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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8/23 21:23:19
Name 나이트해머
Subject [일반] [삼국지] 254~256년, 강유의 전성기.

1. 장기 군사 캠페인의 시작, 254년의 북벌.


다시 농서로 출병하였는데, 적도현을 지키고 있던 장 이간(李簡)이 성을 들어 투항했다. 강유는 나아가 양무(襄武)를 포위하고, 위나라 장수 서질(徐質)과 교전하여 머리를 베어 적을 격파시켰으므로 위나라 군대는 패하여 물러났다.

강유는 승리의 여세를 타고 진격하여 매우 많은 성들을 항복시켰으며, 하관(河關) 및 적도 및 임조 세 현의 백성들을 빼앗아 돌아왔다.

- 강유전


254년, 강유의 북벌은 화려하게 시작됩니다.

254년 적도현의 귀순을 받아들이고 비록 장억의 순사가 있긴 했지만 대촉 전담 특수부대라 할수 있는 정촉호군을 완파, 지휘관인 서질을 전사시키고 그 일대의 백성들을 촉한쪽으로 끌어들이는 대승을 거둡니다.

그 다음해, 강유는 적도현을 기점삼아 재차 북벌에 나섭니다.




2. 강유의 전성기, 255년.


연희 18년(255)에 또 거기장군 하후패 등과 함께 적도에서 나와 조서에서 위의 옹주자사 왕경(王經)을 크게 격파시쳤다. 왕경의 병사들 가운데 죽은 자는 수만 명이나 되었다. 왕경이 퇴각하여 적도성을 지키자, 강유는 그곳을 포위했다.  

- 강유전

정원 2년에 곽회가 세상을 떠나자, 진태가 곽회를 대신하여 정서장군이 되었고, 가절도독옹양제군사가 되었다. 후년, 옹주자사 왕경이 진태에게 말하기를 강유와 하후패가 세갈래 길, 즉 기산, 석영, 금성으로 향하여 병사를 위시로 나아가게 하고, 양주의 군사로 하여금 포한에 이르게 하여 토(정)촉호군을 기산으로 향하도록 하려고 한다고 했다. 진태는 적의 세력으로는 세 갈래 길로 나눌 수 없으며, 아울러 병사의 세력을 분산시키는 것은 피하기 어려우므로 양주의 경계를 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헤아렸다. 그래서 왕경에게 대답했다.

"적의 정확한 소식을 들어 살펴본 결과 그들의 동향을 알았습니다. 동서의 세력이 합치는 것을 기다렸다가 진군합시다."

당시 강유 등은 수만 명을 인솔하여 포한에 도착하여 급히 적도로 향했다. 진태는 왕경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적도에 주둔시키고, 진태의 군사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려 계획에 따라 그들을 공략하도록 했다. 진태는 진창으로 진군했다. 마침 왕경이 인솔하는 군대가 고관에서 적과 싸우고 있었는데, 전세가 불리했으므로 왕경은 곧 백수를 건넜다. 진태는 왕경이 적도를 굳게 지킬 수 없으면 반드시 다른 변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군영의 병사를 파견하여 앞으로 가게 하고, 진태는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이었다.

왕경은 이미 강유와 싸워서 크게 패하고 만여 명만이 돌아와 적도성을 지키고 있었고, 그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강유는 승기를 틈타 적도를 포위하였다. 진태는 상규에서 주둔하며 병사를 나누어 요충지를 지키도록 하고 밤을 낮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등애ㆍ호분ㆍ왕비 또한 도착했으므로, 등애ㆍ왕비 등과 삼군으로 나누어 농서로 나아갔다.

- 진태전


이때도 대승, 강유는 군을 셋으로 나누어 북진해 나갔고, 이에 진태는 나눌수 없는 군대라 판단, 왕경에게 자신과의 합류를 대기하라 명령합니다만, 강유군의 빠른 진격속도로 인해 허를 찔려 왕경군과 조우, 고관에서 전황이 불리하자 왕경은 백수를 건너지만 강유는 재차 조서에서 왕경군을 대파하고 적도성으로 몰아넣습니다.

사상자가 수만에 달하는 패배는 삼국지 시대 후반부엔 특히나 보기 힘든 일이지요. 말 그대로 완파를 당한 겁니다.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고성령을 넘어 몰래 행군하여 밤에 적도의 동남쪽에 있는 높은 산위에 이르러 병사들에게 많은 봉화를 밝혀들고 북과 호각을 울리게 했다. 적도성 안에 있던 장수와 병사들은 구원병이 도착한 것을 보고 모두 떨쳐 일어났다. 강유는 최초의 구원병은 반드시 군사들을 모아 출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구원병이 벌써 도착했다는 말을 듣게되자, 이전부터 미리 준비한 계책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위아래가 모우 매우 두려워했다. 위나라 군대는 농서를 출발할 때, 산길이 매우 험난하므로 적이 반드시 복병을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태는 거짓으로 남쪽길로부터 진군하였는데, 강유는 과연 3일간 복병을 배치하였다. 진태의 군대가 몰래 행군하여 갑자기 적도 남쪽에서 나타나자, 강유가 산을 따라 진태의 군사를 습격했다. 진태는 그와 교전하여 퇴각시켜 돌아가게 했다.

양주 군사는 금성을 지나 남쪽으로 옥간판에 도착했다. 진태와 왕경은 비밀리에 날짜를 정하고 함께 강유의 퇴로를 막으려고 했다. 강유 등은 이 계획을 듣고 즉시 도주했다. 적도성 안의 장수와 병사들은 비로소 성을 나오게 되었다.

- 진태전


등애는 적도에서 포위당한 옹주주사 왕경을 풀어주었고, 강유는 물러나 종제에 주둔하였다.

-등애전


위의 정서장군 진태가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포위망을 풀었고, 강유는 퇴각하여 종제(鍾題)에 주둔했다.

- 강유전


그러나 이때의 위군의 피해는 막심했습니다. 옹주가 마비되기 직전이었다고까지 할 정도로요.


등애 등은 주장했다."왕경의 정예병사는 서쪽에서 실패하여 참사를 당했고, 적들의 사기는 더욱 왕성합니다. 승기를 탄 병사는 감당할 수 없고, 장군은 오합지졸로 방금 전쟁에서 진 군사들의 뒤를 잇고 있으며, 장수와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졌으며, 농우는 매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은 `독사가 손을 물면 장사는 손을 자른다` 고 했고, 《손자병법》에서는 `군대가 공격하지 않는 적이 있으면, 지키지 않는 곳이 있다` 고 했습니다. 대체로 작은 손실로써 큰 것을 보존하는 까닭인 것입니다. 지금 농우의 재난은 독사에게 물린 것보다 심하고, 적도 땅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강유의 군대는 그의 예봉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요충지를 차지하고 안전하게 보존하면서 적의 쇠함을 디란 연후에 진군하여 구조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이 승리를 얻는 방법입니다."

진태가 말했다."강유는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깊숙이 들어가서 우리 군대와 평원에서 선봉을 다투어 한바탕 싸움에서 승리를 구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왕경은 성벽을 높게 하고 보루를 깊게 하여 그들의 예리한 기세를 꺾어야 합니다. 지금 적과 교전을 시작했으므로 적으로 하여금 계책을 얻게하여 왕경을 격파하고 적도를 포위했습니다. 만일 강유가 승기를 타고 동쪽으로 진군한다면 많은 식량이 쌓여있는 역양을 점거하고, 병사들을 풀어 항복한 자들을 거두고, 북쪽 오랑캐와 남쪽 오랑캐를 불러 맞아들이고, 동쪽에서는 우리들과 관과 농을 다투며, 사군에 격문을 전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유가 승기를 탄 병사들을 인솔하여 높은 성 아래에서 주저앉는다면, 우리들의 사기는 높아져 힘을 다하고 목숨을 바쳐 적과 싸울 것입니다. 때문에 공격과 구비의 형세가 다르게 되고, 주객이 전도될 것입니다. 병서에서 말하기를, `사다리나 수레를 제조하는 데에는 3개월의 시간이 필요하고, 흙산을 만드는 것은 3개월 이후에야 완성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가볍게 무장한 병사로 깊속이 들어간 강유가 창졸지간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거지를 멀리 떠난 강유의 군대는 식량이 계속 이어지지 못할 것이고, 이는 우리가 신속히 나아가 적을 격파시킬 때입니다. 이른바, 빠른 번개소리가 귀에 미치지 못하는 자연스런 형세인 것입니다. 조수가 적도의 남족에 둘러있고, 강유의 군대는 조수의 북쪽에 있으므로, 지금 우리들이 높은 곳에 올라 유리한 지형을 점거하고 적의 덜미를 움켜쥔다면, 싸우지 않고도 반드시 도주시킬 것입니다. 지금은 적을 방치할 수 없고 적을 오랫도안 포위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까?" (중략)

(전략)

왕경이 감탄하며 말했다.

"식량은 열흘분도 못 남았습니다. 만일 때에 이르러 구원병이 오지 않았다면 성을 들어 궤멸하여 옹주를 잃게 되었을 것입니다."

진태는 장수와 병사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앞뒤로 나누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따로 사람을 보내 지키도록 하였으며, 아울러 성과 보루를 수리하도록 하고, 군대를 돌려 상규에 주둔했다.

그 이전에 진태는 왕경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군의 장수와 병사가 평소부터 모두 한마음이었으므로 그들에게 성을 지키게 하면 강유가 단번에 공략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표를 올려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밤낮으로 급히 적도로 달려가라고 했다. 여러 신하들의 의견은 왕경이 도주해 버린 후라 성을 굳게 지킬수 없으므로, 강유가 만일 양주로 가는 길을 끊어 사군의 백성과 만족을 겸병하여 관농의 요충지를 점거한다면 왕경의 군사를 전밀시키고, 농우를 멸망시킬 수 있을것이라고 했다. 응당 대군이 사방에서 모이는 것을 기다린 후에 강유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진태전


기록에도 보아 알수 있듯, 이때 위군의 분위기는 상당히 심각했지요. 과거 제갈량의 북벌때 위나라의 최고실권자였던 조진, 사마의가 직접 나섰던 것처럼 이때도 위나라의 최고실권자인 사마소가 직접 이 문제를 책임지고 있기도 했습니다.


비록  마지막 화룡점정에는 실패했지만 이때의 전과는 화려하기 그지 없었고, 관서일대의 위나라 방어체제는 거의 붕괴직전까지 몰립니다.

“농우隴右 사군四郡 등은 매년 적군의 침공을 받았으며, 어떤 사람은 모반하여 적에게 투항하기도 했는데, 그 친족으로 국내에 남아 있는 자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그들을 사면해 주었다.”

- 고귀향공기(조모)

여기에 조서에서도

“.....적군(촉나라)들로 하여금 국경지대를 침범하도록 하였다. 싸움에서 져서 사망한 장수의 수가 모두 천여 명이나 된다. 어떤 이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어 원귀가 돌아오지 못했고, 어떤 이는 적군의 포로가 되어 타향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다.(중략)”

대책으로 장수와 군인들 가족들을 위문케 하고 1년간 부역에 면하도록 합니다. 그것도 안심이 안 되는 지 후속편을 냅니다.

“장병들과 백성들 중에 전쟁터에서 싸우다 사망했거나 조수에 익사한 사람들이 있는데, 유골을 거두지 못하고 들녘에 방치해두었으므로 항상 이 일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그리고 등애를 비롯한 위의 장군들로 하여금 전선에 흩어진 위군 시체를 거두도록 시키죠.



3. 운명의 256년. 단곡전투.


256년, 강유는 대장군으로 승진하고 재차 북진을 감행합니다. 이를 예측한 사람이 위에는 거의 없었고 또다시 기습에 성공할 수도 있었지만, 등애가 이를 읽었다는 게 강유에겐 불운이었지요.


논의하는 자들은 대부분 ‘강유의 병력은 이미 다하여 병사를 내어 다시 공격할 수 없다.’ 고 주장했다.

등애가 말했다. “왕경이 조서에서 패배한 일은 작은 실책이 아닙니다. 우리군을 격파시키고 장수를 죽였으며 창고는 모두 텅 비었고, 백성들은 갈곳을 잃어 떠돌아다녀 거의 멸망 상태까지 되었습니다. 지금 작전상에서 말하면, 적에게는 승기를 타고 공격하는 기세가 있으며, 우리는 허약한 체질입니다. 이것이 첫 이유입니다. 저들은 위아래가 서로 익숙하게 훈련되었고 병기는 예리한데 우리는 장수를 바꾸고 병사를 새로 중원하고 손상된 병기는 아직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둘째 이유입니다. 적은 배로 행군하고 우리는 육로로 걸으니 수고로움이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셋째 이유입니다. 적도 농서 남안 기산은 각기 지켜야만 합니다. 적은 병력을 한곳에 집중시키지만, 우리는 네 곳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넷째 이유입니다. 남안과 농서를 향한다면 강인의 곡식을 먹을 수 있고, 만일 기산으로 향한다면 1천 이랑이나 되는 잘 익은 보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적을 유인하는 먹이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다섯째 이유입니다. 적군은 교활하고 책략에 뛰어나므로 그들이 오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 등애전


이때 기록상으로 보아 등애가 사령관으로서 직접 강유군을 저지할 임무를 부여받은 듯 싶고, 그런 등애가 올 거라 예측했다는 것이 위에겐 행운이고, 강유에겐 불운했다 하겠습니다. 강유의 북진을 예측한 등애는 이에 대응해 방어전을 펴지요.


오래지 않아 강유가 과연 기산으로 향했는데, 등애가 이미 방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곧 동정으로 돌아가 남안으로 진군했다. 등애는 무성산을 점거하고 강유와 대치했다. 강유는 등애와 요충지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지만 이길 수 없었으므로, 그 밤에 위하를 건너 동쪽으로 진군하여 산길을 따라 상규로 달렸다.

- 등애전


등애의 전략은 아무래도 최대한의 병력을 끌어모아 강유군의 진로가 될법한 곳에 모두 방어선을 펴고 자신의 소수 직속부대로 기동전을 펴는 강유군에 대해 마찬가지로 기동전을 펴서 따라잡은 듯 싶습니다. 갈만한 곳에는 모두 방어병력을 배치해 놓았으니 직속부대규모는 작아도 바로 현지의 방어병력을 동원해 그 전장에서의 필요한 병력양을 보유할 수 있었을 테고, 미리 방어선을 구축해 놓았으니 강병인 강유군과도 싸울 수 있었겠죠. 이건 물량에서 압도적으로 앞서야 가능한 일이지만, 위는 언제나 물량에서 촉보다 우위에 있었고, 많아야 수만 정도의 전력만을 동원할 수 있었던 강유군에 대해서는 더더욱 병력양에서 앞서는 일이 가능했을 겁니다. 미리 요충지를 선점하고 방어에 전념해 장기전이 어려운 강유군의 약점을 노리는 것, 이게 등애의 전략이였다고 추정됩니다.

강유는 이때 비록 작년에 위군을 대파하긴 했지만 기본 전략인 강족과 호인을 날개로 삼아 농서의 길을 끊는 다는 기조를 유지하면서 전진했고, 등애와 기동전을 폈지만 미리 모든 진로에 방어병력을 배치한 등애를 상대로 요충지를 확보하는 데 실패하고, 결국 승부수를 던집니다. 상규로 전진한 것이죠.

윗쪽의 등애전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 상규(기산)에는 막대한 양의 보리가 있고, 이를 확보한다면 군량 문제도 어느정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위측에도 대단히 중요한 요충지이며, 당연히 등애가 쫓아올 것이라 예측할 수 있습니다. 강유는 이를 통해 방어준비를 철저히 하고 버티는 등애를 야전으로 끌어내 격파하고, 기세를 몰아 농서를 점령한다면 북벌의 일차 목표를 달성하는 셈이지요.

그러나 장기간의 행군과 군량부족, 위군의 양적 우위를 생각하면 야전으로 끌어낸다고 해도 강유군이 열세입니다.

그래서 강유는 여기에 숫적 열세와 지친 병력을 보강할 방법인 한중군의 합류를 요청합니다만,


진서대장군 호제(湖濟)와 상봉에서 만날 날을 약속하였는데, 호제가 약속을 깨고 도착하지 않았다.

- 강유전.


합류하지 못합니다.

이 원인이 무엇인지는 의문이 많습니다. 호제가 강유를 시기하여 그랬다고도 하고, 진로 곳곳에 방어선을 치고 있던 위군이 한중군을 저지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무언가 뚜렷한 이유가 있는 듯 싶은데, 이는 계한보신찬에서 호제가 의외로 호평을 받고 있기 때문이죠.

어쨌든, 강유가 계획한 한중군과의 합류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강유는 단독으로 등애와 단곡에서 맞부딪치게 되었고,

등애는 강유와 간곡에서 교전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감로 원년(256), 조서를 내려 말했다.

<역적 강유가 해마다 교활한 행동을 하여 백성들과 만족을 동요시켜 서쪽 땅은 편안할 수 없었다. 등애는 이치에 맞는 계획을 세우고, 충절과 용기를 떨쳐 일어나 적장 20여명을 죽였고, 죽인 적군의 병사는 많다. 국가의 위엄을 파와 촉에 떨치고, 무용의 명성을 장강과 민강에 흐르게 했다. 지금 등애를 진서장군, 도독농우제군사로 삼고, 나아가 등후로 봉한다. 그의 식읍 5백 호를 떼어 아들 등충에게 주어서 정후로 삼으라.>

- 등애전


강유는 단곡(段谷)에서 위나라 대장군 등애에게 격파되어 병사들을 뿔뿔이 흩어졌으며, 매우 많은 수가 사망했다. 병사들은 이로 인해 모두 강유를 원망했고, 농서 서쪽 지역에서도 소동이 일어나 안정되지 못했다. 강유는 잘못을 사과하고 책임을 지기위해 자신의 관직을 삭탈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후장군 및 행대장군사로 강등되었다.

- 강유전


결국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강유는 대패합니다. 2년여에 걸처 거두어들인 성과는 단 한번의 전투로 무로 돌아갔고, 하후패를 포함한 장수 20여명이 전사한 패배였죠.


비록 그 다음해에 강유는 재차 수만여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고, 등애가 교전을 피했다는 걸 생각하면 의외로 병력 피해가 엄청나지는 않았을 수도 있긴 합니다.

강유는 촉한 조정으로부터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해 최대로 지휘한 병력도 수만 정도(5만 이하. 기록상 5만이 넘어가면 호왈 10만이라고도 하고, 그렇게 기록하지 않아도 5만이 넘는다고 특별하게 기록해 줍니다. 그 이하는 그냥 수만이지요.)에 추가 병력지원도 부실한데도 수만여 병력을 재차 동원할 수 있었다는 건 병력 손실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단곡전투의 중요함은, 강유가 그때까지 거두어 들인 전략적 성과를 모두 무로 돌렸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였던 것이죠. 촉군 입장에선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전투가 단곡 전투였고, 그래서 장수들이 진두지휘하다가 20여명 씩이나 전사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국 강유는 북벌에 실패했고, 그와 여러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촉한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쉬울 따름이죠. 이후의 통일왕조, 서진의 그 막장스러움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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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ordfish
09/08/23 21:26
수정 아이콘
자급자족형 명장이죠. 혹자는 촉의 재정을 파탄시켰다고 비난하지만, 사실 한중 방면에서 둔전해서 번 거 가지고 북벌한 거니까요. 북벌 횟수는 많지만, 실재 북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얼마 없고요.
나이트해머
09/08/23 21:35
수정 아이콘
swordfish님// 위의 반란을 기회삼아 북진했다가 반란이 진압되자 전투 없이 귀환하는 경우도 많았죠.
촉의 재정 파탄이라... 촉에서 제대로 지원을 해 줬어야 파탄이란 말이 가능한데 말입니다.
애시당초에 촉한이 재정 파탄이 일어난 적도 없고 말이죠.
09/08/23 21:42
수정 아이콘
위촉오 삼국에서 아무래도 촉은 가장 뒤늦게 나라가 형성됬고 국력 역시 타국가에 뒤쳐지다보니 제갈량이나 강유 입장에서 북벌에 욕심을 낸것이 아닌가 합니다. 만약에 제갈량이나 강유가 위나라에 있었다면, 무리하게 전쟁을 하기보다는 내정에 힘쓰면서 위나라를 조금 더 강하게 만들면서 촉과 오가 손을 잡고 양동작전하는것만 신경쓰면 되겠지만 촉에서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겠죠. 개인적으론 북벌이 실패하면 촉의미래는 없다...라는 생각을 제갈량과 강유가 가지고 있었던것이 아닐까 합니다.
블랙독
09/08/23 22:00
수정 아이콘
Tsunami님// 실제로도 북벌을 하지 않는한 미래가 없지 않았나요? 촉은 땅도 척박하고 무엇보다 그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그나마 있던 명분마저도 세대를 넘어 서서히 잊혀져버리게 될지도 모를일이니까요. 그렇다고 오를 치기에는 그야말로 위에게 촉오가 다 죽겠다는 것이니...
사실 명분만 없었다면 그냥 세력 차지하고 오래오래 편안히 살아도 됐는데 말이죠.
기다리다
09/08/23 22:03
수정 아이콘
그런데 글로만 보니까 잘 이해가 안가네요...삼국지 게임으로 따지면 강유의 전성기때 어디까지 땅을 넓힌건가요??보통 게임에서 촉은 무도까지만 점령하고 천수 서량 안정 등은 위가 점령하고 있는 지도로 나오는데...이 지명들이 안나오니 어디까지 땅을 넓힌건지 잘 이해가 안갑니다~설명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swordfish
09/08/23 22:09
수정 아이콘
기다리다님// 천수 안정은 옹주의 일부이고, 서량은 량주라고 부릅니다. 강유가 노린 곳은 바로 장안을 둘려 싼 옹주와 량주를 점령하여, 이민족과 연결하고 두주의 자원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세력을 확보한 다음에 장안을 점령하는 거죠. 그러면 기병 전력도 확보할 수 있고, 국력도 좀 위를 따라 갈 테니까요. 단곡 전투 전까지는 강유는 제갈량이 1차 북벌에 이룰 뻔 했던 옹량주의 확보를 거의 이룰 뻔 했습니다. 그런데 제갈량도 그러했지만 강유도 단곡 전투 한번에 이 모든 게 어긋나 버렸죠.
빵리발갰뜨
09/08/23 22:12
수정 아이콘
기다리다님// 단곡 전투는 제갈량의 가정 전투에 필적한다고 이해하시면 쉬울 것 같습니다.
최소한 장안 서쪽은 촉이 장악할 수 있는 상황에서 단한번의 패배로 완패한 거죠.
제갈량과 다른 점은 강유는 혼자 힘으로 싸웠다는 것...(위에도 있지만 한중군=정규군 없이 강유군으로 싸웠습니다)
내일은
09/08/23 22:13
수정 아이콘
일단 촉한이라는 나라가 한나라를 회복한다는 것을 국가목표로 설립된 나라이니 잦은 북벌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그래서 제갈량과 강유를 비판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다만 촉의 존재는 지세의 험준함에 의존했을 뿐(사천분지) 국력 자체가 현격하게 기우는 것을 극복하기 어려웠다고 봅니다. 진수의 정사나 다른 집주등을 보더라도 위-진의 국력과 촉의 국력은 5배 이상의 차이였다고 보이니까요. 연의에서야 일개 장수의 무력과 재사들의 활약으로 전력의 차이를 뒤집기도 하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전력이 2배 이상 벌어지면 싸우지 않는게 이기는 것인데...

강유가 5만 정도 이끌었다고 나오는데, 당시 요동의 공손씨들도 수만 정도의 병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 5만 가지고 중원 진출하려던 강유는 그저 안습...
기다리다
09/08/23 22:15
수정 아이콘
swordfish, 빵리바겟트님//감사합니다~이제야 이해가 잘갔습니다
swordfish
09/08/23 22:16
수정 아이콘
빵리발갰뜨님// 한중군과 연계 문제는 단곡에서 참패의 원인이 되죠.
내일은님// 제가 듣기로는 2~4 만 사이로 알고 있습니다. 자급 자족 군대의 한계죠.
09/08/23 22:23
수정 아이콘
촉의 땅 자체는 비옥했습니다. 제갈량과 강유가 보급의 문제를 겪은건 그 풍족한 땅에서 나온 군량을 싫어올 길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죠. 촉 땅은 전선의 후방기지화 시키고 그 물자를 안정적으로 형주에 보급한 후, 형주를 통해 위를 압박하는것이 제갈량의 융중대계였을 터인데 형주 상실로 이 계획이 트러지죠. 후에 형주의 역할을 관중지역으로 대체하려고 북벌을 시작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관중지역의 경우는 강족을 비롯한 이민족과의 접경지역이라는 점도 매력적이었겠죠.(강유의 북벌은 대게 이 계열 이민족과의 연계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저는 제갈량이나 강유는 북벌로 위와 촉의 국력차를 한방에 역전시켜 위를 단번에 멸망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기 보다는 관중지역 점령을 통해서 촉의 국력을 위와 비등하거나 그 이상으로 끌어올리려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봅니다. 강유 역시 그 전략적 대계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고(촉의 주력 장수중 이걸 이해 못 한이가 위연 이었죠.)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어내고 있던 찰라에 단곡전투로 성과가 날아가 버렸죠.
내일은
09/08/23 22:39
수정 아이콘
강유가 제대로 지원을 못받은건 촉의 국가목표를 둘러싼 내분 때문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촉은 이전에도 중앙정부에서도 제대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지역이고 호족들이 권력을 잡았던 곳인데, 이들은 중원에 관심이 없었죠. 유언 이후 유장 시대까지도 중원이 혼란스러울 때 별 군사 행동이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굴러온 돌 유비가 촉을 점령했을 때는, 외부에서 들어온 강력한 군사세력에 굴복해 어쩔 수 없이 북벌에 협조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 군사세력 1세대(유비, 제갈량 등 같이 중원에서 활동한 경험을 공유한 이들)가 물러난 후 촉의 권력을 잡은 2세대들은 굳이 중원으로 진출해야 될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겁니다. 그래서 제갈량의 유시를 받은 강유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위가 촉을 점령한 이후에도 이들은 그대로 관료로 촉의 지배세력으로 남게되죠.
나이트해머
09/08/23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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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보건대 파촉 땅만을 장악한 정권은 강력한 외부세력의 공격을 완전히 막아내진 못했습니다. 아무리 지형이 험준해도 결국 돌파당하게 되어 있지요. 특히 전한-후한 교체기때 이지역을 장악했던 공손술은 이미 그시대에 참고할 만한 역사적 사례로 남아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반대로, 파촉뿐만 아니라 관서지역(옹량주)와 장안을 중심으로 하는 관중지역까지 확보한다면 진나라나 한 고조 유방의 경우를 생각해 볼때 외부세력이 쉽게 쓰러뜨리기 어렵고 반대로 전국의 변화 여부에 따라서는 밖으로 치고 나가 천하통일도 가능합니다.

이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파촉에서 외부로 나가는 길이 험준하다는 것인데, 과거 한신은 이를 기습으로 커버했다면 제갈량은 형주를 전진기지로 확보하고, 형북에서 중원 일대로 견제성 공격을 수행해 관중 일대의 방어력을 분산시킨 후 이 지역을 장악하는 대전략을 세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나라의 뒷치기와 이릉대전으로 무위로 돌아간 시점에서, 제갈량을 위시한 촉한 수뇌부가 계획한 것은 상대적으로 위나라의 장악력이 관중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관서지역을 먼저 확보한 다음, 이 지역의 인적, 물적 자원을 추가로 동원해 관중일대를 확보한다는 것이었죠. 관중까지만 확보한다면 이후엔 기회를 노리는 것이 충분히 현실성을 가지게 되고, 상황에 따라서는 촉한의 천하통일이 가능하다고 보여집니다.
09/08/23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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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엔 가정이 불가능한지라 답은 없겠지만 촉이 통일했다고 해서 전진과 꼭 크게 달랐을까요? 유비 사후 촉황실도 마찬가지로 막장스러웠다는걸 생각하면 말이죠.이후 선비족등이 수-당 성립시기까지 강성했다는걸 생각하면(수-당 시조도 선비족 후예란 얘기도) 당시 고대중국대륙에서 기마민족의 발호는 역사적필연으로 볼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죽은곰
09/08/23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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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은 형주를 잃어버린 시점에서 죽어버린 국가였습니다.. 대륙의 중심이 되는곳과는 너무 멀었고 주위에 많은 이민족과 적은 인구때문에

같은 역량을 지닌 신하들이 일한다면 촉은 필패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이트해머
09/08/23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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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님// 일단 촉한의 대 이민족 정책이 동오는 물론이거니와 위, 진보다도 좀 더 낫습니다. 위, 진은 분할통치라는 기본적인 기법을 활용하긴 하지만 강압적으로 찍어누르고 복속시킨 부족에서 강제로 전사들을 끌어들여 반란 진압이나 타부족 및 타국가 공격에 동원해 버렸죠. 불만이 쌓이는 것은 당연한 일. 이점에서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촉한의 대 이민족 정책이 더 낫습니다. 제갈량이 평정한 남만의 경우 정치가 좀 혼란스러워진 후기에도 현지에서 진압이 가능한 정도의 소요 수준을 넘어선 반발이 없었죠. 세금도 꽤 강하게 거뒀는데도.

그리고 서진이 완전히 쫄딱 망해버린 건 황족들이 강력한 자기세력을 가지고 중앙정치에 개입하면서 내전을 벌여 이런 이민족들을 상대할 국력을 다 날려버린 8왕의 난이 결정타인데, 촉한은 그런 후계구도 면에서 상당히 안정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후계자를 일찍부터 정하고, 여기에 위협을 줄만한 황족들의 세력을 적절한 수준으로(너무 밟으면 조모처럼 세력 강한 신하들에게 실권을 잃을 수 있으니까.) 억눌러 놨죠.

그리고... 그외 정치부분도, 사실 유선이 당대에 나라가 망했다는 점 때문에 이것저것 많이 뒤집어쓰긴 했지만, 조비나 조예, 사마염, 말년의 손권, 손호 등 그시대 타국의 황제들과 비교하면 의외로 나쁘진 않은 편입니다. 좀 보신주의적인 모습이 많긴 합니다만.
나이트해머
09/08/23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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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촉한이 천하를 통일했다면, 제갈량 시절의 정책 기조가 유지된다는 가정 하에서 북방 유목민족의 발호로 인한 북중국 일대의 상실은 확실히 서진의 경우보다 가능성이 적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떻게 될런지는 뭐, 가정일 뿐이겠죠.
내일은
09/08/23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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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족이 중원을 쳐들어오는 것은 중국사에 있어서 일종의 전통 or 세금과도 같은 것이라... 촉한이 중원을 통일하더라도 피하기는 어려웠다고 봅니다.
나이트해머
09/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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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님// 단순히 변방을 침략하는 것과 국가 중심부가 통째로 박살이 나고 이쪽 저쪽 할거 없이 치고 들어오는 것과는 차원이 틀리죠. 서진이 망할때를 보면 그때 서진의 주력에 가까웠던(기존 중앙군은 8왕의 난으로 죄다 박살이 났으니까...) 부역병들부터 시작해서 서진 내외의 이민족들이 죄다 들고 일어납니다. 촉한이 천통을 달성하면 이정도로 막장이 되는 일은 없었지 않을까... 싶은 거죠.
09/08/24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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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해머님// 그런 가정이라면 위가 망하지 않거나 오가 통일했어도라고 가정해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위나라 역시 오환이나 흉노를 적절히 잘 억제했던것으로 아는데.남만이야 그후로도 계속 중국에 별 위협이 되지 않았구요.
나이트해머
09/08/24 00:29
수정 아이콘
곰님// 서진의 대 이민족 정책이 위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위의 천통 이후의 상황은 서진과 대동소이합니다. 분할해서 강제로 짓밟다가 폭발, 그때 국내사정에 따라서 막아내거나 못막거나 둘 중 하나인데 서진의 예를 생각하면 못막을 가능성이 크고.
그리고, 산월족도 제대로 통제 못한 오는 서진보다 더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남만이 위협이 안된 원인을 고려해야죠. 촉한의 이민족 정책은 확실히 위나 오보다 낫다는 평가입니다.
09/08/24 01:03
수정 아이콘
나이트해머님// 촉한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신데요? 혹시 전생에 강유였다거나^^

근데 사실 전진이 쫄딱망한건 말씀하신대로 8왕의난이 결정타였는데...
뭐,촉 역시 수대후에 그런 내분이 발생할지도 모르는거고 위or촉or오에서 의외로 4~5대쯤 성군이 나와서 치세를 누렸을수도 있고 그건 진짜 실제로 되봐야 아는거 아니겠습니까? 정책이 계속 초창기 그대로란 법도 없고 수당원명청 등도 그렇듯이 다들 천하통일후에 대내외정책을 다시 정비하곤 했었으니까요.그래서 역사에 가정은 없다라는 말 쓰는거겠죠.
루크레티아
09/08/24 01:21
수정 아이콘
촉의 북벌이야 자원없고 인재없는 상황에서 남은건 북벌 올인러쉬 뿐이었으니 크게 나무랄 수는 없는 정책기조이죠.
리플에서 정확하게 지적 하셨듯이 관중지역 장악이 북벌의 가장 큰 요지였으나 마속 크리 한방으로 모든 것이 날아간 형편이고, 사실 첫번째 기산 진출이 실패한 이후로 촉의 가망성은 거의 없어졌다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가정에서 승리하고 맹달의 호응이 제대로 맞았다면 아마 제갈량 생전에 장안 진출 이후로 중원을 넘보았을 가능성이 컸을 겁니다. 만약 그렇게 되서 관중지역을 촉이 모두 장악했다면 눈치만 보던 오도 역시나 합비와 서주 지역으로 치고 나왔을테니 말입니다.(사실 북벌의 실패 이유는 오가 제대로 호응을 안하고 눈치만 설렁설렁 보았던 것이 가장 크다고 봅니다. 만약 양방치기로 밀고 들어왔다면, 최상위 인재간 격돌에선 촉,오 연합이 위를 능가했을텐데 말이죠.)
윤성민
09/08/24 13:17
수정 아이콘
나이트해머님// 남만이 위협이 적은 이유는 흉노와 같은 기마민족과는 현저히 다른 전투력에서 보는 건 어떨까요? 진압 가능했다는 사실만으로 정책이 좋았는지 나빳는지를 판가름하는 건 좀 섣부르지 않나 생각해요. 아니면 알고 계시는 추가 사실들을 적어주셔도 좋고요
루크레티아님// 첫 북벌때 뚫었어야 했죠. 먹는 자원 차이가 어마어마한데 초반에 찌르기 실패하면 지지치고 나가서 한겜 더 해야죠.
윤성민
09/08/24 13:18
수정 아이콘
아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삼국지 후기 50년은 아는 게 거의 없었는데 도움이 됐어요 ^^
나이트해머
09/08/2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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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민님// 남만이 위협적이지 않았던 게 물론 전투력 차이 때문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한중전투때 후방에서 들고 일어나 위협이 되었던 사례나 유비 사후 익주 남부 호족들과 연계해 촉한 중앙군이 투입되고서야 진압되었던 걸 생각해 보면 제갈량의 남중 평정 이후 현지에서 진압이 가능한 수준의 소요만이 일어났다는 건 그만큼 이민족 정책이 더 나았기 때문... 이라고 생각해 볼수 있지 않나 싶네요.
동시기 위의 경우 지속적으로 현지 주둔군만으로는 제압이 어려운 심각한 봉기가 여러번 있었고, 촉한 멸망 직후에는 양주 일대가 한꺼번에 넘어간 적도 있었습니다. 산월족 문제나 무릉만이 문제를 멸망시까지 완전히 해결 못해 어느 때는 진압을 위해 5만여에 달하는 병력을 투입하기도 한 손오와는 더더욱 비교하기 어렵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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