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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요약
제곧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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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홍이라는 사람은 도진병고두라 칭하며 도진은 성이요, 병고두는 무고(武庫)의 우두머리임.대대로 살마(현 가고시마)ㆍ대우ㆍ일향 등의 주를 차지하였다. 그 지역이 중국 및 유구(류쿠)ㆍ여송(필리핀) 등의 나라와 가까워 중국 배와 오랑캐 배가 끊임없이 내왕하고, 왜들이 중국 지방이나 남만 지방을 오가는 사람도 반드시 이곳을 경유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 물건과 오랑캐 물건이 시장의 상점에 가득하고, 중국 사람과 오랑캐들의 상점과 집이 연달아 있다. 의홍의 무예와 용맹이 또한 여러 왜인을 압도하는데, 왜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의홍으로 하여금 무예를 사용할 수 있는 땅을 차지하게 했다면, 비록 일본 전체를 병탄하는 것도 무난했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 휘하들도 극히 정용(精勇)하였고 또 모두 다 세신(世臣)들이었다. 신장(노부나가)의 말기에 구주(큐슈)를 모두 병탄했었는데, 수길이 신장을 대신하여 서서, 친히 가서 싸웠으나 마침내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의홍이 자진해서 6주를 수길에게 돌려주고, 전에 소유했던 3주만을 차지했다." - 간양록
시마즈 가문은 본래 큐슈의 9개 나라 중 남부의 3개를 정식으로 통치하던 (수호직, 슈고 다이묘라 합니다) 가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가 몰락하고 센고쿠 시대가 열리면서 현 가고시마인 사쓰마만 유지하고 있었죠. 하지만 시마즈 요시히사가 다이묘가 되면서 다시 세력확장을 시작하죠. 요시히사에게는 세 명의 아우들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시마즈 4형제라 불리던 이들이었죠. 원래 시마즈가 지배했던 3국을 모두 지배하게 되고, 큐슈 북쪽에 있던 류조지, 오토모 가문에 연승하면서 마침내 큐슈 전체를 지배하기 직전까지 갔죠. 하지만 그 직전에 히데요시가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고, 오토모 가문이 히데요시에게 지원을 청하면서 20만대군이 시마즈 가문을 상대하러 옵니다. 임진왜란을 대비해 대군을 기동하는 연습을 한 거라고 평가되기도 하죠.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고 큐슈 남부의 3개국만 챙긴 시마즈 가문, 분을 삭히며 조용히 살고 싶었겠지만 히데요시의 명령은 너무나도 컸죠. 임진왜란 때 시마즈 가문은 소극적으로 나섰고, 히데요시는 이걸 따지고 듭니다. 결국 시마즈 요시히사가 둘째 동생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가독을 상속하고 은거하게 되죠.
정유재란 때는 칠천량 해전 때 큰 공을 세우기도 하고 전라도에서 학살도 좀 저지르고 코도 좀 많이 베고 -_-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사천성에 들어가서 동일원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죠. 이걸로 조명연합군 수급을 몇만개 베었다 하지만 뭐 (...) 아무튼 이걸로 그의 이름을 음차한 '석만자' '심안돈' 등이 그 유명한 소서행장 가등청정 다음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순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고립된 상황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는 구원군의 주력이 돼야 했습니다. 그가 거느린 병력은 1만 정도, 여기에 고성에 주둔한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5천여명의 병력과 남해에 주둔한 (대자도주이자 고니시의 사위) 소 요시토시의 병력 1천, 부산포에 있던 수군 소속 데라자와 히로타카의 병력 1천명 정도가 합세했죠.
고니시가 육지로 탈출했으면 좋으련만, 그게 쉽진 않았습니다. 일단 순천은 경상도와의 길이 뚫려있긴 했지만 역시 소백산맥으로 길이 많이 좁았죠. 이 좁은 길도 조선의 관군과 의병의 활동으로 막혔고, 명의 대군이 성을 에워싸고 있었구요. 물론 유정이 안 싸우기로 했으니 실력행사로 나선다면 경상도 쪽으로 탈출할 수 있었을 겁니다. 지만 그럴려면 진작에 했어야 했죠. 히데요시는 양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순천과 울산을 포기하지 못 하게 했고, 히데요시가 아꼈던 고니시와 가토가 이 둘을 맡은 건 그 때문일 겁니다. 반대로 이 둘은 히데요시의 심복인만큼 살아서 돌아와야겠죠. 최소한 마지막에 항복한 시마즈보다야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육지로 천천히 후퇴하기엔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습니다. 수군은 보급에만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기도, 돌아가기도 수군이 훨씬 좋았죠. 가토가 있는 울산부터 고니시가 있는 순천까지, 고립되지 않고 다 함께 탈출하려면 바다로 가야 했습니다. 조선 수군이 바다를 막고 있더라도 해로로 탈출하는 게 더 나았다는 말이죠. 반대로 말하자면, 조선 수군이 임진년부터 바닷길을 막은 게 이 정도로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왜교성에 있는 6백여척에 이르는 배가 고니시군이 일본으로 돌아갈 배인데 이 배들을 포기하면 뭘 타고 돌아가겠어요.
11월 18일, 조명연합 수군이 다시 왜교성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횃불을 밝혀 구원군을 청했죠. 남해부터 사천에 이르는 구원군은 순천으로 향했습니다. 수백척에 이르는 대함대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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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도독부에 가서 위로연을 베풀고 종일 술을 마셨다. 어두워져서야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도독이 보자고 청하기에 바로 갔더니, 도독이 말하기를 '순천의 왜교의 적들이 10일 사이에 철수하여 도망간다는 기별이 육지로부터 왔으니, 급히 진군하여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자'고 하였다." - 난중일기 11월 8일
조명연합 수군은 기동을 개시해서 순천 근처에서 정박합니다. 13일에는 적선 10여척이 나와서 쫓아가자 도망갔죠. 14일에는 적들이 진린과 접촉하는 걸 확인했구요. 막 선물을 주면서 말이죠. 이후로도 계속됐습니다.
"어제 복병장 발포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이 왜의 중선 1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하였다. 왜적은 한산도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뱃기고-_-;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 11월 17일
노량해전 이틀 전 일기이자 마지막 일기입니다. 아니 18일 밤부터 작전을 시작했을테니 그 전날에 썼을 겁니다. 뭐 별다를 건 없습니다. 진린이 적의 구원요청을 봐 줬으니 그에겐 그랬을 겁니다. 일본군이 곧 도망간다는 것 외에는 다를 게 없었으니까요. 그저 도망가기 전에 죽임으로써 그 죄를 심판해야 한다는 것 밖에는요.
"대장으로서는 화친을 말할수 없을 뿐더러 이 원수는 놓아 보낼 수 없소."
행록에서 진린이 이순신을 설득하려 하자 했다는 말입니다.
"임진년 이래로 적을 무수히 사로잡아 총과 칼을 얻은 것이 산만큼 쌓였는데 원수의 심부름꾼 놈이 여기는 무얼 하러 온단 말이냐?"
안 되겠다 싶자 고니시가 직접 선물을 보내 이순신을 설득하려 하자 한 말이죠.
진린이 남해에 있는 적들을 토벌하자고 하니 남해의 적은 조선의 백성들이 포로가 된 것 뿐이라면서 말리고, 적을 먼저 치자고 합니다. 진린이 적에게 붙은 이상 적이라고 하니 황제가 명군을 보낸 건 조선인들을 살리라는 거지 죽이겠다는 게 아니라면서 맞서죠. 그러자 진린은 황제가 자신에게 칼을 내렸다면서 협박합니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관우와 장비에게 한 것에서 보듯 이건 군령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죠.
"
한 번 죽는 것은 아깝지 않소. 나는 대장이 되어 결코 적을 내버리고 우리 백성을 죽일 수 없소."
이렇게 답 했다 합니다. 전후 이덕형의 보고에는 열 받은 이순신이 조선 수군만 이끌고 출동하자 진린이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랐다고 하구요.
둘 사이의 대립이 어느정도였고 진린을 얼마나 어르고 달랬는지는 말이 다 다릅니다만, 확실한 건 목숨 바쳐 싸우는 것에도 참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는 거겠죠. 그것도 이 땅을 침략한 원수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싸우는 것에 말입니다.
적들이 물러나려 합니다. 이걸 놓치면 더 이상 원수를 갚을 기회가 없었죠. 적들이 바다에 있는 동안 조선의 분노를 보여줘야 했습니다. 더 이상 공을 세울 필요 없었습니다. 모가지 따위 명군에게 줘 버리면 그만이었겠죠. 그저 목숨을 바쳐 적들을 죽일 수 있다면 족했습니다. 갈 길은 아직 멀었습니다. 순천은 시작일 뿐이었죠. 어서 사천으로, 한산도로, 부산으로 가서 적들을 잡아야 했습니다. 하나라도 더 탈출하기 전에요.
"이 원수를 무찌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此讎若除 死即無憾(차수약제 사즉무감)
해전 직전, 하늘에 빌면서 한 말이라 합니다. 훌륭한 사망플래그(...)고 자살설의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만, 그냥 당시 상황에서 충분히 나올 말이었습니다. 수백척의 적과 싸운 건 명량 이후 처음이거든요. 안 그래도 힘들 싸움이고 적이 철수하기 전에 공격하는만큼 열심히 잘 싸워야 했습니다. 이충무공전서에는 한 술 더 떠서 죽음을 예감하는 말까지 합니다만 역시 아니죠.
+) 진린이 제갈량처럼 하늘에 빌어보라 하고 이순신은 자기는 모든 면에서 제갈량에게 안 된다면서 거절했다 합니다. 글쎄요...
글쎄요. 정말 힘들 싸움이니 죽음을 생각하고 각오하긴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옥포, 한산도, 부산포, 그리고 명량에 이르는 전투들보다 더 컸을지는 의문이죠. 뭐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 정도는 했을지도요. 어머니를 잃고 아끼던 아들을 잃은 상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에겐 사는 게 지옥이었겠죠. 하지만 그런 생각보다는 적들이 하나라도 더 도망치기 전에 죽음으로 죄를 묻겠다는 생각이 더 컸을 겁니다.
그에게는 조선 수군이 있었습니다. 비록 한산도 때의 규모를 재건하진 못 했지만 최대 80척에 이르는 판옥선이 있었죠. 그리고 임진년부터 싸워 온 든든한 부하들이 있었습니다. 경상우수사 무의공 이순신, 전라우수사 안위를 필두로 우치적, 이영남, 류형, 배흥립 등 그와 손발을 맞춰 온 부하들이었죠. 이제 이들과 함께 그렇게 꿈꿔왔던 일을 할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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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전에 동원된 병력은 불분명합니다. 우선 조선 수군은 전후의 기록을 토대로 80척설이 통설입니다. 하지만 (이전에 소개했던) 한길님은 사로 중 수로에 동원된 조선 수군이 칠천삼백명 정도라는 것과 60척 정도가 나오는 실록의 기사들을 통해 60여척을 주장하셨죠. 저도 이 쪽을 지지하는 편이구요.
명나라의 사선
명 수군은 수로에 동원된 병력도 만구천이라 합니다만 신뢰하긴 힘듭니다. 임진왜란 해전사의 이민웅 교수님은 만삼천 정도로 추측하시죠. 시마즈 가문 기록인 정한록에는 조명연합군의 수군이 무려 오백여척이라고 적고 있는데, 당시 명군이 사선(80~100인승) 호선(30인승) 합쳐 이백척 이상은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일본군은 300척에서 500척까지 다양합니다. 일단 병력은 각 다이묘들의 병력을 합쳐 만오천이 넘는 정도로 추측됩니다. 여기서 격군 등 비전투병력이 어느정도로 포함돼 있느냐가 (일본군이 다 그렇지만) 문제구요. 한편 시마즈군의 군선은 121척이라 기록돼 있습니다. 저게 전투용 배만 따진 거라 치고 수송선 등을 더 투입시켰을 순 있겠지만, 그 수를 무작정 늘릴 수도 없는 노릇이죠.
거기다 이들은 총병력으로 계산한 것일 뿐, 이들이 모두 투입됐느냐의 문제가 또 남죠. 하지만 기록이 없는 이상 이보다 저 자세하게 추정할 수 없을 겁니다. 여기서는 주로 조선군 60~80척 vs 일본군 300척으로 전개하겠습니다. 명군은 아래에서 다시 얘기해보죠.
11월 18일 밤, 남해도에 파견돼 있던 경상우수사 이순신에게서 연락이 옵니다. 적의 구원군이 오고 있다는 것이었죠. 수군은 곧바로 육지와 남해도 사이의 해협, 노량으로 향합니다. 조선 수군은 노량의 입구 남쪽에 있는 관음포에서, 명 수군은 북쪽의 죽도에 매복했죠. 얼마 안 가 저 멀리서 적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 바라 소리가 울리니 포 소리와 북 소리가 겸하여 진동하고, 아군과 명군 양군이 돌발하여 좌우에서 엄습하니 살과 돌이 섞여 떨어지고, 불붙은 섶을 마구 던져서 허다한 왜선을 태반이나 불태웠다. 적병은 목숨을 걸고 혈전하였으나 형세가 지탱할 수 없어 바로 물러가 관음포로 들어가니 날이 이미 밝았다. " (난중잡록)
전투는 근접전으로 이뤄졌습니다. 특히 밤이라서 그랬죠. 짚단에 불을 붙여서 직접 적의 배에 던졌고, 실록에는 '화포와 화살을 쓰지 않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시마즈 가문 기록에도 명 수군(아마도 조선 수군 -_-a)이 쇠갈퀴와 긴 낫을 걸어 끌어당겨서 공격했다고 쓰고 있구요. 물론 그렇다고 정말 화포와 화살을 안 쓴 건 아니겠지만요. 시마즈군도 필사적으로 반격했습니다. 위에서 공격해오는 적들에 철포(조총)으로 맞섰죠. 시마즈군은 조총을 다루는 데 있어 일본에서 둘쨰라면 서러울 가문이었습니다. 조총을 처음 얻은 다네가시마부터가 시마즈군 소속이었고, 이 때도 철포대를 이끌고 싸웠죠.
조선 수군은 위에서 온갖 화포와 화살, 불 붚은 짚단을 던지면서 공격했고 일본군은 조총과 백병전으로 맞섰습니다. 우세한 쪽은 조선 수군이었죠. 후퇴할 수도 없었습니다. 해류가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죠. 백병전도 조선 수군에게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왜교성에 있던 우츠노미야 가문의 기록에 기껏 판옥선 위로 올라갔더니 조선군은 문을 잠그고 격군 갑판으로 내려가 버렸고, 주변의 판옥선들이 화살을 날려서 전멸시켰다고 합니다. 조선군의 약점을 이겨낼 방법을 찾아낸 것이죠.
어차피 왜교성으로 가기엔 글렀고, 포위가 풀렸으니 고니시도 탈출할 거였습니다. 할 일은 다 했으니 탈출해야죠. 방법은 돌파 뿐이었습니다. 뭐 시마즈 요시히로가 돌파 좋아하기도 했구요.
조선 수군은 이런 시마즈군을 관음포로 유도합니다. 밤인데다 포구가 제법 깊어서 탈출로로 착각할 만 했죠. 하지만 새벽이 오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을 거구요. 결국 시마즈군 일부는 배를 버리고 남해섬으로 갑니다. 하지만 시마즈군 본대는 아니었죠.
이 때 명 수군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사선, 호선은 일본군의 배에 비해 열세였고 싸우려면 백병전 수준으로 싸워야 했습니다. 창으로 위에서 아래로 찌르며 열심히 싸웠다는 말 정도는 남아있긴 합니다만... 문제는 판옥선에 탄 진린과 등자룡이 모두 백병전에 휘말렸다는 것이죠.
시작은 등자룡의 배에서 일어난 불이었습니다. 함평 소속 판옥선을 빌려준 거였죠. 어쩌다가 불이 난 건지 -_-; 혼란에 빠졌고, 일본군은 이 틈을 노려 판옥선에 올라가서 배를 빼앗고 불질러 버립니다. 등자룡 역시 적의 손에 전사했구요. 이어서 진린의 판옥선도 위험에 빠졌구요. 적이 기어 올라왔고, 진린의 아들 진구경까지 부상당해가면서 싸워서 겨우겨우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안 싸웠다 하기엔 조선과 명 수군이 좌우익이 되어 포위공격했다는 말이 확실히 나오고, 등자룡과 진린의 배가 포위당한 적이 공격하기 좋은 위치에 있었죠. 그런데 열심히 싸웠다 하자니 1만명 넘는다는 명군은 다 어디가고 (...) 이 둘 다 백병전을 당했는가 하는 것이죠. 다들 혈전을 치루느라 대장을 못 도왔다 하기엔 명군의 피해도 거의 등자룡의 배 정도입니다.
+) 일본군의 기록에 나오는 명 수군은 거의 조선 수군입니다. 시마즈 가문의 기록에 나오는 명 수군 역시 대부분 조선 수군이라 봐도 될 거구요. 다만 북쪽의 명 수군과 남쪽의 조선 수군이라고 구분지어놓은 걸 보면 확실히 참전은 한 것 같습니다.
사선, 호선은 역시 적과 싸우기엔 무리였고, 시간이 흐르면서 진린과 등자룡이 탄 판옥선만이 일본군과 싸웠다, 정도가 합리적이겠죠. 진린은 왜교성을 공격할 때도 이순신과 함께 앞에서 싸우다가 뻘에 박혀 고립될 뻔 했을 정도로 앞에서 싸웠으니까요. 그도 아니면 조선 수군이 우세하고 판옥선 강하니까 전공이나 좀 줍자고 합세한 걸지도요.
어느 쪽이든, 일단 진린 자신은 열심히 싸워줬으면 합니다. 이게 좀 큰 효과를 불렀거든요. 진린이 위기에 빠지자 이순신은 급히 진린을 구원하려 했습니다. 마침 근처에 적 대선이 있었고, 적장이 지휘하고 있었죠. 이 배를 공격해 적장을 쏴 죽이자 진린을 포위한 적들이 급히 그 배로 몰려들어왔습니다. 진린으로서는 한 숨 돌린 거였죠. 하지만 이 때문에 통제사 상선이 적들에게 노출돼 버립니다.
적들이 상선에 몰려듭니다. 조총병들이 탄 적선들이 말이죠. 그리고 시마즈 가문은 조총에 관해서라면 일본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가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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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의 유효사거리가 짧다고 하지만, 해전에서 교전 거리 역시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화포로 어느 정도 때려부순 다음에는 불화살로 차근차근 불태워야 했고, 나포하려면 조선군이라도 일본군의 배에 올라타서 백병전을 벌여야 했구요. 조총은 조선군에게 충분히 위협적이었습니다. 더 크고 강한 오오쓰쓰(大筒)를 동원하기도 했고, 육지의 경우 항복한 조선인을 시켜 조선의 화포를 쏘게 하기도 했죠.
2차 출동인 사천 해전, 결코 불리하지 않은 해전에서도 이순신이 눈 먼 적탄에 부상을 입습니다. 부산포 해전에서는 정운이 전사하기도 했죠. 대장선은 큰 만큼 눈에 잘 띄기 마련이고, 화려한 갑옷을 입은 대장 역시 저격하기에 좋은 대상이었죠. 거기다 장수들은 장대에 올라 독전하기도 했구요.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군은 장수를 집중적으로 저격합니다. 원균의 출동 때부터 두 명이 저격당했고, 왜교성 전투 동안에도 많은 장수들이 저격당합니다. 노량해전에서 저격당한 건 10여명, 이를 장수로만 본다면 큰 수치입니다. 조선 수군이 80척으로 봐도 그 중 배를 지휘하는 장수들 10여명이 당한 거니까요. 저격당했지만 부상에 그친 이들은 여기 포함되지도 않았습니다. 전라우수사 안위가 중상을 입었고, 해남현감 류형은 무려 6발을 맞고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싸웠다고 합니다.
전투는 난전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는 일본군과 그걸 막으려는 조선군이 뒤섞이면서요. 거기다 일본군은 아직 끝이 없었습니다. 포위망 바깥에서도 조선 수군을 뚫으려는 적들이 남아 있었죠. 특히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이끄는 병력이 수군을 공격했고, 시마즈군도 힘을 얻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명 수군의 혼란까지 섞였죠. 밤인데다 난전이 되면서 수군은 진형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적들을 차근차근 잡아야 했지만 적들의 수도 너무 많았죠. 나름대로 관음포에 포위하는 작전을 썼지만 명량 때처럼 유리한 지형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장을 노리는 적의 저격이 잘 통할만 했죠.
+)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히데요시에게 서국 제일의 무장이라는 말을 들은 자로, 큐슈에선 시마즈 요시히로의 적이었습니다. 헌데 이 때도 도와줬고, 나중에 세키가하라 전투 끝나고 큐슈로 돌아가는 요시히로에게도 잘 대해줬네요.
"우치적·이섬·우수·유형·이언량의 공이 우수하였고,
수공(首功 가장 큰 공)은 이순신이 타고 있던 배였습니다." - 권율의 보고
그리고 이순신, 그는 단지 머리만 쓰는 장수가 아니었습니다. 절대 불리하지 않았던 사천 해전에서도 적의 탄환에 맞았고, 어느 해전에서든 상선에서 적탄에 맞는 자들이 꼬박꼬박 나왔습니다. 명량해전이 그렇게 특이하지 않았던 것이죠. 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진린을 구하기 위해 돌출됐다 하지만 그 전에도 계속 전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적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던 거죠. 이 때는 그 위험이 조금 더 커진 것일 뿐이구요.
+) 진린이 포위당한 건 밤 4경(1~3시)고 이순신이 전사한 게 아침인 걸로 기록된 걸 보면 정말 진린을 구한 직후에 맞았는지도 의문이긴 하구요
직접 북을 치며 독전하던 이순신, 그에게 적들의 총탄이 쏟아집니다. 안타깝게도 이번 공격은 빗나가지 않았구요.
"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戰方急 愼勿言我死 전방급 신물언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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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독(진린)은 배 위에 넘어지기를 세 번이나 하고 큰 소리로 통곡하면서, "
죽은 뒤에도 나를 구원해 주셨소."하고 다시금 가슴을 치며 한참이나 울었고 도독의 군사들까지도 모두 다 고기를 내어 던지고 먹지 않았다.
영구는 고금도에서 떠나 아산으로 돌아왔다. 연로의 백성들은 남녀 노소 없이 통곡하며 뒤를 따랐다. 선비들은 제물을 차리고 제문을 지어 곡하며 친척의 죽음을 슬퍼하듯 하였다. - 행록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전사하였으니 앞으로 주사의 일을 책임지워 조치하게 하는데 있어 그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참으로 애통합니다. 첩보 있던 날
군량을 운반하던 인부들이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 무지한 노약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처럼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중략)
이순신이 나라를 위하여 순직한 정상은 옛날의 명장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포장하는 거조를 조정에서 각별히 시행하소서.” - 선조실록 12월 7일, 이덕형의 보고
우치적·이섬·우수·유형·이언량의 공이 우수하였고, 수공은 이순신이 타고 있던 배였습니다.
다만 이순신이 군사들에게 약속하기를 ‘다투어 수급을 베려고 하다 보면 적을 많이 죽일 수 없다.’고 경계하였으므로, 이번 전투에서 수급을 참획한 것이 매우 적었습니다. - 선조실록 12월 18일, 권율의 보고
기록에는 200~300여척 정도의 적들을 불태우고 나포했고, 살아 돌아간 배는 50~100여척 정도라 합니다. 한편 시마즈 가문 기록에는 이름 있는 무사만 26명이 전사했고 그 외에 전사자 다수라고 하구요. 그리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작은 배로 갈아타서 겨우 도망갈 수 있었구요. 총대장이 배를 바꿔 탄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겁니다. 그것도 못 해도 100척이고 최대 300척까지 추측되는 대함대의 대장이 말이죠.
현재 가고시마현에는 상부연(想夫恋)이라는 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가고시마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미망인들이 돌아오지 않은 남편들의 영혼을 위로하며 다시 만날 날을 그리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 시작이 바로 정유재란 때 돌아오지 못 한 이들을 기리는 것이라고 하구요. 하긴 7년 전쟁을 다 버텨놓고 돌아오는 길에 죽었으니...
시마즈군은 고니시군과 함께 사지에서 벗어난 후 부산으로 가서 24일에 조선을 떠납니다. 이 전후로 모든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마침내 임진왜란은 끝이 나게 됩니다. 많은 상처를 남긴채로 말이죠.
진린은 해전이 끝난 후 경상우수사 이순신을 임시로 대장에 임명하고 남해도를 공격합니다. 해전에서 얻은 수급과 여기서 얻은 수급이 모두 진린의 공이 되었고, 난중잡록에 따르면 얻은 수급이 1백여급이라 합니다. 이후 진린의 보고엔 무려 320명을 죽이고 생포했다고 했고, 이는 4로 중에서 으뜸이었습니다. 진린의 열전에도 수공(首功)을 세웠다고 적고 있구요. 목숨을 건 만큼 참 큰 공을 세우긴 했습니다. 다만 남해도의 적들은 이미 거의 도망간 뒤였고, (애초에 수도 별로 없었구요) 백성들을 왜적으로 몰아 죽인 게 많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지 4년 후에도 이덕형이 남해의 백성들을 달래줘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요.
그리고 이순신, 그는 이렇게 전설이 됩니다.
조선시대부터 자살설이 나온 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사람 마음은 다 똑같은가 봅니다. 그가 무사히 살았다 해도 선조 때문에 편히 살지 못 했을 거니까요. 어쩌면 또 다른 일로 그의 모든 것이 부정당햇을수도 있구요. 그가 죽자 선조도 그에 대한 추모는 마음껏 하게 해 줍니다. 좋은 장수는 죽은 장수라는 거겠죠.
뭐 그럴 마음이 아예 없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적들을 더 무찌르겠다는 생각이 더 강했을 거구요. 무엇보다 노량해전이 마지막 전투가 될 거라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고니시가 남아 있었고, 동쪽으로 아직 도망 못 간 적들이 숱하게 남아 있었으니까요. 최소한 부산포까지는 가야 끝이구나 하겠죠. 현실적으로 어려웠을지 몰라도 이순신이 살아있었다면 곧바로 적들을 깨뜨리며 부산까지 가려 했을 겁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노량해전처럼 혈전이 벌어지는 가운데서 죽음을 택해서 지휘체계가 무너지는 일을 벌일 정도로 무책임한 사람은 절대 아니죠.
三尺誓天 山河動色 삼척서천 산하동색 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
석 자 칼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이순신의 두 검에 새긴 글자입니다. 그의 소원대로 노량은 적들의 피로 물들었습니다. 비록 원수를 모조리 갚지는 못 했지만, 침략자에 대한 그의 분노를 잘 보여준 것이죠.
"금월 19일 사천·남해·고에 있던 왜적의 배 3백여 척이 합세하여 노량도에 도착하자,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나아가 맞이해 싸우고 중국 군사도 합세하여 진격하니,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왜선 2백여 척이 부서져 죽고 부상당한 자가 수천여 명입니다.
왜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나무 판자·무기 또는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고 떠 있어 물이 흐르지 못하였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습니다." - 선조실록 11월 27일, 이덕형의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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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에 넣기 애매했던 이야기 하나. 그가 정말 그런 유언을 했을지는 의심받고 있습니다. 그를 방패판으로 가리고 싸움을 독전했다는 사람 역시 이회, 이완, 손문욱 등 다양하구요. 거기다 류형 같은 경우는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 분노해서 더 열심히 싸웠다고 하죠. 징비록에 이게 처음 나오고, 행록에는 처음엔 없다가 나중에 추가됐다고 합니다.
다만 난중잡록에 유언의 전문은 안 나오지만 방패로 가리고 비밀로 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확실히 그런 유언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랬다는 말은 전사 직후부터 널리 퍼진 게 아닐까 싶네요.
그럼, 다음 편으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