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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25 12:22
저같은 사람에게는 조선 시대는 정말 읽어도 읽어도 기분 좋은 부분보다는 기분 안 좋은 부분이 훨씬 많아지는 그런 역사네요. 제가 잘 몰라서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역사를 읽어서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부분이 별로 없어서.. -_-a 그래도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좋기는 합니다. 감사합니다.
09/09/25 12:42
조선사 읽어보면서 최대의 비극은 인조반정이라고 생각합니다....역사의 흐름을 정반대로 돌려버렸죠....
...더불어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이고...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면서 예송논쟁으로 대표되는 당쟁..... 영조-정조가 중흥군주라고 하지만...이미 선조-광해군-인조-효종-현종-숙종까지 이어지면서...나라는 곪을대로 곪아버렸죠 정말 나라 망하지 않은게 신기할따름입니다...... 추가 : 조선시대 예송논쟁으로 대표되는 당쟁의 모습을 보시고 싶으시다면 이덕일씨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반드시 읽어보라고 추천드리고 싶네요
09/09/25 14:00
운좋게 글이 올라오기 보름 정도 전에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게된 것이 책을 얻는 행운으로 이어졌네요.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을 보면서 답답한 것은, 그것이 익숙해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다른 것보다 사형명분이 기가막히면서도, 좀... 무섭기도하네요.
09/09/25 14:10
광해군의 외교 풍토가 계속 이어져 왔으면 최소한 청에게 삼전도에서의 굴욕은 당하지 않았겠죠.
조선시대 정말 최악의 사건 중 하나로 인조반정을 꼽고 싶네요.
09/09/25 14:43
광해군을 과도하게 미화할 필요는 없지만(심시티는 자제좀...) 인조가 너무나도 스펙타클한 막장포스를 선보이는지라 광해군이 실제보다 더 빛나보이는 건 어쩔 수 없네요 -0-
09/09/25 15:36
저는 최악의 사건을 계유정난으로 봅니다.
수양이 그 뒤에 무슨 선정을 펼쳤던(이것도 뒤집어 생각하면 선정이라고 할 수 없죠. 자기가 뿌린 씨, 뒷수습하는 정도지), 강건한 조선의 기상을 꺾고 비합법적인 정치, 힘의 정치가 통할 수 있는 기반을 쌓은 인물이란 점에서 제게는 수양이 최악의 인물로 보입니다.
09/09/25 16:14
엘렌딜님// 저도 비슷하게 생각하지만 너무 어린 왕은 무리가 있는게 사실이죠.
옛 주공의 고사도 있듯이 수양대군이 섭정이 되어 정사를 보다가 단종이 친정하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하나, 그게 되면 성인이지 사람이겠습니까. 문종이 너무 일찍 죽은게 안타까울 뿐이죠. 문종은 거의 세종 주니어 라고 할만큼 성군의 자질이 충만했고 동생들과의 우애도 좋아 종친의 힘으로 신하들을 압박할 수도 있었죠. 문종이 단종이 성인 될 때까지만 살았어도 조선의 전성기는 더 길었을지도 모릅니다.
09/09/25 16:42
비슷한 시기에 명과 조선은 삼촌이 조카를 죽이는 골육상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명에서는 영락제가 주인공이고 조선에서는 세조가 그 주인공이 되지요. 영락제는 변변치 못 했던 인물들이 왕 노릇을 했던 명대에 그나마 명군이라는 소리를 듣는 인물로서 재임 기간 내내 몽고와의 전쟁에 목숨을 겁니다.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했던 모양인데 반대로 그 조카가 왕위에 있었다면 몽고와의 전쟁에서 과연 명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 부호가 붙습니다.(영락제가 실제로 승리한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세조 역시 불안한 정치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외부적으로 군사 행동을 여러 번 일으켰는데 여진족과의 전쟁이 자주 있었지요. 반대로 단종이었다면 집현전의 엘리트 관료와 건국 초기 부터 내려오던 공신들의 압력을 이겨내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 부호가 붙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겠지요. 어쨌든 말 많고 탈 많은 세조 이후에 성종이라는 정리자가 나타나서 부드럽게 조선 전기에서 중기로 넘어가게 만드는 교두보 역할을 해 주고 정치적으로도 훈구와 사림의 교체에 공헌을 하게 되어 이후, 성리학이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니 이를 좋게 보아야 할 지, 나쁘게 보아야 할 지는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09/09/25 16:55
제리와 톰님// 집현전 엘리트 관료의 전횡이라고 하시는데,
실상은 수양을 옹립한 한명회, 권람같은 훈신들과 같은 '비정상적인' 공신들이 무더기로 생겨났고, 그들을 챙겨 주기 위해 토지를 배분하면서 부의 편중과 불균형이 발생했으며, 이는 두고두고 조선의 폐단이 되는걸로 압니다. 세종, 문종, 단종대로 넘어오면서 왕권의 독단보다 재상 중심의 유교 정치의 기반이 자리잡혀 가는데 수양이 공명심이 넘쳐나고 권력욕이 강해서 그런 '시스템'은 무시하고 살육을 벌여 정권을 잡은겁니다. 박정희의 쿠테타나, 전두환의 쿠테타나 다를 바 없으며 결과가 좋았다(?)고 하더라도 합법성 없는 힘의 정치는 사회 전체의 도덕적 분위기와 정통성을 크게 해쳤고, 그 해악은 계속 이어집니다. 수양이 왕이 되어서 나름 한명회, 신숙주도 잠깐 옥에 가두고 쇼를 했지만, 예종의 의문의 급사나, 성종 때의 힘겨루기 등을 생각해보십시오. 정치는 혼자 하는게 아닌게 당연하고 권력을 잡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한명회등의 훈신들이 수양이 걱정했던 김종서, 황보인 등의 자리를 대신해서 카리스마 있던 수양이 죽은 후 나라를 좌지우지 했습니다. 게다가 김종서, 황보인은 세종 때부터 공신이고 마땅히 그 자리에 오를만큼 실력과 명망, 자격이 있는 자들이지만, 한명회는 막말로 건달이지 않습니까? 성종이 정리자로서 조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생각하시지만, 제가 보기엔 반대입니다. 성종은 해놓은게 거의 없는 인물이고, 운 좋게도 성종 대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선조때가서 율곡같은 인물이 일어나서 수양 이후로 무너지기 시작한 조선의 기세를 되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사의 시계추는 이미 많이 기울어졌고, 그 결정적 원인이 전 수양의 야심이 빚은 계유정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09/09/25 17:27
갑자기 논제가 인조반정이 아닌 계유정난으로 흐르네요. ^^
저역시도 엘렌딜님과 같은 의견입니다. 발제글에도 잠깐 적었다시피 정상적이지 못한 왕권의 이양에는 공신이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조선의 창업과 제1,2차 왕자의 난으로 수많은 공신이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태종에 의해 숙청당했죠. 태종이 한일 중 최고가 전 공신의 숙청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세조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세조야 공신들을 컨트롤할 수 있었지만 그 다음왕은 그게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성종의 비도 한명회의 딸이고, 그게 성종이 왕이 된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당연히 성종은 한명회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죠. 성종때 이뤄낸 모든 것들은 다 세종, 세조때 시작된 일들이 성종때 정리된 것 뿐입니다. 성종 치세에 새로운 것을 시도한 것은 없습니다. 성종때가 전성기라는 건 그때부터 국운이 꺽었다는 것과 다르지 않죠. 시대의 흐름일 수도 있지만, 지도자의 리더쉽이 부족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성종과 선조 중 하나를 뽑으라면 차라리 전 선조를 뽑겠습니다. 계유정난에 대해선 그래도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닙니다. 세종때에 다시금 신권이 강화되는 중이었고, 나이어린 국왕이 있으면 왕실 자체의 존립도 위협받을 수 있으니까요. 계유정난은 조선이 창업한지 100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종친이라면 누구나 위협을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양녕대군도 수양대군을 지지한 거죠. 차라리 세종이나 문종이 고명대신을 김종서가 아닌 수양에게 맡겼다면 어땠을까요? 세종은 스스로 모든 아들(문종,수양,안평 등)에게 후계자 교육을 시켰고, 문종이 자신을 닮아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텐데 왜 수양이 아닌 김종서에게 고명을 맡겼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형제들의 우애가 상당히 좋았다는 것과 세종 본인이 형제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수양이나 안평이 왕위를 찬탈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요.
09/09/25 17:30
엘렌딜님// 엘렌딜님께서 하신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역사의 과정에서 보면 실제로 그러했지요. 세조를 뒤따르던 모사 계급이 또 하나의 기득권이 되어 그 이전의 기득권을 대체한 것으로 저도 이해합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말은 의미가 없지만 역시 또 한번 만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세조가 즉위하지 않고 나이 어린 단종의 치세가 계속 이어졌을 경우에 집현전 학사들과 건국 초기의 기득권층이 담합할 가능성은 없었을까요. 물론 어디까지나 만약입니다. 벌어지지도 않았던 일을 가지고 논하는 것 만큼 의미없는 일도 없겠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단종의 치세가 계속 이어졌어도 또 하나의 기득권층이 탄생할 가능성은 항상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들이 훗날 등장하게 되는 사림들의 개혁적 사고와 새로운 철학적 체계를 들고 있지 않았던 이상, 한 기득권의 또 다른 기득권으로의 수평적 이동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제 사견입니다.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150년 가까이 훈구파들은 조선의 기득권 세력으로서 고려와는 차별화된 그들의 정치 철학을 추구하고자 애써왔습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든, 집현전 출신의 관료든, 세조를 옹립한 건달 출신의 시정잡배든, 그들의 출신성분을 불문하고 신생 국가인 조선을 전 왕조인 고려와는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의 왕조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이 훗날 등장하게 되는 사림과 훈구와의 가장 큰 차이가 아닌가 생각되며 역시 집현전 관료와 세조를 옹립한 세력 사이에 철학적 차이를 느끼지 못 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성종에게 정리자라는 표현을 쓴 것은 사실 약간의 유머스러움이 깃들어 있는 말인데요,(죄송합니다, 저의 유머가 이 정도 밖에 안 됩니다.ㅠ.ㅠ) 그렇다고 하여 조선 전기와 중기의 교체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왕이었던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연산군을 세자로 책봉한 것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특히, 성종 대의 업적 중의 하나인 경국대전의 편찬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happyend님께서는 경국대전을 조선 전기 훈구파의 업적 중의 하나로 설명하셨는데 그 안에는 집현전 학자들 중, 세조에게 가담한 신숙주 등의 영향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듯 합니다. 성종의 업적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성종 대에 이르러 훈구와 사림의 교체가 시작되게 된다는 점에서도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09/09/25 20:44
글세요.. 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게 당연하다고 보고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어린 단종이 뭘 알고 통치를 제대로 하겠나요. 어짜피 세조가 그렇게 왕위 찬탈 안했어도 조선 창업기의 정신은 어짜피 시간이가면 사라지는게 당연합니다. 조선이 점점 쇠락해져만 갔던 근본적인 원인은 성리학만을 강조하며 농업, 상업, 공업을 모두 천시하고 무시하고 짓밟던 사회분위기죠. 그 놈의 소중화사상으로 중국에게만 빌붙고 중국만 받들다가 포르투갈과 교역하던 일본에게 호되게 당하기도하고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여진족이 후금을 세우고 엄청난 힘을 길렀는데도 주제도 모르고 맞서다가 엄청난 굴욕을 당했죠. 이후에도 조선은 비참한 역사만 되풀이 되어 갔고 그 결과 19세기들어서 아편전쟁 때 청나라가 깨지자 패닉상태에 이르게되죠. 성리학은 그냥 철학자들 사이에 논의가 되고 학문으로 연구하는 정도라면 좋았습니다. 근데 그게 나라의 모든걸 좌지우지하는 일종의 종교이자 규칙이 되었을 때 엄청난 해악이 되어버린거죠. 성리학은 학문에만 머물러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외적이 쳐들어오는데 기가 어떻고 우주가 어떻고 하는게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도 유럽의 자연과학처럼 실증적인 관찰을 통한 학문이 아닌 사념적인 철학이니 실생활에 도움되는건 거의 없었다고 보입니다.
09/09/26 01:09
광해군은 '정치적인 감각이 떨어지는 최고의 실무 책임자'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후금과의 중립 외교나 대동법의 실시 등은 정말 이 임금이 쫓겨나야만 했던 임금이 맞나 싶을 정도로 훌륭한 정책들이었죠. 하지만 정치라는 더러운 진흙탕에서까지 균형감각을 동시에 유지하기엔 너무 벅찬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불운했던 임금임에는 정말 반론의 여지가 없죠.
계유정난과 영락제의 이야기도 나왔네요. 저 역시도 계유정난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홍승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태종은 왕자의 난 이후로 공신들에게 엄청난 숙청을 단행하면서 6조 직계제라는 초유의 제도도 만들어 냈고, 결국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하여 신하들을 모두 물리치고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까지 단행하게 됩니다.(사실 이런 왕권 강화가 없었으면 충녕대군의 왕위 계승은 택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조는 전혀 그러질 못했죠. 한명회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고, 신숙주나 홍달손 등도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이후 직전법이나 6조 직계제의 부활, 경국대전의 편찬 착수 등으로 나름대로 왕권의 강화를 꾀해보았지만, 정말로 필요했던 일인 공신들의 숙청은 하지 못했습니다. 팥 없는 호빵 신세의 정책이었으니 뒤를 이은 성종이 치마폭에 싸여 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예종은 뭐 너무 빨리 죽고 발자취도 별로 없죠.) 영락제에 대해서 말하자면 영락제의 정변은 그냥 단순한 반란이었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태조 홍무제가 자신들의 공신들을 죄다 죽여버린 이후에 정작 쓸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나마 믿을만한 자신의 아들들을 국경 지방의 번왕으로 보내서 통치를 하고 있었습니다.(번왕은 지금의 도지사가 좀 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혈육으로 채워놓은 후에 나름 됐다 싶어서 안심하고 죽었는데 안타깝게도 홍무제의 뒤를 이은 건문제는 태자의 아들, 즉 번왕들의 조카였습니다. 황제이긴 했지만 나이도 어린 편이었고 변방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삼촌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황제의 권위를 내세워 당시 영락제를 제외한 나머지 번왕들을 죽이거나 직위해제 시켜버립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영락제가 선수를 쳐서 반란을 일으키고, 내통한 환관 세력에 의하여 난징이 함락되면서 건문제는 실종되죠. 영락제가 둔탱이들만 가득한 명나라의 황제들 가운데 드물게 나라를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았던 것은 분명합니다.(명나라 황제들의 면면을 놓고 보면 이 나라가 대체 어떻게 굴러갔는지 궁금해질 정도입니다.) 나름 몽골의 침입도 막아내고 해양 원정단도 보내면서 다른 왕조에 비하면 좀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전성기'를 열었던 황제입니다. 역사가 승리자의 기록이기에 이런 평가가 나오는 것 인지도 모르겠지만, 건문제에 대한 평가나 기록이 워낙에 없어서 영락제의 반란을 긍정해야 할지 부정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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