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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2/22 19:26:44
Name Mighty Friend
Subject [일반] 서재 결혼시키기
한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유행하던 책 중에 <서재 결혼시키기>라는 책이 있었다. 당연히 나도 사서 읽었고 언젠가 배우자와 그런 생활을 꿈꾸었더랬지. 사실 별 거 아닌 내용이다. 오랫동안 같이 살던 부부가 결국 둘이 서가를 따로 정리하다가 두 권씩 갖고 있던 책을 하나는 없애고 정리를 한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그때는 그냥 낄낄거렸건만, 막상 그게 내 일이 되자 새로운 화두들이 떠올랐다.

우리, 그러니까 나와 동거인은 서재 결합에 실패했다. 결국 거실 벽에 새로 맞춘 책장을 반으로 갈라야 했다. 실패한 내용을 분석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결정적으로 서로 취향이 비슷한 듯 달랐다. 그는 문명을 하지만 나는 롤을 하는 것처럼, 그는 전쟁사 마니아고 나는 잡다한 미시사 취향이었다. 서로 교집합이 있긴 했지만 아주 적었고 그 교집합을 제외하고는 각자 책장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책을 본가에서 실어왔을 때 그는 그야말로 헌책방에서 책을 쓸어온 것 같다는 혹평을 했다. 그래, 20년이 넘은 세로줄로 된 <안네의 일기>가 꼴보기 싫었겠지. 왜 그걸 버리지 못하냐고 할 때 화를 냈다. 그 책은 엄마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주신 거였다.  내가 초등학교 때 그 책을 매우 재미있게 본 기억 때문에 나는 버릴 수 없노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가 리더스 다이제스트 전권을 다 꽂고 싶으니 맞춤한 붙박이 책장 상단을 헌납하라고 했다. 나는 당연히 그런 구질구질한 잡지는 갖다 버리라고 답했다. 나는 그가 갖고 있던 밀리터리 잡지들을 정말 꼴보기 싫어했고 정리 안 하면 버리겠다는 협박도 불사했으니까.

주말을 맞아 이사한 뒤 몇 주나 지난 뒤, 그가 책장 정리를 시작하겠노라고 호기 넘치게 선언했다. 새벽까지 책장 정리를 한 그가 자러 들어와 내 잠을 깨운 뒤에 새벽에 불평을 늘어놓길, 내 책이 자기 책보다 많다고 주장했다. 오늘 거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쌓여서 기다리고 있던 책을 보는 순간 이를 악 물었다.

하늘이 노랗다. 언제 이걸 다 꽂지. 이렇게 된 거에 나의 우유부단함이 한몫한 걸 인정한다. 나는 왜 중학교 졸업선물로 받은 옥편을 버리지 못했던가. 이번에야말로 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아야 할 책이 한 무더기 있는 것도 인정한다. 동거인의 책장에는 깔끔하게 꽂혀 있는 책들을 보니 오기가 치솟았다.

향후 십 년은 책정리를 하지 않겠노라는 다짐을 하면서 책을 꽂는데 두 칸을 꽂고 나니 지쳐버렸다. 그러고 보니 치사하게 동거인이 자기 서재에 책꽂이를 하나 더 갖고 있다는 게 생각이 나버렸다. 나는 내 서재에 차단스를 둬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건 불합리한 딜이었던 거 같다. 책꽂이 한 줄을 더 차지해야겠다.

한참 연애를 할 때만 해도 서로 야근하다가 <초원의 집>에서 돼지꼬리 구워먹던 부분을 메신저로 쳐주던 남자가 이제 책장 갖고 치사하게 땅따먹기 하는 거에 실망스럽다. 아무튼 빨리 책장 정리나 마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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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랜드
14/12/22 19:46
수정 아이콘
소재가 흥미로와서 한때 저도 살까 말까 망설였던 책이네요. 자기 책장을 어느순간 반만 취사선택해야한다는건 참 잔인한거 같아요 ^^;
Mighty Friend
14/12/22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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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은 읽어볼 가치는 있습니다. 공간은 유한하고 책은 무한증식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서 취사선택이 필수입니다. 흑흑..
돈보스꼬
14/12/22 19:47
수정 아이콘
올초에 서재 결혼시켜봐서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도 책이 거의 안 겹치는 편이었는데 문제는 제가 책이 더 적어서... 어느새 슬슬 책장을 뺏기고 있더군요
한번은 이의제기를 했다가 영유권의 실효성(이거 빼면 어디에 둘건데?) 문제로 물러서야 했습니다...
Mighty Friend
14/12/22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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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상 제가 더 책을 많이 갖고 있어야 하는데 뭐든지 반반씩 갖는다는 무언의 담론이 형성이 되어 있어서 제가 한발 물러서야 했습니다. 님도 책을 사시면 책장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힘내세요!
14/12/22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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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을 사귀다 결혼했더니 책이 하나도 안겹치더군요.

저는 대학땨까지 켜켜히 쌓인 책을 직장근처 고시원으로 옮기면서 정리해야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어서 싹 다 갈아서 pdf 로 만들어버렸습죠.
그러고나니 한결 가벼워지더군요. 책을 버리는 것도 아니니 더 좋더라고요.
Mighty Friend
14/12/22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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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pdf를 생각해 봤고, 업체에 보내는 방법에 혹하기도 했지만 저는 추억이 있는 책이 없어지는 건 참을 수가 없어요.
14/12/22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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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아이가 생기신다면 아이의 책을 어디에 둬야할지 고민 하시게 될껍니다. 크크크
아마 그때는 사이좋게 반씩 양보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이의 책은 대부분이 전집 세트라 엄청 양이 많은데다가 시기별로 꾸준히 사줘야 하기때문에
지속적인 책장정리가 필요합니다.
Mighty Friend
14/12/22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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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고양이들로 대체했습니다.
에바 그린
14/12/22 19:59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서재 결혼시키키라니 전혀 생각치 못한 부분이네요... 전자책으로 갈아타야하나 계속 고민중인데 그쪽으로 기울게 해주는 글 같아요 흐흐.
Mighty Friend
14/12/22 21:13
수정 아이콘
전자책으로 저도 갈아타봤는데 제 헤닝 만켈 책들이 북토피아가 사라짐과 동시에 날라가버려서 도로 책을 사서 복구해야 했습니다. 흑흑....
에바 그린
14/12/22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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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상상도 못한 단점이!! 이사할때 편하지 않을까..? 들고다니기 편하지 않을까..? 라는 이유로 합리화 시켜보려고 했는데 어쩔수없이 종이책 봐야할듯.. 사실 그 책냄새와, 넘길때의 소리때문에라도 포기하기가 힘드네요 ㅠㅠ
달달한고양이
14/12/2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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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합의를 봐서 드래곤볼과 유리가면은 서로 맨 앞에 진열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열혈강호와 하늘은 붉은 강가는 교섭결렬.....저 꾸석으로..크크크
Mighty Friend
14/12/22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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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인이 2줄로 꼽는 데 대한 엄청난 거부감이 있어서 책 사이즈 재어서 책장을 맞춤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책을 앞에 꽂을지에 대해선 고민 안 해도 돼요. 크크크
14/12/22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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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마니아!?
저도 그런 분 한 명만 소개 좀...
작은 아무무
14/12/22 20:49
수정 아이콘
이분 성별이 PGR에 딱 맞는 분이신듯한데.....

설마 전쟁사 마니아 남성분을 찾고계신거라면?
Mighty Friend
14/12/22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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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마니아는 어디에 쓰시려고요....
Betelgeuse
14/12/22 20:36
수정 아이콘
제 꿈중 하나가 저만의 근사한 서재를 가지는건데 원룸자취생활만 계속 하고 있는지라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겠네요. 흐흐..
Mighty Friend
14/12/22 21:17
수정 아이콘
근사한 서재는 책먼지 앞에서 굴복합니다.
14/12/22 20:55
수정 아이콘
지치지 말고 잘 마무리 하시길.. 제 책장은 수험서밖에 없네요 허허
Mighty Friend
14/12/22 21:18
수정 아이콘
수험서는 나중에 버릴 수 있다는 게 장점 아닌 장점이죠!
14/12/22 21:40
수정 아이콘
독서도 알고보면 정말 돈이 많이 드는 취미죠...
책 한권 한권은 사모으는데 부담이 적어서 시나브로 늘어가고 정신을 차려보면 책장 하나를 더 놓아야 할 상황이 옵니다.
부엉이살림처럼 불어난 책에 내 방인데 내 자리는 없고 책들의 대군이 방 면적의 대부분을 점거하는 이상한 상태를 거쳐
결국엔 책을 위해 집을 바꿔야 합니다...(???!!)
아이지스
14/12/22 22:38
수정 아이콘
책을 버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는데 결혼하면 저런 문제가 있군요
즐겁게삽시다
14/12/22 22:52
수정 아이콘
흐흐흐 서재 결혼시키기라... 너무 재밌네요^^
잘 읽었습니다.
내일의香氣
14/12/22 23:28
수정 아이콘
잘 시간이라 피곤해서 그런가...
순간 처제 결혼 시키기로 보였어요.. 크크크크
형님이라 굽신거릴 좋은 기회였는데...
히히멘붕이넷
14/12/22 23:29
수정 아이콘
꺄오 저도 그 돼지꼬리 꼬챙이에 꿰어 구워먹는 부분 좋아합니다 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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