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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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거리는 캠브릿지 대학의 신년 파티장에서 두 남녀가 서로를 감지합니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에서도 유난히 눈에 밟히던 괴짜스러운 남학생과 어여쁜 여학생은 자연스레 둘 사이의 인력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느닷없이 오가는 초대장과 데이트를 통해 이 둘 사이의 기류는 점점 확실해져 가지요. 그러나 남학생에게 병마가 닥칩니다. 평온하던 오후 교내를 걷던 이 남학생은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지고 의식을 잃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남학생은 루게릭병이라는 진단을 받습니다. 왜 그렇게 요즘 들어 오른쪽 신체를 움직이는 게 불편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살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달갑지 않은 비밀들을 그는 한꺼번에 알게 됩니다. 남학생은 절망에 빠지고 주변의 사람들을 멀리하기 시작해요. 그러나 여학생은 자신을 갑자기 만나주지 않는 남학생을 찾아와 으름장을 놓습니다. 그래도 사랑할 거라고,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고 말이죠. 이 사연의 주인공들은 바로 세기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과 아내 제인 와일드입니다.
영화의 제작사를 유난히 떠들어대는 홍보에 속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영화는 워킹 타이틀을 떠올리면 바로 떠오르는 달달한 로맨스는 결코 아닙니다. 연애의 전조가 감도는 두 사람이 위트와 헌신의 두 시간에 걸쳐 천생연분임을 확인하고 끝나는 영화가 아니란 소리지요. 반짝임이 이어져 마침내 폭죽처럼 터지는 고백의 순간은 이 두 남녀의 인생에서 아주 일부분일 뿐이에요. 영화는 두 사람이 사랑을 결심하고 맺어지는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에 돌입합니다. 그리고 짧지도, 쉽지도 않은 여정을 따라갑니다. 그 안에서 장애를 가진 남자와 그 남자의 곁에 있는 여자가 어떻게 절망 대신 희망을 바라봤는지,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견뎌내야 했는지를 보여주지요.
영화는 신파의 함정을 피해갑니다. 장애를 가진 남자와 그 곁을 지키는 여자의 이야기에서 의례 상상할 법한 최루성 장면들을 빼고 오히려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지요. 제인이 좌절한 스티븐에게 찾아가 사랑을 되돌리는 장면에서 영화가 이들을 동정 대신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영화는 이들이 겪는 번민을 길게 보여주며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하지 않습니다. 스티븐과 제인은 불안함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지 않지요. 제인은 당장 나가서 크리켓을 치지 않으면 헤어지고 말겠다고 말합니다. 스티븐은 절뚝거리는 오른쪽 몸을 이끌고 여봐란듯이 크리켓을 치는 걸 보여주지요. 이 영화에서 가장 먹먹한 이 장면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동은 이 남녀가 갸륵하거나 애틋해서가 아닙니다. 대신 불행을 의연하게 마주하는 그들에게 인간적인 존경심을 느끼게 되는 거죠. 사랑은 이들의 감정에 휩쓸린 우연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앞으로 살아나가기 위해, 또 계속 사랑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에서 그들 자신의 의지로 만든 하나의 선택인 것이죠.
영화는 차근차근 이들의 시간을 쌓아가며 결혼 생활을 보여줍니다. 일단 우리가 보는 것은 스티븐이 끈질기게 죽어가는 몸을 붙들고 학자로서의 꿈을 이뤄가는 과정입니다. 2년이라는 시한선고를 받았지만 걸음걸이가 뒤틀려가고 발음이 점점 뭉개져가도 스티븐은 죽지 않고 그 누구도 써내지 못한 논문을 써내려가며 점차 명성을 얻어가기 시작하죠. 동시에, 스티븐이 이뤄낸 것이 결코 혼자 힘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제인을 통해 알게 됩니다. 스티븐과 꾸린 가정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정말 열심입니다. 남들의 배는 노동하고 신경을 써가며 아내, 엄마, 조수로서의 모든 역할을 묵묵히 해나갑니다. 스티븐이 오늘날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죽지 않은 그의 뇌 덕분이 아닙니다. 죽은 근육을 대신해 준 그의 아내 제인 와일드 덕분이었죠.
그렇게 타오르던 그들의 불꽃은 그을음을 내가며 조금씩 불안정해집니다. 먹고, 걷고, 말하는 일상 행위들이 어려워질수록 스티븐은 어쩔 수 없는 자괴감에 시달립니다. 사지 멀쩡한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할 때면, 계단을 기어 올라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그렇게 못나 보일 수 없죠. 제인 역시 배려보다는 의무에 가까운 성실함으로 하루하루의 책임을 간신히 해 나갑니다. 자신도 공부를 하고 싶지만 커나가는 아이들과 몸이 성치 않은 남편 때문에 제인은 꿈을 미뤄놓을 수 밖에 없죠. 스티븐과 제인은 호킹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조금씩 지쳐갑니다.
조금씩 좀먹혀가는 불꽃 뒤에서도 한 쌍으로 남아있던 호킹 부부의 그림자는 더더욱 일렁이게 됩니다. 힘겨워하는 제인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성가대 활동을 하기로 하고, 그곳에서 조나단이라는 남자를 알게 되지요. 공교롭게도 이 남자는 자신의 남편이 채워주지 못한 자신의 빈 구석을 너무나 잘 채워주는 사람입니다. 키가 크고, 잘 생기고, 독실한 신앙심이 있고, 이지적인 남편에 비해 훨씬 더 다정다감하고 상냥하기까지 해요. 더 이상 제인 혼자서 꾸려 나갈 수 없는 호킹 가의 가정 생활을 위해 조나단은 도우미를 자처합니다. 제인을 대신해 호킹의 수발을 들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심적으로 대단한 지원군 노릇을 하게 돼요. 불편한 몸 때문에 자신이 해주지 못하는 남편과 아버지 노릇 모두를 해주는 조나단을 보는 스티븐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남편 아닌 남자에게 자꾸 기대고 싶어지는 제인은 얼마나 결백하려 애썼을까요. 이들은 모두 충분히 성숙하고 양심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뻔한 통속극으로 흘러가지 않지요. 그러나 영화는 솔직합니다. 호킹 부부의 세번째 아이가 그 출생을 의심받는 걸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조나단은 이 부부의 곁을 떠납니다. 결국 순수한 선의가 이기지 못했던 현실의 압력과 감추고 싶었던 속마음을 털어놓으면서요.
영화는 호킹 부부를 마냥 그림 같은 짝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대신, 이들이 어떻게 흔들리고 그것을 간신히 비켜나갔는지를 보여주며 평범함 속의 위대함을 역설하지요. 이들은 주저앉았을 수도 있을 겁니다. 휠체어 위에서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휠체어를 밀고 끌어주는 것이 왜 지긋지긋하지 않았겠어요. 그래도 이들은 천박해지지 않습니다. 대신 슬픔을 삼키며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 애를 쓰죠. 우리가 이 영화에서 찾을 수 있는 감동은 두 사람 사이에 타오르는 격정이 아니라 그것이 조금씩 꺼져가도 이를 끝끝내 지키려 한 그들의 고결함입니다.
심지 끝에 간신히 매달린 불꽃은 그렇게 불씨로 스스로를 삼키며 재로 화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옆에 있던 누군가가 숨결을 넣어주면 작은 불꽃은 다시 피어나며 빛을 뿜어요. 스티븐은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던 바그너를 직접 듣던 공연장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집니다. 한달음에 달려온 제인은 의식 없는 남편을 되살리기 위해 수술을 요구하고, 스티븐은 성대를 잃은 채 다시 한번 깨어납니다. 제인은 그렇게 스티븐의 사랑을, 그리고 인생을 다시 한번 결정합니다. 빚을 졌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겠죠. 그러나 제인은 분명 스티븐의 모든 것을 있을 수 있게 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같이 나누고 받아들여온 사람이 맞아요.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이제는 말도 잃어버린 스티븐에게 제인은 언어 표시판을 가지고 와 꿋꿋이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눈만 깜빡이며 간신히 살아있는 사람과, 그 사람을 떠나지 않고 기어이 글자 표시판으로 대화를 나누며 살려고 하는 사람은 생과 사랑 모두를 부여잡고 놓지 않습니다.
스티븐의 새로운 논문이 출간될 때, 그들은 결국 각자의 새로운 짝을 찾아 떠나게 되지요. 그들의 사랑은 결코 영원하지 못했어요. 이는 동화같은 결말은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자잘한 위기 속에서도 죽음과 이별 앞에 끝끝내 저항하던 이 부부의 이야기가 빛이 바래진 않습니다. 스티븐과 제인의 만남에서부터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이들의 사랑이 깨졌다는 결론이 아니라, 이들이 함께 해 온 시간 그 자체이니까요. 2년을 채 버티지 못할 거라던 스티븐은 여전히 죽어가는 육체를 그렇게 부여잡고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제인 역시도 스티븐의 마음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옆을 지켜줬습니다. 이들 부부의 생을 통해 우리는 사랑과 생명이 어떻게 순환하는지를 봅니다. 사랑하니까 죽을 수 없고, 죽지 않았기에 사랑하며 계속 살아나가며 써내려간 두 사람의 역사를 말이죠.
영화는 스티븐이 일평생을 매달린 시간이란 소재와, 그 기원을 다룬 논문을 인용하며 끝을 냅니다. 그나마 목소리가 나오던 때로, 그리고 휠체어를 간신히 움직일 수 있을 때로, 지팡이에 기대 걸을 수 있던 때로, 아직 루게릭 병이 온 몸에 퍼지기 이전으로 시간은 되돌아 갑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들이 폭죽놀이를 바라보며 뻣뻣하게 키스를 나누던 그 때를 다시 보여줍니다. 마치 그들의 모든 것은 여기서부터 출발했다는 듯이요. 그것이야말로The Theory of Everything이 결론을 내리는 대신 소박하고,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스티븐과 제인의 인생, 사랑, 이들이 품고 지나쳤을 그 모든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들 안에 아직 잉태되어 있는 미래는 바로 입맞춤의 순간에서부터 시작한 게 아닐까 하는 가설 말입니다. 서로의 눈빛이 눈동자를 적중하는 그 찰나, 쑥쓰러운 전진 끝에 콧날이 아슬아슬하게 부딪히기 직전, 우리가 품고 있는 우주는 이제 막 태어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스티븐 호킹 박사의 두번째 부인 이야기는 떠올리지 말도록 합시다. 고난이란 가끔씩 예상치 못한 잔인함으로 다가오지만, 그것은 벌도 아니고, 스티븐 박사의 생존과 연구를 제껴놓고 떠들만한 이야기도 안됩니다.
@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져 이후로 간만에 여배우 때문에 가끔 몰입이 흐트러졌습니다. 펠리시티 존스 양은 얼굴만 이쁜 게 아니더군요..
@ 인터스텔라를 떠올리면 좀 짓궂어질 수 밖에 없네요. 브랜든 박사의 사랑 타령은 얼마나 낯 뜨겁던지. 지구에서 우주를 이야기하는 사람과 우주에서 지구를 이야기하는 사람의 차이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