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생>에 나온 장면 중 저 자리는 서울스퀘어 건물 뒷편인데, 왼쪽에 보이는 길로 쭉 따라나가면 남산 힐튼호텔로 바로 이어진다. 힐튼호텔과 서울스퀘어를 이어주는 이 구름다리를 나는 계약직으로 일하던 시절에 건너본 적이 있다. 그래서 <미생>이 더 짠한 걸지도 모른다.
2004년 가을에 나는 국립오페라단에서 공연기획팀 계약직 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프랑스 라디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정명훈이 연주를 맡은 오페라 <카르멘>을 한창 준비하고 있었고, A 캐스트는 대부분 힐튼호텔에 묵었다. 나는 공항에서 그들을 픽업해 와 호텔에 체크인시키고, 아침저녁으로 힐튼호텔에서 사람들의 스케줄을 챙기고 있었다.
<카르멘> 에서 에스까미오 역을 맡은 바리톤은 당시 그리 유명하지 않은 젊은 파라과이 출신의 성악가였는데, 입국하는 공항에서부터 까불거리고 오만방자해서 많은 스탭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듣는 캐릭터였다. 호텔에 방을 잡아주고 스케줄표를 전해준 뒤 나가는 나를 붙잡고, 앞으로 매일아침 자기를 깨우러 호텔로 오라고 말하는 데에서는 정말 주먹이 불끈하기도 했었지만 난 착하니까. 아니 그때만해도 착했으니까.
공연 당일 새벽에 그 에스까미오 바리톤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새벽부터 뭔일이야 하고 받아보니 어이가 없었다. 후닥닥 일어나 힐튼까지 택시로 쏘아 가니 이놈자식은 입에 얼음을 한움큼 물고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오늘 공연인데 치통이 너무 심해 무대에 설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
성악은 생목으로 하는 노래가 아니다. 어지간히 심한 감기가 아니라면 발성 스킬만으로도 커버가 가능한 게 그바닥이다. 공연의 규모를 생각하면 A캐스트가 치통으로 빠진다는 게 용납될 상황은 아니었다. 게다가 딱히 대체할 사람이 준비된 것도 아니었고. 아이고 나죽네 를 제 나라 말로 연신 앓아대는 놈을 두고 호텔 프론트를 탈탈 털어 가장 가까운 치과를 물어보니, 대우빌딩 지하의 치과를 이야기해줬다. 전화를 해서 아침에 빨리 문을 여는지 확인하고, 앓는 놈을 부여잡고 저 사진의 구름다리를 건넜다.
지하 1층의 치과는 조그만 개인 치과였는데, 문을 열자마자 바흐 평균율 멜로디가 들려왔다. 뭔가 느낌이 좋았달까. 음악을 듣던 치과의사는 호호 백발의 할아버지였는데, 어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차분함을 풍기고 있었다. 오늘 그랜드오페라 공연이 있고, 저놈자식이 메인 바리톤인데 지금 이빨이 아프다고 난리라는 설명을 하자 끄덕끄덕 납득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알겠어요. 통역은 따로 필요없어."
에스까미오를 눕히고 살펴보자, 이 말많은 바리톤은 또 입이 터져서 빨리 뽑아달라고 하소연이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의사의 답변이 대단했다. 영어였는데 당연히 나는 지금 영어가 기억이 안나므로 한국어로 적어보면,
"이사람아. 자네 성악가 아닌가. 오늘 공연인데 이를 뽑으면 당연히 원래 연습한 발성이 안나. 신경만 마취시키고 공연이 다 끝나면 너네 집에 가서 뽑던지 때우던지 하게. 예술가는 목숨 다음으로 퍼포먼스를 생각해야지!"
"그리고 이빨은 막 뽑는게 아니야. 하늘이 사람 몸이라고 주신 것중에 쓸모없는게 어디 있겠어? 인간이 모를 뿐이지. 아프다고 뽑는 식으로라면 나중에 뭔일이 어떨지 장담못해."
"그리고 너 집에 좀 가서 쉬어. 이빨 보니 너 고향에 안간지 오래됐구먼? 너처럼 썩은 이는 내가 많이 봤는데 타향살이에 막 먹고 다녀서 그런거야. 엄마밥 먹고 엄마 잔소리 들으면 이렇질 않아요. 고생 많았겠네. 이번 기회로 몸좀 챙긴다 하고 집에 가서 엄마밥좀 먹고 동네 치과 가서 치료좀 받아라."
마지막 말에 바리톤 녀석이 치과 베드에 누운 채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울면서도 말은 많아서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대충 열 두세살때부터 집을 떠나 살아왔다고 했다. 어딜 가도 대접받는 클래식 아티스트의 삶. 나름 뻐기면서 인생 살아왔는데 의사선생 말에 엄마 생각이 났다며 코까지 흘리며 울었다. 그가 울거나 말거나 선생은 녀석의 입을 확 벌리고 치료를 시작했고, 슬픈 울음은 고통의 울움으로 바뀌었다.
치료가 끝나고 녀석이 방긋 웃었다.
"아 이제 진짜 안아프네! 고마워요 선생님! 저 그동안 한국 좀 많이 무시하고 그랬는데 제가 정말 큰 잘못을 한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많은 가르침을 주신 것 같아요..치료도 감사하고, 큰 생각에 크게 배웠습니다!"
그토록 방자하던 놈이 한번 아픈 채로 훈계받더니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아 그리고 미스터 리, 내 앞으로 나온 VIP티켓 두장만 여기 선생님 드리세요"
...사람이 되긴 개뿔. 끝까지 갑질이네...
우여곡절끝에 치료를 마치고 나와 바리톤은 다시 저 구름다리를 건너 호텔로 돌아왔다. 로비 부페에서 아침식사를 대충 하는데, 녀석이 집생각이 자꾸 나나보다. 밥먹다 말고 훌쩍거리는 모습을 보니 또 짠했다. 일단 마무리가 되어 나는 서초동 예술의전당으로 다시 출근했고, 세종문화회관 가는 길에 다시 호텔에 들러 오케스트라와 캐스트들 체크한 뒤 구름다리를 또 건너 치과에 가서 티켓을 전달하고 감사인사를 드렸다. 그날 공연은 캐스팅이 이상하다는 세간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나름 호평을 얻었고, 그 번지르르한 바리톤 녀석은 언제 아팠냐는듯 진짜 바람둥이 표정으로 느글느글하게 에스까미오를 잘 그려냈다.
재작년 쯤에 서울역 근처에 일이 있어 방문했다가 옛날 생각이 나서 그 치과를 다시 가보니 문을 닫고 없었다. 할아버지 나이도 있었으니 쉽진 않았겠지. 하지만 힐튼과 대우빌딩을 잇는 저 구름다리는 여전했다. 다시 가보진 못했지만 드라마에 그 자리 그대로가 비치는 걸 보니 참 옛날 생각만 한가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