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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6/29 09:22:17
Name happyend
Subject [일반] 과거로부터의 편지-by 박제가
과거로부터의 편지-by 박제가

조선후기 정조시대. 지식인들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을 호흡한 도시인들과 그렇지 못한 시골 농장주의 귀공자들.

중국의 역사는 묘하게도, 한족과 이족이 번갈아 중원을 차지하기를 거듭하는데 한족 집권기에는 국수주의가 반대로 이족 집권기에는 문화개방기가 반복되는 특징도 있습니다.
원나라나 청나라도 이족이 세운 나라답게 동서양문명을 결합시켜냄으로써 인류문명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습니다.

서양에서 신대륙의 발견을 통해 벌어들인 은화의 절반은 이 개방적인 바닷길을 따라 동양으로 밀려들었고, 중국의 차,비단,도자기를 사들이는데 바쳐졌습니다.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은 은화와 문명이 몰려드는 곳이되었습니다.

라이프니쯔가 0과 1로 이루어진 전자계산기를 발명하게 된 데에는 베이징에 살고 있던 친구(신부)와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서 주역,즉 음양의 원리를 배운것에 힘입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쯤되면 동양과서양의 만남은 가히 운명적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리고 있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은 성리학이 가져다주는 중세적, 폐쇄적, 주지주의적 억압에 신물이 난 터라 새로운 대안을 찾고 있었습니다.

성리학자들은 조당에 올라 임금에게 엎드려 글로써 말로써 백성들의 고통을 입에 올리고, 그들의 고통에 눈물을 흘렸지만 그것은 점차 악어의 눈물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성리학자들이 입만 열면 강조하는 절약과 검소의 선비정신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의 조건도 갖지 못한 채 극한에 내몰린 하층백성들에게는 잔인한 미덕이었습니다.

생산력이 급속하게 확대되기 어려운 문명수준에 버둥대야 했던 중세성은 변화하는 세계속에서 여지없이 파괴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기술문명은 절약과 검소보다 소비와 생산의 근대속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리학이 대변하는 중세성은 낡은 패러다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정조는 새로운 세대에게 중국여행의 기회를 거듭거듭 주면서 새로운 근대성을 끌어들일 계획을 세웁니다.

그 기회를 잡은 것은 슬프고도 푸른 눈을 가진 서자 박제가. 집안이 남인계였던 지라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떠나게 된 것입니다.

박제가에게 베이징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노력해도 얻을 수 없었던 기술문명의 진보를 한눈에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달 남짓가량 베이징에 머무는 동안 박제가는 옆에 공책을 끼고 거리의 모든 것을 적고 그렸습니다. 돌아오는 다른 사신단의 보따리는 선물로 가득찼지만 박제가의 등짐에는 종이쪼가리가 가득했습니다.

귀국후 박제가는 김포의 허름한 농가를 빌려서 불세출의 역작의 집필에 들어갑니다.그것이 바로 <북학의>입니다. ‘의’란 기구,도구,제도 등을 통칭하는 한자어로 쓰이니 말그대로 북학,즉 선진문물에 대하여 쓴 글입니다.

이 수려한 저작의 서문은 특히 더 아름답습니다. 일부만 소개합니다.

‘옛 임금이 백성을 가르치고 깨우칠 때 집집마다 일일이 찾아다니지 않았다. 절구를 하나 만들어내자  껍질을 벗기지 않은 낟알을 먹는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졌고, 신을 한번 만들어내자 온 세상 사람들이 맨발로 다니지 않게 되었다. 또 배와 수레를 한번 만들어내자 아무리 험준한 곳이라도 운반하여 유통시키지 못하는 물건이 없었다. 이런 방법이 얼마나 간단하면서도 쉬운가’

요즘 떡볶이집 논쟁이 한참인가 봅니다. 서민을 살리고 싶다면, 집집마다 일일이 찾아다니기 보다는 절구를 만들어내고 신을 만들어내고 배와 수레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떠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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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두미키
09/06/29 09:27
수정 아이콘
휴...... 인거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honnysun
09/06/29 09:34
수정 아이콘
해피엔드님의 역사 글은 언제나 좋군요.
마지막 줄 동감입니다.
09/06/29 09:36
수정 아이콘
조.. 좋은 서문이다!

농담처럼 썼지만 정말 좋은 서문이네요. 하지만 저 당시에 저런 소리를 하면 좌빨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얼마전에 길을 가다가 공짜급식을 해주는 시민단체 트럭 뒤에 써놓은 문구가 있었는데,

'우리가 배고픈 자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면 좋은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배고픈 자들이 왜 배고파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우리에게 공산주의자라고 한다'

라고 써있더군요.
주먹들어가는
09/06/29 09:39
수정 아이콘
올려주시는 좋은 글 항상 감사합니다.
예전 역사 시리즈는 게시판에는 찾아도 안보이는것 같던데 책으로 나왔죠?
점박이멍멍이
09/06/29 09:42
수정 아이콘
역사를 통한 현실의 의해... 항상 고맙습니다...
09/06/29 10:10
수정 아이콘
조.. 좋은 결론이다!
저도 모르게 박수치게 만드는 happyend님의 글솜씨! 명불허전이군요 >.<
morncafe
09/06/29 10:15
수정 아이콘
아... 좋은 글입니다. happyend 님과 박제가에게 감동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happyend
09/06/29 10:20
수정 아이콘
OrBef2님// 네.박제가는 당시 '좌빨'이었습니다. 당시의 용어로는 '당괴'였습니다. 당나라병에 걸린 괴물이라는 뜻입니다.
말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당나라는 힘(군사력)으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최고였던 나라입니다.하지만 이민족에게 무릎을 꿇었죠.이 시대를 반성하면서 나온 것이 송나라 신유학입니다. 그러니까 신유학(정주학이라고도 하고,주자학이라고도 하고 ,성리학이라고도 하는)은 태생부터 국수주의입니다.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이 이것이 우리나라에 와서 송시열과 그 제자들과 결합하면서 극우꼴통이 됩니다.
그들 눈에 당나라는 좌빨이었죠. 그런데도 이수광을 비롯한 도시문명의 세례를 받은 젊은이들은 당나라 시와 삼국지연의와 같은 문체에 열광합니다. 자연주의적인 성리학에 반해 당나라문학은 인간의 내면을 노래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박제가는 색깔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 '문체반정'에 걸려 낙마합니다.
참,묘한 역사입니다...
주먹들어가는 입님// 책으로 만든 것은 아니고요,여러가지 이유로 블로그에만 올렸습니다.
09/06/29 10:22
수정 아이콘
happyend님// 그렇군요. 문체반정이라는 단어 자체는 알고있었지만 그것이 그렇게 엮이는 것인줄은 몰랐네요. 답변 감사합니다.
09/06/29 10:33
수정 아이콘
빼어난 글이군요.
09/06/29 10:34
수정 아이콘
박제가의 서문도, happyend님의 글도 모두 명문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좀참자
09/06/29 11:37
수정 아이콘
와~좋은 글입니다.
COurage0
09/06/29 12:44
수정 아이콘
주옥 같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Je ne sais quoi
09/06/29 13:56
수정 아이콘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도데자뷰
09/06/29 14:49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글을 읽어봅니다.
좋은 글 감사드려요.
The xian
09/06/29 15:50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위정자들은 "집집마다 일일이 찾아다니기 보다는 절구를 만들어내고 신을 만들어내고 배와 수레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떠할지요?"라는 말에 '그래서 4대강이 필요하다' 할 놈들이라. 씁쓸하기 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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