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쉐도우 복서들- 군부
사실 이 전쟁은 영, 프, 독 3국 고급 장교급에서는 일어날 일이 있어났다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미 3국 전쟁성은 각자 전쟁에 대한 세부 스케쥴까지 만든 작전 계획서가 존재했습니다.
이 플랜의 특성은 어떻게 병사들을 징병하고, 몇시에 열차에 태워 몇시에 내리게 하여 어디어디를 몇월 며칠에 점령하고
이들에 대한 보급은 몇시에 이루어질 예정이고 대략의 전투에 대한 손실율까지 예측한 꼼꼼한 작전 플랜이었습니다.
만약 병사들이 태운 열차가 1분만 연착해도 이 거대한 동원과 작전을 담고 있는 계획은 전체가 망가져 큰 혼란이
불러 일으킬 것이라고 믿어 졌습니다.
이 플랜들은 거대한 톱니바퀴를 가진 기계로 묘사되었고, 이 기계들이 사실 허상이라는 건 독일군이 벨기에 국경을
넘는 순간 이미 증명되었지만 이 당시 누구도 그 중요성에 토를 달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독일의 최고위인 카이저 빌헬름2세
까지 말이죠.
독일의 작전 계획은 이사진의 주인공 슐리펜 참모총장이 만들어서 슐리펜 계획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이작전의
개념은 양면 전쟁에서 프랑스를 박살내고 러시아와는 나중에 붙는다였습니다. 빠르게 프랑스를 제압하는 게 중요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아주 빼곡히 당시 중요한 수송수단인 열차 시간표 등 여러 가지 작전 스케쥴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스케쥴이 너무 기계적인지라 절대 인간사에 빼놓을 수 없는 사건 사고에 아주 취약했다는 겁니다. 뭐 그 대가는
8월 전투에 치루게 되죠. 거기에 상대에 대한 과소평가와 자신의 우위성 만으로 작성 된 결과였기 때문에 솔직히 이 플랜대로
작전이 절대 성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근처까지 간데 대해 프랑스 군의 무능과 독일군의 우수성을 오히려 칭찬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독일 참모총장 몰트케(소)마저도 이 작전안을 보고 절대 달성하지 못한다라고 말해 참모부 철도국 국장에게 강한 항의를 받았습니다.)
덧붙이면 이 플랜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인들이 결정할 중립국 벨기에 국경 침공을 당시 영국이 강력히 개입을 경고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인들이 지들 멋대로 거의 전쟁 10년 전에 유일한 작전안으로 만들어서 정치인들에게 이 결정을 강요했다는 데 있습니다.
얼마나 독일 제국에서 군부가 안하무인의 사고 방식을 가졌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인 거죠.
한편 프랑스의 작전 계획은 통칭 Plan 17이라는 이름 이었습니다.
이는 1911년 참모총장 조프레를 중심으로 만든 작전안이었는데 그 규모와 수준은 슐리펜 계획가 같았습니다.
빼곡한 스케쥴과 열차 시간표로 채워져 있었으며, 예비군을 어떻게 동원하고 투입할 것이며, 자신의 역량을 과대평가하고
상대의 역량을 과소평가한 작전 스케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질적인 면에서 맨날 전쟁에 굶주린 독일의 참모조직에
비하지 못할 정도로 현실성은 더 떨어졌다는게 안습이었습니다. 단 융통성을 슐리펜보다 있다는게 장점이라면 장점이겠지만요.
이 작전안의 특징은 방어전을 상정해야 하는 상태에서 선전포고 즉시 알자스 로렌(당시 독일령)으로 역침공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이 정신나간 계획은 전쟁 초반 프랑스가 대패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됩니다.
영국의 경우 이정도로 구체적이고 공상적이며 거대한 플랜을 짜긴 뭐했지만 사실상 동맹국 프랑스와 연동된 작전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걸 추진한 사람은 당시 정치군인으로 이름을 날리며 친프랑스 파이고 전쟁 말에 영국 참모총장인 된 헨리 윌슨이었습니다.
이 작전안은 개전 초 영국군이 어떻게 대륙에 가고 어디로 향할 지에 대한 스케쥴로 구성되어 있는데 배삯 금액과 배분 시간까지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역시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당시 영국은 공식적으로 전쟁이 나면 프랑스와 같이 싸운다는 언급을 정치인 누구도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정치인들은 이미 전쟁이 나면 참전할 마음이 가득했고 이런 영국 정계의 흐름은 이미 1905년
1차 모로코 사태 때부터 확실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영국군부는 이를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러시아의 경우 구체적인 플랜도 없고 엉망이었습니다. 초안 마저 대충인지라, 그나마 구체적인 안은 빠르게 동프로이센으로 진격한다
수준. 특히 참모조직을 싫어하는 차르 니콜라이의 경우 아마추어임에도 너무 스스로의 군사적 재능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런 엉망인 러시아 군의 모습은 그해 참담한 패배로 되돌아 옵니다.
이런 각국 군부의 작전플랜은 쉐도우 복싱과 같았습니다. 상대에 대해 모르고 자기 혼자만 추는 춤 같았죠. 이런 작전이 불러일으킨
혼란은 전쟁 초기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2. 각국의 표정
1914년 8월 1일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은 참모총장 몰트케(소)에게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동원령을 철회할 수 없냐는 부탁이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용감한 편이 아니었던 카이저는 정작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한 약속을
준수하여 조국이 전쟁에 향하는 건 싫었던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비스마르크와 쌍벽을 이루는 참모총장 몰트케(대)의 조카이며 당시 참모총장 몰트케(소)는 단호했습니다.
만약 여기에서 동원령을 멈춘다면 슐리펜 계획에 오류가 생겨 우리는 혼란에 빠지고 그 틈을
적군이 파고들어 우리는 망할 것이라고 말이죠. 결국 몰트케의 의견을 관철되었고 그렇게 독일은 8월 1일 동원령이 선포
됩니다. 그리고 대러 선전포고도 이루어 집니다.
이날 독일은 마치 축재와 같았다고 전해집니다. 대중을 향한 동원령이 발표되자 대중은 일제히 국가를 부르며 조국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한때 정부의 적이었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자들도 일제히 러시아 스파이로 의심되는 비국민들을 처단하기 시작했고
곧 입대하여 순식간의 독일군이 자랑하는 200만 대군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140대의 열차가 열심히 벨기에 국경으로 실어다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날 유일하게 침울한 독일인은 바로 카이저 빌헬름 2세였는데 조국이 양면전쟁을 하는게 두려웠던 그는 어느 순간 주전파에서
평화주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운명을 예감한 지 이런 말을 합니다.
[세상은 가장 무서운 전쟁의 소용돌이에 통째로 휘말릴 것이며 이 전쟁의 궁극적 목표는 독일의 멸망이다. .... 우리는 이미 궁지에
빠지고 말았으며... 죽은 에드워드(영국의 군주 에드워드 7세, 빌헬름의 삼촌)가 살아 있는 나보다 강하다!]
그리고 그날 밤 다시 몰트케를 부른 카이저는 전쟁을 멈춰 달라고 요청하지만 몰트케는 전에 한말을 되풀이하며 이말을 끝으로 기각합니다.
[그리고 일단 정해지면 그것은 바뀔 수 없습니다]
그랬습니다. 이미 전쟁을 바꿀 수 없는 운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2일 전 프랑스의 푸앵카레 대통령은 러시아와 협의 끝에 영국을 끌어 들이기로 결정합니다. 아직도 이 당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을 때, 이미 그들 마음 속에 전쟁은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레이몽 푸앵카레, 그는 유명한 푸앵카레 정리의 앙리 푸앵카레의 사촌동생으로 의원 내각제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으로 평해집니다.
그는 전쟁 중 무너질 뻔한 프랑스를 구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됩니다.>
프앵카레가 파리에 돌아 올 무렵 파리는 열광의 그자체였습니다. 비바 프랑스가 계속 연호 되고 시민들은 동원령이 내려질 즉시
군복을 입을 준비를 마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민 정부는 전쟁을 위한 준비를 마쳤을 뿐 동원령 자체를 내릴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참모총장 죠프레는 이에 대해
언론에 정치인들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결국 프랑스 정부는 7월 30일 제한적 동원령을 선포합니다.
이런 프랑스의 전쟁에 대한 열정은 극단으로 치달았는데 반전론의 상징 쟝 죠레가 암살 당하는 사건이 일어 납니다. 이걸 빌미로
정부는 반국가 인사들의 상당수를 강제 입대 시켜버려 전쟁터로 보내기까지 하죠.
8월 1일 결국 죠프레 장군은 프랑스 정치인들에게 승리하게 됩니다. 즉 동원령이 결정된 것이죠.
예비군이 된 시민들은 파리를 행진했고, 비바 프랑스가 연호 되었습니다. 심지어 군중 중 누구는 보불 전쟁 당시 뺏긴
알자스 만세를 외치며 눈물을 흘리기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행진하는 동안 프랑스, 러시아, 영국 국가가 연주 되었는데 재미있는 건 이당시 영국은 아직 확실한
참전 의사를 밝히고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영국은 프랑스와 독일과 분위기가 사뭇달랐습니다. 여론은 참전 분위기가 확실히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유명 잡지 펀치에 이런 시가 실리고 있었습니다.
[평범한 영국 애국자의 견해를 나타내는 시- 왜 내가 너의 전선에 따라가야 하는가? 나하고 상관없는 문제를 위해?
나는 모든 싸움에 초청받게 될거야 유럽의 지도 위의 어느 곳이든, 다른이의 전쟁에 끌려들어가게 되겠지, 그것이 이중으로 맺은
협약의 목적이니까.]
하지만 이런 영국 분위기에 참전하고 싶어하는 목소리는 분명히 존재했고 그 중 한명이 바로 윈스턴 처칠이었습니다.
7월 26일 자유당 애스퀴스 내각이 전혀 참전에 대해 결정한 게 없는 그때 그는 해군성 장관으로 함대를 집결해 버리는 결정을 합니다.
영국 해군기지인 스코틀랜드 북쪽 끝 스카파 플로에 집결시킨 그가 한 변명은 독일의 잠수함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안전한
곳에 이동시켰다 였습니다.
그는 애스퀴스를 설득함과 동시에 자신의 원래 정당인 보수당에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시 연립정부에 대한 포석을
깔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면서 애스퀴스를 대체할 웨일즈 인 조지 로이드를 밀기 시작하죠.
한편 프랑스는 영국의 이런 미온적인 태도에 분노를 느끼며 영국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8월 1일까지 영국정부는
여전히 전쟁에 미온적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이 8월 2일 독일 외무성이 벨기에에
[프랑스를 치러 갈거니 잔말 말고 길이나
비키시죠]란 최후통첩을 보내게 됩니다. 이는 앞서 말했듯 슐리펜 계획에 따르면 정치인의 정치적 결정을 하지 않아도 군부적
차원에서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전쟁에 끼기 싫어서 전군을 프랑스, 독일 국경에 흘뿌려 배치한 벨기에로써는 싫어도 프랑스와 함께 독일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총 7개 벨기에 사단은 폰 크루크 장군이 이끄는 1진인 독일군 34개 사단을 막아야 했습니다.(다시 말하지만 1진입니다.)
8월 3일 독일군은 벨기에 선전포고 하며 4일에 벨기에 국경을 넘기 시작합니다. 영국의 수상 애스퀴스에게도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벨기에는 벨기에 독립 당시 런던조약을 통해 영국의 무조건 보호해주기로 약조한 곳임과 동시 프랑스와 더불어 영국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 이곳을 적대적인 세력에 뺏긴다면 영국의 안보는 위험했습니다.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1차 대전 초기 수상>
하지만 자유당 당내에 반전과 참전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이 사건은 참전쪽의 불만을 더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당내 대독 강경파를 해군지원으로 무마시키려 했으나 처칠을 중심으로 한 이 파벌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이젠 내각 붕괴가 확실한 가운데 결국 자유당의 당수인 그는 처칠을 통해 보수당의 벨포어를 불려 연립 내각을 형성하고
전쟁에 참가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8월 4일 11시. 영국은 대독 선전포고를 감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