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클라시코(El Clasico).
축구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모를 수 없는 용어입니다. 엘 클라시코는 바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최대 라이벌이자 슈퍼스타가 즐비한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경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축구광은 아니지만 2002년 월드컵 이후 우리나라 선수들이 유럽 진출이 잦아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두게 되었고 박지성 선수가 있었던 영국의 프리미어리그는 아니지만 메시, 호나우두 등 그 이름만으로도 대단한 슈퍼스타들이 뛰는 바르샤와 레알 경기는 하이라이트라도 꼭 챙겨보게 되었습니다.
엘 클라시코는 1902년 5월 13일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엘 클라시코의 역사를 살펴보면 단순히 축구 경기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엘 클라시코 역사 중에 눈여겨볼 만한 것은 세 가지 사건이 있는데요..
먼저 1943년의 엘 클라시코입니다. 바르샤와 레알의 보면 바르샤가 앞선 시대도 있었고 레알이 앞선 시대도 있었고 물론 비슷한 실력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1943년에는 바르샤가 레알을 압도하는 때였습니다. 아니 그런데 리그 10위에 허덕이는 레알이 바르샤를 무려 11-1로 이기는 대이변이 속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과에는 그럴만한 속사정이 있었습니다. 엘 클라시코가 시작되기 전에 스페인 국가안보부장이 바르샤 탈의실에 들어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들이 마음 놓고 축구에서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는 것도 다 우리 정권이 그것을 눈감아주기 때문이다!”
당시는 프랑코 독재시절.. 정부의 협박에 겁을 먹은 바르샤 선수들은 제대로 경기를 뛸 수가 없었고 결국 11-1이라는 결과가 나와버렸습니다. 이 경기는 큰 파장을 일으켰고 속사정이 밝혀지자 결국 스페인 축구 협회에서는 이날의 엘 클라시코는 무효로 선정하게 됩니다.
엘 클라시코의 역사의 두 번째 흥미로운 사건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영입 문제입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바르샤는 1945~1953년 사이에 5번이나 리그 우승을 하면 날라댕겼지만 레알은 같은 기간동안 한 번도 우승을 못해 똥줄이 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레알은 별난 출신(그는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인이자 이탈리아계 스페인인입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스페인 등 3개국의 국가대표를 뛰기도 했습니다.)이지만 축구 실력만큼은 당시 세계 최정상급에 속했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영입하여 리그 우승을 노리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레알의 앞길을 바르샤가 막아버렸습니다. 콜롬비아 리그에 있었던 스테파노가 이미 바르샤와 이적에 합의를 해 버린 것입니다. 이에 빡돈 레알은 이적 합의를 무산시키기 위해 스테파노에 공을 많이 들였고 이에 대해 바르샤는 엄청난 불만을 표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부의 힘이 작용하기 시작하자 스테파노는 그의 출신답게 요상한 계약을 하게 됩니다. 처음 4년 동안 1시즌 씩 바르샤와 레알을 번걸아가며 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스테파노는 어찌된 영문인지 바르샤에서 뛸 때는 제 기량대로 뛰지 않고 레알에서 뛸 때는 똥줄 타도록 뛰어 이후 레알이 5시즌 연속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최대 기여자가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바르샤 팬들은 엄청난 분노가 쌓이게 되죠.
엘 클라시코 역사 중에 눈에 띄는 세 번째 이야기는 루이스 피구에 관한 것입니다. 2002년 포르투갈 경기에서 등장했던 피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루이스 피구는 1995년부터 2000년까지 바르샤 소속에 주장까지 겸비하고 있어서 인기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2000년에 레알로 이적을 하게 되고 바르샤 팬들은 피구를 싫어하게 됩니다.
뭐 자기내 팀의 인기있는 선수가 라이벌 팀으로 이적했으니 싫어하고 미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02년 그의 두 번째 엘 클라시코에서의 바르샤 팬들의 반응은 축구경기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과격했습니다. 피구가 엘 클라시코에서 코너킥을 차려고 하자 바르샤 축구팬들은 유리병, 당구공, 잭나이프 등 위험한 물건을 포함한 온갖 잡것들을 그라운드에 던지기 시작했고 심지어 돼지머리까지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경기가 위험해지자 15분간 경기가 중단되었고 이후 바르샤는 4000유로의 벌금을 물게 됩니다.
(돼지머리)
위의 세 가지 사건만으로도 엘 클라시코가 단순히 지역 라이벌 경기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레알이 이기기 위해 정부의 개입과 압박이 들어오고 선수 이적이 무슨 매국노가 된양 대하는 바르샤 축구 팬들을 보면서 이는 축구 경기를 넘어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역감정이야 많이 들어봤고 그 지역감정이 스포츠를 통해 표출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엘 클라시코는 여타 다른 나라의 지역 라이벌 경기들과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레알 마드리드는 스페인 역사에서 권력의 상징이자 중심의 역할을 했던 카스티야의 심장이고 바르샤는 바스크와 더불어 아직도 스페인에서 분리독립을 외치고 있는 카탈리야의 가슴이기 때문입니다.
2010년에 카탈루냐의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에 또 다른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습니다. 모인 숫자는 무려 110만명입니다. 또한 2012년 7월 5일에 카탈루냐여론연구소에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카탈루냐 지역민 중 무려 51%가 카탈루냐의 분리 독립을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06년에 비하면 3배로 늘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카탈루냐 주지사가 카탈루냐를 스페인으로부터 분리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시행하는 법안에 서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카탈루냐와 카스티야는 각각 어떠한 역사를 갖고 있길래 엘 클라시코가 지역 라이벌을 넘어 그 이상의 의미가 부여되게 되었을까요?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카탈루냐(Catalunya)
(카탈루냐)
카탈루냐는 지도에서 보시다시피 지역 중심지인 바르셀로나를 포함한 스페인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 스페인어(카스티야어)와 다른 카탈루냐어가 8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12세기에 이르자 드디어 카탈루냐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됩니다.
12세기 카탈루냐에서는 바르셀로나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전략적으로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아라곤 왕국의 계승자와 혼인을 맺게 되면서 아라곤 연합 왕국 형성되게 되는데 물론 카탈루냐는 아라곤 연합 왕국 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리고 13~14세기에 들어서는 지중해 서부지역의 무역권을 독점하면서 경제적 부흥을 맞게 되지요.
카탈루냐의 합세로 아라곤 왕국 연합은 막강해졌습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 중심부는 카스티야가 장악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피레네 산맥이 가로 막고 있었기 때문에 막강한 국력은 지중해를 넘어 동쪽으로 향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지중해의 서부섬인 발레아레스 군도, 코르시카, 사르데냐, 시칠리아, 나폴리 그리고 그리스 일부까지 포함하는 지중해 제국을 형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15세기 들어 스페인의 중심인 카스티야가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고 레콘키스타를 위해 아라곤 왕국과 연합을 하게 되는데 솔직히 동등한 연합이 아닌 카스티야 중심의 연합이었기때문에 카탈루냐의 카스티야의 그늘에 가리게 됩니다.
자존심이 강한 카탈루냐에게 있어 이런 굴욕감은 계속될 수 없었습니다. 17세기 들어 카스티야는 왕국은 계속 되는 전쟁으로 인해 재정이 바닥나기 시작했고 카스티야가 있는 아라곤 연합 왕국에게 손을 벌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때다 싶어 17세 중엽부터 카탈루냐를 중심으로 한 아라곤 왕국은 카스티야와 분리 독립 전쟁을 실시하게 되지요.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18세기 초 왕위계승전쟁(1701~1714)에서 결과적으로 당시 서유럽을 주무르고 있었던 부르봉가가 전체적인 싸움에서는 밀렸지만 스페인에서만큼은 합스부르크가를 밀어내고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서 합스부르크가를 가문을 지원했던 카탈루냐는 카스티야에 굴복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카스티야는 지금까지 인정했던 카탈루냐의 정치 제도적 독립성을 와해시키려고 했습니다. 1714년 9월 11일 긴 공성전 끝에 바르셀로나는 항복하게 되는데 이날은 카탈루냐의 국경일이 됩니다. 카탈루냐가 카스티야에 느끼는 감정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이렇게 정치적으로는 어느 정도 압력을 가했지만 이미 18세기 들어 카스티야의 힘은 약해져만 갔고 반대로 카탈루냐는 지중해를 끼고 꾸준히 경제 성장을 이룩하게 되면서 카탈루냐는 카스티야와 계속 선을 긋게 됩니다. 물론 카탈루냐의 지배계급들은 카탈루냐만의 언어와 문화를 포기하고 카스티야와 통합하려고 했지만 카탈루냐 민중의 마음까지 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카탈루냐인들의 노력으로 인해 20세기초 그리고 스페인 내전이 있기 전인 1932년까지 상당한 정도의 자치권을 인정받게 됩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 이후 파시스트 정권인 프랑코가 스페인을 장악하게 되고 지방 자치권을 묵살하는 소위 '스페인 국가 통합'을 추진하면서 특히 카탈루냐 지역은 엄청난 억압을 받게 됩니다.
프랑코 체제 내에서 억눌렸던 자치에 대한 억압은 프랑코가 사망하고 나자 일찍이 스페인에서 역사상 볼 수 없었던 대규모 시위가 1977년에 일어나게 됩니다. 1977년 9월 백만명이 넘는 인파가 바르셀로나 거리로 뛰어나와 자치권을 요구하게 되고 1979년 강력한 지방자치권을 얻게 됩니다.
예전부터 스페인에서 가장 경제가 발달했던 카탈루냐 지방은 파산 위험에 계속 노출되어 있지만 지금까지 스페인 GDP의 20%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연간 GDP의 8~9%에 해당하는 170억 유로를 중앙정부로 이전해 중앙정부를 봉양하고 가난한 다른 지방정부를 도와왔습니다. 그러니 현재의 카탈루냐의 어려움은 그전까지 카탈루냐의 재정이 스페인 중앙정부로 흘러들어갔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유명한 축구 스타인 티에리 앙리가 아스널에서 카탈루냐의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고 나서 생활해 본 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카탈루냐는 스페인이 아니다!"
카탈루냐는 바스크처럼 분리 독립을 위해 테러와 같은 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국가 속의 국가라는 스페인의 자치국가 형태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카스티야(Castilla)
(카스티야 이 레온)
(카스티야 라 만차)
"카스티야적이다라는 말은 곧 스페인적이다라는 말과 같다!"
앞서 앙리의 카탈루냐는 스페인이 아니다라는 말과 참 대비되는 말입니다. 마드리드를 품고 있는 카스티야 지역은 있는 모습 그대로처럼 스페인의 중심이라 할 수 있으며 15세기 전성기 이후 스페인의 역사는 카스티야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카스티야도 올챙이적이 있었는데요 9세기의 카스티야는 단지 아스투리아스-레온 왕국의 봉건 영지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10세기에 들어 독립을 성취하고 11세기 일련의 왕조들의 변천과 통합을 거둔 뒤 오늘날의 카스티야 이 레온(Castilla y León)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을 몰아내는 레콘키스타를 가장 중심에서 이루어 내면서 세력을 확장하여 이베리아 남부와 남동부를 장악하는데 이는 오늘날의 카스티야 라 만차(Castilla La Mancha)을 형성하게 되죠. 그래서 레온을 구카스티야, 라만차를 신카스티야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라만차..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바로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주무대이죠. 라만차는 바람이 많은 고원지역입니다. 그리고 카스티야는 내륙에 있죠. 한 마디로 비옥한 토지가 있는 것도 아니며 무역을 활발하게 할 수 있는 지역도 아닙니다. 그래서 카스티야는 스페인에 있어 경제의 중심지가 아닙니다. 경제의 선두 주자는 거의 항상 카탈루냐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카스티야는 스페인의 정치, 행정 그리고 사회제도의 거의 모든 뼈대를 세우게 되고 카스티야의 이러한 정치문화는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였던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이식시키게 됩니다.
카스티야는 스페인의 전성기였던 15세기 다른 지역들과 다르게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군주제를 시행됐습니다. 심지어 어떤 역사가들은 카스티야에는 다른 지역에 있었던 봉건제가 없었다 주장할 정도입니다. 물론 봉건 영주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카스티야에서는 봉건 영주의 권력이 제한되어 있었고 또한 중앙정부의 강력한 법적 보호장치로 인해 카스티야인들은 봉건 유럽 사회에서 최고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1480년에 공포한 메디나 델 캄포 칙령은 귀족들이 카스티야 농민들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15세기에 카탈루냐와 갈리시아에서는 봉건영주들의 전제 정치에 대항하는 반란이 빈번했으나 중세 말기의 카스티야에서는 그런 사건이 발생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카스티야의 중앙집권적인 경향은 대내외 스페인 제국을 확장시키고 유지하는데에는 좋았지만 독립성이 강한 지방 정부들의 반기에 늘 신경써야 했습니다. 1520~1521 지방정부들의 반란을 시작으로 오늘날까지도 마드리드에 쏠리는 권력에 이탈하고자하는 정서가 남아 있으니까요.
카스티야가 스페인에 남긴 것은 정치와 행정 분야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더 강력한 것일 수 있는 언어를 남겼지요. 물론 카스티야어가 바스크어나 카탈루냐어보다 더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 이는 정치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카스티야 제국을 중심으로 레콘키스타가 완성되던 1492년 최초의 카스티야 문법서인 <카스티야어 문법>이 출판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문법서를 집필했던 카스티야의 위대한 인문주의자 안토니오 데 네브리하는 이런 말을 남기게 되죠.
"언어란 제국의 동반자이다."
그리고 이 말과 함께 스페인과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에 카스티야어가 명실공히 표준어로 쓰이게 됐고 오늘 날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언어의 발달은 곧 학문과 문학의 발달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의 최초의 대학들이 카스티야에 있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1212년 팔렌시아 대학, 1218년 살라망카 대학, 13세기 중엽 바야돌리드 대학 등이 설립되게 됩니다. 그리고 카스티야어의 절정은 바로 앞서 말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돈키호테>는 그야 말로 카스티야어를 위한 그리고 가장 카스티야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우리 둘만이 한 몸이라 할 수 있으니
그는 오직 나만을 위해 태어났고
나는 그를 위해 태어났다.
그는 행동할 줄 알았고
나는 그것을 적을 줄 알았다"
세르반테스가 자기의 분신 돈키호테에게 한 말입니다.
혹시..
카스티야도 스페인에게 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스페인은 1978년 재정된 신헌법에 '자치국가(Estado de Autonomias)'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단일국가도 그렇다고 완전한 연방제도 아닌 준연방제정도로 볼 수가 있는데요 그러므로 지방정부의 자치권이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중앙정부의 말을 잘 안 듣는 나라죠. 2011년에도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에게 강력한 재정긴축을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쌩깠을 뿐 아니라 지방정부는 수익성이 의심되는 인프라 투자에 적극적이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중앙정부라고 잘 한 것은 없지요. 그래서 현재 중앙정부는 이를 계기로 지방정부의 예산권 회수, 벌금 부과 등의 통제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다른 나라도 아니고 스페인의 지방정부가 그걸 가만 두고 볼리 만무합니다.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지방정부의 종속성을 스페인 지방에서는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니까요.
현재 스페인의 지방정부는 17개이지만 대표적인 9개의 지방을 소개겠습니다. 카탈루냐, 카스티야를 했으니 앞으로 7개가 남았네요 ^^
갈리시아(Galicia)
(갈리시아)
갈리시아는 앞서 소개한 카탈루냐 그리고 앞으로 소개할 바스크와 더불어 지방색이 강한 지방입니다. 물론 정도로 치자면 바스크와 카탈루냐에 비할 수 없지만 말이죠.
1920년에 창간된 문화잡지인 <노스(Nos)>를 보면 갈리시아가 스페인의 중심인 카스티야와 얼마나 구분되기 원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잡지 <노스(Nos)>는 20세기 초 갈리시아 문화계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구성되어 갈리시아 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때 활약했던 인물들을 노스 세대라고 합니다. 지도자였던 비센테 마르티네 리스코를 중심으로 노스 세대는 갈리시아의 주력 문화가 켈트족에서 유래했다고 천명하기에 이릅니다. 서고트족(+켈트이베리아인)의 중심인 스페인에서 이는 확실히 자기들만의 문화를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부유럽의 몇 안되는 순수 켈트족이 바로 이 갈리시아에 있죠.
갈리시아는 스페인에서 좀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습니다. 위치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베리아 반도의 북서쪽 끝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러한 고립적 위치로 인해 스페인 내에서 무슨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중세에 갈리시아가 스페인의 모든 기독교 왕국들의 중심이 되는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8세기 무슬림이 이베리아를 침략하게 되자 그와 동시에 갈리시아에서는 산티아고(성 야고보) 성인이 반도의 서부에서 전도를 했었다는 믿음이 새롭게 일어났고 또한 9세기경 천사들이 산티아고가 매장된 지점을 알려주었다는 구전이 결합되면서 지금의 산티아고 대성당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무슬림의 무어인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베리아를 정복해 나갔던 것처럼 산티아고 대성당이라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카톨릭 중심지가 있는 이베리아 반도 최북단 갈리시아에서 남쪽으로 '레콘키스타(재정복)'이 시작되게 됩니다.
11세기가 지나면서 성당 주교들의 노력에 힘입어 산티아고 대성당은 유럽의 수많은 순례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21세기에 저까지도 이 산티아고의 순례의 길을 가게 되죠. 800km를 33일에 걸어서 말이죠. 아직도 갈리시아 지방을 표시한 돌 비석을 보고 이제 고지가 얼마 안남았구나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물론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펼쳐진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의 그 웅장함도 잊지 못하고 있구요.
이슬람을 이베리아에서 몰아내고 유럽을 이슬람으로부터 구해낸 카톨릭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스페인에게 있어 예루살렘, 로마에 이어 최대의 성지로 꼽히는 산티아고를 품고 있는 갈리시아의 위상은 끝이 없이 올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지역인 카스티야, 무르시아, 안달루시아까지도 대성당에 공물을 바치게 되죠. 그리고 순례자들이 끝임없이 오게 되면서 도로, 병원 등도 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현재의 갈리시아는 감자, 옥수수를 재배하고 주로 돼지를 사육하는 영세자급농업 중심의 1차 산업이 지방경제를 이끌고 있고 농촌에 만연된 고용불안으로 갈리시아에서 일자리를 찾아 스페인 도처로 떠나는 등 녹녹치 않은 현실에 처해 있습니다.
갈리시아어는 카스티야어보다 섬세하여 음유시가 많이 만들어졌으며 스페인 문학의 발전에 기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특이한 건축물로는 돌과 대나무로 만든 ‘오레오’ 곡물 창고가 유명한데요 저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도 처음 이것을 보고 무엇인가 했었는데요 바로 극성스러운 쥐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국내도입이 시급하다고 생각..쿨럭 아스투리아스(Principado de Asturias)
(아스투리아스)
스페인어로 하면 아스투리아스 공국이됩니다. 물론 공국은 이미 스페인 제국에 병합되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이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갈라시아가 지역 특성상 어느 정도 '고립'되어 있다고 했는데요 아스투리아스에 비하면 그 고립의 정도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남쪽의 큰 산맥인 칸타브라아산맥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의 중부의 메마른 고지대의 평야인 메세타에서 아스투리아스를 가기 위해서는 험난한 협곡을 헤쳐나가야 하며 해안까지 가기에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고립되어 있어 외세에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아 원시적 생활양식이 오래도록 존속한 곳이 바로 아스투리아스입니다. 이베리아를 지배했던 로마인들과 서코트족조차 별다른 변화를 주지 못했다고 합니다.
갈리시아가 이베리아반도의 국토회복운동인 레콘키스타의 정신적 시발점이라고 한다면 아스투리아스는 실질적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세기 무어인들은 파죽지세로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해 나갔지만 아스투리아스인들을 뚫고 칸타브라아산맥을 넘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코바동가(Covadonga) 전투에서 수적으로 열세였던 아스투리아스인들이 무어인을 물리치면서 이베리아 전역이 이슬람화되는 것을 막았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독립을 만천하에 알리게 됩니다. 무어인들도 이 작으만한 기독교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인정하기에 이릅니다.
스페인에서 석탄매장량이 가장 많고 철강, 구리, 아연 등이 풍부해서 아스투리아스에서는 중공업이 발달하였지만 지형상 교통이 불편하여 수송비가 많이 드는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아스투리아스는 그 문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스페인들의 역사적 긍지를 심어주었던 레콘키스타 운동의 실질적 시발점이자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왕국들의 최후의 '보루'로서 큰 의의가 있는 지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스크(Basque) (바스크)
피카소는 스페인의 공화파 정부로부터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걸릴 대형 벽화를 의뢰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 30분 독일 공군 '콘돌 군단'은 스페인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Guernica)'를 무차별 폭격을 하게 되죠.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위치한 옛도시로 분리독립을 원하는 바스크인들에게는 성지나 나름 없던 곳이었습니다. 바스크가 프랑코를 적대시하고 공화파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프랑코를 지원했던 나치 독일은 43대나 되는 폭격기를 게르니카 상공에 띄어 4시간 동안 마을의 70%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폭격뿐이 아니었습니다. 장날이라 중앙광장에 북적거리며 모였던 민간인들에게 기총사격까지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마을주민 7000명 중에 1600명이 사망하게 됩니다. 파리에서 이 소식을 들은 피카소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떨었고 6월 4일 드디어 묵시록적인 명작인 지금 보시는 '게르니카'라는 작품을 만들게 됩니다.
(게르니카)
게르니카가 있는 바스크는 스페인에 있어 분리독립에 대한 열망이 가장 강력한 지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99년 독일의 언어학자인 빌헬름 폰 훔볼트는 바스크 지방을 방문한 후 괴테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그토록 강한 민족성과 한눈에 식별할 수 있는 외모를 지닌 민족을 어디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듯 바스크 지방은 스페인에서도 뭔가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녔다는 인식을 만들게 됩니다. 실제로 유럽인들보다 좀 더 키가 큰 바스크인들의 기원에 관해서 학계에 이렇다할 정설도 없을뿐더러 특히 유럽 대부분의 민족들이 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것과는 달리 바스크인들은 계통불명의 바스크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스페인의 바스크가 아닌 바스크만의 바스크를 이야기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바스크인들의 민족주의가 극적으로 변한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12세기 이후부터 바스크 지방은 카스티야 왕국과 스페인에 통합되어 있었고 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행정부에서는 행정부의 엘리트 세력으로 굳건한 입지를 굳히고 있었죠. 또한 스페인의 아메리카 점령 때에도 많은 바스크인들이 식민지 개척자, 선원, 성직자, 군인으로서 스페인 제국에 충성을 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세기 후반에 바스크에서 괄목할 만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상황이 바뀌어져 갔습니다. 철강업과 조선업의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하게 되면서 갑자기 타지방인들이 돈과 일자리를 찾아 바스크로 몰려들게 되었습니다. 1877년에 45만명이던 바스크의 인구는 1930년에 90만명 가까이 되게 되죠. 그러자 바스크인들은 갑자기 자기들의 고유한 문화가 파괴되고 지금까지 잘 유지되었던 공동체 의식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게 됩니다.
그때 바스크의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이었던 사비노 아라나를 중심으로 정치성이 짙은 바스크 민족주의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비노 아라나가 작사한 바스크 민족의 노래(Euzko Abendaren Ereserkia)는 바스크 지방의 국가로 1930년에 채택이 되구요. 그리고 스페인의 제 2공화국은 바스크에게 1936년 자치권을 부여해 주게 됩니다. 허나 이후 스페인 내전에서 중앙집권화를 추구했던 프랑코를 지원한 독일 나치는 게르니카 폭격으로 바스크 자치 정부를 박살내게 되죠.
이후 프랑코 독재가 계속되는데 이러한 반작용으로 ETA라는 바스크 분리주의 테러 조직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ETA는 테러를 통해 프랑코 독재 말기에 바스크 민족주의 불길을 되살리게 되는데요 1968년 최초로 테러를 감행한 이래 약 40여년간 829명의 군인, 경찰을 비롯한 공무원, 정부 요원들을 암살하게 됩니다. ETA는 바스크 체제의 소멸에 대한 정치문화적 반작용이 극단적 민족주의로 표면화된 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전 유로파 결승에서 아틀레틱 빌바오와 AT 마드리드가 맞붙었습니다. 빌바오도 마드리드도 모두 스페인 리그 소속입니다만 기사 제목은 흥미로웠습니다.
'스페인 vs 바스크, 총칼 없는 전쟁!'
바스크 지방에 있는 빌바오는 용병을 거부하고 순혈주의을 고집하는 구단입니다. 카탈루냐의 바르셀로나 팀과는 다르게 빌바오는 전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외국인 용병을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빌바오 모든 선수들의 몸에는 '바스크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바스크는 스페인의 바스크일까요 아니면 그저 바스크일까요? 스페인에 대한 지식이 미천한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유로파 결승에서는 AT 마드리드가 빌바오를 3:0으로 이겼다고 합니다. ETA는 2011년 10월 40년 만에 스페인과의 무장투쟁을 완전 종식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바스크 지역에서 바스크어를 쓰는 사람은 20% 남짓입니다. 역사가 종종 증명하듯이 바스크의 자치권을 상실시키는 큰 물리적 작용이 없다면 그 반작용으로서 실제로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바스크의 급진적 민족주의는 그 힘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근 지방정부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가 강해지게 된다면 현재 축구공에만 머무르고 있는 바스크의 순혈주의가 모든 이들을 '에타(ETA)'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발렌시아(Valencia)
(발렌시아)
2012년 7월 20일 스페인이 1,000억 유로의 구제금융에 동의를 얻었을 때 스페인의 17개 지방자치 중에서 중앙 정부의 도움을 첫 번째로 요청한 지방이 발렌시아 지방입니다. 발렌시아의 지방적자는 스페인 전체 지방 적자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방만하게 운영되었기에 구제금융의 첫 번째 구걸이 발렌시아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발란시아가 이렇게 재정난에 허덕이는 이유는 앞뒤 생각 없이 삽질을 열심히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지방 정부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발렌시아는 삽질에 선두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문화 및 교통 시설을 짓는데 열정을 쏟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8년에 오픈한 발렌시아의 과학예술 종합단지입니다. 예술궁전(Arts Palace), 과학박물관(the Science Museum), 천문관(L'Hemisferic), 해양공원(an Oceanographic Park)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발렌시아의 과학공원은 사진으로만 봐도 으리으리하고 멋드러집니다. 정말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과학박물관)
그런데 수익성은 보는 것만큼 좋지 않습니다. 오픈을 한지 15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6억 유로에 달하는 부채를 떠안고 있고 이자 등의 부대비용을 포함하면 앞으로 7억 유로가 더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현재 발렌시아가 부채 때문에 좀 힘들어 하고 있지만 발렌시아 지역의 수도인 발렌시아시는 과거 스페인 제국이 절정기였던 15세기에는 잠깐이지만 카탈루냐의 바르셀로나를 누르고 스페인의 재정적 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막강한 부르주아와 소수의 부유한 유대인이 지배한 발렌시아는 13세기부터 제조업과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15세기에 이르러서는 도시인구가 바르셀로나를 추월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은 역시 지금과 같이 공적부채가 많아지게 되면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16세기에는 민중 반란으로 혼란에 휩싸이더니 경제적 라이벌이었던 바르셀로나가 제노바와 직접 무역 루트를 확보함에 따라 스페인 재정 수도의 면모를 상실하게 됩니다. 발렌시아의 주도시가 이렇게 몰락하자 발렌시아 지방은 같이 쇠약하기 시작했고 18세기에 이르러 자치권을 완전히 박탈당하며 스페인의 중심인 카스티야의 세력권에 복속되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세기에 들어서 국제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발렌시아는 다시금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게 되는데 바로 농업 수출을 통해서입니다. 발렌시아는 쌀, 포도주 그리고 오렌지가 유명한데요 농업 부르주아지의 대규모 농업 투자를 통해 발달한 발렌시아의 농업은 지금까지도 발렌시아의 핵심적인 산업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 특히 발렌시아의 오렌지가 매우 유명합니다. 아마도 최근에 오렌지를 드셨다면 발렌시아 오렌지를 먹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보통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오렌지는 네이블, 카라카라, 발렌시아 오렌지가 대표적입니다. 그 중에서 5~7월에 대표적으로 맛 볼 수 있는 오렌지가 발렌시아 오렌지입니다. 네이블은 navel, 즉 배꼽이라는 뜻으로 오렌지 밑의 꼭지 모양이 배꼽이 도드라지고 씨가 없다면 네이블 오렌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맛이 굉장히 강한 오렌지다라고 하면 카라카라이구요 먹다가 씨가 자주 나오는 오렌지를 드셨다면 그것이 바로 발렌시아 오렌지입니다.
발렌시아의 오렌지 농장의 면적은 약 20만ha에 이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해에만 400만톤의 오렌지가 생산되고 있는데요 스페인 전체의 65%에 해당하는 규모입니다. 그런데 오렌지를 생산하면 그냥 농산물로만 팔리는 것이 아니죠. 발렌시아에서 생산되는 오렌지 중 60%가 생과일로 유통되고 30%는 주스로 만들어집니다. 10%는 그냥 버려지구요. 그런데 문제는 오렌지 주스를 만들면 많은 양의 껍질이 남게 됩니다. 이게 한해에만 약 50만톤에 가깝다고 하는데 이걸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
이러한 고심 끝에 나온 안이 바로 오렌지 껍질로 바이오 연료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발렌시아는 포드 자동차도 있기 때문에 시너지효과를 낼 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죠. 보통 오렌지 껍질 1톤으로 생산할 수 있는 연료가 80리터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렇게 되면 발렌시아 지역내에서 4000만리터에 가까운 바이오연료를 생산하게 되는 것이고 이게 상용화가 될 경우 석유의존도를 많이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고용창출도 할 수 있으니 지역경제에 엄청난 이득을 줄 것이라는 예상하고 있습니다. 현재 citrotecno라는 회사가 발렌시아 오렌지 껍질를 이용한 바이오 연료 생성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요 이미 기술개발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고 조만간 상용화를 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여담이지만 오렌지 껍질 활용하는 회사가 또 하나 있는데 그 회사 이름이 OPEC입니다. 여기서 OPEC은 석유수출국기구 OPEC(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이 아니라 오렌지껍질 개발 회사인 OPEC(Orange Peel Exploitation Company)을 말합니다. 영국 요크대학교 제임스 클라크 교수가 만든 이 회사는 오렌지가 많이 생산되는 브라질과 스페인 과학자자들이 대거 참여했다고 합니다. New OPEC이 앞으로 어떤 결과물을 나올지 궁금하네요.
아무튼 발렌시아는 이렇게 농산물이 발달했기에 스페인 최대 규모의 농산물 판매 협동조합인 아네코프(Anecoop)가 발렌시아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은 어찌보면 당연해 보입니다. 발렌시아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아네코프는 79개 지역농협을 회원으로 하며 농산물을 세계 52개국에 수출하고 연간 판매액만 7억 유로가 넘는 세계적인 판매 협동조합입니다.
아네코프는 1975년 소련에서 오렌지를 대량으로 주문하면서 효율적인 물량 확보와 유통체계 구축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만들어졌는데요 오렌지의 경우는 미국의 썬키스트에 이어 세계 2위의 사업규모를 자랑하고 있고 수박, 감 수출은 세계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공사례 때문에 우리나라 농협이 많이 배우려고 한다고는 하는데 장점을 잘 흡수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네요.
2012년 5월에 발렌시아에는 다음과 같은 학원 광고가 등장했습니다.
광고 내용은 '당장 일을 시작하세요 – 전문 창녀 코스'정도로 번역된다고 합니다. '이론과 실습'을 병행한다고 하며 수강료는 100유로라고 합니다. 직업 구하기도 쉬우니 걱정 말라고 하네요.
그런데 이 광고가 나오고 정확히 2달 후 발렌시아는 구제 금융을 중앙 정부에 신청하게 됩니다. 지금 학원생들은 얼마나 모였는지 궁금하네요.
나바라(Navarra)
(나바라)
2009년 세계 MBA 경영 대학원 랭킹 1위는 나바라 대학(IESE)입니다. 2011년 이후 10위까지 밀렸지만 나바라 대학은 스페인 최고의 사립대학으로 팜플로냐,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등에 캠퍼스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팜플로냐가 바로 스페인 나바라 지방의 지방 수도이지요. 제가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처음으로 도착한 스페인 도시가 팜플로냐였는데요 신구 조화가 아주 잘 되어 있는 작고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한때 이 팜플로냐에서는 바스크어, 라틴어, 오시타니아어가 스페인어와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나바라의 역사를 어느 정도 엿볼 수가 있습니다.
나바라 지역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바스크 지역과 붙어 있습니다. 바스크 지역과 마찬가지로 고대 바스코니아인들이 나바라에 처음 도착했습니다. 바스크라는 말도 바로 이 바스코니아인들에서 유래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후 기원전 1세기에 로마인들이 이 나바라에 도착해 기독교와 로마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도시 생활을 유입시킵니다. 팜플로냐는 당시 이름이 폼페이오폴리스, 즉 폼페이의 도시라고 불렸는데요 폼페이가 세르토리우스와 싸울 때 바스코니아인들이 그 도시를 지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왜 팜플로냐에서 바스크어와 라틴어가 사용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시타니아어는 어떻게 된 것인가? 그것도 오시타니아가 어디인지를 알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시타니아는 오크어(!)라는 프랑스 지역 언어 혹은 방언을 쓰는 지역을 말합니다. 참고로 오크어는 모두들 잘 알고 계시는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Dante)가 구분한 것입니다. 단테는 유명한 <신곡> 말고도 <속어론> <토착어에 관하여>라는 책을 썼을 정도로 언어에 대가이기도 했습니다.
나바라가 산티아고의 순례길의 통로가 되면서 도시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바로 오시타니아지역의 프랑스인들이 이 나바라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언어, 관습, 기술 등의 문화가 따라오게 되었지요. 그래서 팜플로냐에 오시타니아어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12세기의 나바라의 남부 도시 투델라는 기독교인, 유대인들, 무어인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다양한 학문적 교류가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봤을 때 나바라는 사람과 문화와 언어와 학문과 종교가 역동적으로 흘러가는 교차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바라 대학의 탁월함은 이러한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스페인의 레콘키스타를 완성해 나가면서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하고 있어 나바라의 자치성은 압박을 받기 시작했고 16세기에 들어서는 드디어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서 양자택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바라는 친스페인파와 친프랑스파로 분열을 하게 되고 이후 친스페인파가 승리를 거두면서 스페인에 합병되게 됩니다.
스페인에게 합병이 되면서 나바라는 다양한 종교와 문화의 교차로라는 역동적인 모습이 사라지고 가톨릭을 호전적으로 강력히 수호하는 지역으로 바뀌게 됩니다. 나바라는 현재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금속부품, 가공식품, 음료수, 신발 등의 작은 규모의 제조업이 같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바스크인들이 대부분이지만 대부분은 중앙정부를 지원하고 있으며 약 20%정도가 바스크에 정체성을 두고 있다고 하네요.
나바라는 참 작지만 피레네 산맥과 계곡, 에브로 강, 바르데나스 사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후화 풍광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래서 헤밍웨이가 나바라의 중심인 팜플로냐를 사랑했나 봅니다. 그의 팜플로냐 사랑은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하네요.
아라곤(Aragon) (아라곤)
제 첫 번째 아라곤은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이었습니다. 멋있는 중년의 모습이었죠. 2012년에 반지의 제왕의 왕인 아라곤(비고 모텐슨)이 영화 역사상 가장 섹시한 케릭터로 잭 스패로우 선장(조니 뎁)을 제치고 뽑히기도 했습니다. 선장보다는 역시 왕이죠. 아직도 반지의 제왕 3편을 보고 난 후 극장에서 자리를 뜨지 못했던 경험이 생생합니다.
하지만 지금 알아볼 아라곤은 그 아라곤이 아니라 스페인의 아라곤입니다. 아라곤 제국은 그야말로 유럽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장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레콘키스타 완성을 가능케 했던 세기의 결혼에 주인공 중 한 명이 바로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입니다. 세기의 결혼을 통한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연합은 이베리아 반도의 레콘키스타를 완성하게 되고 이후 세계 패권국으로서의 스페인을 만들게 됩니다.
자료에서 이 대목을 읽었을 때 아라곤은 스페인 역사에서 중심에 서 있겠구나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더군요. 물론 15세기의 아라곤 연합 왕국은 꽤 힘이 쌨습니다. 카탈루냐와 연합해 무어인들에게 발렌시아를 탈환하고 피레네 산맥 북부은 물론이거니와 나폴리, 시칠리아, 심지어 그리스 일부까지 아라곤인들은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라곤은 카스티야에 스페인의 중심을 뺏겼고 심지어 아라곤인들은 카스티야에서 외국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아라곤지역은 이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713), 대 나폴레옹 전쟁(1808~1809), 1차 카를로스 전쟁(1833년), 스페인 내전(1936~39년)의 전쟁터가 되면서 사회경제적으로 반복적인 붕괴를 맛보게 됩니다.
또한 아라곤의 넓은 면적에 비해 인구는 별로 많지 않으며 척박한 토양에 포도, 올리브 등 이베리아 반도의 주요 작물에 부적합한 광대한 산악 지역과 부족한 강수량으로 풍요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지역입니다. 하지만 반도의 교차로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그러기에 전쟁의 쓴맛을 많이 본 지역이기도 하지요.
아라곤 하면 꼭 알아둬야 하는 사람이 스페인의 대표적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입니다. 아라곤 출신인 고야는 82년의 긴 생애 동안 종교화, 초상화, 장르화 뿐만 아니라 당대의 역사, 개인적인 환상이라는 다양한 주제를 프레스코, 유화, 동판화, 석판화 등의 매체로 회화 7백여점, 판화 3백여점, 드로잉 9백여점을 남긴 그야말로 스페인 미술계의 역사적 대가입니다. 고야는 아주 다양한 많은 작품들을 남겼지만 특히 역사의 증언자로서 전쟁의 참상을 담아내는 데도 탁월했습니다. 다음 보시는 작품은 고야의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입니다. 마드리드가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한 후 마드리드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데 프랑스 군대가 이를 진압하고 폭동에 대항했던 사람들을 처형하는 장면입니다. 이때 수천명이 죽었다고 하는데요.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그런데 이 작품을 보면 우리나라와 관련해서 하나의 작품이 떠오르게 됩니다.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고야의 작품과 피카소의 작품은 그 구도가 매우 비슷합니다. 네.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은 고야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국에서의 학살)
저는 미술에 대해 잘 모르고 즐겨 보지도 않습니다만 이 글을 준비하면서 고야의 작품을 보니 미술에도 좀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고야의 '귀머거리 집(Quinta del sordo)'이라 불리는 별장에 그려진 14장의 벽화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음울한 이미지에 대부분이 검정과 회색, 갈색 등의 어두운 색조를 띠고 있어 후대에 이 벽화들을 '검은 그림들(pinturas negras)'로 불리우게 됩니다. 보시는 그림은 검은 그림들 중 대표적 작품인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입니다. 아래 그림은 벽화를 복원한 것인데 완전한 복원이 아니라고 합니다. 벽화에는 사투르누스의 남근이 발기된 것도 표현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적용해서 그림을 상상해 보면 사디스트적인 쾌락과 육적인 욕망의 극단화된 순간을 분노와 공포의 눈으로 포착한 느낌이 듭니다.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
하지만 이 그림은 저에게 단순히 사투르누스 신화를 재현하기보다는 권력의 사티스트적 폭력성과 잔인성, 세대간의 포악스러운 갈등 그리고 인간의 극대화된 혐오스러운 타락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동시에 보여주고 있어 한 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P.S) 아 처음이라 그림이 엑박에 글도 짤렸네요. 크크 난리네요. 안달루시아편은 2편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