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한병철, 『투명사회』
: 투명성의 함정. 부정성이 필요한 이유. “왜 무한한 소통의 자유가 새로운 형태의 직접 민주주의와 연대로 이어지지 못하는가?”
<1>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인상적으로 읽었기에, 『투명사회』도 큰 고민 없이 빼 들었습니다. 『피로사회』가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되는 상황과 그로 인한 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비판적으로 다루었다면, 『투명사회』는 오늘날 훌륭한 방향으로 평가되는 투명성의 증대가 갖고 있는 문제를 고민하게 합니다. 한병철은 “투명성을 부패와 정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사람은 그 영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14)”고 지적하며 포문을 엽니다.
우리는 투명성의 증대를 권력과 부패에 대한 바람직한 감시의 상승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한병철은 투명성이 “타자와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15)”한다고 주장합니다.
투명성은 순응에 대한 강압을 낳고 이로써 지배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다.
투명성은 신자유주의의 요구다. 투명성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모든 것을 밖으로 표출시킨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정보로 전환된다. 6(강조는 인용자, 이하동문)
한병철은 만약 정치의 모든 것이 즉각 공개된다면, 정치는 불가피하게 호흡이 짧아지고 즉흥적 성격을 띠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정치는 잡담처럼 얄팍해진다. 전면적인 투명성은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에 일정한 시간의 굴레를 씌우는데, 그 속에서 천천히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래지향적 비전은 점점 더 희소해진다(5~6).” 이렇게 되면 진정한 의미에서 기존의 시스템과 대결하는 대안적 정치 운동은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입니다.
투명성 속에는 기존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의문시하는 부정성이 들어 있지 않다.(···) 완벽하게 투명한 것은 오직 탈정치화된 공간뿐이다. 지향점 없는 정치는 국민투표로 전락한다. 25~26
‘지향점 없음’은 투명사회가 모든 것을 계산 가능한 단순한 정보로 만드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의 생성이나 서사 구성 같은 기획은 배타적이거나 선별적이라는 측면에서 부정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계산 가능한 정보로 환원할 수도 없지요. 한병철은 투명사회가 되어가는 지금 오히려 이러한 부정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물들은 어둠이 아니라 과도한 빛 속에서 존재의 힘을 잃고, 사유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익사됩니다.
투명사회는 정보사회다. 정보는 어떤 부정성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투명성의 현상이다. 정보는 긍정화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어진 언어다.(···)
투명사회에는 진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가상도 없다.(···) 완전히 투명한 것은 공허뿐이다. 이 공허를 제거하기 위해 대량의 정보가 유통된다.(···) 더 많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만으로 세계를 밝힐 수는 없다.(···) 더 많은 정보가 방출될수록 세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83~86
이러한 투명사회는 모든 것을 계산 가능한 정보로 환원시키고, 그럼으로써 세계를 “경제적 파놉티콘”으로 만듭니다. 투명에의 강요는 “이익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발로입니다. 투명한 정보의 제공은 “생산관계의 최적화”에 봉사하게 됩니다(101).
우리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혁명으로 새로운 형태의 직접 민주주의와 연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은 쓰레기가 되어가는 정보의 홍수와 만연한 악플들의 향연입니다.
신자유주의적 경제주체들은 행동을 함께할 수 있는 ‘우리’를 형성하지 못한다. 사회가 점차 원자화되고 자기중심주의가 강화되어감에 따라 행동을 함께할 수 있는 여지는 급격히 축소되며, 이로써 자본주의 질서를 정말로 위협할 수 있는 반대 세력의 형성도 어려워진다. 공동체는 단독자에 밀려난다. 다중이 아니라 고독이 오늘의 사회 상황을 특징짓는다. 사회의 전 영역에서 함께하는 태도, 공동체적인 정신이 무너져가고 있다. 연대 의식의 희귀해진다.(···) 공동체적 정신의 침식으로 인해 공동의 행위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날이 갈수록 희박해진다. 134
“손 없이 손가락질만 하는 미래의 인간,” 즉 호모 디기탈리스는 행동하지 않는다. “손의 위축증”으로 인해 인간은 행동 능력을 상실한다.(···) 행동은 기존의 지배적인 힘에 새로운 것, 다른 것을 맞세우는 일이다. 행동에는 부정이 내포되어 있다. 행동은 적극적인 무언가를 추구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다른 무언가에 대한 반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의 긍정사회는 모든 저항적 형식을 회피하며, 이로써 행동을 소멸시킨다. 이 사회 속에는 그저 동일한 것의 다양한 상태들만 있을 뿐이다. 160~161
투명사회의 명령은 시스템의 안전에 기여하는 것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해방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사태는 더욱 악화됩니다. 투명성 확대의 진정한 효과를 자각하지 못하고, 착각함으로써 오히려 자발적으로 전체주의적 통제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무제한의 자유와 무제한의 커뮤니케이션은 전면적 통제와 감시로 돌변한다. 소셜미디어 또한 점점 더 사회적인 삶을 감시하고 착취하는 디지털 파놉티콘에 가까워진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서로 열심히 소통하며 그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노출한다. 이로써 그들은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7
벤담의 파놉티콘에 갇힌 수감자들이 감독관의 지속적인 현존을 의식한다면,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그 속의 주민들 스스로가 자기를 전시하고 노출함으로써 파놉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파놉티콘적 시장에 전시한다.(···) 노출증과 관음증이 디지털 파놉티콘인 인터넷을 살찌운다. 주체가 외적인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가발전적인 욕구에 의해서 스스로를 노출할 때, 그러니까 자신의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을 잃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그것을 버젓이 드러내놓고자 하는 욕망에 밀려날 때, 통제사회는 완성된다. 95~96
그래서 한병철은 “새로운 계몽은 바로 인간의 삶과 사회생활에서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영역이 투명성의 강제로 인해 마구 파괴되고 있음을 인식하는 데 있다(19).”라고 말합니다. 그는 무비판적으로 투명성의 확장을 예찬할 것이 아니라, 그것의 진정한 효과를 직시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혁명의 현실을 냉정하게 평가할 것도 요청합니다. 한병철은 이럴 때 일수록 ‘거리두기’와 ‘부정성’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세계를 변화시킬 진정한 행동은 그 속에서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2>
2011년부터 웹진 운동을 했습니다. ‘만인을 위한 장’이었고 특정 분야나 매체로부터 자유로운 열린 공간을 지향했습니다. 이름하여 ‘잡글웹진(
http://cafe.daum.net/essaywebzine)’. 처음에는 자발적인 네티즌들의 참여가 있었고 대안적 운동의 그림을 구상할 여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웹진의 이름(잡글)에서 드러나듯이 처음부터 뚜렷한 방향을 만들지 않았고, 사실상 ‘무(無)키워드’로 기획한 까닭에 응집력이 형성되기 어려웠습니다. ‘아무나’와 ‘무엇이든’이 21세기 해방의 키(key)라고 생각했지만, 한병철이 적절히 지적했듯이 그것은 공허한 투명의 위험이기도 했던 것이죠.
웹진을 개설한지 5년차인 지금은 오프모임으로 진행되고 있는 독서모임과 영화모임의 데이터베이스 창고로 전락했습니다. 오프모임은 웹진의 세부 프로그램 중의 하나였는데, 현재는 웹진을 유지하는 유일한 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웹상에서만 활동하시는 분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운동의 에너지는 전혀 못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요.
인터넷의 디지털 주민은 집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하나의 우리를 생성해낼 수 있는 집회의 내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집결하지 않는 특별한 양상의 군집, 내면이 없는 무리, 영혼과 정신이 없는 무리다. 그들은 무엇보다 고립된 채 혼자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히키코모리다. 라디오와 같은 전자 매체가 사람들을 집결시킨다면, 디지털 매체는 사람들을 따로 떼어놓는다. 131
한병철의 디지털 세계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박하다는 인상을 지을 수 없지만, 귀담아 들을 지점은 있는 것 같습니다. 『투명사회』에서도 언급됐듯이 많은 포스트모던 이후의 이론가들이 디지털 주민에 의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는데, 그것을 엄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잡글웹진’의 경우에도 크게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고요.
오프모임에 비해 온라인 상의 만남은 확실히 더 투명한 성격을 가집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응집력은 떨어지지요. 직접 대면한 사람과의 이별에 비해 온라인 상의 로그인과 로그오프는 너무나 손쉽지요. 모든 현실적인 관계는 필연적으로 일정부분 폭력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의 상호 용인 속에서 존경과 신뢰가 싹틉니다. 반만 디지털 주민의 사회는 “동일한 것의 다양한 상태들”로 머물러 있고, “디지털 이웃 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 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체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버(74)”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저는 한병철의 디지털 세계와 주민에 대한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디지털 사회가 등장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운동들도 있었고, 모든 디지털 주민이 히키코모리도 아닙니다. 디지털 사회와 투명성의 확장을 비판적으로 살피면서도 그것의 이점을 인정하고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한병철은 악플의 물결을 보면서 상호 존경이 없는 오늘날의 현실을 개탄하는데, 매체 간의 상호 존경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디지털 사회와 현실 사회, 디지털 주민과 현실 주민 사이의 상호 보완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과거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종교나 국가 같은 거대 이데올로기에 의해 개인이 폭력적으로 제약되던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후 개인의 단독성을 확보하는 운동이 진행되어 왔고 성취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유를 획득한 개인은 불안한 파편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자본주의는 파편화된 개인을 잡아먹습니다. 지금 우리의 고민은 단독자로 서는 개인을 인정하면서도 가능한 연대는 어떤 것인가입니다. 디지털 혁명에 의해 그러한 연대가 가능할 것이라 여겨왔지만, 그것이 녹록치 않음이 확인되는 지금, 새로운 통찰과 노력이 필요한 듯 보입니다. 그 고민은 ‘잡글웹진’의 미래와도 연관 되겠죠. 폭력적이기에 꺼려만 졌던 진리에의 고민과 직접적 대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국면을 모색해야 되는 시기가 왔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