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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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 여자가 숙박을 위해 자신의 정보를 적어내려갑니다. 빈 칸 앞에서 가끔씩 펜을 멈추는 이 손님을 주인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현재 거주지 없음, 보증인 없음. 이 정체불명의 나홀로 여행객이 혹시나 말썽을 피우진 않을지. 명부에 혼자서 투숙한다고 적어도 방을 누군가와 같이 쓰면 추가 요금이 붙는다고 주인은 몇번이나 고지를 합니다. 돌아갈 집도, 기다리는 남자 친구도 없이 여기에서 이 여자는 뭘 하고 있냐구요? 쉽게 말해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이어지는 하이킹 코스인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에 도전하려고 여기 온 것이죠. 다음날 아침, 낑낑대며 짐을 꾸리고 첫 발걸음을 떼보려고 하지만 집채만한 가방을 메고서 이 여자는 채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걸음마도 간신히 뗀 이 초보 여자 하이커가 난다긴다 하는 이들도 포기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과연 완주할 수 있을까요?
현실의 어려움에 봉착할 때 우리가 꿈꾸는 것은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당장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최소한 쥐어짜인 자신을 다시 채워줄 것이라 기대하죠. 이 영화의 포스터는 그런 식의 도피를 낭만적으로 그려낸 소위 힐링 영화의 상쾌함을 가장하고 있습니다만 거기에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 영화는 이국적인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가벼운 모험과 로맨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당장 배낭여행을 꿈꾸던 사람들이 생각을 접고 싶을만큼 처절한 투쟁에 좀 더 초점이 맞춰져 있죠. 이건 심신을 달래는 여가가 아닙니다. 출발과 동시에 후회하고, 포기할까 갈등하게 되는, 4000킬로미터를 걸어야하는 지독한 도전이죠. 우리가 보는 것은 당장 하이킹을 시작하자마자 자신의 무모함에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땡볕을 걷는 주인공 셰릴입니다.
영화 속에서 자연은 쉐릴에 무심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있는 그대로 쉐릴과 상관없이 더위와 추위를 번갈아 내뿜는 하나의 공간이죠. 이런 점에서 쉐릴이 경험하는 자연은 고난과 시험에 더 가깝습니다. 끊임없이 쉐릴의 생존을 위협하죠. 걷다가 눈 앞에서 코브라를 마주치고, 침낭 안에 들어간 송충이에 기겁해 호신용 호루라기를 미친 듯이 불어야 하고… 하이킹이 길어질 수록 쉐릴은 문명 속에서 기본적으로 누리는 것들을 구하기 위해 말 그대로 개고생을 해야합니다. 쉐릴이 있는 곳은 타는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텐트에 맺힌 이슬을 미친 듯이 핥아먹을 수 밖에 없는 공간인 거죠. 쉐릴은 걷고 때로 멈추는 그 곳은 영화의 제목처럼 거칠기 짝이 없습니다.
이렇게 쌓인 심신의 피로는 걷는 이가 마주하는 자연이 위로해 줄꺼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웅장한 풍광을 펼쳐놓거나 극미한 부분을 걸어놓고서는 그것을 보는 이야기 속의 사람과 이야기 바깥의 사람을 자연이 치유한다는 식의 메시지를 던지기 마련이죠. 그런 과정을 통해 주인공이 영적인 깨달음을 얻거나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겸허해지는 등의 묘사들 말입니다. 이 영화는 자연에 어머니의 속성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가이아 이론이나 범신주의를 끼워넣어 쉐릴을 보듬어주는 등의 묘사를 하지 않지요. 쉐릴이 있는 자연은 정신적으로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과거와 현재, 일상과 특별함이 유리되어 있는 별도의 공간으로서 쉐릴이 다친 정신을 어루만져주지 않지요. 오히려 지나치는 숲과 웅덩이, 빗방울 같은 것들은 쉐릴이 잊고자 했던 과거의 상처를 끊임없이 후벼파냅니다.
그렇다고 쉐릴이 내내 괴롭힘만 당하지는 않습니다. 영화가 당장 갈 길이 멀고 힘든 쉐릴의 하이킹 위에 한 줌의 낭만을 뿌려 치장하고 있지 않을 뿐이죠. 녹초가 되도록 걷는 와중에도, 혼자 오트밀 죽을 해먹을 때도, 쉐릴은 자신이 인공이 아닌 야생 속에 있다는 걸 체감합니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늑대 소리에 쉐릴은 자신도 똑같이 울음소리로 화답합니다. 길을 걷다 허브잎을 손에 비비며 그 내음을 들이 마시곤 하기도 하죠. 저무는 노을로 자신을 물들일 때도 있습니다. 쉐릴 앞에 갑자기 나타나 주변을 맴돌다 훌쩍 떠나버리는 여우처럼, 자연은 그렇게 약간의 불가사의와 매혹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 속에서 의미를 내포하다기 보다는 오감에 대한 자극 그 자체로 다가옵니다.
쉐릴이 걷고 있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은 이렇게 고난과 아름다움이 뒤섞인 길입니다. 그럼에도, 쉐릴에게는 이 터무니없는 도전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쉐릴의 인생은 완전히 헝클어져 있었거든요. 쉐릴은 외간 남자들과 몸을 섞곤 했습니다. 코카인에 취해 반폐인이 되었죠.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얘를 지워야 했습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남편을 배신했고, 자신을 아껴주던 친구를 실망시켰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인생에서 그렇게나 큰 자리를 차지했던 어머니를 병으로 떠나 보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자기 자신마저 잃은채 그렇게 헤매던 쉐릴은 어머니가 사랑하던 딸의 모습을 되찾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한 길로 쉐릴은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택한 것입니다. Strayed란 이름을 스스로에게 지어주고서, 더 이상 헤매지 않기 위해 헤매여서는 안되는 길을 걷고 있는 거지요.
쉐릴은 앞을 향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그녀의 인생 속에서, 그리고 지금 걷고 있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이라는 코스에서도요.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기지만 쉐릴이 하이킹 도중 마주하는 것은 생경한 현재보다 지워지지 않은 과거입니다. 쉐릴의 하이킹은 앞을 향해 가는 과정이지만 한편으로는 과거를 되밟는 길이기도 해요. 행복했던, 혹은 암울했던 과거에 진절머리를 치는 쉐릴을 통해 영화는 묻습니다. 과거를 부정한다고 해서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을지, 그것은 쓸모없는 짐짝처럼 떨굴 수 있는 것일지를요. 우리는 과거를 떨쳐버린다는 표현을 쓰지요. 기억을 표백하는 것이야말로 이전까지의 자신과 완전히 다른 새 사람으로서의 변모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과거는 계속해서 안고 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나라는 사람은 좋든 싫든 그 모든 과거의 총집합체이고, 그렇기 때문에 앞날에 뛰어들 각오를 다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쉐릴은 하이킹 도중 여러 사람을 만납니다. 겉모습과 달리 친절한 아저씨를 만나 신세를 지는가 하면, 자신보다 더 숙련된 사람을 만나 응원을 받기도 하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여자 하이커를 만나 동질감을 공유하기도 하고, 자신을 노숙자로 오해하는 기자를 만나 무례한 인터뷰를 당하기도 하지요. 아무도 없는 숲에서 만난 사냥꾼이 던지는 농에 위기감을 느끼는가 하면, 도착한 어느 마을에서는 호감을 가진 남자와 뜨거운 밤을 보내기도 합니다. 분명 쉐릴의 도전은 혼자만의 것입니다. 쉐릴은 먼 길을 내내 혼자 걸어야 하지요. 그러나 쉐릴의 하이킹은 고독으로만 점철되어있지 않습니다. 혹독한 여정 속에서 쉐릴은 누군가를 만나고,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겪으며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몰랐던 사람들이 그렇게 친구가 되고, 은인이 되며 쉐릴에게 어떤 순간들을 남깁니다. 그렇게 길에서 마주친 이들과 함께, 또 멀리에서, 과거에서부터 이어진 이들 역시도 여전히 편지와 물품을 보내주며 쉐릴을 돕습니다. 생의 본질은 고독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맺음을 낼 만큼 인생이 황량하기만 한 건 또 아닐 겁니다. 고독하기에, 우리는 스쳐지나가는 누군가에게 인연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보이지 않는 끈을 서로 달아놓으며, 때로는 얼마나 멀리 있건 그 존재를 느끼고 힘을 얻으니까요.
그 만남들 속에서 쉐릴은 여성으로 존재합니다. 마지막으로 만난 하이커 삼인방은 쉐릴을 Queen of PCT로 치켜세우지만 여자 혼자서 하이킹을 한다는 게 어디 그렇기만 하던가요. 여자라서 누군가는 선뜻 선의를 베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쉐릴은 남자의 친절 앞에서도 먼저 긴장해야 하고 또는 방어적으로 움츠러 들 수 밖에 없어요. 자신의 과거에서도, 쉐릴은 여자로서 존재했고 온전한 삶을 살아오지 못했어요. 쉐릴은 누군가의 아내도, 어머니도 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쉐릴은 자랑스러운 딸이 되지 못했습니다. 주정뱅이 남편에게서 도망쳐 두 자식을 데리고 간신히 삶을 꾸려나가는 어머니를 향해 쉐릴은 동정과 경멸을 보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엉망으로 살고 있으니까요. 없는 형편에도 늘 웃음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 자연을 사랑할 줄 알았던 어머니, 척추가 무너져 그 좋아하던 말도 앞으로 못 타게 된 어머니. 쉐릴에게 어머니란 닮고 싶은 여자였고, 존경할 수 있는 여자였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천천히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을 끌어올리기 위해, 하이킹 내내 쉐릴은 자신의 기억 속 어머니를 떠올리고 끝에 가서는 오열합니다. 이처럼 쉐릴의 하이킹은 그녀 자신의 인생을 관통하는 길인 동시에, 자신의 어머니에게로 회귀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 쉐릴은 마지막 방명록에 어머니 바비의 취향이었던 소설가의 문구를 적습니다. 어렸을 때 비웃던 문구를 적는 건 자신의 어머니를 여자로서 이해할 수 있게 된 동시에 여자의 삶 자체를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겠지요)
마침내 쉐릴은 자신의 목적지에 당도하며 PCT를 완주하고 맙니다. 그리고 작은 깨달음을 곱씹습니다. 이것은 망각을 위한 하나의 통과 절차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험난한 과거가 있었기에 남들은 실패하는 도전을 끝내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을요. 앞으로도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하이킹 코스 하나 완주했다고 인생이 대단히 변할 거라는 낙관을 가지지도 않아요. 그러나 쉐릴은 자신의 울퉁불퉁한 과거를 용감하게 대면했고, 과오의 수렁에서 자신을 건져낼 수 있었습니다.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뒀던 자신의 삶은 얼마나 야만적이었던가. 우리네 삶은 그렇게 거칠고 야생적인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기에 뒤돌이켜 보면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