔거 평원에서의 학살 등 피보라 자욱한 장면들이나, 륜의 비극, 아트밀의 비극, 사라말의 비극, 그리미의 계획과 치천제의 좌절 등 개개인의 슬픈 이야기까지, '마새' 시리즈는 그 제목만큼이나 눈물과 피가 배어나오는 잔혹한 소설입니다. 반면 '에소릴'과 '샹파이' 에서는 그런 현실성이 적지 않게 조각되고 대신 동화적 환상이 강조됩니다. 곡괭이를 짊어지고 다 박살내고 다니는 먼치킨 캐릭터인 더스번 칼파랑에게서 고뇌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탈출하는 대신 드래곤을 열심히 설득해 보겠다는 나리메 공주의 태도 역시 현실적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이야기는 해피 엔딩이며 숨은 비극이나 미해결되는 의문, 과제는 없습니다. 그전의 이야기들에 비해 비교적 해석이 쉽고 일방향으로 수렴합니다. 동화적인 플롯이 엿보입니다.
(아, 물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번 샹파이의 광부들은 철학적이거나 추상적인 비판이 아닌, 시사적 현실을 꼬집는 이영도 작가님의 첫 소설입니다.
다만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에 수록된 다른 환상소설들은 퀄리티가 비교적 떨어지는 듯 합니다. (물론 개인적 기준입니다)
너무 미식만을 편식해서인지, 좋은 음식까지 깐깐하게 맛보게 된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