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만화 『타짜』, 영화 <나를 찾아줘>, 게임 <엘더스크롤3 : 모로윈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매사에 철학을 갖기를 원했다. 인생 전반을 아우를 수 있는 절대적 진리는 안되더라도 내 행동들의 근거를 갖기를 원했고, 그렇지 못한 일은 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해왔다. 어떤 철학은 옳고, 어떤 철학은 그르다 할 수 있는 짬이 안된다고 보기에 좋은 말은 가리지 않고 일단 소화하려고 한다. (학문이 아니라 인생의 영역이라면 비판적 시선보다 긍정적 시선을 갖는 것이 나은 것 같다.) 하지만 모든 말들을 다 포용할 수는 없는 법이다.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유신론과 무신론 처럼 대립되는 가치는 동시에 소화할 수 없다. 그렇기에 기존에 가졌던 생각과 대립되는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은 상당히 혼란스럽다. (그치만 그러한 혼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사유 활동은 꽤나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작년에 한 편의 영화가 나에게 이러한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개봉했을 때 리뷰를 작성하기도 했던 데이빗 핀처의 <나를 찾아줘>이다. (리뷰
https://ppt21.com../?b=8&n=54541) 시기도 개봉한 지 얼마되지 않았고, '리뷰'이다 보니 영화가 던진 혼란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글을 썼다. 그리고 이 안일함은 더 큰 혼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나의 사상을 흔들어 놓았다. 이 글은 내가 가졌던 가치관을 <나를 찾아줘>가 어떻게 유린했는지, 그리고 그 혼란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나게 되었는지 그 생각의 흐름에 대해 적은 글이다.
『타짜』 - 사랑도 구라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 『타짜 1부』는 수많은 명대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 최고를 꼽으라면 단연코 화란에게 청혼하는 고니의 대사를 꼽겠다.
[고니의 구라론]
도박을 통해 배운 삶의 진리를 사랑과 연결하는 『타짜 1부』 최고의 명대사이다. 또한, 사랑의 본질에 대해 날카로운 성찰을 보여주는 대사이기도 하다. 흔한 연애학개론들은 사랑을 시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열변을 토한다. 갖가지 심리학적 근거를 가지고 와 상대를 유혹하는 술수를 가르치며, 때로는 그것이 과해 상대방의 마음을 갖고 노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사랑을 어떻게 유지하는 가에 대해서는 다소 무관심해 보인다. (이 부분을 잘 살핀다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연애강좌와 이성 따먹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저급한 연애강좌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애는 시작하는 것 보다 지속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법이다. 그리고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고니의 구라론'이다.
지속 가능한 사랑은 가능한가? 누구나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세상이 총천연색 무지개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오래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사랑의 콩깍지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고 종국에는 혼자일 때보다 더 칙칙한 잿빛의 스트레스만 남거나, 배신으로 인한 핏빛 분노만 가득할 뿐이다. 시작하는 연인들은 모두 이 냉엄한 현실을 부정할 테지만 현자들은 그들을 충고하듯 결혼의 끔찍함을 설파해왔다. 의학은 사랑의 감정을 유발하는 호르몬의 생성기한이 18개월이라며, '왜 고무신은 길어야 상말까지 밖에 안 되는가'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주장을 일축하는 '케바케'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불혹을 넘겨도 금슬을 자랑하는 훈남 훈녀 연예인 부부도 있고, 노년의 사랑도 애틋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도 종종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지속 가능한 사랑은 불가능이 아니라 2.69% 정도의 명백한 가능성을 가진 우리가 연금해 나가야 할 기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속 가능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사랑도 마음의 작용인 만큼, 원효대사께서 해골 물을 단물처럼 들이킨 후 인생 지사가 마음먹기에 달린 일임을 깨달았듯이, 마음먹기에 따라 사랑의 유통기한을 늘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고니는 여기에서 의리를 내세운다. 마음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랑이란 이름의 '구라'가 아니라 '의리'로써 함께하겠다고 말한다. 물론 '의리'라는 것은 다소 투박하고 낭만적이지 못하게 들린다. 하지만 이를 이끌어 낸 발상 자체는 본받아야 한다. 그 발상이란, 마음을 들썩이게 만드는 것보다 관계의 소중함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이 있고, 내가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고마움이 있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내게 있어줘서 얼마나 다행인가. 고니는 이 마음을 '의리'라고 표현한 것뿐이다. 도박판에서 가장 구하기 어려웠던 관계의 소중함이 바로 '의리'였기에...
그리하여 나는 고니의 저 대사를 마음 깊이 새겨 내 사랑의 나침반으로 삼고 있었다. 사랑의 광풍이 몰아칠 때도, 권태기의 늪에 빠질 때도 흔들리지 않고 상대를 아끼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의리'를 간직하였다. 그렇게 성공적인 연애를 하고 있다 자부하고 있었다. <나를 찾아줘>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를 찾아줘> - 사랑은 위선이다
<나를 찾아줘>는 관객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영화다. 잘 짜여진 전반부의 미스터리 스릴러는 관객에게 두뇌 싸움을 걸어온다. 하지만 스릴러 장르에 찌들은 나 같은 영화 덕후에게 그 정도의 반전은 예상 가능한 것이었고, 에이미의 생존이 스크린에 전사된 순간 만족스러운 승리감에 도취해버렸다. 그러나 그 승리감은 반전이 드러났음에도 상영시간이 1시간 넘게 남아있다는 부조화를 맞닥뜨리며 시원하게 뒤통수를 얻어맞게 된다. 에이미의 생존이 드러난 순간부터 영화는 또 다른 시작을 맞이하며 다시 한 번 관객의 뒤통수를 후드려 패기위한 새로운 몽둥이를 장전한다. 에이미라는 캐릭터가 치밀한 복수의 화신에서 천진난만한 사이코패스로 거듭나는 반전은 이 영화의 두 번째 몽둥이이자 영화적 백미이다. 그리고 결말을 향해가는 영화는, 세 번째 몽둥이로, '위선'이라는 이름의 바이러스를 내 사랑의 내비게이터에 침투시키고 만다.
<나를 찾아줘>를 통해 드러나는 공포와 혐오의 핵심에 존재하는 것은 위선이다. 선량함을 가장한 채 필요에 의해 주변의 단물을 빨아 먹고 죽여버리는 에이미의 위선은 소름이 돋는다. 상대를 유혹하기 위한 와인으로 자신의 음부에 상처를 내는 장면은 마치 내 목구멍 속에 칼날을 집어넣는 듯한 공포를 유발했다. 닉은 그러한 에이미를 받아들인 채 카메라를 향해 임신사실을 자랑하는 굴욕을 보여준다. 이를 지켜보며 나 또한 쌍둥이 여동생이 느꼈던 혐오감과 무력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한 번도 진실을 본적이 없었던 언론은 임신을 축하하며 그들의 위선에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게 된다.
[에이미 던 "그게 결혼이야."]
"그게 결혼이야."
에이미의 대사를 통해 결혼의 본질을 위선이라 선언한 순간, 영화는 마지막으로 나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갈겨버렸다. 부부관계를 다룬 대부분의 영화들은 어긋난 오해를 극복하고 서로를 용서하는 진실한 사랑이 결혼의 본질이라며 관객을 훈계한다. 하지만 <나를 찾아줘>는 그 사이에서 위선이야말로 결혼의 본질임을 선포하고 만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선언은 그러한 인간의 속마음을 꿰뚫고 나온 냉혹한 현실고발이자 위선을 인정하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라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새로운 이정표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에이미의 위선은 사랑과 결혼을 완전히 분리하지 않는 것 같다. '당신을 위해 살인을 했다.'라며 살인에 사랑이라는 명분을 부여하는 것이 그러하다. 또한 이 글 전반에서도 결혼과 사랑을 엄격히 구분하여 서술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사랑의 본질이 위선이라는 점은 내 사랑의 나침반에 가장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였다. '고니의 구라론'에 따르면 사랑은 마음먹기에 달린 일인데, <나를 찾아줘>는 그 마음 먹기가 위선이라 하니, 나의 행동에 대한 의심이 싹틀 수밖에 없었다. 닉과 재회한 후 에이미는 아내로서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며 부부관계를 재정립하려 했다. 심지어 잠자리까지 함께하려는 모습에서 위선이 진심마저 잡아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구라라고 했던 고니의 대사가 새삼 섬뜩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나도 저렇게 내 마음을 속여가며 사랑하는 척 스스로 세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혼란이 엄습했다.
내 사랑의 나침반은 고장 났고, 나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위선이던, 의리이던 결국 사랑은 구라라고 퉁치고 넘어가려 했지만, 이는 도피일 뿐이었다. 위선의 바이러스가 마음속에 퍼질수록 의심이 싹트게 된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진심이 아니라 습관처럼 되뇌는 것은 아닐까? 방금 그녀와의 통화가 귀찮게 느껴지지 않았나?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마음을 속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혹시 상대가 내 사랑이 위선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는 이러한 혼란만 던진 채 끝나버리고 만다. 핀처는 어떠한 해답도 주지 않는다. 아마도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관객을 조롱하는 것이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엘더스크롤3 : 모로윈드> - 본질은 현상에 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엘더스크롤3 : 모로윈드>는 무게감 있는 스토리로 유저들에게 큰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이야기는 다고스-우르라는 반신(半神)이 부활하면서 모로윈드 지방의 거대 화산 '레드 마운틴'이 재분화하고 이로 인해 전염병이 돌면서 시작된다. (이 병으로 모로윈드 주민의 1/3이 죽었다.) 모로윈드의 주민 사이에서는 이 고난을 극복해줄 구세주로 과거 자신들의 지도자였던 네레바린이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이 퍼지게 된다. 통합제국의 황제는 이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제국의 수도 시로딜에서 죄수(주인공)를 선발하여 모로윈드로 파견하고 네레바린 부활 예언을 수행하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이 죄수가 우여곡절 끝에 예언의 관문을 모두 통과해버리고 말았다. (-_-) 결국 주인공이 최종 보스 다고스-우르와 맞닥뜨린 순간, 다고스-우르는 그에게 질문을 던진다.
[다고스-우르 "그대는 진정 네레바린인가?"]
"그대는 진정 네레바린인가? 아니면 만들어진 네레바린인가?"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죄수는 네레바린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수행하였지만, 네레바린으로서의 자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게임이니만큼 결국 죄수는 최후의 결전을 통해 다고스-우르를 무찌르고, 모로윈드의 수호신으로부터 네레바린으로 인정받게 된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나를 찾아줘>가 던진 혼란을 극복할 생각의 기초를 발견하였다. 죄수(주인공)가 스스로 신이라 각성했던지,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던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네레바린으로 인정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아니라 그가 겪은 모험 즉, 행동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내가 사랑하는 것의 진심 또한 내 마음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내 행동으로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사르트르는 어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였다. 내 사랑의 진심 여부 또한 내 행동의 충실함으로 판단해야 할 일인 셈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고니가 말했던 구라)에 눈길을 빼앗기지 말고 내 행동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지속 가능한 사랑을 위해서
그렇다면 닉과 에이미의 결혼생활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그들이 겉으로만 충실한 모습으로 백년해로한다면 진심어린 사랑으로 인정받는 것일까? 하나 그들이 퍽이나 그럴까 싶다. 분명 닉이 뛰쳐나가던지, 에이미가 새신랑을 구하던지 할 것이다. (그럼 닉은 어떻게 되는 거지? 덜덜) 충실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마음과 불일치하면 돌아오는 것은 스트레스이다. 그런 스트레스를 감내하고 대외적 인정을 받아봤자 행복할 리가 없다. (에이미가 미친년인 이유는 그 속에서도 행복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위선이 아니라 이 불일치야 말로 닉과 에이미가 지닌 위선의 실체이다.
이 지점에서 나와 던씨부부와의 차이가 드러난다. 나에게 행동의 충실함은 행복으로 돌아오지만, 그들은 마음과 불일치하기에 불행으로 돌아온다. 굳이 닉과 에이미 뿐이랴. 현실에서도 마음과 행동이 불일치한 커플들이 있다. 사랑이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는 사람들도 있고(그렇다면 목적은 당연히 돈 아니면 그거겠지...), 의무감에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도 있다. 이들의 스트레스는 언젠가는 마음의 바닥을 드러나게 할 것이다. 그 전에 마음과 행동의 괴리를 줄이는 조정이 필요할 것이다. 사랑의 행동이 마음의 부담으로 다가오기 전에 소통을 통해 조율을 해야 한다. 그러한 조율이 있어야만 사랑이 오래도록 아름다운 선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마음대로 조율할 수 없는 법이다. 결국 행동을 바꿔야 한다는 점에서 마음보다 행동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여기서도 유효하다.)
결론적으로 위선이 결혼의 본질이라는 <나를 찾아줘>의 선언은 거짓선동이었다. 오히려 아무생각 없이 정신나간 부부의 막장인생으로 치부했어도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를 교묘하게 다루어 한 때나마 솔깃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괘씸하면서도 역시 거장답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철저히 농락당한 기분이다.) 어쩌면 <나를 찾아줘>는 사랑과 결혼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고민하라는 질문을 던진 영화였을지도 모른다. 위선으로 살 것인가? 때려칠것인가? 나는 내 행동의 충실함으로 극복하겠다고 대답하겠다.
※ 2014년에 비슷한 방식으로 농락당한 영화가 2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나를 찾아줘>였고, 다른 하나는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였죠. 거 명망도 높으신 분들이 왜케 베베 꼬인 영화를 내놓은 건지...
※ 본문의 이야기들은 글쓰기 이전에 여친과 이야기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엘더스크롤> 이야기를 할 때 무척 지루해 하더라고요. 역시 여친이라는 존재와 게임은 잘 안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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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팟캐스트 방송
[미련한 연애 시네마]에서 <나를 찾아줘>를 다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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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한 연애 시네마]에서는 청취자의 연애 상담이나, 영화에 대한 궁금한 점 등을 메일로 받고 있습니다. 혹시 방송을 들으시고 관심 있으신 분은 sillylovecinema@gmail.com으로 메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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