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잘나고 못 나건 누구나 리즈시절은 갖고 있을 것이다.
간단히 생각해서 내가 올해 너무 못나 보인다 생각이 들면 '나에겐 작년이 리즈시절이었어' 라고 위안 삼으면 그만일 테니.
씁쓸했던 발렌타인데이를 잊고자 2월 14일 점심에 구내식당에서 나눠준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물었지만 현실만큼 씁쓸한 맛에 살짝 놀랐다.
도대체 나에게 리즈시절은 언제 누구와 어디서였을까?
고3을 마치고 재수를 결심했을 당시, 내 목표는 하나였다.
고3 담임이 합격한 곳 가지 뭐하러 사서 고생을 하냐고 물을 때도,
졸업식 때 정장을 맞춰 입고 온 가족이 함께 축하해주러온 단짝 친구가 정말 재수할 거냐고 물을 때도,
재수 시절 유일하게 놀아본 5월 15일, 모처럼 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나서 요새 어떠냐고 물을 때도 내 목표는 변하지 않았었다.
그건 '여.자.친.구' 를 만드는 것.
재수 기간 내에도, 재수에 성공을 해야 여친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신념하에 초딩 이후로 처음인 남녀합반이라는 클래스였음에도
한눈을 팔지 않았었고 그 결과 흡족할 만한 결과를 만들었다.
그리고 예비대학생 신분으로 처음으로 맞는 발렌타인데이.
그 날은 입학 전 조촐하게나마 첫 동기 모임이 벌어질 예정이었다.
그 날 참석을 해야 수컷 경쟁자인 동기와 잠정적 경쟁자인 선배들보다 한 타임 빠르게 스캔을 할 수 있으며 이는 곧 CC로 가는 지름길이라며
귀가 따갑게 말한 친구 녀석의 설교가 있었기에 필히 참석하려고 했었다.
그 날을 핑크빛으로 물들이길 바라면서 기다렸던 나에게 어무이께선 핏빛 기억을 안겨다 주셨다.......
추리닝에 종이컵을 고정시킨 채, 엉거주춤 모임에 나갈 순 없었다.
이런 상태로 누가 나와 CC를 하겠는가.
아직 실밥 자국이 남은 채로 화장실에서 그 녀석을 마주칠 때마다 원망스럽기 그지없었고,
녀석은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따끔한 맛을 보여주곤 했다. '앗. 따가워'
녀석의 마수에 걸려들어 난 오티날에도 집에서 안정을 취하는 편을 택하였고 그만큼 내 의지를 불태웠었다.
비로소 입학식 날 처음으로 동기들을 마주했다.
오오 예뻐보이는 여학우들이 제법 눈에 들어오는게 아닌가!
물론 동기 모임+ 오티로 인해 친해진 남자애들로 둘러싸인 채 말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녀석을 원망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는 수없이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만 했다.
우리과 아이들은 나름 착한 축에 속해였던지라 재수를 하고 온 나에게 형, 오빠 소리를 제법 해주었기 때문에 굳이 동기가 아니어도
2학년 선배중 현역이라면 CC가 가능하단 계산이 나왔었다.
물론 그 계산은 입학식 날 술자리에서 본 약간 어려 보이는 2학년 선배가 나와 동갑이라는 사실+남친 유무 사실을 알고 난 후 내 답안이었다.
공강 시간에 함께 학식을 먹고, 중도를 다니며 주말에 만나서 리포트를 같이 작성하는 꿈을 밤마다 꾸고 있을 무렵.
며칠이 흐르고 화이트데이 때 학수고대하던 새내기 환영회가 열린다는 게 아니던가.
개강 직후 한 번도 술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던 나에게 그 날만큼은 참석하겠노라 주위에 말하였고
수업을 마친 후 어색한 동기들 사이에 끼어서 술자리에 참석 후 주위를 스캔하였다.
역시나 그 선배가 다른 선배들 사이에 끼어서 참석해있는 게 아니던가!
FM도 하는 둥 마는 둥 성의 없는 태도를 보였다며 욕과 벌주를 시원스레 먹었음에도 시종일관 그 선배만 예의주시하였다.
한참 시간이 흘러 그 선배가 자리에 일어선 순간, 좌우 한무리의 사람들 속에서 힘들게 일어나야만 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 선배에게 다가가는데 선배는 화장실로 향하였고 한참 뒤에야 나왔다.
화장실 앞에서 마주친 날 알아보며 괜찮냐고 물어보는 선배에게
'오 역시.. 입학식 날 , 어필한 효과가 있었어!' 라고 판단하여
서슴없이 내 마음을 고백했다.
왜냐면 화이트데이는 남자가 주는 날이니까... 마음에 드는 상대라면 그게 꼭 사탕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화장실 앞에서 그 선배와 대화를 나눈 그 날이 학창시절에그 선배와 1:1로 말해 본 마지막 날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하는 수없이 CC를 포기하고 미팅시장을 개척하리라 마음먹었다.
어차피 공강 시간 맞추기도 힘들뿐더러 주말에 굳이 학교 앞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면 되니까 굳이 CC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여자와 말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 따위가 출판되기 전 시대인지라 잘 모르는 여자 앞에선 까막눈과 다를 바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는 1학년 내내 수많은 미팅과 소개팅으로 여자와 말하는 법을 현장실습으로 터득한 결과,
1년여 만에 비로소 여자앞에서 어색어색 열매를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2학년이 될 무렵, 발렌타인데이때 짝없는 것끼리 또 미팅이 잡혔다는 제보를 전해 듣고 역시나 참석의사를 밝혔다.
왠지 이런 날은 다른 날보다 성공확률이 높을 것이다. 라는 말도 안 되는 희망을 품은 채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강남역 그 소주방으로 향하였다.
-본 이야기는 글쓴이의 [ EPL FA컵 5라운드, 아스날 대 리버풀] 시청관계로 다음 시간에 이어서 작성하겠습니다. 양해 부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