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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02 10:21
개인적으로 김훈씨의 작품과 그의 말투를 참 좋아라 합니다.
건조하지만, 뭔가 문장의 힘을 느낄 수 있어서 그런것 같습니다. 김훈씨가 이렇게 기고문을 낸 것은 거의 못 본 것 같아서 참 새롭습니다. 그만큼, 감정을 억누르고 억눌러서 썼다는 느낌이 들긴 하는데, 이 글들이 얼마만큼 힘을 발휘할지에는 약간은 회의적인 느낌이 드는 게 안타깝습니다. "대통령의 명령이 구중궁궐에 갇힌 대왕대비의 신음처럼 대궐 담 밖을 넘지 못한 꼴이니, 그 나머지 일들은 기력이 없어서 더 말하지 못한다." - 아마, 국민 대부분들도 이 사건에 대한 기력을 잃어가고 있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15/01/02 10:49
시간이 이렇듯 많이 흘렀음에도 지지부진한 정부의 대처를 보면서 작은 분노만 속으로 삭였는데 부디 새해에 진행될 여러 대책사업들이 진정성 있게 진행되었으면 좋겠네요.
15/01/02 10:53
저는 소설가로의 김훈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소설이라는 것이 본래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역량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라 소설가에는 맞지 않습니다. "내 젊은 날의 숲" 처럼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를 하는 소설에서는 모른 척 넘어가려야 넘어가기 힘들 정도로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장가로의 김훈은 참 좋아합니다. 문장을 아름답게 쓴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지요. 장황한 수사를 늘어놓는 사람들은 많습니다만, 그렇게 쓰인 문장이 날카롭게 느껴지는 것은 김훈 뿐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5/01/02 11:16
그래도 남한산성이나 칼의 노래를 보면 그 특유의 스타일이 있잖아요?...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김훈만의 스타일...저는 그게 참 좋더라구요...--;;;
15/01/02 11:24
저도 김훈 무척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짓는 재능은 없다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글을 쓰는 솜씨야 탁월하지요. 개인적으로는 소설가보다는 수필가가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15/01/02 11:30
서사가 빈약하죠. 그런데 저는 그것이 서사를 끌어나가는 능력이 부족하다기보다는 서사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에 더 가깝다고 봅니다. 김훈은 사람 개개인의 내면을 파고들어가는 데 집중하며, 그 과정에서 서사는 과도할 정도로 생략되어 심지어 배경 정도에 그치기까지 합니다. 저는 이걸 스타일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겠지만요.
사실 서사보다 인물(특히 주인공)의 내면에 집중하는 소설이 딱히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런 류의 소설을 접하다 보면 '이 작가가 시방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있는 건가?'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만 김훈은 적어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글을 씁니다. 그래서 저는 김훈을 높게 칩니다.
15/01/02 12:08
일단, 저도 김훈의 글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을 다시 말씀드리고,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지, 능력이 없는 것인지는 애매한 부분이 있기는 할 겁니다. 그런데 김훈 본인도, 소설은 쓰기가 어렵고 수필을 쓰는 일은 쉽다고 말하는 걸 보아서는 어느 정도 역량의 문제도 있음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오해가 있을가 분명히 밝히는 것은 제가 그렇다고 김훈을 낮게 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하신 내면에 집중하는 소설에 대하여, 이것을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글이 가지는 의미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훌륭한 문학작품이나 훌륭한 글로 부를 수 있을 망정 훌륭한 소설로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러한 글들이 무척 많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중 뛰어난 글도 많이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소설로서 우수하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러한 것이 제 관점일 뿐,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저는 '소설' 이라는 것에는 반드시 이야기가 있어야 하며, 좋은 글과 좋은 소설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15/01/02 12:01
예전에 쓴 기사나 그의 수필에서 드러나는 문장가로서의 김훈을 더 좋아하지만, 소설가로서의 김훈이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화와 드라마가 난무하는 시절에, 소설이 이제와서 '본래 이야기'이기만 하지도 않고 해서도 않죠. 그리고 화장 등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서사 구조도 탁월한 면이 있다고 봅니다.
15/01/02 12:15
저는 문장가와 소설가는 다른 구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장을 짓는 능력과 이야기를 짓는 능력은 분명히 다른 것이지요.
방금 위에도 답글을 달았습니다만, 저는 이야기가 없는 것을 소설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이야기가 없는 소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건 소설이 아니지 않나라는 것이지요. 사실 저는 화장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문장이나 구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간 이야기에 대해서 말하자면 남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김훈의 역량이나 작품의 가치를 낮게 본다는 뜻은 아니기도 합니다.
15/01/02 13:02
생텍쥐페리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대단한 문장가이지만 동시에 서사에서도 강점을 보이죠. 서사와 메세지가 같이가요. 그에 반하여 김훈은 따로노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칼의 노래같이 메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인생을 지닌 역사속인물을 주인공으로 한경우를 제외하면 그렇죠.
동시에 까뮈와 김훈을 비교할 수 있을것같은데, 까뮈는 서사의 약점을 형식의 강점으로 뒤덮는 느낌을 받곤합니다. 김훈에게 이러한 형식미는 찾기 어려운듯 해요. 국내소설가인 김애란, 김연수등과 비교하면 김훈이 문장 만큼은 우위에 있다고 보이지만 김애란의 단편선에서 보이는 서사의 치밀함 , 김연수의 설산이나 네가누구든에서 보여주는 형식적측면의 수준과 비교하면 소설가로써 김훈이 국내 최정상인지에는 항상 의문이 있습니다.
15/01/02 12:05
저도 코알라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기자시절 김훈이 쏟아낸 글에는 찬탄했지만 소설가로서는 글쎄요... 흐흐 소설은 역시 이야기고 서사의 탄탄함이 그의 역량을 재단하지요. 그렇다고 김훈을 작가주의로 작가로 보기도 어렵고요. 내면을 파고드는 면을 말하자면 특유의 스타일에서 나오는 화려함일뿐 독특함은 부족하다 느낍니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평가도 저랑 비슷해서 놀라운데요.
15/01/02 13:28
소설에는 서사가 필요하다는건 일종의 취향 내지는 편견이 아닌가...싶네요. 물론 그랬던 시기도 있었다고 봅니다만.
게다가 아직도 일부 독자들에게는 진리일 수 있겠고...그러나 지금(혹은 미래) 시점에서 반드시 보편타당하지는 않은 듯. 음악으로 예를 들자면, 화성과 특정한 진행 같은게 있어야만 제대로된 음악이었던 시기가 있었죠. 지금은 그야말로 한 소절만 죽어라 5분 동안 반복하면서 약간의 미세한 변화만 주는 전자음악도 훌륭한 음악이라 할 수 있죠. 물론 '트랜스' 라던가 '테크노' 라던가 많은 소분류가 새로 태어나거나 재정의되거나 하기도 하지만... '소설'은 물론 '글'에 비하면 소분류이긴 하지만 동시에 다시 여러가지로 분할될 수 있는 큰 카테고리이기도 합니다. '서사중심적 소설'은 예전에는 소설 그 자체였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봅니다. 이상한 동어반복이나 진행되지 않는 서사구조, 자동필기, 시적허용, 산문시인지 소설인지 모호한 구성이라던가... 카테고리란 성장하기도 하고 재정의, 재분류되기도 하는 것인데...수필과 소설과 시의 엄밀한 경계선이 예전엔 있었다면 지금은 모호해지거나, 교집합적인 신종의 무언가가 탄생하거나, 여러가지 일들이 있고 또 있었지 않나 싶고 그렇기 때문에 개별 작품들에 대한 평가가 매우 어려워지는 것이지만...결국 평가라는건 일종의 '레벨'이랄까 '수준'의 문제인데 수준이 딸리면 그냥 미흡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평가될 뿐이지만 분명 대단한 '수준'이 있는데 예전의 분류로는 잘 이해가 안된다면 그건 신사조나 새로운 무엇이 되는거죠. 김훈은 문장에 천착해있던 아니건 간에 평가를 받을만한 부분이 있고...그건 개인의 '이런 것만이 소설이다 이론'을 넘어선다고 봅니다.
15/01/02 13:34
예, 박상륭이나 파스칼 키냐르를 소설가가 아니라고 말할 순 없으니까요. 헌데 이들이 보여주는 내러티브에 대한 형식적 묵시와 김훈의 그것은 같은 궤에 놓일 게 아니죠.
15/01/02 13:50
아무래도 그 수준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A가 부족해도 B가 만렙이라며 훌륭하다고 볼 수 있다면, 김훈은 B가 최고급인건 알겠는데 그 B만으로 괜찮겠어? 이런 느낌이 들어요.
다른 분야에서 예를 찾아보면 시인 황병승은 기괴한 방식으로 글을 쓰지만 이성복이 가진 한방의 문장들을 가지고 있다고 보거든요. 그 한방들이 황현산이 황병승을 극찬한 이유라고 보고. 그런데 같이 미래파로 묶이는 젋은 시인들을 보면 분명 괜찮고 꽤나 수준이 높은 시인건 알겠는데 평생 들고갈만한 문장이 있다고 보이진 않네요. 그때는 이것만으로 괜찮겠어? 라고 묻고 싶어지는 것 같아요. 김훈도 분명 문장이 대단한 편이고 사유의 수준도 높다는건 알겠는데, 그래서 김훈이 까뮈급의 사유수준과 문장력을 보이는가 하면 좀 아쉽거든요. 문장의 명쾌함도 까뮈랑 비교하면 떨어지는 느낌이고.
15/01/02 14:22
사실 저는 피겨스케이팅이나 체조가 왜 스포츠로 구분되고 있는지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그것들은 무용처럼 예술의 영역으로 분류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그건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용이 스포츠가 아니라고 해서 그게 스포츠보다 열등하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저 구분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말씀하신 지금의 서사 중심적이지 않은 소설들이 그 가치가 낮은 것이 아니라, 소설이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소설이라는 것은 허구적 산문을 말하는 것일텐데, 이야기가 없다면 허구적이어야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러한(서사 중심적이지 않은), 글들을 쓰는 데에 왜 소설의 형식을 빌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쁘다거나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소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되, 대체 왜 소설이어야 하는 것인지를 모르겠다는 뜻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 표현의 방법 중에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표현을 하는 것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고 보고 있습니다. 글의 가치가 아니라 소설의 가치를 매긴다면 이야기를 볼 수 밖에 없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시라고 해도 그것을 소설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 고루한 제 생각입니다. 그야 그 글이 '소설'로 나쁘다는 것이 글로 나쁘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확실히 저는 완고한 면이 있습니다. 시쳇말로 꼰대스러운 부분이라고 할 것인데, 과거의 소설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없는 새로운 무엇인가가 나왔다면 그건 소설이 아닌 새로운 무엇이지 그걸 굳이 소설의 영역으로 넣어서 해석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입니다. 소설이라는 기존의 단어에서 평가를 하려면 기존의 기준에 맞추어야 할 것이고, 그 기준에서 잴 수 없는 것이라면 그에 맞는 기준을 정하면 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쨌든, 저는 김훈이라는 사람의 글을 참 좋아합니다. 문장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생각하게 하는 글이고, 몇 번을 다시 봐도 질리지 않는 글이기도 합니다. 그에 대해 굉장히 높이 평가합니다만, 굳이 소설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면 좋은 소설이기는 하되(문장도 소설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할 것이고, 이것은 김훈의 글에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제가 가지고 있는 소설의 의미에 관한 것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15/01/02 11:02
문장가가 해야 할 일을 해주네요. 뭔가 이래도 되나 싶고 이렇게 지나가도 되나 싶은 그 께름칙함에 대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다니는 단어들을 잡아와서 문장으로 만들어내서 비로소 실체가 있는것으로 만들어주는...
이렇게 명백히 잘못한것에 대해서 이다지도 두루뭉실하게 넘어갈수도 있나 싶습니다. 너무 교활하고 지혜로웠다고 해야 할까요. 사실 세월호라는 단어는 국민 모두가 피곤해하고 더이상 생각하기싫은 그말싫이 되어버렸죠. 그게 감히 떳떳해졌고요.
15/01/02 11:21
마지막에 인용하신 문구는 원문을 보더라도 계속 눈길이 가게 됩니다.
또한 이 글에는 사실, 다른 어떤것도 아닌, 대한민국의 한 작가분의 인생에 대한 통찰, 생각들이 담겨있다 생각합니다. 비록 글을 보는 식견이 미천하여 명문이라 칭하지 못하겠고, 함부로 좋은 글이라 권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15/01/02 12:14
기자로서의 김훈이 쓴 가장 좋은 글들은 거리의 칼럼과 칼기 추락사고에 관한 것들이었다고 생각해요. 르뽀 정말 잘쓰는 기자였고...
15/01/02 13:04
사장의 미감을 극단으로 추구하는 탐미주의가 언제나 소설가의 미덕으로 환원될 이유는 없지요. 김훈이 벼린 문장이며, 꽉 짜인 구성미는 분명 문학적 미감을 자극합니다만 이것만으로 좋은 소설가라고 말할 수 있을진 의문입니다. 레이먼드 카버라던지, 혹 이언 매큐언처럼, 같은 미덕을 공유하는 소설가가 없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김훈과 그네를 같은 영역에서 놓고 볼 땐, 소설의 오랜 독자들은 어떤 이물감을 맛보기 마련입니다. 작가로서 당연히 갖는 고유한 개성을 뒤로하더라도요. 저들과 달리, 작가로서, 소설가로서 장르에 대한 야망과 소명을 김훈의 소설에서 엿볼 수 없거든요. 진정 특정한 장르를 자신의 업으로 상정한 예술가라면,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소설이란 주제/형식적 한계의 끝을 쳐내려가는 순간 올올히 전해오는 긴장을 통해 그 소명을 독자가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김훈의 경우 기성작에서 이미 확보되었던 소설의 주제/형식적 자유만을 향유할 뿐입니다. 좀 과격하게 말하면 장르문학의 그것과 다를 바 없어요.
물론 모든 작가가 소설의 형식적 가능성을 최우선으로 염두에 두어야한다는 건 아니며, 장르문학 종사자들은 감히 소설가라고 말할 수 없단 식의, 순문학 꼰대스러운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소설가가 쓸 정치철학서와 달리)정치철학자가 쓴 소설이라면 읽을만한 나름의 가치가 있을 것"이라던 테리 이글턴의 말이 소설가 세계의 한심한 전문성을 비꼬려는 의도만은 아니니까요. 단, '정치철학자가 쓸 소설'은 [예술로서 소설]의 표준을 겨냥한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며, 소설이란 형식에 비추어 미적 가치를 측량할시 '소설가가 쓸 정치철학서'에 기대하기 어려운 학적 엄밀성 이상으로 참담할 것임은 두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슐라 르귄의 <빼앗긴 자들>과 <어둠의 왼손>을 떠올려봅시다. '특정한 조건 하에서 다른 양상을 띌 인류의 이념형에 대한 공상'으로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고, SF 소설의 외연을 넓혔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만, 반대로 예술로서 문학적 가치를 논할 땐 유의미하게 말할 구석이 거의 없을 겁니다. 문학적 접근보다는 사회학적 접근을 할 때 (둘 모두 진부하긴 매한가지일 겁니다만)그나마 신선하고 유익한 걸 좀 뽑아낼 수 있겠네요. 반면, 같은 SF란 장르에 포괄된다고 한들, 로버트 홀드스톡의 <미사고의 숲>이나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일 경우 우린 좀 다른 이야길할 수 있겠죠. 이 둘은 작품을 통해 스스로 말하려는 바에 앞서, '소설'이란 장르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말하려는)주제와 (표현하려는)형식 사이의 조화와 긴장 속에서 작품을 엮어냅니다. 따라서 이들의 경우, 굳이 소재를 따져대며 '장르문학'이란 라벨을 붙여 보호하지 않아도 [소설]로서 존중할 이유가 충분하겠죠. 그리고 우리의 김훈이 소설을 다루는 방식은 테드 창, 로버트 홀드스톡보다는 어슐라 르귄에 무한히 가깝구요. 이글턴 식으로 말하자면 '수필가가 쓸 소설'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네요.
15/01/02 13:19
사실 저는 김훈의 '벼린 문장'에 대해서도 회의하는 편입니다. 벼린 문장을 보려면 시를 읽으면 될 일입니다.
박상륭은 저에게 여러가지 면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작가기는 하지만 "벼린 문장이라고 하려면" 박상륭정도는 되어야죠. 그의 언어가 그의 작품과 뼈와 살처럼 밀착하지요. 또한, 파스칼 키냐르나 가오싱젠같은 소설가는 작가주의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가지요. 영미권이나 유럽에서 각광받는 작가들은 모두 이렇게 탄탄한 서사를 기본 바탕으로 합니다. 살만 류슈디, 귄터 그라스가 좋은 예지요. 쟝르에 대한 철저한 이해, 그리고 서사와 주제의 밀착 이런 것들은 소설가라면 가져야할 당연한 야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서사예술로 이해하고 예술을 말라죽게 하지는 말아야죠. 테리 이글턴이 순전히 비웃음으로 저 말을 했다해도 할 말이 없어지는 순간입니다.
15/01/02 13:33
모르겠네요. 몇년 전의 저는 이것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왜 "테크노, 메탈, 일렉트로니카 같은게 음악이냐?" 같은 소릴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아직 흔들리는 와중에 있습니다. 작가주의는 작가주의대로 좋고, 서로 물고뜯고 이게 옳다 저게 옳다 논쟁하는 것도 좋다고 보긴 하는데...Canonical 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그 Canon도 가끔은 바뀌곤 하죠. 일단 저는 독자 입장에서 '읽어서 뭔가 얻은게 있으면 좋다'라는 식으로 갈수록 황희정승식 평가로 가고 있는 중이네요.
15/01/02 13:44
작가주의을 물어뜯는게 아닙니다. 서로 양립해야죠.
제가 작가주의작가를 안좋아하는 것도 아니구요. 사실 작가주의 작가 작품중 제가 열손 꼽는 좋은 작품도 있구요. 다만 모든게 작가주의로 뭉뜽그려지는 것은 반대입니다. 내가 이렇다는데 뭐 어쩌라고? 이런 식이 되어서는 제대로된 평가를 방해한다는 이야깁니다.
15/01/02 13:37
당연한 야망이란건 없죠. 창작자는 하고 싶은걸 제대로 했냐가 중요한거고, 그 하고 싶은게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가 중요한거지. 특정한 의미를 가지는걸 반드시 욕망해야한다고 말하는건 창작의 독이죠. 말씀대로라면 이상과 황병승은 시인이 아닐지언데.
서사의 한계를 지니면서도 끝내주는걸 써낸다면 그게 통섭인거고 진화인거죠. 다만 김훈이 아직 그 지점까지 도달했다고 보이지도 않고, 그걸 지향하는지도 잘은 모르겠다는 점에서 비판 요소는 있지만요.
15/01/02 13:48
선후관계로 보면 할머니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독자입장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창작의 독이건 뭐건 저는 좋은 작품을 읽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한 야망이란 특정 주제를 지향해야한다기보다 자신의 장르에 대한 형식적 이해와 분투에 대한 의식/무의식적 시도를 말함입니다.
15/01/02 13:52
그런 측면이라면 납득이 가네요.
그나저나 문학을 나눌만한 곳이 없긴 없는것 같네요. 딱히 문학과 관련 없는 글에서도 파이어가 되는걸 보면..
15/01/02 14:29
저는 김훈의 글을 좋아합니다만, 사실 그가 글을 쓰는 태도는 어슐러 르귄과도 많이 다릅니다.
본인이 직접 밝히듯이 이야기가 좋아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려고 쓰는 것이죠. 본인이 직접 한 말이기도 하거니와, 그가 살아온 삶을 보면 그게 빈 말은 아니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단지 그에게는 글을 쓰는 재능이 있었고, 예술이라기 보다는 생활을 위해서 글을 쓴다는 느낌이 무척 강하지요. 여러 매체에서 직접 밝힌 것들을 보면 딱히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애정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15/01/02 13:33
관광이라고 까지 말하기엔 김훈의 문장은 소설에 꽤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팟저님이 쓰신것처럼 같은 미덕을 공유하는 위대한 소설가가 없는것도 아니며, 국내 소설가와 비교했을때 문장력으로 최상위권에 위치한것도 어느정도 맞다고 봐서요. 미국에 nas가 있다고해서 타블로가 한국 힙합씬에 어느정도에 위치하는지, 메날두가 있다고해서 박지성이 한국 축구사에서 어느정도에 위치하는지 말할 수 없는건 아니니까요. 특히 본문에 첨부된 김훈의 글은 매우 좋네요.
박민규가 세월호에 관하여 쓴 수필 '눈먼 자들의 국가'와 비교해보면 역시나 박민규 쪽은 확실히 소설가라면 김훈은 확실히 수필가구나 싶습니다. 각각 장단이 있죠.
15/01/02 13:40
예, 위에서 제가 소설가로서 김훈의 아쉬움을 논했던 그 많은 부분들은, 그러나 수필가 김훈을 이야기할 땐 전혀 달라지니까요. 소설에서 김훈과 달리 김훈이 쓰는 수필에선 해당 장르의 형식적 한계를 줄타는 긴장을 종종 느낄 수 있죠.
15/01/02 13:58
당황스러운 건 사실인데, 글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니 그보다도 재미있다는 느낌이 훨씬 더 많이 드네요. 허허. 제가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원하는 미덕과 다른 분들이 원하는 미덕이 꽤 차이가 난다는 사실도 흥미롭습니다. 넵. 저는 소설을 소설답게 만들어 주는 미덕이 여러 가지가 있다면 (문장의 힘, 서사의 구조와 완결성, 이야기 자체의 흥미로움, 주제 의식 등등) 그중 한두 가지만 일정 수준을 넘더라도 양호하게 평가하는 편입니다. 예컨대 김진명은 끔찍한 사람이고 그의 글은 좀 더 끔찍하지만, 그렇다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소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 싶은 거죠. 그러니 결국 '더 잘 쓰인 소설이란 어떤 것인가'로 귀착되게 되는데 저는 국문과를 나왔지만 비평 쪽은 수업시간에 졸기만 하다가 다음 학기부터 죄다 빼 버렸거든요. 하기야 가장 재미있게 들었던 전공은 구비문학 쪽이었으니...
말이 엇나갔는데, 그래서 저는 '더 잘 쓰인 소설이 어떤 것인가'를 논하는 장에 뛰어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럴 능력도 없는 것 같고요. 제게 있어서 잘 쓰인 소설은 제게 어떠한 감정의 일렁임을 가져다주는 소설이고 제게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어둠의 왼손과 네 인생의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던 반면 미사고의 숲은 읽기 지루했으니 역시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천차만별이 아닌가 합니다. 어떤 작품의 문학적 성취를 객관적으로 점수 매길 신묘한 방법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저도 그 천차만별인 사람 중 하나로 살아가려고요.
15/01/02 14:02
저는 오히려 인용하신 글이 (제가 생각한) 김훈답지가 않아서 좀 당황스럽습니다.
가장 날카로운 대립의 장면을 무심한듯 담담하게, 그러나 세부까지 묘사를 파고들어 천착하면서도 글이 컴팩트한게 매력인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글에서 했던 말을 오락가락 몇 번을 하고 또 하는지.. 개별 문장은 김훈인데 글이 김훈이 아닌 것 같아요.
15/01/02 14:35
아, 그런데 전 사실 김훈이 이런 글을 썼다는 자체가 되게 신기합니다.
이 양반이 딱히 저항하거나 그런 사람이 아닌데,, 기본적으로 권력에 순응하는 스타일인데 왜 이러지? 하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15/01/02 16:06
원래 김훈은 이념이고 뭐고 상관없다면서 미세한 개인의 삶이라는 주제에 천착하는 인물이니까요. 이건 칼의노래에서도 남한산성에서도 흑산에서도 그랬죠. 당장 구중궁궐 얘기는 흑산에서 비슷한 글귀를 본 기억이 있으니... 딱히 정치적 입지 권력 뭐 이런 걸 고민할 사람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는 자리에 있지 싶습니다. 다만 이게 세월호 사고라는 단일 개체라기보다 하나의 절명이 300번 반복된 사건으로 인식한 탓 아닌가 합니다. 드문 일이잖아요.
15/01/02 16:07
김훈의 글 자체를 소개받은 점도 좋은 점이지만, 댓글로 진행된 논의가 흥미롭습니다.
(아마도 본문의 글이 소설가로서의 김훈과 산문가로서의 김훈에 대해 평가로 시작한 글이었기에 그에 관한 논의가 벌어진 게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결국 이러한 논의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 대답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이 드네요. 서사구조가 소설의 전부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진 가장 핵심적인 특징으로 평가 받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소설의 성립 과정을 조망한 학자들은 소설이란 장르의 성립에는 근대 새로운 계층의 발달과 큰 연관이 있을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소설의 문장과 서술 방식은 시와 드라마가 가진 '귀족적인' 언어의 구조와 지식을 요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 언어 자체가 비교적 간단한 형태로 쓰여진 흥미로운 이야기로서 상업을 중심으로 사회 내의 새롭게 부상하는 중산층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최초의 소설들이라 불리는 작품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루는 소재들이 그러한 독자 계층을 타겟으로 쓰여졌으리란 부분을 많이 찾아볼 수 있죠. 또한 당시 반-소설주의자들의 반응 역시 이러한 논지를 뒷받침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소설의 미덕이란 심미적으로 아름다운 문장과 표현보다는 얼마나 이야기가 독자들을 매혹시키는가, 즉 서사 자체에 맞추어져 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지금은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고, 소설로 분류되는 산문들 사이에서 언어 자체의 아름다움을 찾고자 하는 것이 낯선 모습도 아닌듯 합니다. 그렇지만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의 독특성, 왜 이것이 소설이라 분류되는가, 무엇이 소설이라 할 수 있는가를 따지게 된다면 서사의 문제로 가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도 댓글에 몇몇의 분들이 이야기하신 바처럼 김훈이라는 작가는 소설의 양식을 차용해 글을 썼으나, 서사의 독특성이나 전개 양식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김훈의 소설을 읽으면서 글곰님의 평가와는 달리 비문학의 기반을 둔 문학을 전개하시는 분이 아닌가 하고 느꼈습니다. 소설의 소재들도 계속해서 역사적 문헌을 근간으로 쓰여지는 바도 그렇고요. 어쨌거나 김훈의 일련의 작품들이 널리 호응을 얻고 읽히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거리는 많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부분은 새해 기고에 대한 많은 반응들이 보여주듯이 김훈의 비문학 범주에 속하는 글과 문학 범주에 속하는 글이 명쾌하게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이네요. 제 댓글이 너무 흐지부지 난잡하게 쓰여졌습니다만, 좋은 글과 댓글들 감사합니다.
15/01/02 16:11
사실 김훈이 기자 시절 쓴 글들, 특히 르뽀들은 지금 김훈이 쓰는 소설과 거의 다를 바가 없더군요. 그런 글이 신문지면에 실렸다는 게 신기한 감각이 드는 지경이라고 해야 하나... 애초의 그 경계에서 평생 써온 거 같아요.
15/01/02 16:09
김훈의 글에 대한 의견을 하나 덧붙이자면... 전 사실 김훈 소설 읽을 때 서사가 눈에 안들어오더라구요. 그냥 하나하나의 문장 하나하나의 문단에 정신이 팔리게 되서요. 서사가 좋은지 구린지 몇번을 읽어도 잘 모르겠어요. 형민우의 프리스트를 그렇게 읽곤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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