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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1/11 23:42:39
Name nickyo
Subject [일반] 고통은 친구가 참 많네요.
의사는, 아주 사무적이고 차가운 표정으로 날카롭게 몇 마디를 던졌다. '담석이네요, 별로 심각한건 아니구요. 수술하면 나으실겁니다. 일단 진통제좀 투여하고, 병실부터 잡죠.'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을 인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어머니는 식은땀으로 베드시트를 축축히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듯,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그 의사는 검사 몇 가지와 사진 몇 장, 그리고 딱 한 문장의 말로 어머니의 상태를 아주 말끔히 정리했다.

그래, 평소라면  난 그저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고, 수술도 간단한 수술이라고 하는 만큼 금방 나아지실 수 있겠구나 따위의 건전한 생각. 그리고는 의사'선생님'에게 고맙습니다 라고 말했겠지. 아, 병원에 빨리 모셔와서 다행이야. 엄마 수술만하면 금방 낫는대요. 조금만 참아요.

그런데, 그런데 하필, 하필이면 오늘이다. 하필이면. 빌어먹을 일이 하루에 몇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지 모르겠다. 나는 무신론자이나, 만약 브루스에게 비더미라클을 외치며 잘난체를 하는 모건프리먼 같은 신이 존재한다면 제발 X같은 일은 하루에 1개, 아니 인심써서 2개정도로 한정지어줬으면 좋겠다. 아무리 내가 좋게, 웃으며, 참아 넘어가려고 해도 오늘 하루는 좀 너무한다.

아 이론 dog가튼나리요기잉네.

의사의 사무적 어투는 매우 정상적이었다. 그러나 그 정상적인 말투는 오늘 하루의 인내에 대한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물론 의사는 절대 우리 가족을 하찮게 여기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그렇게 말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본디 대학병원의 ER이란 바쁘기 마련이고, 우리어머니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위독한 곳이니까. 그러나 그것은 그네들의 사정이고 하필 나는 평소에는 그렇게 잘 사려깊게 생각했던 그네들의 사정따윈 변기통에 쳐박고 물을 내려버리고 싶은 생각이 가득한 날이 오늘인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정말로 한심하게도 나는 그저 그 의사의 흰 가운을 노려볼 뿐이었다. 내게 주입된 관념과 행동양식과 교육등의 모든 족쇄들은 나의 아주 간단한-그리고 꼭 행하고 싶었던-폭력행위를 아주 적절하게 제압한 것이다. 아, 베리 원더풀. 나의 행동은 정말로 훌륭한 사회적 인간의 모습이었다. 마지막에 눈에 힘을 풀면서 "병실 접수는.."이라고 말하는 나의 모습은 정말이지 남우주연상을 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회적으로 이렇게 꾸욱 참으면 손해를 보지않는다. 잘 했다고 한다. 이런게 정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나. 그 순간만큼의 나는 나를 죽이기 위해 모든 심력을 소비해야했다. 그것이 성인이 된, 사회인이 된 나의 역할이니까. 그리고 그것만큼이나, 나는 오늘 내가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사회니 구조니 원망하는것도 지쳤다. 그 모든것들이 나아지기를 바라느니, 차라리 그 모든것들이 사라지는게 빠를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것이 뒤틀려 보이고 샛노래 보였다. 무언가가 나의 종말을 종용하는 듯 한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다. 무너지는 자신을 하루에 몇 번을 추스리라고 요구하는지 알 수가 없다. 사라지지 않은 채 가슴 한켠에 쌓인 '분노'라는 이름의 창고에 걸린 '인내'라는 자물쇠는 오늘 하루만에 몇십년간 녹이 슬어 손만 대면 스러질 것 같은 모양새로 변했다. 그러나 그 문을 열지 않게 최후의 최후까지 버틴것은- 그들의 삶과 나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었고, 그들의 모습을 그저 내 식대로 왜곡해 받아들였다는걸 어렴풋이 알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따질 수 있는 나의 이성이 오늘만큼은 참으로 대견하고 그만큼이나 역겹다.


광대는 가느다란 줄 위에서 춤사위를 펼친다. 위태위태한 모습이 관객들의 숨소리에 맞춰 흔들거린다. 숨을 쉬는 듯 마는 듯 광대의 휘청거림에 관객들은 호흡을 멈춘다. 광대는 얇디 얇은 줄 위에서 위태로움을 한껏 교태로이 뽐낸다. 광대의 마지막 춤사위는 언제나 화려한 점프였고, 그를 지탱하는 줄은 그 춤사위의 피날레를 함께 하기 위해 힘껏 광대의 체중을 튕겨올린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앞에서, 관객석에 앉은 나와, 광기라는 이름의 광대와, 이성이라는 이름의 끈이 함께 춤춘다. 언제고 끊어질 지 모르는 위태로움 속에서도 나는 그 끈이 끊어지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과, 그 끈은 절대로 끊어져선 안된다는 의식이 영원히 갈등하고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서 참아내는 것만이 방법임을 알게 되니, 웃음이 저절로 사라진다.

-----------------------------------------------------------------------------------------------------------------------------


어머니가 신장에 담석이 생기셔서 갑자기 고통이 너무 심하게 찾아오는 바람에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오늘은 제 생일인데 좋은 일은 커녕 하루에 아주 참기 힘든 일들만 겹치고 겹쳐서 절 공격하네요.


차마 이 질서잡힌 세상에서 엄한 곳에 화를 풀 수 없어 익명성을 빌려 이렇게라도 감정을 조금이나마 글속에 담아 보냅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숨이 가빠 져서 속도 쓰리네요. 대체 왜 이런..

아버지랑 아침에 교대해 드려야겠네요.


live를 뒤집으면 evil이 되고, 여기에 d를 붙이면 devil이 된다고 하는데, 제 삶 속에는 악마가 자리잡고 있나 봅니다.

너무 더러운 글이라 기분 언짢으실 분들이 많으시겠네요.
벌점맞고 삭게가면 그런가 보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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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Ss_YiRuMa
10/01/11 23:58
수정 아이콘
힘내십쇼. 고통을 받은 만큼 반드시 후에 기쁨이 따라 올 것입니다.
10/01/12 00:36
수정 아이콘
어째서 시련은 아무런 죄없는 자들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걸까요..
어머님을 위해서라도 좌절하지 마시고 그 뒤에 더 큰 행복이 기다릴 것이라고 믿으세요..
쾌차하시길 기원합니다..
끼리리릭
10/01/12 00:38
수정 아이콘
제가 수술후 병실에 누워있을때 지나가던 의사들이 지네들끼리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 종양은 잘 제거했네? 근데 이거 곧 재발해서 다시 수술 들어가겠네 하하하"

그때 그 의사는 왜 그렇게 즐겁게 웃으면 말했을까요? 아직도 그때 그장면을 꿈에서 보곤합니다.

수술을 담담했던 의사와 신경전이라도 벌였던걸까요? 아니면 자기가 영어로말하면 알아듣지 못할정도로 내가 바보로보인걸까요...
끼리리릭
10/01/12 00:39
수정 아이콘
그냥 무심하게 말하는 의사에게 화났었다고 말하는 대목을 보니 별 관계도 없는 제 경험이 생각나서 휘갈겨버렸네요 ...
10/01/12 00:41
수정 아이콘
힘내시라는 말씀뿐이 드릴수가없네요..
낙타입냄새
10/01/12 00:51
수정 아이콘
사회적으로 이렇게 꾸욱 참으면 손해를 보지않는다. 잘 했다고 한다. 이런게 정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나. 그 순간만큼의 나는 나를 죽이기 위해 모든 심력을 소비해야했다. 그것이 성인이 된, 사회인이 된 나의 역할이니까. 그리고 그것만큼이나, 나는 오늘 내가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이 구절이 참 인상 적이네요. 힘내세요. 분명 세상에 밝은면도 있잖아요. 힘내십쇼
BoSs_YiRuMa
10/01/12 01:05
수정 아이콘
Gidol님// 글과는 관련이 없는 이야긴데요.
Gidol님이 쓰신 리플이 어째 매번 제 뒤에 바로 붙어있는 것같은 느낌이 듭니다?-_-);;
10/01/12 01:25
수정 아이콘
원글자분의 인생이 남들보다 조금 더 암초투성이인 것을 어렴풋이 알기에 이런 리플을 달기가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그래도 원글자분께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굳이 하나 달자면, 일단 잘 참으셨습니다. 사회생활의 다른 부분에서 분노가 쌓이셨다고 해서 엄한 사람에게 분노를 터뜨리진 않아야 한다는 것은, 힘들긴 하지만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근데 왜 그러한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혐오를 느끼셨는지는 조금 안타깝습니다. 이를테면... 자신을 괴롭히는 상사가 있고, 그 상사에 대한 분노가 어마어마하게 쌓였는데도 먹고 살기 위해서 그것을 자제했다면.. 자신에 대한 혐오가 조금 느껴질 수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원글의 상황은 그런 것과는 많이 달라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에 대한 혐오가 마구마구 느껴지신다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nickyo 님께서는 약간 위험한 상태이신 것 같습니다.

혼자 힘내기를 계속하다보면 가끔 그것이 지겨워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에는 친구에게 기대도 좋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다면 삼겹살에 소주 한잔이라도 나눠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러지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부디 5년 10년 뒤에는 지금의 이런 시절을 웃으며 추억할 수 있으시기를 빕니다.
10/01/12 01:58
수정 아이콘
BoSs_YiRuMa님// 저도 리플 달려고 할 때마다 BoSs_YiRuMa님이 눈에 익더군요. 이것도 운명이려나요...
아나키
10/01/12 08:07
수정 아이콘
힘내세요.
힘내시라는 말 밖에 해드릴 말이 없지만, 힘내시라고 말하는 것 밖에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없지만,
그래도 힘내세요!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Who am I?
10/01/12 08:33
수정 아이콘
어머님의 빠른 쾌유를 빌고...생일도 축하드립니다.

가끔은 옳기 때문에 버티는게 아니라, 그저 뒷수습이 귀찮고 시간이 아까워서 버티는것 같은 순간이 오더군요. 기운내세요.
세상은 살만한건 아니어도, 살만할지도 모르니 살아는 봐야겠지요. 흐흐흐....
10/01/12 08:40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글 내용에 대해 왈가왈부하기에 앞서. 이런 형식의 글 참 좋아합니다. 자주 써주세요.
nicewing
10/01/12 08:43
수정 아이콘
끼리리릭님//

사실 수술을 할 때도 수술방 안에서 의사와 간호사끼리 서로 농담도 하고 잡담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게 절대 수술이 만만하게 보여서 그러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긴장하면 농담도 못합니다.)

하루에 수차례 수술하고 수십명의 환자를 봐야 하는 의료진 입장에서 모든 환자를 대할 때마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일을 하면

그것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견디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수술이건 진료건 이미 의사에게는 일상 생활이니까요.

다만 환자 입장에서는 일상 생활이 아닌 평생 한두번 받을까말까한 수술이고, 자기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진료이니 다르게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런 식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절대' 환자가 듣는 곳에서는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는 그 의사는 굉장히 큰 실례를 한 것이죠.
켈로그김
10/01/12 09:30
수정 아이콘
orbef2님 의견에 동감하는것이...
이런 '당연한' 일들로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하면 한도끝도 없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춥게 만들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Observer21
10/01/12 10:14
수정 아이콘
가끔씩 당연한걸로 화가 나기도 하죠.
저도 언젠가 글쓴이님이 쓴 댓글을 보고 상당히 짜증난 적이 있는데요.(왜 이게 기억이 나지....)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니까 역시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 같아요.
10/01/12 10:39
수정 아이콘
제가 초등학교 때 저희 어머니도 담석 때문에 몇개월간 입원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땐 정말 철이 없었을 때라 어머니의 소중함도 모르고 병문안가는 것이 마냥 귀찮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죄송스럽고 제 자신이 밉더라구요. 나중에 가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담석이 정말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머니의 배에 생긴 수술자국을 볼 때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nickyo님은 다행히 저처럼 나중에 후회될 일은 안하고 계시니 어머니께서 분명 쾌차하시리라 믿습니다. 간혹 세상에 정말 악과 태클만 들어올 때도 있지만, 그것도 찰나의 순간이고 분명 축복만 가득한 날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때일수록 잊고 있던 소중한 것을 더욱 상기시키는 계기도 되길 빕니다. 힘내세요!
10/01/12 11:58
수정 아이콘
좋은 말씀들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병원에 다녀오느라 댓글을 못 달았네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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