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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1/14 21:55
재밌네요. 이런 글 많이 올려주세요~ ^^
소설,영화,만화,TV 로 여태껏 봐왔던 캐릭터중에서 제가 처음으로 깊은 감정을 가지고 지켜봤던 캐릭터는 누구인가 잠시 고민해봤는데 , 저는 드래곤라자의 '후치 네드발'이네요. 울면서 웃는 얼굴로 이루릴과 인사하던 후치의 모습과 '나의 마법의 가을은 이제 끝났어요'라는 그 말 한마디를 듣는순간 처음으로 공허함을 느꼈던거같습니다. (중1때였네요.) '아 이제 후치의 이야기는 끝인거구나' 이 사실을 깨닫고 굉장히 1주일간 우울해했었죠. 후치의 마법의 가을이 끝나는 순간, 저의 마법의 가을도 동시에 끝났었습니다.(그 때 읽었던 때가 마침 가을이라..)
09/11/14 21:57
슈슈님// 아 갑자기 레알 소름 돋네요. 저도 그 장면이 기억이 납니다. 퓨처워커에서 후치가 안나와서 읽는 맛이 안났었고요. 한 밤중에 드래곤 라자 읽다가 엄마가 불끄고 빨리 자라 그래서 지금 후치가 오크한테 붙들려가 귀가 잘렸는데 어떻게 자냐고 화를 냈던 기억이 나네요.^^;;
09/11/14 22:12
그런데 이러한 질문이 잊고 있는(혹은 이미 전제하는) 것은 존재하는 대상에게 감정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점입니다. 이 점이 해명되지 않는다면 구태여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게 감정을 갖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 별개의 문제로 놓아둘 이유는 사라지겠죠. '왜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가'가 '왜 이러한 의문을 갖게 될까'의 답이 될 것입니다. 그 대상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사실 매우 부차적인 부분에 불과하죠.
물론 이론이란 말 놀이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09/11/14 22:15
예전에 에반게리온 보고 "이카리 신지"가 중, 고딩 시절 제 성격이랑 비슷한 면이 있어서 꽤나 감정이입 했었는데
'엔드 오브 에바'를 보고는 18!!! 내가 저런 개망나니 같은 놈이었나??? 싶은 생각에 자책하게 되더군요.....ㅡ,.ㅡ (이건 단순히 덕후여서 그런가??)
09/11/14 22:23
Ms. Anscombe님// 사실 그 감정에 대한 부분은 쓰다가 너무 지리해질까봐 빼버렸습니다. 리플로 간단히 설명 드리면
위의 논의와 관련된 철학자들이 견지하고 있는 감정이란, 어떤 명제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 대상에 대한 어떤 평가가 뒤따라야지만 감정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대상없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또 그 대상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있을 때 사랑한다는 감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무섭다고 말할 때, 지금 내 눈앞에 코브라가 한마리 있고 코브라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가지고 있어야 공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대상이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지만 감정이 있을 수 있는 것이죠. 이들의 이론상으로는 대상이 없다고 믿으며 감정을 느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감각 같은 경우에는 대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배고픔은 대상이 없어도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은 어떤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믿음과 그 대상이 나에게 어떤 평가를 불러일으키는지 평가적 믿음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뱀을 무서워 하지만 친구는 뱀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면 둘의 평가적 믿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론을 감정에 대한 좁은 인지주의라고 하고요. 물론 감정에 대한 다른 이론들도 많습니다.^^
09/11/14 22:24
뭐랄까요? 사실 게임이나 만화 캐릭터에 감정을 품는다고 이야기 하기 보다는
우리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에 대해 감정을 품는 것이겠죠. 이런 모습은 고대부터 전해 져 내려온 인간의 습성이라서 뭐라고 이야기하긴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설을 하나 내린다면 애초의 이야기의 목적이 교육과 유희라면 감정 이입이 되는 편이 훨씬 그 기능면에서도 좋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그렇게 하도록 진화되어 왔겠죠.
09/11/14 22:40
전 이게 특정 대상에 대한 감정이입이라기보다는, 상징적 기표와 관련된 일종의 파블로프의 개... 같은 생리적 반응이지 않나, 그리고 우리가 '감정이입'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과정이 연속되고 복잡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왔습니다만(개인적인 경험이 있기도 하구요)... 굳이 이야기하자면 월튼의 말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레드포드의 말은 그 생리적 반응이 우리가 인식한 상태에서 용납할 정도로 당연한 것인가, 를 묻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레드포드라는 사람에게 개인적 감정이 있다거나, 그 사람의 책을 읽고 짜증이 났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에 일부러 개기는 것은 아닙니다. 혹은 오늘 봤던 영화에서 주인공의 키가 작다고 놀리는 장면에서 모든 관객이 '풋'라고 웃어서 스스로 루저라는 계급적 한계에 부딪힘을 느껴 분노했다거나, 또한 오늘 지인을 만났을 때 마신 홍차가 무려 5천원이어서 가슴이 아팠다거나, 외출할 때면 어김없이 반갑게 맞아주는 대순진리회 돌격대원들에게 사랑을 느껴서도 아님을 밝혀두겠습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누가...
09/11/14 22:57
swordfish님// 사실좀괜찮은밑힌자님//
아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이 허구를 즐기는 것은 오래전 부터 내려온 전통이기도 하고, 어릴 적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아오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허구의 역설이 무력화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레드포드가 그런 질문을 상정해 놓고 이런 식으로 대답합니다. 다른 것에서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데, 왜 허구에 대해서는 불필요한 것인가. 그것에 대해 질문하면 안되는가? 그냥 물어보고 싶다는데 어쩔 수 있나요?^^;; KnightBaran.K님// 논 픽션이 실제로 있는 것이고 픽션은 없는 것이죠. 설마 이 것을 물어보신 것은 아닐것 같은데.. 죄송
09/11/14 23:06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하는 건가요..?^^; 그냥 짧은 제 생각으로는, 영화나 게임 같은 작품 속의 인물들에게 자신을 투영시키는 감정이입은 월튼의 믿는 체하기 와 가장 비슷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도, 유사감정이라든가 허구라든가 하는 내용들에는 이상하게도 선뜻 동의하기가 힘드네요. 힘들다기보다는 그냥 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구차하긴 하지만, 그 감정들이 전부 다 거짓이라고 해버리면 왠지 너무 쓸쓸할 것 같아서요:)
09/11/14 23:43
lost myself님// 어떤 논의든 특정한 전제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전제를 갖고 있다는 것'이 논의의 불건전함을 함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밝혀져야하는 부분'들이 있음을 시사할 뿐이지요. 만약에 제가 언급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어떤 대상'의 수준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이 논의는 그저 '우리는 왜 감정을 갖는가'라는 고전적인 질문을 변형한 것에 불과합니다.(물론 '의미'는 있겠죠) 제가 언급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은 그 대상의 '실제로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언급하신 '대상이 있어야 하고'는 그저 '감정은 무언가를 향해야 한다'를 의미할 뿐 그것의 실재성을 논하지는 않습니다.
이 부분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게 감정을 갖는가'를 논할 때 '존재함'이 무엇인가에 대한 입장이 모호하다면 그 문제제기 자체도 모호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나는 너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아프다'고 할 때, 나의 마음 아픔의 대상은 '너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의 사랑'이라는 것은 존재할까요? 그 어떤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할까요? 그것을 '네가 숨을 (하루 기준)1742번째로 들이마쉴 때의 너의 상태'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조차도 모호하지만)이 아니라면 그것이 코브라나 뱀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쉽사리 얘기할 수 있을지 어렵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을 쉽게 '존재한다'고 말하게 된다면, 대체 '셜록 홈즈'나 '햄릿'을 왜 존재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지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지겠죠.(셜롬 홈즈와 햄릿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역사적으로 '실존'했음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저 감정을 가질 수 있는 '대상'으로써 존재한다고 말할 뿐입니다) 혹은 '나는 가다머의 지평융합론을 보고 감동하였다'라는 문장에서 지평융합론이 감동의 대상이라면 지평융합론이 어떤 식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게 됩니다. 이를 타개하는 하나의 방법은 그런 대상들을 위에 언급한 '1742번째..'의 경우처럼 우리가 (별 생각없이) 존재한다고 단언하는 형태(대개 물리적 형태)로 환원시키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형태로 환원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환원은 형식을 바꾸는 수준을 넘어서서 의미 자체를 변화시켜버립니다. '사랑해, 자기야'라고 말하는 연인에게 '사랑한다는 건 너의 동공 0.5인치 이상 커짐을 기준으로 하니, 아니면 0.6인치 이상 커짐을 기준으로하니?'라고 묻는 사람과 사랑하는 건 불가능할 것입니다. 대상이란 결코 그런 식의 존재를 요구하지도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존재하다'는 다양한 층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쉽사리 하나의 잣대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원자 집합체 수준으로 환원시키려는 것이 아니라면 아픔, 비판, 지배와 같은 것들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최소한 상식적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현실적 대응물을 갖기도 하지만(종종 대응하지 않기도 합니다, 예컨대 '상상'은 존재하지만 상상에 대한 현실적 대응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언어적 차원(그가 갖고 있는 개념틀)에 있습니다. 이 틀 속에서 통용되느냐의 여부가 존재-비존재의 기준일테고, 그러한 한에서는 셜록 홈즈를 읽고 감정을 갖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 논의는 두 가지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감정'을 주로 삼고 존재의 문제를 껴 넣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정은 대상을 갖는다'의 수준의 문제라면 여기에서 존재의 문제는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1742번째..' 식의 것만 존재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래서 '왜 감정을 갖지?'라는 문제와 동일합니다. 다른 하나는 '존재'를 주로 삼고 감정의 문제를 껴 넣는 것입니다. 여기서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있다'와 동일한 지위를 갖습니다. 즉, 하나의 '예시'일 따름이라는 것이죠. 핵심은 '어떠한 것을 '존재한다'고 말할 것인가'가 될 것입니다. 예컨대, '셜록 홈즈는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는 어떻게 '셜록 홈즈는 베이커가에 살았다'가 참이라고 할 수 있는가'와 같은 문제가 그러합니다. 따라서 이는 인간의 감정 문제와는 무관합니다.(하나의 예시일 수는 있습니다) 제 생각엔 예로 드신 주장들은 전자의 입장에 있는 듯 하고, 그래서 '왜 감정을 갖지?'의 변형된 형태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일종의 언어의 함정에 빠져있죠) 사실 이 질문은 결코 무의미하지도 않을 뿐더러 매우 중요하기까지 하지만, '왜 감정을 갖지?'라는 말을 '왜 존재하지 않는데 감정을 갖지?'라는 말처럼 보이게 하려면 이런 말 정도는 들어야 하는 것이 철학의 원죄일 듯 하네요..(물론 lost myself님더러 해명하라는 뜻은 아니라는..^^)
09/11/14 23:45
lost myself님// 아까 댓글을 쓰면서 생각이 정리가 안되서 안쓴 부분인데 이젠 정리가 되어 씁니다.
사실 우리가 이야기에 환장하는 건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인식 세계가 이야기의 세계와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세계 역시 이야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실례로 현실 사회에서는 선과 악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과 악을 명확하게 나누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 세계에서는 선과 악은 명확히 나누어져 있습니다. (아닌 것도 있지만 그런건 이해하기 힘들죠.) 그리고 현실에서는 선하다고 해서 흥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악하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성공과 선악은 전혀 관계가 없는 렌덤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에서는 선이 성공합니다. 사실 선의 성공은 많은 사람들이 열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현실에 이상이 닮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야기의 세계는 우리와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이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인공에 감정을 이입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주인공은 그 세계의 주인공의 대리인입니다. 실재 우리는 우리의 인식체계와 너무나 닮고 그리고 이상도 있는 이 세계를 실재 겪을 가능성이 너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런 매력적인 세계에서 자신을 대리할 수 있는 존재로 주인공을 선택하게 된겁니다. 즉 대리인을 통해서 느끼는 것이긴 하지만 실재 우리의 감정인 것이죠.
09/11/15 00:03
Ms. Anscombe님// 크크크크 저 보고 해명하지 말라고 하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 문제를 찝찝하지 않게 넘어갈 수 있을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적어주신 글을 정독하면서 고민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가 생각하는 허구의 정의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까 '존재'하지 않는 거야라고 가정해버려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군요. '존재하지 않음'을 상정하고 있지만 어쨌든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써놓고도 참 말이 괴상망칙하다는 생각이 ㅡ0ㅡ;;;
09/11/15 00:06
swordfish님// 밑에 댓글을 쭈욱 읽어보면서 이 말이 없길래 한 번 써볼까 했는데, 마지막 댓글에 멋지게 달아주셨네요^^;;
영화나 드라마 자체의 모든 캐릭터들은(단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매우 이상적이거나 그 정반대에 서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 중 누군가가 매우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사람 혹은 "매우" 끔찍하게 증오하는, 존재하지 않지만 두려워하는 귀신같은 사람 말입니다.
09/11/15 00:14
swordfish님//오.... swordfish님의 글을 읽다보니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주인공에 대한 감정이입은 swordfish님이 설명해 주신 방식으로 감정이입하게 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지금 막 머리를 굴려 보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상적이지 않은 세계를 담고 있는 픽션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죠. 악이 승리하는 픽션은 다른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걸까요? 그리고 픽션에 대해 그러한 일반화가 가능할까요?
09/11/15 00:15
lost myself님// 우리가 '허구'라는 말을 쓸 때는 '존재하나 실존하지는 않는'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예컨대, 셜록 홈즈는 존재하지만(그리고 허구이지만), '키루하고수고니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는 '허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냥 '너 뭐냐?'일 뿐이죠.
'감정은 대상을 가져야한다'(혹은 대상을 향해야한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대상은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이를 '존재'(특히 실존 수준)의 문제로 여기는 것은 심각한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셜록 홈즈에 대해 감정을 갖는 사람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지만, '키루하고수고니차'에 대해 감정을 갖는 사람은 (제목에서 언급된 방식대로) 왜 그런지 의문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이 차이는 셜록 홈즈는 존재하는데, 키루하고수고니차는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협소한 대상 개념에서 본다면 둘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겠죠. 따라서 문제는 존재하느냐가 아닌 다른 곳에 있습니다. 뻔한 대답이긴 합니다만, 중요한 건 '대상의 존재여부'가 아니라 '의미 여부'에 있습니다. 예컨대, '1768년에 태어나 프랑스 황제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해서 그 말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나폴레옹을 '1768년에 태어나 프랑스 황제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이상하지 않았는데, 그가 사실은 1769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그 감정은 1768년에 태어나 프랑스 황제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에 대한 것이었고,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감정은 대단히 괴상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괴상할 것입니다. 지칭하는 대상의 존재여부와 의미여부는 다릅니다.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의미있을 수 있고, 의미없으면서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감정이 의미적 문제라는 것, 최소한 '의미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저러한 문제제기 자체가 괴상해 보인다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즉,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감정'이 괴상할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그 과정을 '설명'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물론 해묵은 것이라도, 문제제기란 우리에게 늘 풍부한 사고로 향할 '길'을 제시해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지만, 그런 해묵은 문제제기를 '해묵었어'라고 말함으로써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 또한 철학의 특성일 것입니다.
09/11/15 00:33
lost myself님// 사실 그 경우도 사실상 그 틀은 다르지 않습니다. 일단 그 경우도 우리의 인식체계와 그 세계는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 경우에는 두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은 醜美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낀 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악의 승리가 반드시 악의 승리를 바래서 좋아하는게 아니라는 점 입니다. 중세 수동승들이 빈번히 지옥을 그렸다는 점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그림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이 좀더 돋보일 수 있었던 겁니다. 바로 그원리라고 생각시면 됩니다. 아무튼 인간의 인식 체계 속의 세상은 사실 현실 세계와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이야기 속 세계와 많이 비슷합니다. 즉 가공이 더 현실적이고, 현실이 더 가짜 같은게 바로 뉴스는 안보면서 드라마에 환장하는 인간이 훨씬 많은 이유 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절대 이야기의 감정이 가공 감정이 아닌 이유이기도 합니다.
09/11/15 00:43
저는 허구의 존재에 대해 감정을 갖는 것이 학습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허구의 존재라니, 뭔가 재밌군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런거죠. 어릴 적 우리는 주변 환경에서 여러가지 것들을 학습하게 됩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기고, 자신을 관리하고 챙기고, 영향을 주는 사람이 바로 부모입니다. 이들 부모의 모습과 행동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학습한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영화는 그 영화만의 공통적인 특징과 분위기들이 있죠. 그것을 보며 어떤 반응을 하는, 눈물을 흘리고 슬픈 표정을 짓는 부모를 보며 아이들은 슬픈 영화를 볼땐 그런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학습하는 것입니다. 이는 본능적인 감정, 이를테면 간지러움을 태우면 웃는다던지 어딘가를 맞으면 아파한다던지 하는 생리적인 반응을 제외하고는 그 외 모든 감정들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패턴이라고 봅니다. 만약 감정이 학습되지 않은 인간 본연의 무엇이라고 한다면 슬픈 영화라는 것을 보았을때 모든 사람들의 감정은 슬퍼야만 합니다. 하지만 어떤 슬픈 영화를 보았을때 그것에 대해 인간들은 여러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매우 슬픈 감정을 느낀 사람도 있을테고, 반대로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가 감정이라 느끼는 것은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소위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라 불리우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정말로 비정상이라서 감정을 못 느끼는 걸까요. 어떤 감정적 분비가 되지 않는 것이 비정상이라 볼 수 있을까요. 결론은 존재와 비존재를 떠나서 우리는 존재(비존재)하는 어떤 상황에서 그러한 감정을 느끼도록 학습된 것이 아닐까 하는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09/11/15 01:07
Ms. Anscombe님// 네 설명해주신 그대로 인 것 같습니다. 존재하지만 실존하지 않는다.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이냐를 물음으로써 문제제기 자체를 무마 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swordfish님// 음 그런 식으로 설명이 가능하겠군요. 인식세계가 이야기의 세계와 닮아있다. 이 명제도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해석하는 것 그 해석된 세계는 어떤 모습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심리학적인 지식도 더 필요할 것 같고 앞으로 더 고민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Ms. Anscombe님이 질문이 성립불가능함을 보여주셨다면 swordfish님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쪽으로 알려주신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legend님// 네 그렇죠. 어느 글에서 읽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모든 인류 종족 문화를 통틀어서 공통되는 감정의 표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심지어 웃는 것도 문화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고 합니다.(아마 넬슨 굿맨의 책이 었던듯...) 그렇듯이 legend님이 설명해 주신대로 감정은 학습되고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레드포드의 지적은 조금 다른 부분입니다. 바로 그 문화적으로 구성되고 학습되는 감정이라는 것이 대부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발생한다. 그런데 허구는 그렇지 않다. 왜 이것만 그런 것인가? 이런 식으로 역설이라고 문제제기 하고 잇는 것 같습니다.
09/11/15 01:52
유사감정론이라...꽤 예전부터 저도 나름 생각해본 내용을 명확히 정의를 한 느낌이네요.하하
본문 내용 좀 퍼갈께요.(혹시 안된다고 하시면 삭제하겠습니다 ㅠㅠ)
09/11/15 02:07
AyuAyu님// 아 저 퍼가시는 건 괜찮은데요. 저건 제 생각이 아니고 레드포드와 월튼의 이론이라서요. 제가 읽고 쓴 논문 제목을 적어드릴게요. 그걸 참고문헌으로 적으시는 편이 나을 것 같네요.
"허구에 의해 환기되는 감정의 합리성 문제" - 오종환 "허구에 대한 감정과 래드포드의 퍼즐" - 김세화 "How can we be moned by the fate of Anna Karenina?" - Colin Radford "Fearing Fictions" - Kendall L. Wa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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