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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25 11:55
조일전쟁 후 조선은 무너지거나 완전히 환골탈태했어야 했습니다.
광해군이 환골탈태를 위해 노력했으나 결과는 인조반정으로 인한 회귀. 안타깝죠.
09/09/25 13:20
그냥. 평범한 학생으로써의 생각과 갈리는 점이 몇가지 보입니다.
1.제목 : 조선건국부터 조선의 역사는 중세를 넘어서 근세로 평가받아야 함이 마땅합니다. 기존의 역사학자들이 고려를 중세, 조선을 근세로 구분한 것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 방면에 있어서 고려의 음서제도와 과거제도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개혁하여 신분 위주의 등용보다 능력 위주의 등용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제일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이를 토대로 조선이 고려와 대비하여 사회, 경제, 문화 등으로 쭉쭉 달라지는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도 중세라 표기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2. 3)내용의 아랫부분에서, 각 붕당이 끊임없는 내분을 통해 세력을 잘라낸다는 내용은 일본의 우익과 우리나라의 극보수가 똑같이, 끊임없이 주장하는 식민지 타율성론과 다를바 없습니다. 물론 붕당정치의 변질 과정에 있어서는 맞는 내용입니다. 붕당이란 명칭을 사용했던 것이 일본의 식민지 타율성론과 박정희의 유신 독재의 정당성을 혁파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지만, 일단 뒤로하고. 초기 붕당정치의 하에서는 '공존'의 미덕이란 반드시 지켜졌습니다. 조선의 미묘한 권력의 분배(예를 들어 이조전랑을 통해서, 조선의 3품 이하의 관리들이 그저 실무직으로 전락하는 사태를 막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의 원칙 하에서 붕당이란 정파적 성격과 학파적 성격을 갖춘, 꽤나 선진적인 정치 시스템이였습니다. 4)중간내용과 맞물리게 말한다면, 조광조는 '공존'의 미학을 지키려고 했던 자이기 때문에 '공자 vs 소인'의 구도를 말하였습니다. 붕당정치의 변질 과정에서 이와 같은 구도는 '충신 vs 역적'의 구도로 변질되었고, 따라서 공존의 원칙이 사라짐과 동시에 노론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더 쓰고싶은데. 시간이 없군요 크크. 항상 좋은글 잘 읽고 있으며 나중에 뵙겠습니다.
09/09/25 13:24
뜻이 있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입니다만, 능력이 받쳐주지 못할 때에는 그저 아까운 사람이 되지요. 이 능력이라는게 본신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국가단위가 되면 본신의 능력이라는 것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싶어지지요.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욕심이 있기 때문에,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힘을 모을 수 밖에 없지요. 지금보다도 더 절박했을 겁니다.
09/09/25 14:36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4)번에 대해 제 짧은 소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생이 반정으로 임금이 된 중종은 즉위초부터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 신씨를 폐비시킬정도로 훈구공신들에게 시달려서, 그 훈구공신들의 기세를 꺾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조광조를 기용하고 불과 몇개월만에 대사헌까지 승진시키며 파격적인 신임을 보여줬으나, 소격서격파 - 위훈삭제 에서 보여지듯 조광조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선 집단사직, (성균관유생의)집단휴학 등으로 중종에게 위협했으며, 그러한 조광조의 과격성이 훈구공신에게 시달려왔던 중종의 눈에는 조광조도 훈구공신과 다를바 없다고 느낀 것입니다. 중종의 신임을 잃은데다가, 위훈삭제로 자신들의 밥그릇을 빼앗길까 두려웠던 훈구공신들이 중종과 힘을 합쳐 조광조를 사사시켰죠. 중종은 조광조를 스스로 내치면서, 훈구공신들은 중종이 또다시 제2의 조광조를 기용할지 모른다는 불신이 생겼고, 사림들에게는 조광조를 사사시킨것은 중종이라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 중종이 자신의 치세를 위해 선택한 길은 윤임, 김안로, 윤원형 등 외척세력과의 야합입니다. 희대의 간신이자 삼사를 자신의 언론으로 이용한 김안로, 명종조까지 조선의 등골을 빨아먹은 윤원형. 조선조를 통틀어 외척이 가장 득세했던 시기는 중종조와 조선말기의 안동김씨-풍양조씨였고, 외척정치를 거치면서 조선은 피폐해졌죠. 조광조는 스스로 자멸했습니다. 자신이 섬기는 임금의 그릇과 성격을 제대로 몰랐으며, 밥그릇을 섯불리 뺏었다가는 어떠한 결과가 있을지 잘 몰랐던 것입니다. 조광조의 자멸은 조선사 최악의 비극이 아닐까 합니다. P.s./ 조선초부터 계속 탄압받아서 거의 멸망 직전으로 몰린 한국불교가 문정대비 수렴청정시절 기사회생하여 조일전쟁때 승병의 활약이 가능했다는 것을 본다면, 역사는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09/09/25 16:06
조선의 건국과 동시에 고려 시대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자 했던 학자들(주로 성리학에 바탕을 둔 사람들로써 군주에 대한 의리를 중시했던)은 낙향하여 제자를 기르는 길을 선택합니다.
조선 건국 당시에 조선의 지배 계층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고려 시대부터 남아 있던 관료로서 역성혁명에 동참하고자 하던 사람들, 이성계 중심의 무인들, 역성 혁명의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했던 모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마저 태종 이방원의 왕권 강화 차원에서 신권의 상징인 정도전 일파의 제거 작업으로 인해 역성 혁명 당시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했던 사람들은 거의 제거되고 맙니다. 오죽하면 고려 시대의 구유신 중에 막내 뻘에 해당하는 황희가 세종의 정신적 멘토가 되었겠습니까. 태종이나 세종 모두 인재의 발굴이 시급해 집니다. 낙향했던 목은이나 야은의 제자들은 스승들의 영향하에 출사를 꺼리고 있기에 당장 집현전이라는 특수 기구를 만들어 문화 사업을 독려하게 된 것은 당시의 다급한 인재 고갈 현상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슴을 보여줍니다. 세종의 사망 후, 다시 세조의 인재 제거 정책으로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육성되었던 엘리트 학자들의 수가 급감하게 됩니다. 더구나 세조는 신권의 상징인 의정부보다는 승정원 위주의 밀실 정치를 펼치면서 인재의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게 됨으로써 새로운 세력의 등장은 요원해 질 수 밖에 없었지요. 성종이 훗날 사림의 정신적 거두가 되는 김종직을 등용하기 시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겁니다. 정치의 상층부에서 학자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 보기가 어려웠기에 긴급히 새로운 세력의 수혈이 필요해 지게 된 것이지요. 또한 이들은 대부분이 고려말의 성리학자들이었던 야은이나 목은의 영향을 받았기에 100여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는 현실과의 타협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 겠지요. 김종직의 중앙 권력으로의 진출은 자연히 은둔하고 있는 학자들의 경세에 대한 자신감을 부추기게 되어 훗날 여러 번의 사화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완전히 사림파가 조선이라는 사회를 지배하는 계기가 됩니다. 조선 전기와 중기를 구분짓는 계기를 정치적으로 보면 훈구와 사림의 교체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훈구의 가장 큰 업적이랄 수 있는 경국대전이 만들어진 성종 대에 사림의 거두라 할 수 있는 김종직의 등장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보면 성종 시대야 말로 그러한 경향을 엿볼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순간이 아닌가 합니다.
09/09/26 00:29
Valentian님// 붕당이 선구적인 정치 체계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정을 못받는 이유가 바로 그 견제의 미덕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의 시기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조선의 균형잡힌 당파 정치는 율곡 사후에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율곡이 죽고나서 곧바로 동인의 관직 독식이 이어졌고, 다음에는 정여립 사태에서 서인의 동인 독박 씌우기가 이어졌습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 호란 이후 예송논쟁 시절이 균형잡힌 시기라고 역사서들이 적고 있기는 하지만 그 예송논쟁이라는 것이 전혀 쓸모없는 소모적인 언플이라는 것을 보면 이것도 딱히 설득력이 없죠.
그리고 조광조는 별로 공존의 미학에 부합되는 인물은 아닙니다. 단지 그는 자신의 세력들, 즉 사림들을 조정에 제대로 꽂아넣지 못한 상태에서 훈구 세력의 집중타를 받고 쓰러진 것 뿐이죠. 소격서를 쓸어버리고 위훈을 삭제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훈구파들을 정치에서 배제하겠다는 의지가 드러난 행위입니다. 사림파로서 처음 정계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김종직의 의지처럼, 그리고 율곡의 사상처럼 나라를 다스렸다면 재평가고 뭐고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지 않은 인습 중의 하나인 학벌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담합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는 최악의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곧 죽어도 성리학이라는 폐쇄적 사고관도 비판받아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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