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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7/28 21:05:36
Name
Subject [일반] kiss away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이끌릴 수 있을까.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는, 존재의 자기운동으로서의 연애가 가능할까.

아무 필요도 없다면, 그게 어디 있는지도 상관 없겠지. 하고 당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버려야 할 것들의 목록을 적어두지만, 버려야 할 곳에 버리지는 않으니까. 결국 나는 내가 어디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며, 당신은 어쨌든 같이 있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인과율에서 툭 떨어져나온 톱니바퀴처럼, 나는 당신에게 버려져 있었다.

그래서 당신은 한 번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던 적이 없다. 삶에 주어지는 문제들은 결국 그 답과 교환할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들이었고, 내겐 누군가에게 주어버려도 좋을 만한  것들이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소유해버릴 수는 없었다. 무언가를 가진다는 게, 누군가를 소유한다는 게 사실은 마음대로 다루고 함부로 주어버릴 수 있다는, 서로에게 일종의 나머지가 된다는 뜻이라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주어진 문제의 답을 몰랐지만, 항상 서로를 알고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서, 대답보다는 대답해주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당신은 이야기했었다. 내가 당신을 정답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당신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듯이, 서로를 위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서로를 위해 남겨두어야 할 어떤 것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
.

가끔 당신을 지우거나 떨쳐내 버리고 싶었던 적도 있다. 내 무릎과 팔꿈치에 달린 바퀴들은 다시 굴러가기엔 너무 흠집이 많이 나 있었고, 사람들은 대부분 지나치게 매끄럽고 단단했다. 그들은 나와 당신 어느 쪽으로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내게 도망쳐 내려갈 만큼의 기울기를 허락하지도 않았다. 곰곰 엎드려서, 나는 당신이 돋아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하지만 그대는 오래 할퀴어진 생채기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는 함부로 드러난 그대의 상처들에 내 모서리들을 맞물리며 조금씩 나아가곤 했었다. 서로에게 저질러진 결핍들에 손을 들이미는 견고함으로, 우리는 부어오른 눈을 마주칠 때마다 그 안에서 부풀어 있을 기대만큼을 견딜 수 있었으며, 마침내 서로의 상처를 손잡이삼아 끌어당길 수 있었다. 그러고 나자, 우리는 더이상 서로가 필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섹스가 끝난 후에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대는 결코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않은 채 내 안을 떠돌아다녔고, 나는 당신을 붙들고 오래 흔들리다 마침내 떨어져나오곤 했다. 나는 그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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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러쉬
09/07/28 21:06
수정 아이콘
엄마 나 판님봤어..
FantaSyStaR
09/07/28 21:08
수정 아이콘
친절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판님
미개한 저를 못알아보시겠지만..글만 봐도 반가워요 눈물이 주륵주륵..ㅠㅠ
도라에몽
09/07/28 21:14
수정 아이콘
간만에 이런글 좋아요..
허느님맙소사
09/07/28 21:17
수정 아이콘
엄마 나 판님봤어.. (2)
항즐이
09/07/28 21:28
수정 아이콘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은 말할 것이 많고 말할 것을 알고 말할 상대를 아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역시 판님은 Pgr 최고의 이야기꾼입니다. 소재를 넘나들어도 탁월하시네요.



.. 하고 맺기에는 묻어나는 것이 쌀쌀한 날씨같아 저도 괜히 판렐루야나 외치고 돌아설 것을 하고 생각해 봅니다. ^^;
09/07/28 21:32
수정 아이콘
친절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판님
미개한 저를 못알아보시겠지만..글만 봐도 반가워요 눈물이 주륵주륵..ㅠㅠ (2)
honnysun
09/07/28 21:35
수정 아이콘
무언가 심오하군요. 잘 읽고 갑니다.
켈로그김
09/07/28 21:48
수정 아이콘
나는 결국 그녀에게 선택받지 못하고, 내게 남은건 짙은 상처 뿐이지만
나는 그녀의 실체를 흠모하고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그림자를 갖고싶었다.
..는 언젠가의 조금 미묘한 짝사랑이야기가 떠오르네요.
테페리안
09/07/28 22:02
수정 아이콘
PGR에서 연애와 동물을 맡고 계신 판님이시군요.
지니쏠
09/07/28 22:16
수정 아이콘
유일신을 맡고계신분입니다.
소리샘
09/07/28 22:33
수정 아이콘
kiss away 정말 오랜만입니다.
09/07/28 23:30
수정 아이콘
코멘트 : 1421

우리는 1421번의 판내림을 경험했습니다.
Freedonia
09/07/28 23:42
수정 아이콘
전에 나름 진지하게 Kiss away와 kiss awaY 등 대문자와 소문자로 변주를 주시길래 무슨 의미일까 1시간정도 고민한적 있습니다.

어째든 글 좋네요.
소설이든 수필이든, 그저 오늘 떠오른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든 글 읽기가 좋아요.
09/07/28 23:58
수정 아이콘
친절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판님
미개한 저를 못알아보시겠지만..글만 봐도 반가워요 눈물이 주륵주륵..ㅠㅠ (3)
영웅의물량
09/07/29 00:28
수정 아이콘
kiss away 정말 오랜만입니다. (2)
랄프위검
09/07/29 00:36
수정 아이콘
kiss away 기다렸어요
바나나 셜록셜
09/07/29 06:53
수정 아이콘
PGR에서 연애와 동물과 춤과 유일신을 맡고 계신 판님이시군요.
모모리
09/07/29 07:18
수정 아이콘
역대 kiss away중 최다 리플인 듯. 크크.
나두미키
09/07/29 08:25
수정 아이콘
PGR에서 연애와 동물과 춤과 유일신을 맡고 계신 판님이시군요.(2)
오랫만에 보는 글 반갑네요~
09/07/29 09:25
수정 아이콘
PGR에서 연애와 동물과 춤을 맡고 계신 판님이시군요!
저는 또다른 신도 섬기고 있어서(..) 유일신은 인정 못하겠습..(퍼억)

항즐이님// 말할 것이 적고 말할 것을 모르고 말할 상대를 모르는 누군가는 그저 안구에 습도만 높아집니다. ㅠㅠ
09/07/29 14:56
수정 아이콘
엄마 나 판님봤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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