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회는 1988년에서 1992년까지의 역사를 다루게 됩니다.
기존회에서는 1회당 1시즌의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이번회에서는 5년치를 1회에 묶었다는 소리이지요.
'너무 날로 먹는거냐?'라고 하시겠지만...... 부득이하게 한번에 묶게 되었습니다. 몇년치를 한번에 묶게 된만큼, 내용의 깊이가 너무나도 얄팍할 것입니다.
절취선----------------------------------------------------------------------------------------------------------------------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에게 4 : 0으로 패한 이후, 삼성라이온즈에게는 침체기가 찾아옵니다. 하지만, 침체기라고 해서 그대로 침체만 한 것은 아닙니다. 1980년대의 선수들과 1990년대의 선수들이 이제 자리를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1988년, 전기리그 54경기중 23승만 거두며, 전기리그 5위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게 됩니다. 그나마 후기리그에서 33승을 거두며 2위를 거두지만,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하게 됩니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삼성의 선발로테이션을 지키며 첫 100승을 거둔 대투수 김시진은 1988년에는 단, 11승만을 거두며 쇠퇴합니다. 그나마 김시진과 성준이 거둔 11승이 팀내 최다승입니다. 그래도 장효조 - 이만수 - 김성래로 이어지는 핵타선은 리그 최고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후기리그가 한창이던 9월, vs 해태전에서 김성래가 해태의 1루수 김성한과 충돌하면서 부상. 그 후로 몇년간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김성한과 부상하기 전까지 김성래는 0.350이라는 고타율을 기록했지만, 결국 시즌아웃. 이만수가 3할타율에 18홈런으로 분전하지만, 그래도 무너진 투수진앞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1988년말, 삼성과 롯데의 대형트레이드가 이루어집니다. 선수협을 결성하며 미운털이 박혀버린 최동원을 처리하려는 롯데와 '한국시리즈 4승투수'를 영입하려는, 정확히 말하면 큰무대용 투수를 원한 삼성이 의견이 일치하여 대형트레이드가 이루어진 것이죠.
삼성 : 김시진, 장효조, 오대석 <-> 롯데 : 최동원, 김용철
하지만, 대형트레이드의 핵심선수인 김시진과 최동원은 결정적으로 쇠퇴하여, 잊혀진 이름이 되고 맙니다. 최동원은 2년간 7승, 김시진은 4년간 13승을 거두었을 뿐입니다. 그래도 김용철은 삼성의 중심타선을 나름대로 지키며 두자릿수 홈런에 평균 50점대 중반의 타점을 기록하며, 장효조는 1989년 0.303, 1990년 0.275라는 최악의 부진을 겪다가 1991년 0.347이라는 고타율로 빙그레의 이정훈과 수위타자경쟁을 하면서 재기합니다.
1989년, 상황은 더더욱 악화됩니다. 심지어 해태의 선동렬에게는 노히트노런을 상납하고, 약체 태평양에게 무려 23 vs 4라는 기록적인 참패를 당하고 맙니다. 그나마, 신인투수 류명선과 재일교포 투수 "부시맨"김성길이 14승으로 고군분투하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인 강기웅이 장효조의 빈자리를 깔끔하게 메워준데다가 류중일 - 강기웅이라는 전설적인 6 - 4(키스톤콤비라고 할 수 있지만, 저는 그냥 6 - 4라인으로 표기합니다.)라인이 내야의 수비를 강화시켜주며, 최하위권으로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전,후기리그가 폐지되고 패넌트레이스제도가 처음으로 시작한 1989년, 그리고 각 팀간 20경기를 치르게 되면서 경기 수는 120경기로 늘어난 해에서 삼성은 57승 58패 5무, 승률 0.497로 간신히 4위에 턱걸이,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합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만난 상대는 돌풍의 팀 태평양돌핀스. 1차전에서 태평양의 잠수함투수 박정현이 14회를 완투하면서 삼성의 타선을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태평양의 간판타자인 김동기가 김성길을 상대로 그전까지의 열세를 뒤집는 끝내기 3점홈런을 날리며, 0 : 3으로 패배합니다.
2차전에서는 4 : 3으로 승리하지만, 3차전에서 또다시 등판한 박정현에게 5이닝동안 타선을 봉쇄당하고, 박정현이 실려나간 다음 등판한 태평양의 간판투수인 양상문에게 또다시 타선이 봉쇄당합니다. 그리고, 10회말 태평양의 노장이적생인 김일권에게 결승득점을 헌납하며,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1990년, 9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삼성에서 활약할 에이스, 김상엽이 실질적으로 데뷔한 시즌. '부시맨' 김성길과 또다른 신인 이태일이 동반 13승을 올렸고, 김상엽이 12승 18세이브로 팀의 뒷문을 단속. 또한, 작년에 무너진 팀의 투수진을 홀로 지탱한 유명선도 9승으로 팀을 이끕니다. 타선이 비록 많이 무디어졌지만, 패넌트레이스 4위를 차지하면서 3위팀 빙그레와 준플레이오프에서 맞닥뜨립니다.
그리고, 준플레이오프 스윕. 그다음 앙숙 해태타이거즈와 플레이오프를 치릅니다. 86, 87한국시리즈의 한풀이라도 하듯,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은 해태를 3 : 0으로 스윕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합니다.
한국시리즈에서 만나게 된 상대는 MBC청룡을 인수하고 프로야구에 뛰어든 신생팀 LG트윈스.
1차전 : LG의 에이스 김용수가 삼성의 타선을 너무나도 쉽게 묶어두면서, LG의 타선은 무려 21안타 13점을 뽑아냅니다. 13 : 0으로 LG의 완승
2차전 : '부시맨' 김성길이 LG의 타선을 1실점으로 묶어두고, 삼성의 타선은 2점을 내며 앞서갔지만, 9회말 등판한 김상엽을 상대로 LG의 타자 '영감' 김영직이 김상엽의 명품구질 파워커브를 때려 적시타를 만들며, 연장으로 승부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11회말, 또다시 등장한 김영직은 만루상황에서 풀카운트까지 가는 접전끝에 밀어내기 볼넷을 얻어내 또다시 LG트윈스가 승리를 따냅니다.
3차전 : 2회초, LG가 3점을 먼저내면서 앞서갑니다. 9회말, 이만수가 2점홈런으로 따라갔지만 추격은 거기까지였습니다.
4차전 :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치르며, 지쳐버린 삼성라이온즈는 또다시 등판한 '노송' 김용수를 상대로 타선이 묶여버리며, 또다시 준우승에 머무르고 맙니다.
비록,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거치며 피로가 쌓였기 때문에 한국시리즈에서 맥없이 무너졌지만, 삼성라이온즈는 해태타이거즈를 꺾으며 자신감을 회복합니다.
1991년, 1989년과 1990년 팀을 이끈 정동진 감독을 해임하고 1989년 태평양의 돌풍을 이끌었던 김성근을 감독으로 영입합니다. 그리고, OB베어즈에서 '학다리'신경식을 영입하며 타선을 보강합니다. 김성길이 또다시 16승을 거두면서 팀을 이끌었고, 타선에서는 이만수가 다시 불을 뿜으며 활동했습니다.
제 8구단인 쌍방울레이더스가 창단되었고, 각팀간 18경기를 치르며 총, 126경기를 치르게 된 1991년. 삼성라이온즈는 70승을 거두며, 패넌트레이스 3위에 안착합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만난 팀은 롯데자이언츠. 서로 1차전과 2차전을 나눠가지고, 3차전 '부시맨'김성길과 박동희가 각각 구원등판해 15회까지 투수전을 하면서, 무승부. 4차전에서 롯데에서 이적한 김용철이 롯데의 간판투수 윤학길을 상대로 역전홈런을 치면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합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빙그레이글스에게 패배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합니다.
1992년, 제주도출신 투수 오봉옥이 13승 무패를 거두며, 초유의 100%승률로 승률왕에 올랐던 그 해. 팀을 이끌었던 기둥들이 하나둘씩 쇠퇴해 가던 그 해. 그래도 126경기중 67승을 거두며 패넌트레이스 4위에 오르면서 준플레이오프에 오릅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만난 팀은 작년에 꺾었던 롯데자이언츠. 하지만, '염슬라' 염종석과 박동희가 삼성의 진군을 막으며,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이렇게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은 삼성에게는 암흑기와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김성길과 류중일, 이만수등이 분전하면서 팀을 나락으로 떨어뜨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암흑기를 이겨낸 삼성라이온즈는 다시한번 비상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 됩니다.
모든 기록은 아이스탯(www.istat.co.kr)에 있습니다.
P.S : 주요 선수들의 성적과 팀의 성적은 부득이하게 생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