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알았어. 그리로 갈게. 거기서 보자."
전화를 끊고 가슴 한 구석에 꽉 막혀있던 구멍이 조금 열린다. 심장에 반짝 불이 들어온다. 힘차게 펌프질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어쩌면. 약속장소에 30분 먼저 도착한다. 계단을 올라가며 먼저 와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분명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나 하는 벅찬 기대감. 역 앞에서 한참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찾는다.
역시나.
없다.
약속 시간. 기대하지 않는다. 맞춰 올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도 일종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30분이 지나고 슬슬 지친다. 아무래도 안 되는 걸까. 이걸로 네 번 짼데. 차라리 못나온다고 하지. 왜 계속…
"누구게?"
시야가 캄캄해진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가슴 속이 환해진다.
'왔구나!!!'
"미안, 미안. 1시간이나 늦어버렸네. 일찍 나왔는데 지하철이 막혔어."
베시시 웃으며 새치름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그래? 지하철도 막힐 때가 있구나.
"가자!"
내 팔뚝을 잡고 끌고 간다.
"으응? 어디로 갈까?"
"뭐야? 밥 사준다며 그런 것도 생각 안 하고 나온 거야?"
방긋 웃는다. 가슴의 조그만 구멍으로 뭔가 조금씩 흘러 들어온다.
"어섭쇼."
"깜짝이야."
옆에서 쿡쿡 웃는다. 따라 웃는다. 마주 앉아 주섬주섬 메뉴판을 뒤적거린다.
"뭐야 이거 밥이 아니라 술이었어? 밥 사준다며?"
"응. 나한테는 술이 밥이잖아."
"뭐야, 변태잖아!" 하고 또 웃는다.
조그맣고 많은 구멍들에 무엇인가 계속 흘러들어와 메워준다. 연습한 보람이 있다. 분위기가 좋아지는 걸 느낀다. 음식이 탁자 가득 나온다. 맛있겠다, 그녀가 양손에 한 짝씩 든 젓가락을 서로 부딪히며 소리친다. 이것 봐, 돈까스가 책상만 하다! 뻔뻔한 거짓말도 잘한다. 아깐 지하철이 막힌다더니.
"아~ 해봐."
"어…어?"
"아~ 해보라고."
아…아.
입 속에 뭔가 들어온다. 바삭한 튀김옷. 새콤달콤한 소스가 느껴진다. 그리고 가슴 언저리의 구멍도 계속 메워지고 있다. 졸졸졸 목으로 흘러드는 소스처럼. 흘러 흘러 구멍을 메운다. 내 눈을 빤히 본다. 어때? 어때? 하는 것만 같다. 음, 맛있네. 내가 준 거라서 그런 거야. 뻔뻔한 말을, 서슴없이 잘도 한다. 역시나 그런 성격인 걸까? 발랄하다. 귀엽고 예쁘다. 역시, 너무나 사랑스럽다.
콸콸콸. 술을 따라준다. 줄줄줄 구멍으로 들어오던 무엇도 콸콸콸 쏟아져 들어온다. '뭔가 될지도 모른다. 기회가 다신 없다. 지금뿐이다.' 하는 생각들이 든다.
콸콸콸 목으로 술을 붓는다. 그리고.
"저기, 음, 그러니까, 우리, 아니, 나랑 사귀어 보지 않을래?"
"뭐?"
"에...그러니까, 나랑 사귀자고."
"사귀자고?"
푸하하 웃는다.
침이 꿀꺽 넘어간다.
"글쎄? 사귈까?" 하더니,
"푸하하핫. 얘 너무 웃긴다."하며 테이블을 손으로 탁탁 치며 방정을 떤다.
탁, 탁자 위의 잔이 떨어져 깨진다. 바닥으로 술이 줄줄 흐른다. 구멍으로 콸콸콸 들어오던 것도 줄줄줄, 아니 졸졸졸 흘러 나간다. 어머, 어쩜 좋아. 안절부절 못한다. 깨진 잔은 치우면 되는데. 이제 난 어쩌면 좋지. 쭈그려 앉아 깨진 조각을 같이 줍는다.
"미안, 미안해."
"아냐, 그럴 수도 있지. 잔 같은 거 깨질 수도 있잖아."
그녀는 나를 한참 빤히 쳐다보더니 베시시 웃는다.
"너 조곤조곤 얘기하는 게 너무 자상한 거 알아?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내가 그래?"
나도 웃는다. 여기서 웃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르겠다.
"빨리, 빨리와. 막차라구."
혼자 신나서 뛰어나간다. 꽤 많이 마셨는데 쏜살같이 뛴다. 막차는 만원이다. 발 디딜 틈도 없다. 저 만원 버스에 가득 차있는 사람들처럼. 그녀에게는 나란 사람도 빼곡히 들어찬 사람 중 하나가 아닐까. 고개를 젓는다. 그래도 오늘 이렇게 나와줬는 걸.
집까지 바래다주며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잔이 깨질 때처럼 가벼웠으면 좋겠는데 공기가 너무 무겁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계속 생각하지만 마땅치 않다. 침묵은 무겁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너무 무거워 이대로 가라앉아 버릴 것 같다.
"아까 술집에서 뭐라고 했더라?"
또 희게 웃는다. 문득, 귀신같다고 생각한다.
"어? 그러니까, 사귀지……않겠냐고………한 거?"
고개를 쳐박고 말을 이으며 얼굴이 화끈거린다. 빨개졌겠지. 슬쩍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역시나 웃고 있다.
"그거 진지하게 생각해볼게."
마알간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또 웃는다. 다시. 또 다시, 콸콸콸 쏟아져 들어온다. 잔에 붓는 맥주처럼, 아니 대홍수처럼. 아니 그거 말고 쓰나미처럼. 마구 들어와서 구멍이 커진다. 점점 커져 찢어져 버릴 것만 같다.
다음 날.
"어머, 내가 그런 말을 했어? 어머, 어머 웬 일이니!!!"
깔깔 웃는다. 그렇게 웃는다. 그게 끝이다.
"너무 웃긴다? 그치?"
"그래. 웃긴다."
정말 웃긴다. 우스워 죽겠다.
그녀는 모르겠지. 내 가슴 언저리에는 누군가 희망을 넣었다 빼었다 해서 커져버린 구멍이 있다는 걸. 모를 것이다. 그 구멍은 옛날처럼 작아지지도 않는다는 걸. 결코 모를 것이다. 커지는 건 쉬운데 절대 다시 메워지지 않는다는 것도.
희망을 잃지 않게. 넣다 뺏다 넣다 뺏다. 이건 성교가 아닌데. 자꾸만 그런다.
세기 말도 아니고 계속 희망을 노래하라니.
'07.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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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고 싶으시죠? 될 것만 같죠. 자꾸만 여지를 주는 것만 같죠. 안 돼요. 고백해도 안 돼요. 해봤자 소용 없어요. 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