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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9/01 16:23:32
Name 배려
Subject [일반] 스며들듯이 생각 난다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그 분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다보니, 최대한 부담없이 쓰려고 했는데 쉽지 않네요.

원치 않으시면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

벌써 돌아가신 지 4개월째로 넘어가는군요. 참으로 시간은 빠르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제 결혼식을 잡아놓고, 상견례도 다하고 불과 결혼식이 약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위암 말기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5개월? 6개월? 전이군요. 그 전까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셨었죠. 모르는게 약이였는지 진단 받으신 후 급격히 병세가 안좋아지셔서

결혼식도 결국 참석 못하시고 2달 투병생활만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는 정신이 없어서였는지 너무 급작스러워서였는지 '어?'하다가보니 어느새 49제도

지나고 그랬더군요. 무뚝뚝하신 아버지라서 평소에, 아니 평생에 같이 얼굴 마주보며 지낸 시간도

손에 꼽을 정도고 제대로 대화를 한 시간도 아마 시간 단위로 끊을 수 있을 정도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장례식때도 별로 울지도 않고 저 자신도 생각보다 덤덤했었죠.



"부모님의 자리라는 것이 아마 서서히 스며들 듯이 자각 될 꺼다. 그 때 너무 힘들어 말아라."



장례식 중 어느 날 제 자신의 감정이 비정상인가 싶어서 저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몇 해전에 떠나보낸

친구에게 진지하게 물어본 후 들은 이야기입니다. 사실 저런 이야기는 장례식 때 있다보면 참 많이 듣게 되는

흔한 이야기. 들었던 당시에는 '지금도 이렇게 덤덤한데 실생활의 바퀴에 엮여 굴러가다보면

정신이 없어서 그럴리가 있겠느냐?' 싶은 생각이 들어서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말이지요.



그 때 부터 최근까지 하루 걸러서 하루 꿈을 꿉니다. 그 전에는 한 달에 꿈 한 번 꾸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꿈꾸는 것이 거의 연례 행사인 것을 감안할 때 상당히 큰 변화입니다. 내용이 전부 아버지에 대한

내용은 아니고 정말 다양하지만, 상당히 높은 확률로 아버지께서 주연이든 조연이든 까메오든 출연을

하신다는 점이 좀 특이하죠. 웃긴 꿈에도, 슬픈 꿈에도, 현실적인 꿈에도, 초현실적인 꿈에도...

장르를 가리지 않고 출연해주시는 기염을 토하십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가 한 행동, 말투를 곱씹어보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그 전에는 별 의미 없어보이던 행동같은 것들을 곱씹다보면 '아...'싶은 것들도 많고, 말투도 마찬가지고요.

결국 혼자서 우울해지고 슬퍼질 때가 잦아지게 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그렇게 신경을 지내다보니 왠지 아버지의 증세가 그대로 저에게도 나타나는 듯 한 느낌마저 듭니다.

소화도 잘 안되고 거북하고...

그 중 아버지가 생전에 저에게 강력히 주장하셨던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모든 것은 구심점이 없으면 제 힘 발휘하기 힘들다. 사람에게 집은 모든 생활의 구심점이고,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그 구심점을 박차고 나가봐야 발붙이 곳이 없는 상태에서 뜬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거다.

언제나 기댈 수 있는, 의지할 수 있는, 돌아갈 수 있는, 돌아올 수 있는 구심점이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라는 이야기를 자주하셨고 곧 이것은 제 자취생활을 대학 졸업때까지 반대하셨던 이유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당연히 내보내기 싫어서라고 생각하고 투덜거렸죠.

지금에 와서도 저 말을 전적으로 공감한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의미로 구심점이라는 역할을 깨닫고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에피소드가 아무리 없다고 해도 수십 년을 한 지붕아래 살다보니 자연스레

학습된 사고방식과 행동 등... 문득 문득 신혼집에서 나타나는 저의 행동이나 말투를 보면서 놀랍니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제 안에서 아버지가 보일 때가 종종 있달까요.

저의 사고방식과 행동의 구심점은, 근본은 아버지(물론 다른 가족들도)임을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정도 쯤 되다보니 '스며들 듯 찾아온다'라는게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겠더군요.

제가 살아가는 한 아버지의 굴레(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는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하는,

그래서 따로 떼 놓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네, 그래서 요즘은 많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요즘에 와서야 아버지의 유언 한마디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치도록 슬픕니다. 단 한마디라도 들을 수 있었다면 아마 그 당시에

펑펑 울면서 제발 살아나 달라고 옷깃을 부여잡고 애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결혼식 준비에,

아버지의 성격에, 그리고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리라곤 상상도 못한 가족들의 상황등등이 겹쳐져서

유언을 들어야할 상황이라고 느꼈을 땐 이미 아버지의 의식이 희미해져서 제대로 말하시기도 힘든 상태가

되어버리셨죠.



음 괜시리 이 부분쓰다가 좀 격해져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어쨌든 저와 가족들에게 한 마디도 해주지 않고, 해주지 못하고, 가버리신 아버지.

평생 가슴에 담아두고 원망(이라고 쓰고 생각이라고 읽습니다)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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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ne sais quoi
09/09/01 16:46
수정 아이콘
에구... 제가 같은 경험이 없어 이해한다고 말은 못하지만... 힘내세요. 그 마음이 하늘에 계신 아버님께도 전달될겁니다.
리콜한방
09/09/01 17:07
수정 아이콘
아주 오래전 내가 올려다본
그의 어깨는 까마득한 산처럼 높았다
그는 젊고 정열이 있었고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나에게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내 키가 그보다 커진 것을 발견한 어느 날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가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이 험한 세상에서 내가 살아 나갈 길은
강자가 되는 것뿐이라고 그는 얘기했다
난 창공을 나는 새처럼 살 거라고 생각했다
내 두발로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라
내 날개 밑으로 스치는 바람 사이로
세상을 보리라 맹세했다 내 남자로서의 생의 시작은
내 턱 밑의 수염이 나면서가 아니라
내 야망이 내 자유가 꿈틀거림을 느끼면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가족에게 소외받고 돈벌어 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집안 어느 곳에서도 지금 그가 앉아 쉴 자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을 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이란 침묵뿐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아직 수줍다
그들은 다정하게 뺨을 비비며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를 흉보던 그 모든 일들을 이제 내가 하고 있다
스폰지에 잉크가 스며들 듯
그의 모습을 닮아 가는 나를 보며
이미 내가 어른들의 나이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러나 처음 둥지를 떠나는 어린 새처럼
나는 아직도 모든것이 두렵다
언젠가 내가 가장이 된다는 것
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무섭고
이제야 그 의미를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그 두려움을
말해선 안된다는 것이 가장 무섭다
이제 당신이 자유롭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나였음을 알 것 같다
이제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후에 당신이 간 뒤에
내 아들을 바라보게 될 쯤에야 이루어질까
오늘밤 나는 몇 년 만에 골목길을 따라
당신을 마중 나갈 것이다
할 말은 길어진 그림자 뒤로 묻어둔 채
우리 두 사람은 세월 속으로 같이 걸어갈 것이다

<아버지와 나> N.EX.T
신해철이 20대 초반에 쓴 가사입니다.
공감이 가는 부분도 가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정말 한국의 아버지들을 잘 표현했다고 평하고 싶습니다.
그냥 배려님 글을 읽으니 이 노래를 띄워드리고 싶었습니다.
마음속의빛
09/09/01 18:43
수정 아이콘
아버지께서 사고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신지 이제 곧 6개월이 되어 가네요.
저 역시.. 아버지의 말투, 행동 하나하나 곱씹고 있습니다.
나이 29에 아직 장가도 가지 못하고, 직장도 좋은 직장을 갖지 못하고...
제대로 해놓은 게 없는 못난 아들을 보며 남몰래 답답하고 괴로워하셨을 아버지께
차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저 아버지가 그리울 뿐입니다.
어머니께서 고생을 많이 하시고 사고도 몇 번 당해
몸이 안 좋은 걸 안쓰럽게 바라보던 아버지셨는데...

큰 트럭이 컨테이너를 밀어버릴 때
컨테이너 박스와 박스 사이에서 어떤 심정으로 견디셨을까요.
병원에서 어머니를 보고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까요..
뭔가 유언을 남기려고 손을 들어 어머니를 부르셨다는데
산소호흡기 같은 걸 빼면 그 즉시 즉사할 수 있다는 병원 의사들의 말에
어머니는 산소호흡기 빼드릴까요 하고 물어보지도 못했다네요.

과묵하고 표현을 안 하시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어머니를 보시고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까...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봅니다.

아.. 내가 이렇게 마음이 여리고 나약하구나.. 하는 생각에 아버지께 죄송하고 어머니께 미안할 뿐입니다.
09/09/01 19:24
수정 아이콘
저희 아버지도 약 6년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배려님 꿈에서처럼, 저희 아버지도 꿈에 나와주셨으면 좋겠는데..꿈에서조차 나와주시질 않네요.
꿈에서라도 보고싶은데 말이죠..
대신 치통과, 위통과, 우울증과, 신경쇠약을 주셨는데, 그 당시 그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아버지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는 게 진심으로 감사했었습니다..아버지가 너무 보고싶네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을 보고싶어도 볼수 없는 것과, 이세상에 없는 사람을 보고싶은 건..참 달라요..ㅠ.ㅠ
09/09/01 19:45
수정 아이콘
전화해야겠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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