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유머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보고 생각나서 적어 봅니다.
('기관사 아빠와 아들이 반갑게 인사하는 법'
https://ppt21.com../pb/pb.php?id=humor&no=236138&page=5)
2008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학교를 마치고 기분도 우울한 기분도 달랠 겸 오랜만에 야구를 보러 갔지요.
기아와 히어로즈의 목동 경기였습니다.
잠실만 다니다 처음 온 목동구장은 마치 종합경기장에서 축구를 보다가 전용구장에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아담하면서도 운동장의 선수들과 더 가까운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기분전환하러 간 터라 승패에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아는 또 초반부터 밀리기 시작했어요.
전년도 꼴찌였던 터라 큰 기대는 안 했지만 역시나 맥없이 끌려다니는 야구를 하더라고요.
어차피 경기는 기울고, 역전승을 잘 거두지 못하던 시절이라 경기는 포기한 채 경기장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어요.
처음에는 당연히 1루측으로 가서 앉았는데 경기에 집중하지 않다 보니 외야쪽으로 가서 기아의 불펜 투수들이 몸을 푸는 것도 구경하고,
(그중에 양 모지리도 있었고, 당시엔 덜 아픈 손가락이었던 기주 선수도 있었고, 4년만에 복귀한 유동훈과 불펜의 소년가장 손영민 등...)
좌석 곳곳을 돌아다니며 다음에 올 때 앉기 좋은 위치를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3루 히어로즈 좌석으로 건너 갔고, 1루 측에 비해 사람이 적고 조용해서 사색도 할 겸 관중들과는 동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물론 자리잡기 전에 외야쪽 히어로즈의 투수들이 몸을 푸는 것을 본 다음이었죠.
평소에 외야석을 선호했는데 외야가 없는 목동구장이다 보니 그나마 외야에 가까운 쪽으로 자리를 잡았고, 고개를 돌리면 히어로즈 선수들도 볼 수 있으니 그냥 계속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후반을 향할 무렵 자매로 보이는 두 여자아이가 제가 있는 3루 외야쪽 한산한 곳으로 옵니다.
저렇게 어린 애들이 둘만 왔을까 궁금해 하던 찰나 뒤에 엄마로 보이는 분이 따라 오더라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경기는 보지 않고 제 근처에 자리를 잡습니다.
경기 중반 이후에 온 것도 의아한데 야구를 보기는 커녕 줄곧 외야쪽 히어로즈 불펜을 보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두 딸이 불펜이 보이는 쪽으로 쪼르르 달려갑니다.
아마 공수 교대 시간이었던 것 같네요.
뒤 이어 엄마도 따라 가고요.
그러더니 큰 애가 불펜을 향해 소리치더군요.
"아빠~"
뒤이어 작은 애도 따라 부릅니다.
"아빠, 아빠!"
그렇게 불펜과 엄마를 번갈아 보던 아이들에게 엄마는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주면서도 웃습니다.
담장 너머 불펜 쪽에서 한 선수가 이쪽을 쳐다 보고 지긋히 손을 흔드네요.
두 딸과 엄마도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듭니다.
경기는 이미 넘어간 것 같고, 패배의 직감을 처음 온 구장에 대한 호기심으로 누르며 기분전환을 하려던 저에게 이들 가족의 상봉(?)은 제 입가에도 미소를 짓게 하더군요.
꿀꿀한 기분을 완전히 날려 버리고, 기아 타이거즈의 패배를 관심 밖으로 밀어내며 웃음을 가져다 준 순간이었습니다.
근데 도무지 저 선수가 누구인지 통 모르겠는 거예요.
한화와 같이 두번째 응원팀인 히어로즈인지라 웬만한 주전 선수들은 다 알고, 특히 투수들은 유망주를 포함해 주전이 아닌 선수들까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두 아이의 아빠 정도면 분명 중고참 주전이라고 생각했지요.
히어로즈가 무난하게 가져가는 경기라 한두 명 외에는 몸을 푸는 선수가 없었고, 이 선수도 담장 너머의 경기를 보는 데에 집중을 하고 있어 등번호와 이름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두 딸과 아내는 아빠와 남편의 직장 안에서 조용히 응원하고 있었지요.
물론 경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히어로즈가 이기는 것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애초에 이 가족의 방문 목적은 아빠를 보기 위한 것이었을 테니까요.
아빠가 일하시는데 딸들이 방해가 될까봐 외야 불펜에서는 보이지 않는 어정쩡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으면서도,
아빠를 볼 수 있는 곳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아이들을 보며 걱정 반 기쁨 반이던 엄마의 모습은 정말 행복해 보였습니다.
한편으론 짠하기도 했고요.
아빠는 한두 번 아이들을 더 보더니 이내 경기에 집중을 했고, 결국 히어로즈의 승리와 함께 불펜의 문이 열렸습니다.
선수들은 짐을 챙겼고, 두 아이의 아빠도 짐을 챙겨 운동장 안으로 들어가네요.
그리고는 외야석에 난간에 기대어 목을 빼고 있는 두 아이와 아내에게 손을 흔듭니다.
아내는, 거기서 기다릴게요, 라는 전해질듯 말듯한 작은 목소리와 함께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고, 아빠는 알았다는 신호로 손을 흔들며 선수들과 함께 덕아웃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제서야 그 선수의 이름을 확인했어요.
근데 역시나 들어본 적이 없어서 무명 선수인가 하고 궁금증을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동안 그 가족의 모습은 계속 아른거리면서도, 무명 선수의 비애 같은 것이 느껴지고, 그럼에도 참 행복한 모습을 봤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지요.
들어오자 마자 인터넷으로 뒤졌습니다.
쉽게 검색이 안 되네요.
이 선수가 누굴까, 왜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지, 무명 선수인데 애가 둘이면 생계는 어떻게 하나...
경기 후반에 가족들이 들어 온 점에서 입장권이 싸 질 때까지 기다렸다 온 것인지, 엄마가 일을 마치고 유치원에 맡겨 두었던 애들을 데리고 뒤늦게 방문을 한 것인지, 뭐 이런 잡다한 생각들이 들었지요.
그런데 이 분, 선수가 아니라 코치였습니다.
검색창에서만 찾다가 한참만에야 히어로즈 홈페이지에 들어 가서 보니, 불펜코치더라고요.
선수 생활은 매우 짧았고, 코치 경력도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코치...
어제 유머게시판의 기관사 아빠와 아들의 인사 글을 보고 생각나서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당시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지금까지 제가 본 가족 상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입니다.
@ 여전히 그는 히어로즈의 코치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딸들은 아마 중학생 쯤 되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