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그 녀석을 처음 만난건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느 가을이었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나를 형이 운동장으로 데려고 가서 처음 소개 시켜준 친구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단순에 사로잡았던 녀석의 첫 인상은 아직도 눈에 선하게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의 첫 대면인 녀석은 상당히 어색했다. 녀석은 상당히 사교성이 좋았지만 내 사교성이 유난히 떨어졌던 편이라 서로 그렇게 많은 말도 하지 않은 채 어색한 첫 만남을 가졌고 해가 떨어지자 우린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나와 녀석의 처음이었다.
#2
사교성이 좋았던 녀석은 집에만 박혀있던 나를 밖으로 끄집어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내심 나도 이런 녀석이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던지라 해가 넘어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놀러다녔다. 너무 늦은 귀가에 가끔은 어머니께 혼나기도 했다. 내가 어머니에게 혼나는것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친구가 우리집에 찾아와서 놀다가 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가끔씩 친구가 아파서 오지 못하는 경우에는 내가 어떻게 해야할까 상당히 고민도 많았지만 며칠이 지나고 아무렇지 않았던 모습으로 나타난 친구에게 안심도 했다. 내가 아플때도 내 곁에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남들이 보면 서로 사귀고 있다는 듯이. 우린 10년을 그렇게 지내왔고 그 10년동안 아주 친해져있었다.
아니,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3
친구가 내게 여자를 소개시켜줬다. 어디 하나 흠잡을데 없는 외모와 괜찮은 학벌에 집안도 상당히 좋았던 애였다. 친구는 내게 친해지라고 했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그런 사람에게 감정이 좀 있었던 난 친해질 수 없었다. 나와 얘기했던 여자도 나와 얘기하다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내비치면서 내 조언을 듣거나 이것저것 상담하면서 서로 겉으로는 친해지려고 노력하는듯 했지만 난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애가 대체 왜 나하고 친해지려고 그러는거지?'
여자와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런 이미지에 대해 일종의 컴플렉스를 갖고 있던 나는 그 여자와 항상 같이 나오는 친구를 점점 피하게 되었다. 친구가 나를 불러내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나가지 않게 되는 날들이 점점 늘어났고 친구도 내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여자와 노닥거리면서 우린 그렇게 멀어지고 있었다.
#4
오늘도 어김없이 늦잠을 자고 있던 나를 불러내는 친구, 요 며칠간 녀석과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난 이래저래 핑계를 대며 오늘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이게 웬걸? 갑자기 그 여자가 내게 인사를 하기 시작한다. '우리 이제 사귀기 시작했어요.' 뭐, 대충 나도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여자가 그 인사를 내게 왜 하는것일까. 나보다 더 친해졌으니 이제 녀석의 애인놀이는 그만 하라는 소리인가? 뭐 좋다. 나도 이제 애인놀이는 지겨워졌으니.. 녀석도 그동안 애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이번만큼은 좀 달랐다. 내심 속으로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녀석은 이제 내가 잡을 수 없을만큼 멀어져있었다. '여자'때문이라는 것은 조금 황당하고 어이없기도 했지만 이제 너를 놓아주고 나를 찾아야겠다. 이제서야 녀석을 보낼 수 있게 됐다. 일말의 미련은 남아있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이니까. 나는 녀석에게 인사하고 재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이해는 하지만 화가 났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눈물이 났다. 10년간의 우정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리라고는 나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을 잡고 이제 새롭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별로 지켜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은 이렇게 빈 공간을 채워야지 내가 버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