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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11/27 03:24:04
Name 루크레티아
Subject [일반] 시대의 지성, 유시민을 만나다.
지난 25일 오후 4시 30분에 숭실대학교에서 유시민 전 장관의 강연회가 있었습니다.
10월에 나온 그의 저서인 '청춘의 독서' 출간을 기념하는 강연회였죠.
생전에 그를 직접 보면서 육성의 강연을 듣는 것이 얼마나 될까 싶어서 수업 끝나는 즉시 한달음에 달려가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생각보다 좁은 장소와 몰려든 인파로 인해서 간신히 저는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 들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서서, 바닥에 앉아서 그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최근 대선 발언 때문이기도 하겠고, 돌아가신 분의 정통 후계자라는 이미지도 있어서 많이 왔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과연 그의 강연은 어떨지, 학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정치인의 면모를 보여줄 것인지 기대반 걱정반으로 그를 기다렸고, 마침내 그는 출판사 편집장님의 소개가 있고 나서 연단에 올라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 간략하게 그의 발언을 정리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책은 인간의 연장이며 책을 불사르는 자는 인간도 불사른다.
그가 가장 먼저 말을 하기 시작한 내용은 '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 였습니다. 그는 그것을 '지식을 탐구하는 원초적인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에.'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런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의 훌륭한 문자로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며 세종대왕을 세계에 유래가 없는 최고의 지도자로 꼽았습니다. 한글을 만든 이유 뿐만이 아니라 지도자로서 다루기 쉬운 '우매한 백성'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역사상 거의 모든 지도자들은 민중들이 우매하기를 바랬습니다. 그 편이 통치에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종대왕께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이 깨달음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문자를 창조하셨습니다. 반대로 진시황은 법가, 점술, 농업 등의 극히 일부의 학문을 제외한 모든 책을 불사르고 학자들을 생매장했습니다. 나치의 히틀러 역시도 나치에 반하는 모든 책들을 불사르고 결국 유태인들과 다른 나라의 사람들까지 불사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백성들의 눈과 귀를 막고 우매하게 만드는 정책을 세계 역사상 거의 유일무이하게 실행하지 않았던 지도자인 세종대왕을 그는 세계 역사에서 유래가 없는 지도자로 평했습니다.
들으면서 지금의 상황은 어떤지 생각해봤습니다. 그냥 쓴웃음이 나오더군요. 물론 왜 그런지 주어는 없습니다.

2. 책읽기는 즐기기 위한 책읽기와 목적의식의 책읽기로 나뉜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책에 담긴 내용을 음미하며 즐기기 위해서 읽기도 하지만 공부를 위해서, 소위 '있어보이기 위해서' 읽는다고도 했습니다. 그 역시 '공산당선언'을 읽은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을 하더군요.(간간히 청중들을 터뜨려주는 센스도 있었습니다.) 보통 누군가가 둘 중에 무엇이 중요하다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은 즐기기 위한 책읽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지만 그는 목적의식의 책읽기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본인 스스로를 계발하고 지식을 쌓는 데에는 목적의식의 책읽기가 더 도움이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목적의식의 책읽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면 결국에는 책읽기에 흥미를 읽어버릴 수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결론은 '목적의식의 책읽기도 중요하지만 재미없는 책을 너무 매달려서 읽진 마라.'입니다. 그는 카프카의 '성'을 한글로 2번, 독일어 원문으로 1번, 총 3번을 읽기에 도전했지만 중간에 너무 재미가 없어서 접었다고 하더군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고 2때 오기로 읽기 시작했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떠올렸습니다. 어거지로 읽긴 했지만 역시 기억에 남진 않더군요. 있어보이기도 참 힘든 책읽기입니다...

3. 글을 잘 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다독과 다작이다.
평범한 진리이기에 그 역시도 이 말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1984년 영등포 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당시 시국사범으로 복역하던 그에게 법원의 판결문이 전달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에 그 판결문은 억지와 비논리로 가득찬 어처구니 없는 문자의 조합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0.7평의 독방에서 원고지에 먹지를 댄 채로 나오지 않는 볼펜 끝으로 눌러쓰며 100매의 항소 이유서를 썼다고 합니다. 또한 시국사범이기에 일체의 외부 접촉이 차단된 상태에서 할 것이 없었던지라 토지 1부와 장길산을 5회에 걸쳐서 반복해서 읽었답니다. 우리나라 소설계의 가장 큰 두 거목의 작품인지라 방대하고 아름다운 어휘로 가득 찼던 이 작품들에게서 그는 수많은 어휘와 표현법을 습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출소하고 87년까지 근 3년여를 투쟁 선배인 김근태 전 의원과 이해찬 전 총리 밑에서 선언문 쓰는 일로 보냈습니다. 초중고를 통틀어 글쓰기에 대한 상이나 칭찬 한 번을 받지 못하던 그가(농담인줄 알았는데 정말이라고 누차 강조하더군요.) 글쟁이로 소문나기 시작한 것이 이때였다는군요.
다독과 다작을 하되 '좋은 책을 여러 번 읽고, 그 어휘를 온전히 습득한 이후에 다작을 하라.' 가 요점이겠습니다.

4. 아무거나 메모를 되도록 많이 하자.
학생운동 시절, 형사들의 눈을 피해서 다방에서 접선하던 시기에 그는 상대방 접선자를 기다리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 자기 주변의 모든 풍경, 떠오르는 생각 등을 닥치는 대로 메모했다고 합니다.(물론 그 메모는 어떤 꼬투리가 잡힐지 모르기에 바로 파기했다는군요.) 그렇게 메모를 하다보니 어느새 자신의 주변 환경 묘사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고, 1980년 지금의 국정원 조사실에서 이틀 동안 맞는 것이 견디기 힘들어 진술서를 쓴다는 핑계를 대고 썼던 시위 현장 묘사가 한 편의 소설처럼 되서 당시 수사반장에게 극찬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6개월만 메모를 하면 확실한 표현력의 상승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며 '약장수' 유시민이 말을 했습니다. 저도 약장수의 말을 믿어 볼까 합니다.

5. 의인의 도는 작금의 변화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맹자의 내용을 들며 지금 당장 세상이 변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의인의 도를 세우고 그 길을 가라고 했습니다. 면암 최익현은 일본군에 잡힌 후에 곡기를 끊고 죽어서 의인의 도를 다했지만 그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후세에 의인으로 빛나며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당장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이 진정한 의인의 도는 아니며 변화를 원하고 그 방향이 옳다면 그 이후의 반응을 두려워 하지 말고 망설임 없이 행하는 것이 진정한 의인의 도라는 것입니다.
문득 들으면서 우리나라 정치판과 투표가 생각났습니다. 더러운 정치판에 깨끗한 사람들이 투신하면 '더러운 곳에 뭐하러 들어가느냐.'며 말립니다. 투표를 할 때에는 '대세가 정해져 있는데 내 표가 사표가 될 바에는 투표 안한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를 잘 알게 해준 이야기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고등학생과 대학생이라면 꼭 읽어보아야 할 만한 책으로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박경리의 '토지'를 꼽았습니다. 두 책 모두 말이 필요없는 책들이기에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듯 합니다.

강연을 들으며 확실히 그는 '시대의 지성'이라고 불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의 약간 급진적인 면모도 사라지고 이제 오십대에 접어들면서 그의 완숙미가 확실하게 뿜어져 나오는 기분이 들더군요. 다른 대학들도 마찬가지로 강연을 할 예정이라는데 다들 꼭 한 번 쯤은 들어보셨으면 합니다.


P.S. 숭실대 전에는 이대에서 강연을 했는데 사람이 별로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냥 적은 인원이겠거니 하고 왔다가 깜짝 놀랐다고 하더군요. 다른 학교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 대선 이야기의 여파도 상당히 큰 탓에 상대적으로 이대보다는 많은 인원이 모인 듯 합니다. 만약 강연 한다고 하면 30분 정도는 일찍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약석도 있는데 예약하고 안오는 꼴불견들도 있어서 참 보기 안좋더군요. 대선에 대한 질문도 나왔는데 아직까진 확실하게 마음을 정한 것 같지는 않아보였습니다. 부디 그가 좋은 방향으로 가기를 바래야겠죠. 그리고 만약 질문하실 분들은 앞에 자기 소개는 생략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시간도 없는데 자기 소개와 자기 모임 소개하느라 시간 낭비를 한 숭실대 독서모임은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만 할 듯...;;(별로 보기도 좋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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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형젤나가
09/11/27 04:05
수정 아이콘
의인의 도 부분 잘 읽고 갑니다.
서지훈'카리스
09/11/27 05:00
수정 아이콘
토지는 양에 눌려서 차마 못 건들였는데 꼭 읽어봐야겠네요
09/11/27 05:44
수정 아이콘
의인의 도 부분 잘 읽고 갑니다. (2)
카이레스
09/11/27 07:59
수정 아이콘
저희 학교도 계획이 있는지 한번 알아봐야겠네요. 감사히 읽고 갑니다.
09/11/27 09:40
수정 아이콘
독서토론회가 뭔짓을했나요 크 저번 진중권씨 강연할때도 많이 왔는데 이번에도 많이왔었나 보네요 학과 교수님이 초청한 강연 오라고 협박만 안했어도 가는거였는데 말이죠
09/11/27 09:44
수정 아이콘
발언 하나하나가 명언이고 감동입니다 ㅠㅠ
의인의 도 부분 잘 읽고 갑니다. (3)
09/11/27 09:55
수정 아이콘
우리학교도 곧 오신다는데..가봐야죠
언제나남규리
09/11/27 09:59
수정 아이콘
저희학교도 오셨는데 수업중이라서 듣지 못해서 넘 아쉬어요
09/11/27 10:25
수정 아이콘
하나님// 학교가 아니라 대전 아닌가요;; 기독교무슨회관이었던 듯...아무튼 저도 꼭 갈 생각입니다만, 제가 못들어갈만큼 미어터지도록 많이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ManUmania
09/11/27 11:15
수정 아이콘
서지훈'카리스마님// 토지 꼭 읽어보세요. 제가 원래는 이번학기에 토지를 다 읽을 목표로 시작을 했었는데 지금은 아직 21권중에 10권을 보고 있지만.. 3학년 2학기라 쉽진 않네요; 어쨌든, 정말 좋은 책입니다. 다른 책을 읽을 때와는 달라요. 토지는 그 세계가 넓다기 보다는 깊이가 깊다고 해야 할까요. 정말 수백명의 등장인물들이 나오는데 그 사람들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다 그냥 넘어가지를 않습니다. 그 수백명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있어요. 그리고 2권에 등장했던 사람들이 그 이후에 5권, 9권에 등장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연결이 되는데 그 연결이 정말 유기적입니다. 처음 이 글을 박경리 선생님이 쓰실 때 어떤 식으로 구상을 하고 쓰셨을까 싶을 정도로 놀랍습니다. 그렇게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고 그들이 저마다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데 정말 자연스럽게 유기적으로 작품이 전개가 되죠. 그리고 토지의 세계가 1897년에서 1945년까지의 시대를 다루는데 그 당시의 있었던 사건들, 관동대지진, 한일합방, 동학혁명 등등등.. 그 당시의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도 교과서에서는 알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잖아요. 정말 그런책인것 같아요. 당시에 사용되던 방언, 용어들에 대한 표현력도 워낙 깊고 풍부해서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나중에는 우리나라의 언어의 역사를 다루는 자료로도 정말 좋지 않을까 싶구요. 괜히 대작이 아니고 괜히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정말 강력추천하는 책이에요. 겨울방학때까진 꼭 다 읽어야 겠어요.
09/11/27 11:24
수정 아이콘
한 학기였지만, 그래도 이 분의 경제학 수업을 들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흐흑 유강사님!!
09/11/27 11:28
수정 아이콘
Shura님// 그거슨 여..염장!
히로317
09/11/27 11:29
수정 아이콘
유시민 전 장관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 글에서 만큼은 루크레티아 님의 정리솜씨에 더 큰 고마움을 느낍니다.

강연을 들으시면서 이 만큼 정리하기도 쉽지 않을텐데, 마치 직접 듣는 것 처럼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율리우스 카이
09/11/27 11:40
수정 아이콘
PGR만 보면 유시민 대통령 나올거같은데 말이죠..

... 휴..

현실은 시 to the 망 이겠죠? 이분은 노무현 전대통령처럼 대권을 잡기에는 약점이 노출이 너무 많이 되었음. 정말 똑똑하고 대통령하면 잘하실 분인데.....
성야무인Ver 0.00
09/11/27 11:45
수정 아이콘
인간적인 유시민을 좋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리더나 계파를 책임질만한 보스형 정치인은 아니라고 봅니다. 분명히 유시민씨가 자기에 맞는 보스를 위에 두고 국회의원이나 유시민씨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장관의 자리를 할경우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할수 있을것이라고 봅니다. 그에 반해 대선후보로 나설때나 그 이전에 노무현 전대통령에게 칼날이 돌아갔을때 노무현 전대통령의 2인자자리에 오르기 위해선 어느정도 관리자의 능력을 보여 줬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구요. 그렇다고 노무현 전대통령처럼 특정이슈가 나오면 무슨수를 쓰던지간에 꺾이지 않아야 되는데 그런모습을 본것도 아니구요. 제가 유시민씨에게 제일처음 실망했던건 노무현전대통령 탄핵발의가 되었을때 그걸 막지 못했다고 대성통곡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인간적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가진 정치가적 이미지에 비추었을때는 우는시간에 차라리 다른대책은 강구하고 언론이라도 이용했어야 했는데 그것마저 못한걸로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시민씨자체가 모자란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학자나 평론가의 입장에서 계속있었으면 지금보다 휠씬 나았을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정치가 유시민이라는 단어를 붙일때는 어느정도 한계가 있는 분이라고 보니까요.
적합한아이
09/11/27 12:08
수정 아이콘
감히 대통령감을 논할 자격은 못되지만
그런 문제를 떠나서 꾸준히 일관된 자세를 보여주는 모습이 정치인으로서 충분히 신뢰할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09/11/27 15:32
수정 아이콘
시기상조입니다.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승리도 기적이지만

이건 기적이 아니라 혁명이라도 일어나야지 가능한 승리로 예상됩니다.
제시카와치토
09/11/27 16:08
수정 아이콘
호랑이 없는 굴에 늑대나 여우가 왕이 될수도 있습니다.
중요한건 그 늑대나 여우가 호랑이 만큼의 배포와 리더쉽을 키울만한 능력이 있겠느냐 없겠느냐의 차이죠.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유시민 전 장관 이라면 전자쪽에 가깝다고 생각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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