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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9/24 22:05:11
Name happyend
Subject [일반] (역사불판-중세사)조선 성리학, 그것을 말해보자
발제글이 상당히 길어버려서 두회에 걸쳐 올리겠습니다.(양해를)
(오늘 답사가 있어서 나갔다 오는바람에, 글이 정말 두서없습니다.안그래도 꼬이는 주제인데...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시길^^)

첫번째 토론주제는 조선성리학에 대한 평가입니다.
당연히,저는 철학에 관해서는 문외한에 가깝습니다.설령 아는체를 한다고 해도 알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번 발제는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그점은 바로 잡아주시면 더욱 고맙겠고요,
그리고, 제가 조선성리학의 계보를 다 정리해서 올리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생각나는대로 정리했습니다.누락된 부분도 보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철학사로는 성리학을 평가할 능력이 전혀 없고요,다만 시대상황과 결부해서 성리학의 전개를 간단하게 서술해봤습니다.
율곡이이와 퇴계이황의 변주곡에 불과하다고 여길 수도 있고, 아니면 둘다 하나의 체계속의 양극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지 모르나, 제 생각의 핵심은 '유학'은 '철학적 단일성'이 비교적 적은 철학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양하게 변주가 가능했고,그것이 조선성리학의 위대함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은 사회변화의 민감한 부분도 반영되기 마련이었고, 그것은 철학사속에 고스란히 드러나있습니다만,그동안 조선성리학은 철저히 외면받았고, 그까닭에 멋진 의미도 다 퇴색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역사에 대해 말하라면 그것은 어떤 시대와 상황속에서 '인간이 내린 답'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왜,그는 그때 그런 답을 내렸을까? 그걸 이해하려다보니, 그시대의 정신으로 그시대의 인물의 눈으로 그시대의 사건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고, 그것이 저에게 조선성리학을 연구해야 한다는 당위를 제공했습니다.그런 까닭에 조금 발제를 할 수 있었을 뿐,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니 양해를 바랍니다.

그럼, 먼저 조선성리학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평가를 올리겠습니다.
다른 분들의 멋진 보충과 해설과 토론을 기대하겠습니다.
(다른 불판도 금방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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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성리학에 대한 평가


한국 성리학, 특히 조선후기 사림들의 성리학의 계보는 이언적부터 시작한다고 얘기합니다. 이언적은 ‘진리라 무엇인가’라는 동서양을 막론한 철학적 주제에 덧붙여, ‘진리를 알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적 논의를 통해 한국 성리학을 중국 성리학으로부터 독립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도 다 알고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어찌되었든 이언적은 중세가치관을 풍부하게 함으로써, 논리적으로 여타 철학을 압도, 성리학에 대항한 학문이란 것이 태어나면 그 순간 초전박살 낼 수 있는 강력한 무기체계를 도입함으로써 조선시대 후반기 유학을 수렁으로 몰아넣기도 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저의 생각입니다. 그래도 이언적은 주희에 대한 주석만으로 만권을 채우고도 남았던, 그래서 주희의 원전보다 주석만 읽다가 생을 마감하기도 하였던 조선후기 성리학자에 비해 훨씬 더 래디컬했는데요, 그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모든 사상은 보편성과 더불어 시대성을 가지고 있는데요, 이언적은 사화의 소용돌이를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것은 당연히 철학체계에 영향을 끼쳤는데요, 훈구파라고 일컬어지는 조선건국부터 성종때까지 법률체계를 완성해낸 경국대전 세대에 대한 반성이 그 출발점이었습니다.

훈구파는 거칠게 표현하면 진리(道)=법률로 표현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믿음이 고려와 조선을 구분해주었는데요, 고려시대는 전형적인지는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귀족사회였습니다. 이 귀족사회를 재편하기 위해 경국대전 세대들은 일생을 바쳤습니다. 즉,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이죠. 따라서 귀족은 해체되었고, 대신 그 자리에 양반사대부가 들어갑니다. 양반 사대부는 본질적으로는 귀족과 다른데요, 귀족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신의 영역에서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인데 반해 양반 사대부는 법아래 존재합니다.(물론 양반사대부와 평민,그리고 천민의 법률적 인격은 완전히 다른 존재여서, 법아래 평등하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에 대항한 이언적의 철학체계가 법률을 부정하고, 그 자리에 ‘인격’을 집어넣어 수양을 통해서만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철학은 이전 철학에게 이렇게 묻잖아요?
“니들은 옳아? 니들이 진리를 알아?”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던 것처럼 지배자들은 자신만이 진리인양 떠들지만 그래봐야 탐욕스런 육체를 가진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죠.

이 지점에서 이언적은 불교나 노장사상과 결별, 율곡 이이와도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즉, 불교나 노장사상은 태생적으로 ‘반골’입니다. 노장사상은 중국 절대적 권력에 대항하면서 ‘니들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래?’라고 물으면서 탄생했습니다. 이런 진리의 상대성은 언제나 반군에게 이데올로기를 제공해주었고, 사회의 끝자락에는 노장사상과 연관된 도교가 성행합니다.

불교 역시(동아시아 불교) 그런 특징이 있는데요, 불교는 현실을 ‘변화’로 인식합니다. 진리 그자체도 변화무쌍한데 어떻게 그걸 진리로 인정할 수 있냐는 거죠. 그래서 격변기에 불교는 매우 묘하게도 혁명적인 은유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율곡이이도 마찬가지로 진리의 상대성을 추구합니다. 자연은 늘 변하는데 그 변하는 것 가운데 변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논리모순 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진리란 것은 저 피안에 존재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변화무쌍해야 합니다. 전자라면 우리가 아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 무엇인가가 문제가 되고, 후자라면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거죠. 이것이 소위 ‘氣’철학입니다.

율곡이이의 기철학이 성리학적 틀을 벗어나 노장사상이나 불교와 결별한 것은 어찌되었든 진리란 것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가능했는데요, 그것은 자연 그 속에 존재한다는 일종의 유물론적 철학과 실천철학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율곡 이이의 후예들은 정치일선에 뛰어들어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나가려 했고, 그것이 소위 서인-노론 정권의 160년 장기집권을 낳을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또한 이 기철학의 흐름 속에서 한국적 과학이 탄생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다시 이언적으로 돌아와 그가 만들어낸 관념론적인 성리학의 특징은 진리의 구현체가 존재한다는 낙관론과 연관이 되어 있는데요, 이러한 절대적 진리의 존재와 그것이 현실세계속에서 구현가능성을 믿는 철학은  ‘理’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理’ 중심의 철학은 퇴계 이황에 의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져서 ‘진리는 우리를 초월한 절대적 가치로 존재하지만 또한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관념론으로 완성됩니다. (이런 어찌보면 말도 안될 정도의 싱싱한 낙관론이 우리나라 사회 변혁의 주체인 남인에 의해 현실적으로 표현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가끔 생각해보기도 합니다만, 현실은 오히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통해 표현되었습니다)

이러한 낙관론은 바로 맹자의 성선설에 입각한 것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은 저 유명한 ‘우물의 비유’로부터 시작하는데요,
‘만일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가 있다면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아이를 구하려고 할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냈고, 따라서 세상은 선(한 존재)에 이끌려 간다고 믿게 됩니다. 바로 그것은 유학의 특징답게 현실적인 존재인 ‘왕’에 의해 구현됩니다.

그래서 진리의 구현체는 ‘왕’을 그 정점으로 한다고 믿는 퇴계 이황의 남인계 철학에서 이후 ‘신’을 그 자리로 대체하는 ‘서학파’로 갈라져 나온 것은 어떤 면에서는 논리적 귀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퇴계 이황 철학의 진정한 정수는 (지극히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理가 ‘선’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우주는 ‘정의롭기 위해 존재하고 스스로 정의로워지는 理’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으니까요.

만일에 세상을 움직이는 영원불변의 진리가 ‘정의롭지 못하고 무뚝뚝하며 조변석개하는 인간의 마음과 같다면 어떡하지?’ 누구나 생각해봤음직한 이 질문을 4대 사화가 횡행하는 조선중기의 성리학자들은 다 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폭풍 같은 시기에 그들이 미래를 보여줄 수 있는 근거는 오로지 ‘세상을 정의롭게 하는 힘=理’라는 믿음 뿐이었으니까요. 이후, 서학파는 여전히 무뚝뚝하고 믿지 못할 우주의 질서따위보다는 인간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외아들을 보내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운 ‘신’에게 의지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조선후기 남인의 처지는 조선중기 사림파의 처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으니까요.

어찌되었든 정의에 대한 이 믿음을 본격화시키기 위해서 퇴계이황은 소위 ‘사단칠정론’이라는 매우 복잡한 인식론을 펼쳤는데요, 인간은 진리를 알고, 진리를 구현할 수 있는 있다는 낙관론은 이 이론에 의해 진리탐구의 문제를 인간에 대한 탐구의 문제로 환원시킵니다. 즉, 인간의 본성은 그자체가 ‘선’하고, 또한 그자체가 ‘진리’의 구현체이므로 당연히 본성을 잘 닦으면(즉,인격수양) 진리를 알 수 있고, 그런 인간의 행위는 ‘정의’가 되는 것이지요.

사단칠정론은 지극히 복잡하게 전개됩니다만, 핵심은 그 한마디로 표현됩니다.
“정의!”

따라서 사단칠정론은 이언적으로부터 결국은 ‘우리 승리하리라’는 노래를 이어받아, ‘본질적으로 세상의 이치라는 것은 정의를 추구하고, 우리는 열심히 살아간다면 세상엔 정의가 강물처럼 넘칠것이야’라는 것을 보여주려던 조선중기 철학자의 인간적 고뇌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기대승에게 한방 얻어맞으면서까지 이황은 이런 믿음을 굽히지 않았는데요, 기대승은 이황에게 묻기를,
“어이! 사단도 사람의 감정이고, 칠정도 사람의 감정인데, 그걸 구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둘 다 사람의 일인데 말이야. 투표권을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주는 것과 교육받은 지식인에게만 주는 것과 뭐가 달라? 결국 인간일 뿐인데...”
뭐, 이렇게 딴지를 걸었지만 이황은 정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성리학체계 내에서 그것은 인간본성에 대한 믿음, 즉 성선설의 체계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만일에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지만 욕심을 부리면 악인(소인)이 되고, 욕심을 줄이고 수양을 하면 선한 군자가 되지 않는다면, 사림파는 무슨 이유로 그토록 죽어라 당하면서까지 세상의 정의를 위해 달려가야 할까요?
(다시 말해, 이세상을 지배하는 자가 선한자가 아니고, 악한자가 승리한다면 세상을 살아갈 가치가 있기나 하는건가요? 이런 처절한 울부짖음은 결국, 지배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이어야 ’하고, 도덕적인 사람만이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슬로건으로 표현되면서, 오늘날까지 우리들에게 ‘도덕성’과 ‘정의’의 상관성에 대해 되묻고 또 되묻고 있기도 합니다.)

이황은 왕을 정점으로 하는 정의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따라 임금이 본성을 찾으면 정의가 찾아오고, 임금이 본성을 찾도록 돕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림의 시대가 도래 한 선조 1년. 왕에게 바친 첫 번째 희망의 메시지는 ‘성학십도’입니다. 즉, 성군이 되기만 한다면 정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혹시라도 임금이 잘 모를까봐 그랬는지 ‘성학십도’는 그림책입니다^^

퇴계 이황의 철학은 일본에서 더 활발히 연구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솔직히 고백하건데, 저는 잘 모릅니다. 혹시 아시는 분이 있다면 보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만 임진왜란때 강항이라는 학자가 잡혀가서 영주의 보호아래 승려들의 교육을 맡았는데 그 중에는 승복을 벗고 환속하여 유학자가 된 사람이 많았고, 그에 따라 유학이 일본에 퍼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요, 이 강항이란 학자가 그랬는지 아니면 환속한 승려이자 일본 최고의 주자학자가 된 후지와라 세이카가 특별히 이황에 관심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의 제자들이 명치유신때 교육헌장의 기초이념으로 퇴계학을 차용하면서 일본의 퇴계학연구붐의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기도 하지만 오렌지가 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이황과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이이는 기대승의 의견과 동일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즉, 사단이니 칠정이니 해봐야 결국 변화무쌍한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이 우주에 절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변화 속에 있는 것인데, 어찌 절대적 가치를 담지한 존재(특별히 왕의 신성성)이 존재할까요?

이런 이이의 생각은 이황의 철학이 중세적인데 비해 근대에 접근해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어찌되었든 본성으로 인정한 셈이고, 그것을 ‘선하게 하는 것’은 교육이라는 외부적 제도이니까요.

이이 철학의 핵심은 사회도 인간도 자연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도 변화한다는 것, 법률도 영원불변일 수 없으면 제도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이걸 ‘경장’이라고 합니다. 나라와 사회와 인간에 대한 이런 이이의 생각이 이황보다 근대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던 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황은 농촌사회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이이는 좀 더 도시적이었지요. 도시문명의 존재는 극복이 대상이 아니라 사회발전의 한 단계라고 보는 것이 이이 철학의 위대함이라고 여겨집니다.

이황을 비롯한 중세철학의 핵심은 도시의 욕망은 ‘소인배적’ 극복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중세 물질문명의 저열함, 생산력의 일천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 가난한 상황에서 최고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배의 평등’입니다. 이황의 후예들인 남인들이 분배의 평등에 더 천착했던 것은 이런 까닭입니다.(남인계 실학자인 중농학자들은 바로 이 분배의 평등을 지향합니다)

반대로 이이 철학의 핵심은 ‘성장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곳간에서 인심이 나는 법, 먼저 경제적 보장을 해준 뒤에 윤리도덕을 가르쳐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의 ‘핵심’으로 회귀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희철학이 중세적 가치를 추구하여 ‘배고픈 우아함’에 천착하고, 이황이 주희철학에 맹자의 철학을 접목하여 ‘함께 배고픈 우아함’을 추구했다면, 이이는 공자의 철학에 기반하여 ‘배부른 우아함’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이의 철학은 ‘실천철학’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조선후기 ‘실학’은 바로 그로부터 출발했다고 생각됩니다.

서인-노론계 철학이 이후 ‘호락’논쟁에서 농촌의 서인-노론파인 ‘호’에 대항한 도시학파인 ‘락’파를 형성,이들에 의해 도시적 성장론의 모색이 나왔던 것은 이런 결과이기도 합니다. (락은 도시라는 뜻입니다)
낙론은 김원형,이재 등 말하자면 도시에 사는 성리학자들, 청나라 사신으로 한번은 다녀온 친척을 두었고, 그들에게 서양문명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주장이었습니다.
인물성동론이라는 이 이론은 이이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인간의 본성이 진리의 구현체가 아니라 인간도 사물도 모두 우주의 한 조각, 같은 법칙아래 존재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자연은 배타적 존재가 아니라 연구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중세적 자연관을 담은 유명한 고사는 자공의 고사인데요,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어느 날 길을 가는데 한 노인이 밭에다 작은 항아리로 물을 주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열심히 일했지만 항아리로 물을 떠다 물을 주는 일은 너무 더뎌서 하루해가 넘어가도록 일해 봐야 몇 이랑 못 주었지요. 그 모습을 본 자공이 ‘길고’라는 물 푸는 기계를 알려주면서 ‘이것을 쓰면 하루에 백이랑도 넘게 물을 줄 수 있습니다.’고 하자 노인이 화를 매며  말하기를,‘기계는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자연을 파괴할 뿐이야.’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자연을 파괴하고 생산력을 높여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인 배고픔을 해결하는 일을 ‘자연을 파괴하는 일’이라 여기고,자연이 파괴되면 인간의 본성도 파괴된다는 이 믿음이 중세 성리학적 자연관이었습니다.

이것을 김원행을 필두로 하는 낙론의 인물성동론은 공격합니다. 자연에 대한 연구,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유도한 이 조선후기의 새로운 사상적 흐름에 따라 소위 ‘북학파’가 떨어져 나와 자기발전을 이루기도 합니다.

특히, 북학파의 철학과 이후 최한기로 이어지는 철학은 이이의 ‘氣’철학의 발전을 통해 독자적 세계관으로까지 나아갔는데요, 이것은 홍대용의 무한평등우주론을 통해 근대적 평등론으로 나아갈 단초가 제공되었고, 최한기에 의해 중세적 철학인 이기철학속에서 ‘자연법칙’이 분화되어 독립하고, 사회법칙이나 인간의 본성과 같은 각각의 다른 분야들도 속속 독립, 사회과학으로 정립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성립합니다.

아마, 우리나라 철학사의 이런 흐름들이 강력한 자기세력과 만나 정치세력화했다면 시민혁명에 의해 우리나라의 중세적 가치도 무너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민의 형성을 가져올 자본주의의 발전이 이루어지기 전에 외세와 전면전을 벌여야 했고, 이에따라 외국철학이 강제이식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외국철학, 특히 서양철학의 강제의식은 우리역사 속에 자기 흐름을 가지고 있었던 민족적 철학체계까지도 도매금으로 처리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는데요, 이것이 현재 우리는 서양철학보다 동양철학이 더 낮설고, 더 어렵게 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되었든 조선 성리학은 중국의 성리학보다 인간본성에 대한 탐구, 인식론에 대한 탐구에서 많은 성과를 갖고 전개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정치에 대해 외국인들은 지극히 도덕적 잣대를 그 기준으로 하는 특이한 나라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시대적 상황과 더 많이 결부되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요, 조선성리학이 분화와 발전이 바로 ‘훈구파’와의 ‘피의 살육전쟁’의 산물로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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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ordfish
09/09/24 22:24
수정 아이콘
저는 동양사는 잘 모르는 편이긴 합니다만, 성리학은 실패한 학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 이를 신봉했던 중국과 한국이 실패했을 뿐이죠.
실례로 한 국가를 500년 동안 이 토록 온건하게 운용할 수 있게 만든 건 성리학의 공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이 덕분에 조선 백성들은 일본 농민들 처럼 아주 엄청난 수탈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뭐 그래도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수탈이었습니다만, 그건 봉건 왕조의 한계 니까요.) 그리고 중국 처럼 아주 잔인한 형벌 역시도
피할 수 있었죠. 또한 국가 엘리트도 비교적 적은 사치와 나름의 엘리트로서의 규율을 만들어 낸 것 역시도 성리
학의 힘이라고 봅니다.

단 물질 중심의 서양 사상과 달리 과학이나 몇몇 분야에서 발전을 이끄는 추진력은 부족했다고 봅니다. 특히 수학
부분에서는 더욱 그렇죠.(서양의 물질과 이성 중심의 사상에서는 수학은 세상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지만
성리학은 그렇지 않았죠.) 하지만 결국 이 차이 역시도 주변 환경이나 조선이 가진 물질적 하부 구조가 빈약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싶습니다.
귀염둥이
09/09/24 22:28
수정 아이콘
일단 철학의 내용적인 측면은 넘어가더라도

조선의 성리학을 다룬다면 남명선생이름이 빠질 수 가 있나 싶습니다.

물론 퇴계나 율곡처럼 큰 학파를 형성하진 못했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치진 못했지만

학문의 깊이 그 자체만을 따진다면 퇴계나 율곡에 비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죠.
Benjamin Linus
09/09/24 22:34
수정 아이콘
철학으로써는 평가할 수 있지만
철학이 모든게 되어버려서 조선을 망쳤다고 봅니다.
조선이 없고 고려시대가 계속 되었다면 꾸준히 중동과 교류해서 여러 정보와 문물을 얻어
임진왜란도 막았을테고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었다고 봅니다.
성리학때문에 조선은 잘된게 하나도 없어 보이네요.
성리학이라는 학문이 외적을 막아주는 것도 아니고 일본에게 털리고 청에게 털리고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등
모든 외부 세력의 침입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죠.
기껏 한다는게 오히려 더 눈코입을 막는 쇄국정책이라니...
윤성민
09/09/24 22:47
수정 아이콘
좀더 다양성을 인정하는 학문이었다면 참 좋은데 다른 주장을 틀린 주장으로 받아들이는 점이 우리나라의 비극을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다른 학문에 베타적이었을까요.

그리고 만약에 실학이라든지 양명학이라든지 새로운 학문이 성리학의 자리를 대체했다면, 우리나라는 일본처럼 서양과 대등한 입장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 적어도 1910년처럼 나라를 뺏기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오야붕
09/09/24 23:11
수정 아이콘
정치면에서 보자면 풍양조씨 안동김씨가 집권하기 직전까지 노론의 일당전제가 계속되었고
따라서 주류 성리학계도 송시열에서 더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그는 문묘에 배향될 정도로 신성불가침이었으며
비주류 성리학이론들(북학,중농실학)은 배척당했고
때문에 이전 시대까지는 서로간의 논쟁을 통해 발전하던 조선성리학이 붕당,가문싸움으로 변질된 것에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 다음은 지나친 예보학의 시대...과학적 합리주의로 무장한 서양세력에 속절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리와 톰
09/09/24 23:12
수정 아이콘
조선 후기의 비극적 운명 때문에 그 왕조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리학은 실패한 학문으로 인식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실제로 조선 건국 이후에 벌어졌던 성리학 내의 철학적 논쟁은 전세계의 무수한 철학적 논쟁과 더불어 그 궤를 달리할 정도의 풍부한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중에 제가 기회가 된다면 성리학과 명리학을 통한 중세 이후의 동양 철학을 한 번 언급하고픈 생각이 있습니다만 가능할 지는 모르겠습니다.
happyend님께서는 성리학의 계보를 이언적으로 부터 시작한다고 보셨습니다만 동시대인이었던 화담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이신 지 궁금합니다.
물론 후대 성리학자들에 의해 화담의 학문을 육현 중의 횡거의 '기'나 강절의 '수'에 비유하여 그의 학문을 비하하는 경향을 가지기는 하지만 실제 화담의 학문은 누구보다도 기에 기반을 둔 현실 인식에 투철한 학자였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문하에는 도가, 시문학자, 정치가, 노론학자, 화가, 양명학자, 구류학자 등의 다양한 학풍이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율곡 역시도 화담의 학문이 자신이 주장해 온 이통기국론의 기반이 됨을 인정하지 않았을까요.(물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조선 시대의 가장 큰 논쟁이라면 고봉과 퇴계의 사단칠정논쟁과 호락논쟁의 핵심 주제였던 인물성동이논쟁이겠지요.

이러한 철학적 검증을 통해 성리학은 녹문에 의해 주기론이 정리되고 노사에 의해 주리론이 정리되어 19세기 이후에 이르러 성리학이 정리되게 된다고 보는 것이 제 개인적 견해입니다.
사실 녹문과 노사 모두 리와 기의 통합을 우선시 합니다.
단, 보는 시각을 녹문은 기를 중심으로 리를 보려 하고 노사는 리는 중심으로 하여 기를 보려 한다는 점의 차이인데요, 결국 결론은 같으나 그 과정의 차이로 인해 녹문의 학문은 주류에서 벗어나게 되고 노사의 학문이 조선 후반기 철학의 주류를 이루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의 비극은 정치적인 비극일 수는 있으나 결코 철학의 실패는 아니었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이 부분은 여러가지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루뚜님
09/09/24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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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밋네요 ^^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역시.. pgr분들의 내공이란..
09/09/24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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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jamin Linus님// 성리학이 그렇게 잘못된 것이라고는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까지 좋은 것 잘한 것 없다면 조선은 500년 동안 지속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500년 이상 간 절대왕조가 전 세계적으로도 얼마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성리학 때문에 조선이 망한 것이 아니라 망할때가 된 것이니 망한 것 같습니다.
大司諫
09/09/24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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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의 기틀이 되었던 주자 성리학도, 몇 백년이 지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를 겪었습니다.
효종 · 숙종 대 송시열의 학문처럼 보수적인 이념도 있었고,
'실학'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만, 어쨌든 그렇게 불리는 일련의 개혁적 학문 운동도 일어났습니다.
조선 말미에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박영효 같은 진보적 성리학이 등장했고,
최익현 등의 위정척사 운동같은 수구적 행태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정통 주류로서 힘을 가졌던 것은 송시열의 보수적 이념이었을 뿐,
실학은 미미한 영향 혹은 그조차도 안되는 흐름에 불과했고, 갑신정변은 실패했고,
위정척사 운동은 국제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저의 우견으로는 체계화된 도그마의 부재와 함께 민중적 에너지의 결합을 낳을 수 있었던 동기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주자 성리학은 그 긴 세월 동안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탱했고, 지금도 대한민국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붕당 정치 시기는 절대 피의 정치가 아닌, 정치적 희생자가 가장 적었던 시기였습니다.
우리는 주자 성리학의 그런 부분을 인정하고 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P.S. 귀염둥이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퇴계가 있다면 남명도 있어야죠.
한사영우
09/09/24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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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실 우리 현대사 이전 역사에서 기장 아쉬워하는 역사가 두개 있습니다.
하나는 나당 연합이고 ( 대등했던 중국과의 관계가 무너진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

나머지 하나는 유학 이죠.
조선의 마지막 때문이 아니라
고려와의 단절 때문에 유학을 아쉬워 합니다.

나당 연합이 힘의 관계에서 밀리는 계기가 됐다면
유학은 정신과 문화의 관계에서 중국에 복속 되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생각 한답니다.
소림무술
09/09/24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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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jamin Linus님// 고려보다는 조선이 상대적으로 발전된 국가입니다.정치,경제,사회,문화에서 모두 고려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과거제도,조선 초기의 과학기술 등을 보면 알 수 있죠.
또한 조선시대의 성리학은 철학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협소한 생각입니다.예송만 하더라도 겉으로는 무의미해보이지만 왕과 사대부간에 어디에 더 힘을 둘 것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앞으로의 정치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언급됬던 호락논쟁과정에서 인물성이론에 흐름은 위정척사파 ->의병 ->무장투쟁 으로 이어집니다.무장투쟁론자였던 신채호 선생도 유학자 출신입니다.
참고로 고려가 조선보다 좋다는 인식은 그 뿌리를 파혜치면 일제의 식민사관에 토대를 두고있다는 점을 염두해두셔야합니다.분명 조선은 고려보다 발전된 국가입니다.
Eternity
09/09/25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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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조선이 무너진 원인.. 그래서 결국 멸망 후에 외세의 침탈을 받아야했던 이유 중의 하나로 성리학을 드는 건 납득하기 어렵네요.

성리학에 문제가 있어서 조선이 무너진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리학의 일부 분파가, 자신들의 보신과 영달을 위하여, 그 가르침을 한 쪽으로 교조적으로 몰아가서 오용을 하였기 때문이겠지요.

어떤 국가이든지.. 그 국가가 멸망할 때에..
그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지배적인 사상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으로서의 성리학은... 쉬이 범접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깊이가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러한 철학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배층의 권력 독점'을 정당화하고.. 변질되어왔는지를 성찰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한 성찰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철학으로서의 성리학의 위치를 제대로 판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서유럽 중세, 기독교의 가르침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성서의 일부 가르침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자신의 기득권 유지의 도구로 삼았던 계층이 있었습니다.
애초에 성서의 가르침 자체가 그른 것이 아니었음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지요.
언제 어디서든.. 수 많은 이들의 고심을 거친 사상 자체가 그릇된 것일 가능성은 적다고 봅니다.

그 사상이 현실에 '어떻게 (권력계층의 입맛에 맞도록) 변형되어 적용되었는지' 를 고찰하고 나서,
그렇게 '변질되어버린' 사상의 해악을 먼저 살펴 보고, 원래 그 사상의 본형이 어떠하였는지를 고찰하는 것이 순서이겠지요.
그러한 고찰에도 불구하고 그 사상에 결함이 있었다는 점이 인정되지 않는 한에야...
함부로 하나의 사상을 들어, 그 사상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리학이 - 당시의 현실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 큰 오류가 있는 사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당시 사회 권력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그 원형을 곡해하고,
자신들의 자의에 따라 마음껏 뒤틀어버린... 그러한 현상에 문제가 있었지... 성리학 자체의 문제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서의 가르침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보다... 성리학이 못할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윤성민
09/09/25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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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와 조선시대는 장단점이 있다 생각해요. 조선시대가 많은 면에서 발전을 이룬 것은 맞지요. 나중에 나온 국가니까요.
하지만 아라비아 상인이 속요에 등장할 정도로 무역이 활발했던 점, 사상의 자유로움 등은 19세기 말에 우리 나라가 살아남는데는 더 적합했다고 생각합니다.

성리학이 다른 나라 철학 등에 비해 덜 떨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성리학만 떠받들고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행태가 아쉬운 겁니다. 비판하는 분들이 성리학 자체를 까는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용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인 탓이죠.

땅떵이 크기 탓이었을까요? 정작 주희가 살던 중국은 그 이후에도 양명학 등등(더 아는게 없음) 많이 발달했는데 우리나라는 왜 몇백년 전 사람만 잡고 늘어졌을까요.
윤성민
09/09/25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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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rnity님// 하나는 확실하다 생각합니다. 러시아고 영국이고 일본이고 미국이고 독일이고 프랑스고 다 쳐들어오고 있는 걸 이겨내려면 우리가 집중적으로 파야 할 건 우주의 이치를 아는 것보다도 얼른 테크 올리고 업글하는 것이라는 거죠. 당장 동해바다 서해바다에 이양선이 돌아다니고 있는 상황을 미리미리 막으려면 말이죠.

성리학이 굉장히 좋은 학문이라는 점에 대해선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윤성민
09/09/25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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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영우님// 유학과 성리학은 약간 구분해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유학의 한 갈래가 성리학이 된 거고, 본문에도 잇지만 공자의 가르침과 이황의 생각은 다른 면이 있습니다.
한사영우
09/09/25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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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민님// 제가 굳이 성리학이라고 하지 않고 유학이라고 한 이유가 그 구분 때문이죠. 하지만 한가지 분명 한건 성리학이건 기철학이건 중화 사상에서는 벗어나기 힘들었다고 봅니다.
제리와 톰
09/09/25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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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성리학이란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것인지를 한 번 알아 보겠습니다.

중국이라는 나라의 특성상 외부 민족과의 끊임없는 접촉은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자신들이 타 민족을 정복하여 그들의 문화를 흡수하기도 하고 때로는 타 민족에게 정복당하여 그들의 문화의 변화를 강요받기도 하였던 것이지요.
춘추전국시대의 백가사상 중에 후세 군주들이 사용하기 쉬운 학설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법가와 유가이지요.
법가의 사상이 진이라는 전국 국가들 중에서 후발 주자에 속하는 국가에게는 상당한 도움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법가의 이론적 틀을 잡은 한비자라든지, 실제로 운용하여 빛을 본 상앙이라든지, 법가를 통해 전국을 통일한 이사의 예에서 본다면 법가란 군주가 현명하든, 그렇지 않든 군주 일인에게 충성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시스템이 있다면 어떠한 시대에서도 효율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으로 통치의 불안정성을 시스템을 통하여 극복하고자 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르네상스 이후에 대두되었던 마키아벨리즘과 이런 면에서는 비슷한 점이 있는데요, 중요한 것은 통일 이후의 통치에 있어서도 혼란기에 지속적으로 가졌던 유효성을 가질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결국, 법가의 국가 관리 시스템은 진의 단기 멸망을 통해 확인되었습니다.

지금도 중국이라는 나라를 보면 법의 적용이 상당히 독특함을 볼 수 있는데 서양적 사고에 길들여진 우리로써는 이해하기 힘든 법 적용이 많습니다. 아마도 법가에 대한 중국인들의 알러지 반응이 지금도 남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중국에서는 군주의 이상적 모델로 한의 창시자인 유방이라는 사람을 꼽는다는데 그가 진을 멸망시키고 펼친 '약법삼장'이라는 통치 형태는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통치라고 하더군요.

유가의 사상은 공자와 맹자를 통해서 빛을 발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군주의 입장에서는 그 학문이 가지고 있는 개인 개인의 인격 수양보다는 일반 군중들과 자신을 이어주는데 있어서 그 학문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가 가장 중요한 이슈였을텐데요, 유가에서 주장하듯이 왕도정치만 펼친다면 영원히 일반 군중들은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이라는 점에서 군주의 관심을 끌게 됩니다.
혼란기의 국가에 있어서는 국가의 능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끌어내어야 하므로 법가의 사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통치기에 들어선 국가에 있어서는 국민들을 어떤 식으로 복종하게 만들 것인가가 최대의 관심거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유가는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되지요.

제가 본업이 있어서 시작은 거창했으나 마무리를 짓질 못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에 시간이 나면 유가의 평생 라이벌인 도가, 그리고 도가의 평생 동반자인 불가의 관계를 한 번 써 보고 싶습니다.
유가와 도가, 불가 사이에 벌어졌던 치열한 자기 고민 속에서 성리학이 탄생되는 것이기에 성리학을 유가의 후계자로 인식하는 것은 너무나 학문적 안일함 속에 빠져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happyend
09/09/25 12:29
수정 아이콘
제리와 톰님// 철학적으로는 제 지식이 일천합니다.다만 서경덕의 의의에 대해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서경덕의 위치는 '개성파 성리학'정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성리학의 본류는 고려시대 개성을 중심으로 원나라 유학파에 의해 받아들여진 성리학입니다. 이제현까지 학문적으로 닿을지는 모르나 어찌되었든 이제현-이곡-이색....이렇게 이어지는 성리학으로 당시 이들의 위치나 역할,남긴 글등을 종합해보면 이들의 지향은 실천적 성리학이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실천적 현실적 성리학에 따라 이곡,이색은 <공녀>제도의 폐지를 이루어내고, 백성들의 생활여건 향상을 최우선과제로 삼아, 당시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의 보급에 앞장섰는데요, 이렇게 '생활조건향상'의 논리는 이후 서경덕을 거쳐 이이를 지나 경기북부에 근거를 둔 청풍김씨까지 이어지며 조선후기 중상학파 탄생계보가 완성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저는 지극히 정치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만)

고려의 멸망은 개성중심의 성리학자들에게 고려시대 정신을 이어가게 해주었는데요,개성의 분위기는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상업적입니다.즉, 상업은 '화폐'를 중심으로 모든 물건이 교환관계가 성립하는 일대일 관계를 특징으로 하고, 이것이 서경덕의 자연철학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기중심의 철학(물건)속에도 중심원리(화폐)가 존재하지만 물건이 없으면 화폐가 의미가 없고,화폐가 없으면 물건은 돌지 않으니까요.

이런 자연철학은 '만물은 변하지만 그속에 변하지 않는 규칙이 있다'는 자연관을 낳아 이후 조선시대 자연철학과 자연과학은 서경덕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만한데요, 가장 이런 흐름을 잘 보여주는 것이 저는 개인적으로 석실서원을 이끈 김원행의 낙론이라고 여겨집니다.
(김원행에 의해 서경덕과 율곡과 이지함은 재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런점에서 서경덕은 자신의 학풍을 만들고 사승관계가 없었지만 경기북부지역의 서원들은 그의 영향아래서 발전해왔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흐름은 이후 이지함,이산해를 비롯해 경기북부에 근거지를 둔 청풍김씨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나이트해머
09/09/25 12:29
수정 아이콘
성리학이 문제가 아니라 사상 독재가 문제가 되었다 봅니다. 조선 후기의 난맥은 성리학 중에서도 특정 계파가 여타 사상을 모두 짓눌러버리고, 정치적으로도 노론이 다른 세력을 모두 짓밟았기에 일어난 일이라 보여지지요. 서양과 비교한다면 로마 카톨릭은 중세 초중반에는 동방정교회와 종교적, 동로마제국 및 신성로마제국이나 여타 세력들과 정치적 분쟁상태로 지속되어 유지되었고, 문제가 많긴 했지만 발전 없이 정지되어 매몰되\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동방정교회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이런 종교분야에서 탈락한 시점에서는 종교개혁 운동이 있었고요.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면서 발전해 나가야 하는데 조선 후기엔 그런 경쟁이 멈춰 버렸고, 그로인해 발전이 정지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루크레티아
09/09/25 12:33
수정 아이콘
역사에서 철학쪽으로 주제가 옮겨지니 이제 슬슬 은둔고수분들께서 나오시는군요.
저야 철학에는 영 맹탕이니 그냥 대충 성리학의 역사적 의의에만 촛점을 두고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성리학은 엄연한 철학입니다. 기본 정신부터가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지극히 관념적인 학문이죠. 이 성리학이 철학이었던 덕분에 전 언제나 서양 철학사를 읽을때마다 속으로 서양 철학자들을 비웃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항상 '플라톤을 신봉하는 무리들아. 우린 이미 철인 정치를 하고 있었다. 조선 왕조에서 말이다.' 라는 말이 맴돌고 있었죠. 어찌 되었든 조선의 관리들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이고, 그 잘난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유교, 그것도 성리학에 기반한 경전을 달달 꿰고 있었어야 하니 말입니다. 하는 짓거리는 시정 잡배들이나 다름 없는 쌈박질만 일삼고 있었더라도 그들은 엄연히 간판만은 철학자라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당히 외칠 수 있습니다. '철인정치를 하면 나라가 망한다.' 라고 말이죠...
조선시대의 벼슬아치와 지금의 국회의원, 장관들의 공통점은 정치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항상 가장 좋은 교육을 받고 가장 이상적인 체제에 대한 꿈을 머리속에 주입받고 있지만 언제나 가장 진흙탕의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고, 있었습니다. 이런 과격한 현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냉엄한 권력 싸움의 소용돌이와 언제 먹고 먹힐지 모르는 국제정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사회의 건설이란 씨알도 안먹히는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차라리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실용적인 기술이 하나라도 더 필요하죠. 문제는 성리학은 이런 기술은 전혀 없고 당장 외적이 쳐들어오고 백성들이 굶어죽는 마당에 우주의 원리나 탐구하라고 계속 뜬구름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성리학은 분명 철학적인 면에 있어서는 위대하고 훌륭한 우리네 선조들의 자랑거리가 되는 학문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치 이념에는 그다지 맞지 않는 학문이었습니다.
信主SUNNY
09/09/25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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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이후 양명학등으로의 발전이 있었는데, 우리는 왜 수백년간 성리학에 머물러 있었는가. 이 말이 모든 것을 오해하게하는 시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중국이 양명학으로 가는 테크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테크를 탔던 겁니다. 조선에 남은 성리학이라 이름 붙은 그 것이, 그보다 몇백년 전의 중국의 성리학과 같을까요?

그리고 외세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지배 때문에 조선을 낮게 보는 분들이 있는데, 이것도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고려는 원나라에 의해 전쟁에서 패했으니까요. 무신 정권이 몇백년간 이어져서 나라를 지켰나요? 외세의 침략이라는 것은 그 국가의 국력에도 영향이 있지만, 주변 국가의 정세도 많이 타는 편입니다.

일본이 전국을 통합한 '쇼군'에 의해 지배되는 칼의 문화를 지속적으로 갖고 있었고, 그리고 한국을 식민화하고서 전쟁중이었고, 그 식민지배가 매우 짧았기 때문에 야만적인 행동이 부각되는 것이지요. 식민지배가 시작되면 아무래도 초기에 수탈은 심할 것이고, 전쟁중이니 더 그러하고, 처음이면 무섭다고 일본이 처음 점령한 곳이 한국이니 더욱 그렇겠지요.(일본을 칭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원나라에 의해 공격당했던 고려의 그로부터 딱 36년간의 고려상황도 다를 것이 없었을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더 부강할 수 있었을 겁니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짧은 시간만에 서강 열강들과 어깨를 견주었던 일본만큼 부강해졌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쇄국 정책을 하지 않았다면 외국의 지배가 더 빨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가 조일전쟁을 겪었던 것은 일본이 전쟁을 통해 통일하고 전쟁영웅을 만들어냈을 때입니다. 보다 앞선, 보다 능력이 뛰어난 새로운 체제가 들어와 국가가 발전한 상태에서 외국을 넘봤다는 것이고, 당연 그 일착이 한국이었던 것이죠. 기존의 '쇼군'정치제계를 밀어내기 위해 '덴노'를 신격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황의 사상은 말 그대로 안성맞춤이었지요. 그렇게 부강하게 되고, 한국을 침범한 것입니다.

------------------------

넘겨서.

조선 시대의 유교는 학문이기도하지만 종교이기도 했고, 그리고 정치체계이기도 했습니다. 왜 죽자고 하나만 붙잡고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받아들였는지는 자명하지요. 학문의 단계에 머물렀다면 다른 것들을 받아들여 새롭게하는 것이 쉬었을지 모르겠지만, 신앙이자 사상의 단계이기 때문에 사수해야한다는 사명감도 생겼고, 정치체계이기도 했다는 것은 정치인들이던 유학자들에게는 밥줄이기도 했기에 놓을 수 없는 절박함도 있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처럼 정치 집단이 옳다고 했던 것을 바뀌고 나서 그르다고 하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한 힘의 논리로서만 작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옳은 것 중 하나'였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리와 톰
09/09/25 14:09
수정 아이콘
happyend님// happyend님의 글을 읽으면서 실증적이고 논리적인 글의 전개에 자못 고개가 숙여집니다.
또한 happyend님께서 서경덕과 그 유파를 정의한 실천적 성리학이라는 말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네요..

당시 중국으로 부터의 서적이 전해지는 통로는 육로로는 만주와의 교역소였던 의주와 수로로는 개성이 유명하였지요.
그 중에 개성의 상인들은 송상이라 하여 대단한 상업 수완을 발휘하였습니다.
동아시아의 네덜란드라고나 할까요.
자연히 집중된 부에 따라 중국의 각종 문화도 집중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이렇게 부와 문화가 풍성한 상태에서 송도학파는 많은 형태의 문화적 결실을 맺어 조선 중기의 문화를 이끌어 가게 됩니다.

제가 서경덕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철학자이면서도 대단히 현실적이기도 하였고 성리학을 공부하였슴에도 기타 다른 유파에 대해서 배타감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포용주의의 문제인 자기 본질의 퇴색도 보이지 않는데 이는 그의 학문의 뿌리가 끊임없이 현상을 '기'의 변화로 보고 이를 분석하는 방법으로써 '수'를 사용하여 검증함으로써 오류를 줄이고자 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됩니다.
후세 학자들도 화담의 실천적 연구 방법에 대해서는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그의 제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좀 더 그의 학문적 다양성을 쉽게 알 수 있게 됩니다.
성리학 계열로는 이지함, 이산해, 중봉 조헌, 고창 서기 등이 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 중에 서고창의 제자인 송이창의 제자가 아들인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입니다.)
도가 계열로는 박지화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정북창 선생과 절친한 관계로 훗날 동의보감 편찬 당시 허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정북창의 동생인 정작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시인으로는 박순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명에 원군 파병을 요청하러 간 사신이었습니다.
동강 남언경, 홍인우, 이소재 이중호 등은 조선 중기의 유명한 양명학자들로 역시 화담의 문하에 있었습니다.
이들에 의해 성리학에 의해 고사당할 뻔 했던 양명학이 후기까지 명맥을 유지하게 된 계기가 되지요.
차천로의 아버지인 차식과 조선 시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최립도 화담의 제자였습니다.
최립과 한호, 차천로를 합쳐서 송도삼절이라고 부르지요.
마지막으로 정치인으로는 초당 허엽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초당 두부가 나오게 된 소스를 제공한 사람이기도 합니다만 그의 둘째 아들 균이 쓴 소설이 바로 홍길동전이지요.

이처럼 화담의 문하를 보면 다방면에 걸쳐 있슴을 알 수 있는데 이것만 봐도 화담의 학문이 한 편에 치우치지 않았슴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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