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흔한 자취하는 대학생입니다.
흔한 인서울도 아니고 인천에 있는 저희 학교는 그다지 유명한 게 없습니다. 입학한 연예인도 별로 없고, 공대가 좀 유명하다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남자 투성이인 곳이 잘 나가봐야 군대스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다른 학교도 이목을 줄 만한 게 있다면 바로 '축제'입니다.
저희 학교 축제에는 큰 이벤트가 두 개 있습니다. 가요제와 미남대회! 둘 다 예선-본선이 나뉘어져 있는데, 본선은 대강당에서 관객투표로 심사하는 등 꽤나 규모가 큽니다. 슈퍼스타 K 기분이랄까... 전 피지알러답게 미남하고는 그닥 관계 없는 얼굴 형편상 미남대회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가요제는 이미 경험이 있고 올해 예선도 패스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본선 공연날이었습니다.
전 대기실에 앉아서 빈둥거리고 있었습니다. 리허설까진 꽤 시간이 남아 대기실도 텅텅 비어있었죠. 축제날이긴 하지만 시끌벅적한 것도 싫고 혼자 있는 게 편합니다. 간이의자에 방만하게 앉아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데 문득 낯익은 놈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게 보였습니다.
"여기서 뭐하냐 너?"
"보시다시피 의자 위에 누워있는데... 뛰어왔냐?"
"응."
"왜 뛰어와? ..."
"본 공연까지 다섯 시간도 더 남았지?"
"응 그런데 리허설도 하고 그 전에 동선체크도... 왜?"
"잔말 말고 나랑 어디 좀 가자."
"귀찮아 이노마."
"야 친구 좀 도와주라. 쫌"
"귀찮다고!"
전 별로 친하다고 생각치 않는데 지 입장에선 날 친구라고 생각하는 동기 종국이놈은 절 거의 질질 끌다시피하며 같은 건물의 작은 홀 무대 뒤편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여기가 어디임?"
"미남대회. 나 미남대회 스탭이잖아."
"아니 그걸 왜 여기서 하냐?"
"올해 장소 섭외 안되서 가요제랑 같은 건물에서 한다는 거 몰랐냐?"
"그렇구만.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는거냐?"
저보다 힘센 이 놈은 설명해줄 시간이 없다며 절 반강제적으로 무대로 올려버렸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미남대회라니. 의사선생 이게 무슨 소리요...
무대 위에는 저를 포함한 본선 진출 남학우들이 열댓 명 정도 서 있었습니다. 둘러보니 히치스러운 꽃미남, 댄디하게 잘 입은 키 큰 남자애... 그리고 이상한 애? 못생긴 애? 아저씨? 배나온 교수님? 조교형? 경비아저씨? 어?
아놔 망할 놈의 자식아.
종국이놈의 상황이 단박에 이해되는 광경이었습니다. 수 년간 역성차별이다 외모의 상품화다 이러쿵 저러쿵 말 많던 미남대회는 결국 참가자가 줄고 또 줄어 예선도 없이 본선만, 그것도 사람이 없어서 저나 경비아저씨 같은 인물까지 끌어다가 인원수 구색을 맞춰야 했던 겁니다(경비아저씨 죄송해요.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어쩐다... 관객도 별로 없다지만 올라가긴 했으니 대충 하는 척이라도 하고 내려가야 하는데. 어차피 저한테 표를 던질 여자는 없을테니 전 대놓고 썩은 표정으로 꼴뚜기처럼 어물정뛰게 서 있었습니다.
[자 이번 순서는, 참가자들의 매력 어필 순섭니다! 자 참가번호...]
그만해 미친 놈들아,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뭐냐. 어쩌자는거냐. 대놓고 미남과 오징어를 섞어서 세워놓고, 나 같은 오징어는 오징어춤이라도 추면서 빵 터뜨려야 하는거냐. 내가 아무리 인기 없고 아는 사람 없어도 이건 아니지... 전 올라갈 때 처럼 존재감 없이 스르르 무대 뒤로 도망쳤습니다.
2
종국이놈 내가 너 죽일거야.
가요제 무대 때문에 캐주얼 정장을 입어놔서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자취방에서 고무줄바지에 쓰레빠 신고 나갔었다간 무대에서 통아저씨 춤을 춰야했을지도 모릅니다. 시간을 보니 리허설까지 약 3시간... 무대체크가 있을 시간입니다.
대강당은 2층 객석까지 있는, 꽤나 본격적인 홀입니다. 참가자 순서 점검과 동선체크를 위해 총학 스탭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중에 곧 제 차례가 왔습니다. 제 담당 스탭은...
"... 너 여기서 뭐하냐?"
"스탭."
"너 작년엔 안했잖어?"
"총학에서 사람이 없다고 우리 과에도 지원공고 돌렸잖아..."
"여기도 사람이 없나? 종국이객기도 미남대회 스탭이더만."
"어 그런데 종국이는 작년에도 미남대회 했... 얔크크크 그러고보니 너 땜빵으로 올라갔대매크크크크 경비아저씨랑..."
"... 어떻게 알어?"
"너가크크크크크 미남대회크크크크크 미남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 미남이란 단어에 안 부끄러움?"
"그만 웃어 이 기지배야;; 좀전에 끌려갔다가 매력발산하길래 텼는데 벌써 소문났어?"
"단톡방엨크크크크 종국이가 너 어디로 갔냐고크크크크크 그런데 경비아저씨는 왜 거기크크크크크크크크크"
종국이놈 내가 너 죽일거야. 제 앞의 동기 J(여자의 이름은 소중하니까)는 스탭의 본분을 잊고 배를 잡고 자지러지고 있었습니다. 이러라고 준 스탭티셔츠가 아닐텐데...
"그만 웃고 빨리 하자."
"어... 그런데 사실 나 올해 처음이라 뭐가 뭔지 모름."
"뭔지 모르는데 어떻게 했어?;;"
"윤지가 도와달라는데 어떡해. 그리고 너는 유경험자니까 너 담당해서 대충 떠넘기면 된다 싶었지."
그래 이 기지배도 남한테 맡기는데 달인이었지...
무대체크는 간단한 스탭에의 고지입니다. 어느 시점에서 훅 부분 부르면 핀을 이케 저케 쏘면 된다, 느린 노래니까 조명은 이런 식으로... J는 이해가 가는 듯 안 가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중앙에서 내려간다고?"
"응 그러니까 무대에서 부르다가 고조되면 무대 아래 객석쪽으로 걸어갈거야. 관객도 보면서..."
"춤은 안추냨크크크크크크크크"
"나 몸치잖아.;; 내가 왜 발라드 부르겠냐. 탐 요크 오징어댄스 보고싶어?"
"작년엔 그래도 잘했잖아. 우리과에서 본선까지 간 사람 너 밖에 없었지 않나?"
"그래봤자 4위지..."
"4위가 어디야. TOP 4네. 크크크"
난 1등하고 싶었단 말이다.
무대 아래 계단을 성큼 뛰어내려오니 J는 좀 어물거립니다. 얘 다리 짧구나...
"야"
"응?"
"잡으라고."
"어;;"
전 잡고 성큼걸으라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J는 답지 않게 좀 민망한 표정입니다. 얼씨구? 반응이 왜 이래 나도 민망하게.
"그러니까 여기서 다섯 걸음 정도 내려오고..."
"어..."
"여덟 걸음 정도 나오면 여기서 끝내면 돼."
"어..."
얘가 왜 얼굴 붉히고 우물거리나. 아니 나도... 설마 작년에 K한테 차인 이후로 새로운 꽁냥꽁냥이!?
3
서로 뻘쭘해하던 무대준비 절차가 끝나고, 전 리허설 및 본 공연 전 밧데리를 가지러 잠시 자취방에 들리기로 했습니다. 그래 J한텐... 공연 끝나고 카톡을 해보자.;;
후문 너머 자취방으로 가는 길엔 작은 슈퍼가 있습니다. 알파문구도 입점된 마당에 슈퍼라니. 그래도 슈퍼 주인이 아는 사람이라 잠깐 들러보니, 주인인 영만이형은 꾸뻑꾸뻑 졸고 있습니다. 이러니 장사가 잘 될 리 있나?
온 김에 뭐라도 좀 살까하고 안에서 둘러보는데... 입구에 낯선 손님이 있습니다. 머리나 옷차림으로 보아 깍두기형님처럼 보이는데, 입구에서 졸고 있는 형을 슬금슬금 살피더니... 대뜸 앞에 있는 물건을 대충 집고 튀는겁니다!
후다닥 하는 발소리에 영만이형은 잠을 깨고 어누룩하게 소리를 지릅니다. "도.. 도..둑이야!" 아이고 이 양반아... 전 다짜고짜 뛰쳐 나갔습니다. "저기! 저기요!" 한참 뛰니 앞에서 도망가던 깍두기 아저씨는 걸음을 멈춥니다. 억... 가까이서 보니 더 무섭네.
"왜? 뭐!?"
"저기... 돈 내고 가셔야죠.;;" 무섭다. 때리는 건 아니겠지?
깍두기 아저씨는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에이 X발!"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대충 동전 몇 갤 제 얼굴에 던져주고 다시 달려갔습니다. 이거라도 받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런데 깍두기가 슈퍼 도둑질을 왜 해! 가오 안나게! 얘네도 생활고인가.
슈퍼로 돌아와보니 어눌한 영만이형은 눈물이 그렁그렁합니다. 마음이 뭐합니다. 이 양반은 우리 학교 졸업생인데 공부도 못한 양반이 학교는 좋다고 후문에 코딱지만한 자리를 얻어 슈퍼를 냈습니다. 당연히 장사는 잘 안됐고, 후문 원룸촌에 얻은 코딱지만한 방은 밖으로 창도 안 나있습니다. 겨울에는 난방도 없고, 여름에는 냉방도 없는. 왜 그리 잘 아냐고 하면... 제 자취방 바로 앞이니까요.
"아 진짜 형도 울지 말고! 그러니까 왜 졸고 있어... 장사 한다며!"
동전을 건네니 영만이형은 말이 없습니다. 610원. 그래도 고마웠는지 고...하고 입을 여는 모습을 차마 보기 힘들어 전 매몰차게 돌아섰습니다. 아 진짜 그러니까 무슨 슈퍼야, 속상하게.
한참 걷다가 문득 결국 참지 못하고 전 뒤를 돌아서서,
"형! 몇 달 있다가 더워지면 선풍기 사줄게! 그리고 겨울에는 전기장판 사줄거야! 그러니까 졸지 말고!"
하고 외치고선 눈물이 왈칵 나올까봐 좀 민망해져서 달렸습니다. J와 마찬가지로, 좀 얼굴 뜨거워지는 말이긴 한 거 같았습니다.
4
자취방에 들어와보니 제가 미리 보낸 카톡(배고파)을 봤는지 룸메녀석이 라면을 끓이고 있습니다. 뭐? 불닭볶음면? 형이 이거 못 먹는 거 모르냐 이놈아! 그런데 라면냄비는 가스렌지에 올려져 있고 사람은 없어? 두리번 거리고 있으려니 룸메동생이 화장실에서 머리 털며 나옵니다.
"왔어? 생각보다 걸리길래 라면 올렸다?"
"물 올려놓고 머리 감고 있었냐... 그러다 불난다."
"안났으면 됐지 뭘."
"나 늦으면 혼자 먹을라고 불닭볶음면 끓였냐?"
쯧쯧. 룸메동생은 혀를 찼습니다. "형도 매운 거에 좀 적응할 필요가 있어. 맛있다니까..."
"너 먹어라;;"
책상으로 향하는 제 등에 룸메동생이 말합니다. "형 그런데 올해는 뭐 불러?"
"응?"
"올해도 발라드할거라매."
"......"
아!
그렇습니다. 전 아직 곡도 안정하고 있었던 겁니다. 미쳤어, 내가 왜 스탭한테 곡명도 안 말했지? 스탭은 왜 안 물어보고... 아! J 올해가 처음이랬지!
망했다. 전 재빠르게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왜? 뭐 잘못됐어?"
"야 나 망했다. 너 멜론 계정 있지?"
"엉."
"형 곡 두 개만 사자.; 나중에 돈 줄게."
"어... 그런데 아직 MR 안냈어? 곡은 정했고?"
"아니... 나 쳐 돈듯"
음... 하고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룸메후배는 곧 똘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심은고도 주연'해."
"심은고도 주연?"
어려운 노래다. 어반자카파꺼였나 누구꺼였나... 쨌든 그런데 여자파트는 어쩌고?
"그런데 여자파트는 어쩌고?"
"옥타브 낮춰서 형이 다 불러."
"개빡셀걸;;"
"그래도 뻔하게 감동있는 노래잖아. 작년에도 심은고도 주연한테 졌다며."
그렇습니다. 이 제목 이상하고 가사 사이케델릭한데 노래는 묘하게 정통 발라드인 이 곡에 전 4강에서 더 못올라가고 떨어진거죠. 사랑이야를 부른 게 잘못이었습니다. 이소라처럼 불렀으면 결승 갔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그리 잘 부르는 건 아니니 관객들이 보기엔 밋밋했던 모양입니다.
"심은고도~ 주연~ 이렇게 부르라고?"
"엉 괜찮네."
심은고도 주연... 왜 검색해도 안나오지? 어반자... 어반자카파 노래가 아닌가?
심은고도 주연. 그런데 대체 뭔 뜻이야 이게.
심은고도 주연... 왠지 사람이름 섞어놓은 거 같기도 하고...
아......
그리고 동생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심은고도 주연이 무슨 뜻이냐고.
팽이가 돌고 나도 돌고......
5
그리고 저는 꿈에서 깼습니다.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을 눌러 구글검색해봅니다. 심은고도 주연... 없다. 좋은 노래였는데, 아니 이게 꿈이라니. 도대체 무슨 노래야.
아니 그보다 심은고도 주연이 무슨 뜻이야!?
完.
* 꿈 얘기 였습니다. 다시 말해 개꿈.
* 제가 대학 다닐 때 가요제에 나갔던 건 사실입니다. 총학은 아니고 X과대 가요제였고, 첫 해엔 준우승 그 다음엔 인기상(...)이었습니다.
* 대강당-홀은 교양가창 수업 때 학기말에 했던 발표회가 모티브가 된 것 같습니다. 전 이탈리안 가곡을 불렀었네요.
* 심은고도 주연은 무슨 뜻일까요. 심은진 김주연? ...
* 꿈 속의 종국은 김종국씨였습니다. 힘에서 못당해내는 게 당연
* 꿈 속의 영만이형은 배영만씨였습니다. 왜 배영만씨가 내 꿈에...
* 역시 피쟐러에게 썸은 꿈속의 얘기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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