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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11/22 21:08:40
Name 헥스밤
Subject [일반] 직업으로서의 학문.
PGR에도 아마 적지 않은 대학원생 분들이 계시리라고 생각되고, 그 중에서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꿈꾸는 분들도 많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네, 저도 그 중 하나입니다. 올해 초에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나름대로의 연구와 고민을 하고 있는 그저 그런 대학원생 중 한명입니다.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구요, 질적방법론과 과학사회학/지식사회학에 대한 꿈을 꾸며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어쩌다보니 현실은 동성애자-알콜중독자-탈북자 등의 '팔릴만한' 소수자 연구를 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네, 팔릴만한.

자연과학/공학도 마찬가지겠지만 워낙 돈도 연구여건도 안되는 인문사회과학 연구에서 장학금을 받고 연구업적을 쌓자니 결국 내가 실제로 하고 싶었던 막연한 꿈같은 연구들-작가나 학자, 언론인 등의 지식생산자들은 어떻게 스스로를 사회화할까, 우리가 '보양'과 '약물사용'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보다는 어느 정도 그 분야에 대한 접근성(?)이 있고 사회적으로 hot한 이슈들에 주력하게 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아, 물론 저는 제가 손댔던 연구들이 결코 재미없다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만.

마찬가지로 이론과 담론들에 대해 관심이 적지 않지만 실적을 위한 실증 연구들을 진행해야 되는 압박도 약간은 슬픕니다. 아, 물론 그렇다고 이론이 사회학의 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학부 시절 사회학 이론들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다가 학부 말년 자료에 기반한 실증 연구의 즐거움에 눈을 뜨게 되고 그러한 연구를 해보잡시고 대학원에 오게 된 케이스인지라.

건강이 좋지 못한 것도 슬픕니다. 매년 감기로 한달쯤 드러눕고 불면증으로 한달쯤 드러눕는 심약한(?) 성격인지라 학부 시절에도 학점이 그리 좋지 못했는데, 프로젝트와 논문 작업 사이에 끼어드는 건강상의 문제는 참 이거 어떻게 조절이 되질 않습니다. 동기들에게 미안하고 선생님께 미안하고 그런 와중에 평판은 계속 깎여나가고...

어디나 그렇듯 커뮤니티의 일들도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말싸움하자면 어디가서 뒤지지 않을 사회학과 대학원의 커뮤니티는 언제나 시끄럽고 차분하고 분쟁적이고 평화롭습니다. 게다가 워낙 작은 규모의 과이고 대학원생 뿐 아니라 학부생 교수님들도 모두 말이라면 지지 않는 그런 곳인 덕에 '사회학과 학부생이 연애를 시작하면 그날 오후에 모든 석박사들이 그에 대해 알게 될 것이고 다음날 정도면 모든 교수들이 그의 연애에 대해 알고 있다'는 장난스런 소문까지 도는 수준인 곳의 인간관계는 쉽지 않습니다.

영어와의 사투도 쉽지 않습니다. 중고대 다닐 동안 영어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은 적은 없는데, 나름 꼴에 열심히 수업좀 듣겠다고 학부 시절 원강도 자주 들었던 편이었는데, 대학원 오니 이건 뭐 수업에서 한글 텍스트를 쓰는 경우는 사실상 없고 그렇다고 양이 적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용이 만만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토플 만점자에 조기유학파에 순수노력파인 영어숙련자에 나는 지금까지 뭘 하면서 살아온건지.... 학부 시절 문장력에 경탄하며 읽었던 맑스는 이런 개새가 왜 이리 글을 화려하게 써서 읽질 못하게 만들었니 하는 생각뿐이고.

새로운 기능을 익히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통계는 사회학의 주된 언어 중 하나인데, 정말 언어라는 비유가 적절한 듯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제2외국어가 던져주었던 공포감을 다시금 맛보는 기분. 어찌저찌 학제개편의 정중앙에서 통계수업 하나도 안 듣고 사회학 학사 받아서 좋아했던 과거의 내 모습에 경멸을 던지며...

하지만 제일 두려운 건 역시 미래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순수학문 분야의 석사는 연애 상대로서 최악입니다. 자녀로서도 최악이고. 간단합니다. 석사과정이 안풀리면 그대로 석사 백수가 되고, 잘풀리면 되면 10년짜리 박사유학을 가서 돈먹는 괴물이 됩니다. 그렇게 유학에 성공한다고 고생끝 행복시작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미 버린 학점과 지금부터 해도 늘 리가 없는 영어를 뒤로한 채 어거지로 업적을 쌓아봅니다. 덕분에 두학기 동안 국제학회 발표 두어개 국내학회 발표 서너개 RA/TA 두어개를 해봤지만(아, 물론 모두 대학원생 세션입니다) 모두가 업적을 향해 달려가는 판에 이정도 가지고는 어림없습니다. 첫학기 퍼블리쉬의 '업적'을 달성한 친구도 있고, 2학기째 SCI급 퍼블리쉬 '위업'을 노리는 친구도 있습니다. Regular session 발표도 하나쯤은 해준 친구들도 몇몇 보입니다. 이미 학진등재지급 주저자 퍼블리쉬를 향해 달리는 동기들을 보며, 사실 학부때부터 손에 쥐고 거의 1년간 진도가 안 나가고 있는 내 논문을 보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사회학은 성찰의 학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느끼는 스트레스와 공포는 성찰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지난하고 비루한 생활세계의 일들입니다. 가끔씩 슬픈 일이긴 하지만 이게 왜 슬픈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건 역시 슬픈 일입니다. 무슨 글을 쓰고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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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hrodite
09/11/22 21:14
수정 아이콘
학부 시절 문장력에 경탄하며 읽었던 맑스는 이런 개새가 왜 이리 글을 화려하게 써서 읽질 못하게 만들었니 하는 생각뿐이고.

크크크크크크크크
09/11/22 21:24
수정 아이콘
그런데 살다 보면 다들 그럴 거예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함에도 개인의 이상과 회사의 현실은 상충하는 법이거든요.
누구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고, 현재 상황에 대해 스트레스 안 받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물론 객관적인 경중은 존재할지언정.^^;;

여튼 사회학 전공이시라니 반갑긴 하네요.^^
뭐 저희 선배들도 석사, 박사 과정 밟고 학교에 강의 나가시는 분이 꽤 되는데 지금 후배들이 선배님들 보고 '교수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어색한데, 이야기 들어보면 선배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도 같더군요.
그래도 '열심히 할 뿐'이란 말을 들으면 역시 정답은 자기가 선택한 길을 확신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것뿐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고요.
혼란스러우시겠지만 확신을 가지고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요?
너무 기본적인 말 같긴 하지만요.^^;;

그나저나 통계 안 듣고 어떻게 졸업하는지 신기하네요.
우리는 사회통계, 사회조사방법론, 사회조사실습은 전필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생각해 보니, 사회조사실습은 통계랑 방법론 듣고 안 가면 안 되는 것 같아서 수업을 들었고, 전필은 앞의 두 과목이었던 것 같네요.^^;;)

(졸업하기 전에 대학원 가라는 선생님의 권유도 받아봤지만, 집안 형편상 대학원 진학이 어려웠을뿐더러 통계와 영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패스한 사람으로서 조금 부러운 마음도 있긴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배운 거 다 까먹고 뭐가 뭔지 기억도 안 나네요.ㅠ_ㅠ)
헥스밤
09/11/22 21:31
수정 아이콘
Artemis님// 뭐 학제마다 이름이 약간씩 다를텐데, 사조방에 해당하는 사회조사입문은 필수였고 사조실에 해당하는 사회조사연구와 통계는 선택이었습니다. 남들이 통계 듣는 동안 질적방법론, 문화인류학 등속의 수업을 들었었고. 그 외 모든 수업의 실증 연구는 질적연구로 막았습니다. 현지조사하고, 심층면접하고, FGI하고, 어줍잖게 담론이나 내레이션도 짤라서 분석해보고...
요를레이
09/11/22 21:32
수정 아이콘
작성자분 K대 대학원생이시죠? ^^
같이 전공 수업 한번 들었던 사람입니다. 저보다 학번이 낮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학문에 뜻을 두시고 대학원에 진학하셨다니 저로선 우러러 보일 뿐입니다. 정진하셔서 '직업으로서의 학문'에 스스로 만족하실 만한 성과를 거두시길 바랍니다.
09/11/22 22:19
수정 아이콘
공감되는 글이네요.. 저도 상담심리학으로 석사학위 받아놨지만.. 제가 있는 방향으로 열심히 노력해봤자.. 다른 학과 학부생 월급에도 못미치는 상황이.. 성취감은 있고 공부 자체도 재미는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와 닿으면 답답하네요..
09/11/22 23:10
수정 아이콘
근데 궁금한것이 있습니다
대학원 입시는 어떤수준인가요?
편입보다 쉽고 수능보다 어려운 수준인가요?
제가 어렸을때는 대학원은 돈만있으면 간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ㅜㅜ
09/11/23 00:04
수정 아이콘
저는 지금 대학교 2학년생이지만.. 저도 석사-박사를 꿈꾸고 있는 학생입니다.
대학원생의 생활이 어떤지는 잘몰랐는데 글잘읽었습니다.
저가 꿈으로 잡고있지만 글쓰신분과 같이
미래가 보장이 될런가 늘 고민이 됩니다.
거기다 전.. 아직 군미필인데다 학사장교와 그냥 육군사이에 갈등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ㅜㅜ
또 더한다면.. 전 스포츠과라 그 자리가 더좁을꺼같아 두려움이 앞서고있습니다 ㅜ
09/11/23 00:43
수정 아이콘
사회학과는 거의 반대편 끝에 있는데 공대이지만, 공감이 많이 가는 글입니다. 기본적으로 '학계' 라는 곳은, 피라밋 아래쪽 사람들의 대부분이 한칸 위로 올라갈 수가 없는, 본질적으로 인적 구성이 잘못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뭐 매년 배출되는 학석박사들과 교수의 비율을 보면 바로 답이 나오죠. 그러다보니 석박사 마치고 나서 비로소 다른 직업을 찾아보기 시작하는데, 그럴거면 애초에 대학원은 뭐하러 갔나.. 하는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구요.

뭔가 크게 잘못된 상황인데, 어디를 손을 봐야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09/11/23 00:50
수정 아이콘
BIFROST님// 자대 대학원[자기 학부 출신 대학원] 진학은 정말 쉽습니다. 왠만하면 원서만 내면 되는 수준이고...

그런데 타학교 대학원 진학은... 무지 힘들다고 하더군요; 전 겪어보지는 않아서 뭐라 하기는 힘드네요
09/11/23 00:50
수정 아이콘
오호 pgr에서 대학원생을 만나다니;;
그러나 저와 좀 다른 대학원생이시군요 ^^;
전 자연과학계열 쪽이라 저 위에 쓰신 "맑스"를 이해하는데 한 10분은 뭐지?뭐지? 하면서 생각한
완벽한 공돌이는 아니지만 반쯤 공돌이가 되어가고 있는 자연계열 대학원생입니다.

뭐 어디든간에 비슷하겠지만서도
자연계열쪽도 취업이나 여러가지 공부하는 면에서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내가 지금 원하는 공부가 이런건가..;;; 하는 심각한 고민에 휩싸이기도 하고
몇날 몇일 교수님이 맡긴 여러 문제를 손에 쥐고 있자니 머리에 쥐나면서 정말 도망가고 싶을뿐이죠;
별반 다르지는 않을껍니다. 여타 다른 계열 대학원생들도 비슷하다죠?
다만 취업을 하는데 있어서 조금 인문계열쪽보다는 선택의 폭이 넓고 갈 곳이 좀 더 많지 않나 싶을 뿐이지
막상 좋은데 들어갈려고 하면서 공사, 대기업 생각하다보면 정말 어림없을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죠;;

이제 대학원 1학년 2학기가 지나가고 있는데
정말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스쳐지나가는 계절인거 같네요
헥스밤님도 공부 열심히 하셔서 남은 1년동안 좋은 학문의 성취를 얻으셔서
취업준비 잘하시길 바랍니다!
이상... 같이 우울(?)해지는 pgr의 한 대학원생이였습니다.
내일은
09/11/23 01:33
수정 아이콘
사회학 전공자이시라니 반갑네요. 저도 모 대학에서 학부와 대학원에서 사회학과라는 이름을 짊어지고 다녔습니다.
사실 결혼정보회사에서 인문학, 사회과학 대학원 생들은 직업 순위에서 48-49위 정도 합니다. (그 밑으로는 2개 정도 있습니다. 농어민, 군인... ) 뭐 그래도 이쪽 길을 택할 때 안정된 삶과는 거리가 멀어질꺼라는 것을 알았지만 직업으로서의 학문이 아니라 즐거움이 선택요인이었기 때문에 딱히 후회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회과학을 업으로 삼으려면 통계나 영어 둘 중에 하나는 마스터 해두시는게 편합니다.
저는 원래 이공계 출신이어서 수학과 컴퓨터 랭귀지는 자신있었는데, 통계 기초 없이 응용통계만 배울려니까 짜증이 나서
대학원에서 틈틈이 통계학과 수업을 청강하면서 기초를 다져놓으니 편해지더군요. 영어는 뭐 원서 읽을 정도만... ^^;
09/11/23 03:17
수정 아이콘
본문과는 상관없지만 대학에 처음 들어갈 때 읽었던 책이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이었습니다.
그때는 나름 멋있어보여 그 꿈을 잠깐이나마 꾸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뭐..--;;
마땅한 열의도 없고, 그 길을 걸으시면서 고생하시는 많은 분들을 보니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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