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저는 새내기 정유지 입니다. 현역은 아니고 N수생입니다. 취미는 독서구요. 남자친구는 있습니다. 사람들앞에서 장기자랑 같은건 잘 못하니깐 애국가 한소절 부를게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그녀가 2월달에 있었던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 선배들과 만남을 가진 자리에서 했던 소개말이라고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요구하던 주어진 소개 양식이 이름, 나이, 취미 남친여부 그리고 장기자랑, 딱 주어진 그만큼만 하고 내려갔다고 하더라구요. 요즘 학생들이 입학할때부터 연인이 있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생각만큼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노려지는(?) 학생들이 연인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체감상으로는 훨씬 비율이 높아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래도 없는 경우가 있는 경우보다는 더 많죠. 동기들과 선배들이 헛발질(?)을 하지 않기위해서인지 연인유무를 초면에 처음보는 상황에서 신입생에게만 오픈시키는데, 이해는 안가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뭐 이건 과거 저때도 그랬습니다. 좋은게 좋은거겠죠. 여튼 그녀는 그자리의 10%에 해당했던 연인이 있는 상태로 학교에 입학한 신입생이었습니다.
그녀는 현역이 아니라서 동기나 바로 윗선배의 푸쉬는 못받아봤지만 복학생 오빠, 졸업생 ob의 푸쉬도 받아보고, 그러니깐 그럭저럭 평범한 신입생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루는 본인 주변을 좀 서성이시던 복학생 오빠랑 이야기를 하는데 입학때 이미 있던 남자친구 (그러니깐, 저)와는 대부분은 깨진다며, 언제 깨질지 내기를 하자고 그랬답니다. 그녀는 제가 미리 알려준대로 의연하게 받아쳤답니다.
"남자친구가 그런말 하는 사람들만 조심하면 우리 사이 별일 없을거라고 그러더라구요.'
물론 '농담이에요' 라고 말하며 수습하고 '부정적으로 보시기보단 긍정적으로 응원해달라'고 이야기를 덧붙히는것도 빼먹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선배는 선배니깐 서로 좋게 지내는게 좋으니깐 수습도 잘하라고 이것 역시 미리 알려줬었습니다. 잊어버릴뻔 했는데, 주변의 푸쉬외에, 본인이 아주 적극적으로 조직해서 몰래 미팅하려다가 걸렸던건 기억나네요. 흐흐 할꺼면 좀 똑바로 하든가.
제 친구들 역시 저에게 앞서나온 복학생 오빠가 했던 비슷한 이야기는 많이 했습니다. 니 여자친구는 이쁘게 생겼으니 대학가면 인기좋을거라고, 그때 되면 걔 생각이 달라질거라고. 잘 깨지니깐 너무 조심하라고. 걔는 OT도 가고 미팅도 하고 멋있는 학교선배들이랑 연애도 하고 싶을텐데 너는 이제 슬슬 아저씨가 되어 가는데, 잘 되겠냐고. 나름 걱정의 마음에서 해준 이야기인거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 누굴 왜 , 그러니깐 좀 시건방지게 말하자면 초등학생이 왜 고3 수험생 형아공부를 가르쳐주려는건지 의문이지만서도요. 대학생, 원생, 강사, 교수님의 수업이야 언제든 들을 마음의 준비는 되어있었는데 넌 초등학생이잖아! 그렇지만 좋은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걱정할 이유가 없는 일입니다. 저는 내일을 함께하기 위해 그녀와 만난게 아니니깐요. 대학1학년때 커플도 대부분은 깨지는데 입학전에 사귄 커플이 졸업때까지 계속 만날거라고 생각하고 연애를 한건 아닙니다. 전 입학전에 사귄사람과 졸업까지 함께하는 경우는 주변에서 본적도 없고 한다리 건너 들은적도 없습니다. 있기야 있겠지만 제 주변에는 전혀 관계없었던 일일 정도로 드문 일이라는것이죠. 저는 내일을 함께하기 위해 그녀와 만난것이 아닙니다. 아니 어떤 여자라도 내일을 함께하기 위해 만나지 않았었습니다.
틈만 나면 돌려보았단 영화, 닳도록 돌려본 영화 '연애의 목적.' 아무도 이 영화를 보고 연애의 목적에 대해 이야기하진 않더라구요. 누군가에게 연애의 목적 영화 이야기를 했을때 언제나 나누게 된 이야기는 조개탕을 먹으며 날렸던 박해일의 걸쭉한 음담패설이나, 5초만 넣을게, 그리고 그것이 강간이냐 아니냐. 저런 류의 들이대가 실제로 저게 통하냐 안통하냐 아니면 박해일이라서 통하냐 뭐 이런 이야기들 뿐이었습니다. 제가 관심깊게 본 부분은 박해일이 강혜정의 집안에 들어가는 장면과 강혜정의 연애의 목적이었는데 말이죠. 전 영화를 보고 제목 참 잘지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강혜정은 깊은 불면증을 박해일을 만나고 사랑을 나누고 엿먹이면서 치유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박해일을 찾아가는것으로 영화가 마무리되죠. 저는 그래요. 저는 연애의 목적이 사랑이나 결혼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사랑은 정의가 제각각이고 줄때의 기준과 받을때의 기준도 달라 뭔지도 모르겠구요. 내가 상대에게 바랄때는 '사랑하면 이래야지' 라고 주장하지만 내가 상대에게 베풀때는 '현실적으로 이렇거든' 이라고 말하는것이 부지기수죠. 저는 많은 사람들이 저랑 비슷한데 타이틀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연애의 목적은 이전의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되는것입니다. 연애의 목적을 봤을때도 박해일을 만나 비로소 사람답게 살게된 강혜정은 박해일을 다시 찾아갈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그녀와 내일을 함께 하기 위해 만난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녀와 내일부로 관계를 종료하더라도, 그녀와 만나기 이전의 나보다 그녀를 만난 이후의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서, '그간 많은 시간 함께 해줘서 고마웠어. 니덕분에 내가 많이 자랐어.' 라고 이야기를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녀가 노력해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든지, 그녀에게 잘보이기위해 노력해서 스펙이나 실력이 좋아졌다든지, 아니면 인간관계에 임하는 철학이 개선되었다든지, 나의 그릇이 커졌다든지 이런 부분에서 그녀를 만나기전보다 제가 더 좋은 사람이 되길 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직 그것을 위해 노력할뿐입니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된다면, 자연스럽게 내일의 나도 그녀와 함께하고 싶겠죠. 마찬가지로 그녀도 저를 만나기전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이건 그녀뿐 아니라 어떤 여자를 만나더라도 그랬어요. 사랑하니 마니 없으면 죽을것 처럼 서로 울고불고 해도 지나고 나면 계산기 두드리는게 사람입니다. 어차피 본인 그릇대로 사람 만나는거라 그 사람 안만났다 해도 별로 좋은 일이 있었을거같진 않은데, 이상적인 만남을 상정하고 그와 비교해서 그 사람을 만나서 생긴 시간 손해(이것도 왜 손해인지 모르겠지만.), 금전 손해, 에너지 낭비, 게다가 나이로 인한 감가상각까지 죄다 그 사람을 만나서 벌어진일로 계산하면서 후회하는일 흔하죠. 저는 그런것은 정말 원치 않고요. 현재에 그 보답을 서로 주고 받길 바랍니다. 내 자식이 나중에 자라서 나에게 보답을 해주기 위해 키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라는 와중 키우는 와중에 이미 다 보답받았다고 말씀하시는 부모님들 처럼요.
아무리 잘해주고 헌신해도 그 사람이 나를 만나고 본인 가치가 하락하거나 부정적인 일을 자주 만나면, 지나고 나서 나와의 만남에 후회를 가지더라구요. 아무리 나쁘게 대해도 그 사람을 성장시켜주거나 좋은 일을 자주 겪게되면 좋게 기억하더라구요. 그래서 언제나 함께 성장하는 법을 고민합니다. 나도 그녀도 같이 작은 것 뭐라도 하나 배워가자 성장해가자. 자존감이든 성정이든 지식이든 실력이든 말이죠. 그녀는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언제나 입버릇처럼 '오빠가 사람하나 만들었다'고 그럽니다. 좋은 일도 많이 생겼죠. 마음잡고 공부해서 바라던 대학도 입학하고. 저도 그녀로 인해 좋아진 것이 많지만 그 중 특별한것이 하나 있습니다. 한여자에게 충성하는 것. 저는 이게 정말 내가 할수 있을지 의문이었거든요. 그녀도 그런 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게 맞습니다. 그녀에게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녀와 저는 만나서 서로를 조금씩 성장해나갔습니다. 그리고 거창한 미래를 명분삼아 현재를 소홀히 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미래를 약속하고 그것을 댓가로 참길 바라기보단 현재가 마음에 들면 내일도 함께하자고 말하고 싶어요. 미래를 위해 여친에게 현재를 희생시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신입생이었던 그녀가 오늘 졸업했습니다. 저주변에서 입학부터 졸업을 함께하는걸 한번도 못봤었는데 내가 그렇게 되다니... 신입생환영회때 연인이있었던 다른 분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미처 2학년이 되기도 전에 깨졌는데 저희는 이렇게 됐네요. 친구들은 4년전에 하던 이야기, 본인이 했는지도 까먹고 똑같은 이야기 하고있습니다. 이제 사회나가면 보는 눈이 달라지고 어쩌구 저쩌구. 래파토리가 바뀌지도 않았네요 이놈들은. 창의력이 없어요 이눔들은. 그녀와 나는 내일도 함께 하려나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왠지 마음은 설레네요. 묘한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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