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시판
:: 이전 게시판
|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4/07/08 20:20
너무 말도안되는 전적에 신격화가 되었을것이라고 기를쓰고 깔거리를 찾다가 모두 GG치고 오히려 찬양하기에 바쁘다는 충무공니뮤 ㅠㅠ
14/07/08 20:36
참 재밌는 게 우도와 좌도의 구분이에요. 어릴 때 이순신 위인전을 읽으며 '이상하다. 전라 우수사인 이억기가 어째서 전라 좌수사 이순신보다 서쪽에서 군을 이끌고 오지?'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북쪽이 위에 있는 현대적인 지도에 익숙해서일까 생각했습니다만 또 생각해보니 고대 지도들도 죄다 북쪽이 위로 가는데 -_-?
왕정의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겐 왕이 있는 곳을 기준으로 좌우를 나누는 게 당연하다는 일을 나이가 들고야 알았습니다. 기본적인 일에서도 사고의 방식이 다른 경우가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깨달음도 함께
14/07/08 21:01
질문이 있는데요.
제가 알기로 명에서 조선에 원군을 보내서 국력이 쇠약해졌을때 청이 들고 일어나서 결국 멸망했다라고 알고 있는데요. 임난을 보면 명군의 수가 정말 얼마 안되요.. 대륙스케일은 10만은 기본으로 깔고가는 레벨인데도 불구하고 조선에 파병한 원군이 10만이 채 되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당시 명이 10만원군을 보내도 나라가 휘청할만큼 쇠약해져있었나요? 그랬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옛날 옛적 맨날 치고박고 싸워서 인구증가가 더뎠을 삼국시대나 전국시대의 거병규모보다 턱없이 작은 병력을 일으켜도 통일 중국의 국가가 휘청할만큼 쇠약할 수가 있나요? 이정도면 누가 톡쳐도 픽쓰러질 정돈데... 아시는분 알려주세요..
14/07/08 21:08
전설의 명나라 F4가 있습죠...
https://mirror.enha.kr/wiki/%EB%AA%85%204%EB%8C%80%20%EC%95%94%EA%B5%B0
14/07/08 21:12
아 이랬군요. 와 도대체 얼마나 암군이고 망국으로 가고 있었길래 제가 알기로 전투병 5만? 기타 2~3만해서 7~8만 보냈다고 알고 있는데, 일게 제후도 10만군사는 우습게 일으키는 대륙스케일에 고작 저거에 나라가 휘청할만큼 막장이었나보군요..
청은 그냥 주인죽어갈때 꽁으로 대륙을 집어삼킨 꼴이네요...
14/07/08 21:18
명은.. 청나라때문에 망한게 아닙니다.
반란군이 일어나서 북경이 함락된것입니다. (영향을 아예 안준건 아닙니다.. 명의 정예병사들이 청군을 막기 위해 북쪽으로 차출될 수 밖에 없었고, 그 이후 반란군을 못막은거니까요) 북경을 함락시킨건 틈왕 이자성 그리고 사천을 중심으로한 또다른 세력 장헌충 명나라 말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청의 팔기군을 다 합해봐야 겨우(?) 18만이지만 국내(명나라 안)의 반란군들의 수는 60만이다.
14/07/08 21:43
고작 조선에 원군 보낸걸로는 만력제 무덤값도 못합니다...(만력삼정(여기에 조선 원군도 포함) 다 합쳐도 무덤값이 안되요...)
그리고 이렇게 명이 뻘돈 마구써도 쓰는대도 청은 정면으로는 산해관을 넘지 못합니다...응?(청이 더 가난해서...양대호란 원인이...청이 돈없으니 조선 삥뜯으려는거였으니...)
14/07/08 22:34
정유재란때 명군은 전투병력만 10만 이상을 파견합니다. 조선까의 상투적인 드립 중 하나가 사로병진군 중 조선군은 2~3만 정도고 10만 가까이가 명군이다. 조선은 남에게 국방을 맞기는 나쁜 국가였다, 지요.
14/07/08 23:11
임진왜란이 명나라의 쇠퇴에 그렇게 큰 영향이 있지 않았을 거란게 대세죠
청나라는 명나라가 멸망한 그 순간까지도 그 경제력면에서 명나라한테 압도당했고 산해관을 넘어가지도 못하고 있었어요 명나라가 멸망한 건 순전히 내부의 반란 이자성의 난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면서였었고요. 여기서 만약 이자성이 부하관리만 잘해서 오삼계를 자기편으로 확실히 끌어들일 수 있었으면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먹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겁니다. 문제는 이자성의 부하중 골떄리는 놈 하나가 있었는데 이놈이 오삼계의 애첩을 건드리는 바람에 빡친 오삼계가 산해관 문을 열어버리고 청나라 애들 데리고 곧장 북경으로 가서 이자성군을 박살내버리는 바람에 ....(참고로 오삼계의 병력은 명나라 멸망까지 명군 최강의 정예병이었습니다. 실제로 최소한의 수비병력과 산해관의 외성은 주더라도 오삼계 병력으로 이자성을 막으려고 했었다고 하는데 그러기전에 명나라가 먼저 멸망해서....)
14/07/09 07:59
아침부터 눈시님 글로 시작하는 즐거운 아침이네요 ^^
근데.. 대체.. 저 상황에서.. 장군님은 어떻게 이기신 걸까요. 정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명량해전 직후 정유일기에서 "이는 실로 천행이었다(此實天幸)." 라고 기록하시기도 했구요. 실제 제가 명량해전 전투에 직위를 불문하고 참여했다고 생각하면.. 어휴.. 정말... 역시 장군님은 위대하십니다.!!
14/07/09 10:43
전국시대 일본의 각 군 승패가..수장이 웅거하고 있는 성을 함락시켜 수장이 항복하면 끝나는 것이었고, 수장이 본거지를 이탈한다는 것이 무사의 수치로 여겨지던 풍토였기에..일본군의 목표는 '빠른 진격으로 한양을 점령하고 조선왕의 항복을 받아낸다' 였습니다. 그래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의 좌우편(호남과 경상북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죠.
조선왕의 항복을 받아내면 싸우지 않아도 호남의 지배권이 일본에 넘어오는 것이고 그렇다면 수로도 자기네 것이 되기에 '한양을 점령하여 조선왕의 항복을 받고, 조선을 지배하게 되면 수로를 통해 군사를 보충하고 호남에서 식량을 조달하여 명으로 진격한다'가 일본의 전략이었습니다. 그런데.. 1. 조선왕이 수도를 버리고 몽진을 한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던 데다가.. 2. 약할 것이라 생각했던(실지로 부산에 상륙할 때 해전 없이 무혈 상륙을 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 했죠) 조선 수군에 의해 호남쪽 수로를 확보하지 못하게 됩니다. 평양까지 진격한 고니시군 등 일본군의 보급로는 육로가 될 수 밖에 없는데 수송 거리가 길고 의병의 게릴라전으로 여의치 않고 수로는 이순신에게 막히게 됩니다...그래서 도요토미는 일본 제일의 해군 장수라는 와키자카를 남진시켜 조선 수군을 없애려 합니다. 와키자카를 비롯 부산에 주둔하던 일본 수군 장수들이 연합하여 조선 수군과 싸웠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나..와키자카는 단독 행동을 하게 되고 한산도에서 대패를 하게 됩니다. 한산 대첩이후 도요토미가 해전을 금지했고..또 경상도 해안에 왜성을 쌓고 장기전을 준비하게 되죠. 그러면서 전라도 공략을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 전라도 공략의 제 1목표는 전주성이고, 주요 루트는 이치와 웅치입니다. 이치 전투는 패했지만 웅치 전투는 권율이 잘 막아내고 있던 중..전라도 공략군의 근거지인 금산을 조헌 등의 의병들이 공격하자 고바야카와가 후퇴하게 되어 육로로의 호남 진군도 막히게 됩니다..그리고 본격적으로 명-일 간의 강화 협상이 시작되죠..(이 강화 협상 전에 있는 전투가 행주대첩과 1차 진주성 전투 입니다) 명-일 간 강화협상에서 우선 일본은 북진한 군대의 경상 해안까지의 안전 퇴각(불가침)을 요청하게 되고 이를 명이 들어주면서 북진했던 일본군은 전력 손실없이 안전 퇴각을 하는데..이 퇴각을 하면서 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집니다..상호 불가침이었으므로 먼저 약조를 어긴 것을 빌미로 조-명 연합군이 퇴각하는 일본군을 공격할 명분이 생겼는데..일본에서 '이번 진주성 전투는 1차 진주성 전투의 복수이지 침략 전투가 아니다'라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우자 정전을 원했던 심유경이 '복수라는데?'라며 조선군에 공격 금지 명령을 유지합니다. (명군이 조선땅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조정은 작전권을 전부 명에다 넘긴 상태였습니다) 아무턴 2차 진주성 전투 이후부터 정유년까지는 강화 협상이 있게 되고 큰 전투는 없는 상태였는데..명-일 간의 강화 협상이 깨진 것은 도요토미가 '명 황제의 딸을 후궁으로 줄 것, 조선 하삼도를 일본에 넘길 것 등' 사실상 승자의 조건을 내세우면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심유경과 고니시가 대 사기극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