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 도끼 만행과 누나
(부제 : 누나도 울고 있었다)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던 우리 형은 내게 산타클로스 같은 존재였다.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인 예닐곱살 무렵, 중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귀가한 형은 종종 가방 속에서 '드래곤볼', '디어 보이즈', '천하만화' 같은 만화책을 꺼내 선물처럼 던져줬고 나는 그런 형에게 열광했다. 또 때때로 형이 읍내에 하나밖에 없는 극장에서 <영구와 땡칠이> 같은 영화라도 보고 온 날에는 극장에 가본 적 없는 나를 위해, 마치 배우처럼 내 앞에 서서 영화의 스토리와 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몸소 묘사하며 설명해주곤 했다. 그러면 나는 마치 극장에서 진짜 영화라도 보는듯한 기분으로 형의 몸짓과 연기에 푹 빠져 빵빵 웃음을 터뜨리며 몰입하곤 했다. 그렇게 나는 우리 형을 무뚝뚝한 아빠보다 더 친근하게 따랐다. 그리고 나이 차가 많이 나던 형에 비해 고작 두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누나랑은 툭하면 다투기 일쑤였는데 어릴 적부터 둘 다 식탐이 강해서 먹을 것을 두고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날은 아침부터 날씨가 흐렸다. 하늘은 곧장 굵은 빗방울을 뿌릴 것처럼 먹구름이 가득했고 바람은 사나웠다. 그날도 나는 평소처럼 이제나 저제나 집에 돌아올 형을 기다리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날도 어김없이 누나랑 싸움이 났다. 그것도 아주 대판. 지금은 무슨 일로 싸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암튼 그날은 부모님도 안 계시는 바람에 평소보다도 내가 누나에게 일방적으로 호되게 당하면서 서럽게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얼른 이 기울어진 전세를 역전시키고 누나에게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는 읍내 중학교에 가 있는 나의 든든한 지원군의 회군이 절실했다. 형만 돌아오면 내가 하루종일 당한 일련의 굴욕과 억울한 일들을 낱낱이 고해바치고 나의 경호원이자 대리인으로서, 여우같은 누나를 향해 엄숙하고 냉정한 복수를 집행해줄 것을 종용할 생각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형은 나의 산타클로스가 아닌 나의 구세주이자 복수의 집행인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형은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고 아무리 엉엉 울면서 기다려도 현관문은 열릴 기색이 없었다. 현관문이 활짝 열리고 형이 들어오는 순간, 모았던 서러움의 눈물을 폭죽처럼 한방에 터뜨리며 형의 품으로 달려들 준비를 진작부터 마친 나는 하도 울어서 이제 눈물마저 마를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창문을 열어보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 밖에는 비바람까지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런 내 속내를 진작에 꿰뚫어보기라도 한듯한 누나가, 흐린 하늘을 우울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내 뒤통수에 대고 야멸차게 쏘아붙였다. "오빠 기다려봤자 소용없어.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거 같애?" 내 남은 자존심까지도 박박 긁어대는 이 얄미운 말에 순간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밖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설령 태풍번개가 친다고해도 이렇게 무기력하게 집 안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마치 "난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는 아이처럼, "두고 봐, 형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라고 비장한 말투로 외친 후 울먹이며 우산도 없이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곤 곧장 현관문 바로 옆에 있는 옥상 계단으로 뛰어올라가 옥상 장독대에서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한길 쪽을 마냥 바라보며 다시금 울음을 터뜨렸다. 마치 마을사람들을 괴롭히는 나쁜 용을 없애기 위해 용의 동굴로 떠난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다 바닷가 절벽 위에서 망부석이 되어버린 아내처럼 그렇게 장독대 위에서 서러운 눈물을 훔치며 나는 마냥 형이 귀가할 한길 쪽만을 바라봤다.
어쩌면 그 순간 나는 사도 빌라도와 같은 누나의 모진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바람을 홀로 맞으며 구세주를 기다리는 신실한 선지자이자 어린 양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모진 비바람을 뚫고 집 앞에 당도한 형이, 장독대 위에서 홀로 추위와 두려움에 떨며 훌쩍이는 어린 양을 발견하기만 하면 깜짝 놀란 얼굴로 "야, 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라며 흥분한 채로 수선을 떨 것이 분명했다. 그럼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최대한 억제하며, 할 말은 너무나 많으나 말할 수 없다는 듯 흑흑 울먹이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결국엔 설움에 복 바친 목소리로 "...혀엉~~!"하며 서러운 눈물 콧물을 왈칵 터뜨리며 형의 품에 와락 안겨야 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비바람 몰아치는 장독대 위에서 그렇게 두 형제는 감동적으로 뜨겁게 상봉해야했다. 내가 고대하며 그린 시나리오는 이러한 것이었다. 하지만 애타게 기다리고 기다리는 구세주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고 결국엔 예기치 않았던 나쁜 용이 먼저 나타나고야 말았다.
비바람 속에서 나를 집 밖에 내보내고 편치 않은 마음으로 집 안에서 부글부글 참다 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누나가 자기 머리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커다란 '도끼'를 찾아들고는 장독대 밑으로 쫓아 나온 것. 모르긴 몰라도 아마 누나 입장에서는 자기랑 싸우고 옥상 장독대로 올라가 비바람을 맞으며 형을 기다리는 내 꼴 자체가 보기 싫었을 것이다. 남동생 혼자 밖에 그렇게 비 맞고 있는 것이 못내 걱정도 됐을 것이고 더불어 내가 그렇게 비련의 주인공 코스프레를 하고 비바람 속에서 형이나 엄마아빠를 맞이하는 순간, 이유가 어찌됐건 누나는 동생을 못살게 괴롭힌 팥쥐이자 악의 축으로 전락하기에 딱 좋은 그림이었고 이 사실을 아홉 살짜리 누나도 모를 리가 없었다. 누나는 이런 나의 괘씸한 시나리오를 뭉개놓기 위해 누나가 소유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이자 가장 강력하고도 압도적인 최종병기를 손에 쥐고는 날 겁주기 위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상상해보라.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어둡고 흐린 오후, 둘만 남은 외딴 집 옥상 밑에서 커다란 도끼를 들고 성난 표정으로 나타나 날 쏘아보는 누나의 모습을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호러도 이런 호러가 없었다. 마치 <미저리>의 주인공처럼 그 무거운 도끼를 양손으로 지탱한 어린 누나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얼른 집에 안 들어가?!"라고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나는 무서웠지만, 내가 그린 시나리오를 이렇게 한 순간에 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싫어! 형 기다릴 거야!"라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일단 내지르며 저항했다. 그랬더니 누나는 옥상 계단으로 한걸음 올라서면서 나를 인파이터처럼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며 "뚝 안 그쳐?!"라고 더 크게 소릴 질렀다. 하지만 그 순간에 이상했던 건, 막상 그렇게 울지 말라고 소리치는 누나의 눈에서는 나보다 더 많은 닭똥같은 눈물들이 서럽게 흐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여간 어쨌든 누나의 비명 같은 외침을 동반한 전방위적 압박에 질겁한 나는 나도 모르게 울음을 뚝 그쳤다. 사실 일부러 그칠려고 그친 건 아닌데 도끼를 든 누나의 눈빛과 포스가 워낙 강력해서 나오려던 눈물도 쏙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 훌쩍이자 누나는 조금 진정된 말투로 "얼른 내려와."라고 다독이듯 말했다. 이미 애초부터 어마어마한 도끼 비주얼에 한번 눌리고 누나의 성난 기세에 완패한 나는 눈물을 훌쩍이며 전쟁포로처럼 천천히 계단 아래로 억울한 발걸음을 떼었다. 그제서야 누나도 힘겹게 들고 있던, 자기 머리 두 배만한 도끼를 힘없이 내려놨다. 그렇게 누나에게 완벽한 항복을 하고 제압당한 채로 집 현관으로 들어가던 순간 절반은 유리로 되어있던 현관문이 비바람에 강제로 쾅 닫히며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다행히 누가 다치거나 한 일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그 유리가 와장창 깨지고 난 이후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도 도끼의 강력한 포스와 위세에 완벽히 눌리면서 저녁이 돼서도 부모님과 형, 그 누구에게도 그날의 도끼 만행(?)을 일러바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후에는 누나랑 이 일을 가끔씩 농담 삼아 추억으로 얘기 나누며 서로 깔깔 웃곤 했는데 당시엔 몰랐지만 곰곰이 그날의 일을 되짚어 볼수록 누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자꾸만 들었다.
사실 어린 시절의 누나는 항상 외로웠다. 맏이인 형과 막내인 내 사이에 끼인 누나는 부모님으로부터도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대접과 관심을 받곤 했다. 더군다나 내심 좋아했던 막내 동생이 자기랑은 안 놀아주고 항상 오빠 뒤만 졸졸 쫓아다니며 둘이서 한 세트처럼 그렇게 지내며 다니니,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누나가 유년기에 느꼈을 소외감은 어떠했을까? 아마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그날의 '장독대 도끼 만행(?)' 사건을 떠올리면 다른 것보다 무거운 도끼를 낑낑대며 양손에 들고 눈물범벅으로 울며 서있던 누나의 애처로운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그 당시에는 정말 무서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그 모습이 안쓰럽고 미안한지 모르겠다. 자기와 싸운 동생이 마치 구세주를 기다리는 양 그렇게 형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며 비바람 몰아치는 옥상 위로 올라갔을 때 집에 홀로 남은, 아무 편 없는 누나는 누나대로 얼마나 야속하고 속상했을까. 그 집 안에 홀로 남겨진 채로 저절로 악역이 되어버린 어린 소녀의 외로움과 서글픔을, 이른바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만약 지금 그날의 광경을 필름 영사기에 끼워서 스크린에 재생시킨다면 옥상에서 망부석처럼 형을 기다리다가 겁에 질린 내 모습이 아닌, 커다란 도끼를 들고 눈물범벅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던 누나의 모습을 클로즈업해주고 싶다. 결국 비바람 치는 장독대 옥상에서 하염없이 형을 기다리던 나도 서러웠지만 그런 나를 집으로 들여보내고자, 자기가 봐도 무시무시했을 커다란 도끼를 힘겹게 양손으로 움켜쥐고 겁주던 아홉 살짜리 소녀의 마음도 그만큼 서러웠을 것이다. 그 눈물범벅된 그 여자아이의 마음, 유년기의 우리 누나의 외로움을 이제는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다.
그래서 만약 지금의 내가 그날의 그 순간, 그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제 3자의 입장에서 그 장독대 밑에 서게 된다면, 나는 장독대에 올라간 내가 아닌 옥상 밑에 서있는 우리 누나를 끌어안아주고 싶다. 아, 물론 도끼는 내려놓게 한 다음에. 아홉 살짜리 누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양팔로 따뜻하게 끌어안아주면서 "니가 많이 외로워서 그랬구나.. 그래.. 괜찮으니까, 이제 울지 마." 라며 토닥토닥 다독여주고 싶다. 그리고 선지자 코스프레를 하며 겁먹은 채로 장독대 위에서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어안이 벙벙해있을 오동통한 놈에게는 "넌 이제 그만 울고 얼른 내려와서 도끼나 창고에 갖다놔!"라고 톡 쏘아붙여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