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나를 설명할 줄 아는 지혜 (feat. 레이디제인, <5일간의 썸머>)
JTBC의 새로운 예능 <5일간의 썸머>는 두남녀를 해외라는 낯선 공간에서 5일간 함께 하게 함으로써 그 속에서 생겨나는 알 듯 모를 듯한 썸의 기류와 연애감정의 순간들을 포착하는 일종의 관찰 예능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방송에 등장하는 이들이 실제 썸남썸녀인지 아니면 이른바 방송을 위한 비즈니스 커플인지 여부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낯선 땅에서의 여행 중에 이들이 자연스레 보여주는 남녀의 심리와 연애 풍속도에 더 관심이 가는데요. 이 프로에 등장하는 유상무-장도연, 김예림-로빈, 홍진호-레이디제인 조합 가운데 제가 가장 재밌게 눈여겨보는 커플은 바로 홍진호-레이디제인 커플입니다. 때로는 연인처럼, 또는 친구같이 서로 끊임없는 티격태격하는 이 둘의 알콩달콩한 케미를 지켜보는 맛이 이 프로의 핵심 재미 가운데 하나더군요. 특히 지지난 2회차 방송에서 이 둘은 해외여행 중에 처음으로 사소한 트러블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여행 중에 보통의 커플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마찰이라서 어떻게 마무리가 될지 관심있게 지켜봤는데 이 문제를 풀어가는 이 둘의 모습이 자못 흥미롭더라구요.
설레는 마음으로 체코 프라하에 도착한 이들은 홍진호가 깜짝 준비한 커플 선글라스를 끼고 한껏 들뜬 채로 프라하성에서 첫 번째 데이트 관광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훈훈하던 분위기도 잠시, 달라도 너무 다른 서로의 관광 스타일로 인해 금세 마찰이 시작되죠. 우선 홍진호는 매우 넓고 큰 프라하성 일대를 하루에 다 돌아보기 위해 핵심적인 관광코스들만 효율적으로 제대로 볼 요량으로 빠른 걸음을 재촉합니다. 사실 홍진호 눈에는 이 그림이나 저 그림이나, 이 동상이나 저 동상이나 그게 그것처럼 비슷하게 보이니 한 장소에 기약없이 무한정 머무는 것은 여행 전체로 볼 때 시간낭비이자 효율낭비로 느껴졌던 것이죠. 그래서 엇비슷한 전시물들이 끝 모르고 늘어서 있는 성 안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며 한정 없이 머물기보단, 계획한 일일 관광 코스대로 이동하기 위해 계속해서 레이디제인을 재촉하고 채근합니다.
["자 이제 다 봤으면 나가자. 시간 없는데 얼른 계획한 다른 코스도 보러가야지."] 라는 게 콩의 기본적인 마인드인 거죠. 하지만 레이디제인은 다릅니다. 그녀의 눈에는 타국의 낯선 성 안에서 마주한 사소한 그림 하나, 동상 하나 하나도 전부 다르고 신기하게 보일 뿐입니다. 더군다나 여행객들의 발걸음을 저절로 끌어들이는 상품점의 예쁜 상품들에도 눈을 뗄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그녀는 하나를 보더라도 제대로 곱씹으며 즐기면서, 그 흥분과 감탄을 동행과 함께 나누며 느긋하게 여행하길 바랍니다. ["나중에 볼 것들을 위해 현재의 볼거리를 소홀히 한다면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 라는 게 레제의 입장인 거죠.
어쨌든 이러한 여행에 대한 서로간의 시각차는 점점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결국 여행 중간에 갈등이 터지게 됩니다. 자꾸만 레제를 억지로 재촉하는 콩에게 "왜 자꾸 내가 보고싶은 것도 못 보게 하고, 사고 싶은 것도 못하게 하냐"며, 불만이 머리끝까지 솟은 레이디제인이 "나 안 갈래!"라며 근처 벤치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죠. 그녀의 이러한 시위성 돌발행동에 홍진호의 얼굴에서도 난감함과 답답함이 역력히 묻어나오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이 여행에 대한 남녀의 시각차를 전형적으로 대변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전에 준비한 여행계획이 착실하게, 지체됨 없이 진행되도록 이끌어야하는 막중한 책임감과 부담감을 지닌 남자의 입장과, 짜여진 계획에 앞서 상대방과 함께 소통하고 공유하며 현재의 볼거리들을 자유롭게 즐기고자 하는 여자의 입장은 둘다 크게 틀린 것은 없습니다. 생각이 다를 뿐이죠. 따지고 보면 여자 입장에서도 짜증날만한 상황이고, 남자 입장에서도 짜증날만한 상황이랄까요.
어쨌든 급기야 그녀는 "그럼 차라리 오빠 보고싶은 거 보고, 내가 보고싶은 거 보고 중간에서 만나."라는 식의 심통 섞인 발언까지 하며 남자를 압박합니다. 물론 진심은 아닐 것이고, 그냥 그 정도로 자신의 마음이 상해있고 불만이 커져있다는 표현이겠죠. 하지만 서로에 대한 배려가 없는 발언임은 분명하니 이런 말을 듣는 남자의 마음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쨌든 여기까지만 놓고 본다면 전형적인 '여행가서 대판 싸우고 돌아오는 커플'의 표본(?)을 보는 느낌입니다. 자기만의 방식만을 고집하는 홍진호의 태도도 답답하고, 그런 홍진호에게 맞불을 놓으며 관광 거부를 선언하는 레제의 모습도 지나친 면이 있죠. 하지만 이러한 모습만을 두고 레이디제인이 피곤하고 짜증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저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냥 서로 간의 스타일이 다른 것일 뿐이죠. 사실 정말로 피곤하고 짜증나는 스타일은 제대로 된 표현도 하지 않은 채 상대방이 내 마음을 모두 알아주길 바라며 꽁해 있는 스타일입니다. 오히려 레이디제인은 정반대의 스타일이죠. 제가 보기에 그녀는 나름의 심통도 부리긴 하지만, 오히려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슬기로움을 지닌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만약 이 둘의 마찰이 여기에서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전하지 못하고 평행선을 그렸다면 저는 이 둘 모두에게 실망했을 겁니다. 그건 둘 다 배려심이 부족하고 이기적인 거죠. 하지만 이 둘의 마찰이 무작정 평행선으로 일관하진 않았고 그 해결의 실마리는 레이디제인이 먼저 제시하더군요. 답답한 마음에 일단 벤치에 앉은 홍진호를 향해 그녀는 차분하게, "오빠, 우리가 여행을 왔잖아.." 라며 자신의 속마음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본인이 왜 서운했는지, 그리고 이 여행과 데이트를 통해 내가 바라는 건 무엇인지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털어놓더군요. 저는 여기에서 레이디제인이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막무가내로 불만을 표현하며 심통을 부리는 모습을 넘어서서 이른바 '자신을 설명할 줄 아는 지혜'를 지닌 여자라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녀는 말 그대로 화해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레이디제인이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을 설명해내자, 홍진호도 차분하게 자신이 왜 갈 길을 재촉하며 그녀를 채근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홍진호 또한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찬찬히 설명할 준비가 되어있었던 거죠.
저는 이러한 이 둘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문제의 결론을 떠나서, 각자의 속마음을 솔직히 털어놓고 대화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이 둘에게서 보였거든요. 결국 '자기 자신을 설명할 줄 아는 지혜'를 지닌 사람은, '내 앞의 상대방이 본인을 스스로 설명하도록 끄집어낼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서로간의 몰이해에서 시작된 오해와 첨예한 대립 끝에 차분한 설명으로 레제의 마음을 이해한 홍진호는 그녀의 바람대로 '전부 다 보지 못하더라도 찬찬히, 서로 공유하며' 그렇게 여행을 즐기기로 합의합니다. 자기 자신을 차분히 설명하면서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여자의 모습도, 이러한 여자의 섬세한 마음을 이해하고 보듬어줄줄 아는 남자의 모습도 참 보기 훈훈하더군요. 그리고 이러한 마찰이 빚어낸 어색함을 탈피하기 위해 "아직 서운함이 덜 풀렸다"며 자신을 업어달라는 레이디제인의 애교 섞인 모습에서 또한 그녀의 매력이 느껴졌습니다. 남자가 알아서 해주길 바라며 무작정 지켜보며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게 넌지시 그 방법과 길을 제시해주는 여우같은 매력말입니다.
어쨌든 저는 이 커플의 이러한 화해 과정에서 '남녀 간의 트러블을 극복하는 교과서적인 모습'을 봤습니다. 사실 인간 관계에서 '나를 제대로 표현하고 설명할 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이잖아요? 때로는 무안함과 민망함을 동반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하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그만큼 소중하고, 이 관계의 회복과 소통이 그만큼 절실하다면 당연히 '그렇게까지 해야'합니다. 상대방이 내 맘을 무작정 알아주고 이해해주길 바라며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꽁해 있기 전에, 나부터 얼마나 이해받고자 용기를 내고 노력했는지 되돌아볼 일입니다. 이건 비단 남녀 어느 한쪽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귀찮다는 이유로 내 속마음은 제대로 표현하고 설명하지도 않은 채, 상대방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거나, 오히려 정반대로 기계적인 OK만 남발하며 영혼없는 태도로 일관하는 이들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순 없습니다. 우리가 넷상에선 쓸데없이 자세한 설명으로 일관하는 이들을 눈치없는 설명충(?)이라며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만 우리네 연애에 있어서 만큼은 다릅니다. 설명하고 표현하지 않으면 몰라요. 내 앞의 상대방은 독심술사가 아니니까요. 그러니 결국 연애에 있어서만큼은 우리는 얼마든지 설명충(?) 혹은 설명왕이 되어도 괜찮습니다. 내 앞의 상대방이 독심술사이길 무작정 바라기 이전에, 그 사람이 독심술사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지혜가 우리에겐 필요하다는 점을 이 프로를 통해 새삼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