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명동 중앙시네마에서 있었던 오다기리 죠와 황추생의 이름을 걸고 올린 <플라스틱 시티>의 시사회를 다녀왔습니다.
황추생과 오다기리 죠의 이미지 그대로를 조합해보건데, 무간도와 독립영화의 어름을 헤매겠구나,하는 것이 영화를 보기 전의 심정이었지요. 그나마 같이 보기로 한 친구가 급한 출장이 잡히는 바람에(하....슬픈 월급쟁이의 운명이여!) 혼자보게 된 영화. 이상하리만치 쓸쓸한 지하철마저 어쩌면 앞으로 감당하게 될 영화의 무게를 자꾸 저울질하게 했습니다.
영화는 지극히 단순합니다. 브라질이란 아주 낯설고, 또한 비합리적인 곳에서 동양인 두 남자가 맞서게 된 운명 따위....거기에다 하나 더 보태자면, 그 비극을 연출하는 것은 같은 동양인이 하나 더 추가된다는 것 정도. 이정도면, 정통 무협소설의 플롯을 반복해온 홍콩영화에서 실컷 맛 본 실마리일 것입니다.
영화가 끝났을 때, 관객들은 아무도 일어서지 못했고, 어떤 처자의 참으로 허탈한 웃음이 장내를 감돌았습니다. 네, 영화는 지극히 허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하루를 보낸 오늘까지 맴도는 것은 어쩌면, 그 순간 나는 황홀한 지옥을 맛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그런 느낌 때문입니다. 너무도 낯설고, 너무도 잔인하고, 너무도 완벽하게 모든 것을 순식간에 빼앗아 가버리는 21세기의 벼랑 끝에 선 우리들 모두가 잠시나마 느끼는 그 황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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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아들아...
아들이라고 불러도 될까?
네, 당신은 나의 아버지니까.
널 오래 기다렸다
아들아, 백호를 오래 보는 건... 생명을 거는 짓이다.
“一物一數 作一恆河
一恆河沙 一沙一界
一界之內 一塵一劫
一劫之內 所積塵數 盡充為劫”
세계 모든 것들의 수를 세어 그 수 만큼의 항하(갠지스강)가 있다고 하고,
이 항하의 모든 모래 수 만큼의 세계가 있으며
그 숱한 세계 안의 한 먼지를 한 겁으로 치고
그 모든 겁 동안에 쌓인 먼지 수를 다시 겁으로 칠지라도...
-지장본 원경 제 1품 중- (대한불교 선밀종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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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무간도가 가슴을 헤집고 들어와 물었던 그 물음을 다시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찰나를 살아 온 나는 여전히 그 시간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옥, 그것은 시간에 대한 인간의 열등감이 아닐까요?
2.
스타크래프트 10년이 남긴 유산.
아니, 스타크래프트 팬 10년이 남긴 유산이라고 해야 옳을 듯합니다. 이스타즈 헤리티지 스타크래프트 부문 우승자의 이름을 보는 순간 정말 이제 마침표가 찍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 그 시간의 지배자들이 하나둘씩 단상에 올랐고, 그 마지막 트로피에 입맞춤을 하였던 스타크래프트 마지막 낭만의 주인공, ‘절대본좌 마본좌’가 영겁의 시간을 지배해오던 천재테란의 고개를 떨어뜨리게 만들었던 신한은행 시즌 3의 결승점 무대가 데자뷰처럼 되풀이되었습니다. 어쩌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되풀이 될 뿐이 아닐까, 하는 짧은 소회에 잠겼습니다.
스타크래프트가 단순한 애들 오락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스포츠의 반열에 오른데에는 사회적 편견을 딛고 꿈을 걸었던 선수, 선수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자기일같이 함께 했던 팬, 그리고 투니버스 방송국 짜투리 공간에 탁자하나 덜렁 놓고 진행된 방송에서도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를 수 있었던 엄재경 해설위원을 비롯한 방송계가 함께 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은 지극히 물량과는 관계없는 스타일이면서도 팬카페 물량으로 대한민국을 뒤집어 놓은 임요환선수가 마린 한기로 러커줄넘기를 할 때,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의 가슴은 뭔지 모르지만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이제는 30대가 되었을 그들에게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그것은 ‘나약한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계시’라고 대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음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판은 늘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내년에도 우리 방송 볼 수 있을까?”
김정민 선수가 스타리그 예선에서 탈락하였을 때, 그리고 그 좋은 경기력에도 불구하고 예선 탈락한 최인규 선수를 장장 6개월간 다시 볼 수 없다고 했을 때, 선수는 화장실에서 흐느꼈고, 팬들은 스타리그 엔딩곡과 함께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스타판은 늘 위기였고, 언제나 위험한 애들 놀이였습니다.
마치 공자가 말한 ‘모든 군주의 선의에 의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란 교의가 ‘교활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전국시대의 벽’앞에서 좌절했을 때와 같은 위기가 스타판에 닥쳤습니다.
공자의 위기는 맹자가 구해냈습니다. 그가 ‘성선설’을 통해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증명해냄으로써 유교를 구해냈듯이 스타판의 위기를 구해낸 것은, 다시 말해, ‘요환단물’이 빠져도 스타판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살벌한 위기속에서 나타난 구세주,그가 ‘사비어’입니다.
3.
‘사비어’.
그는 맨처음 토스유저로 시작했습니다. 그와 함께 했던 안기효,송병구가 토스유저로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본다면 그의 출발은 너무도 평범하고, 너무도 일반적이었을지는 몰라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저그의 매력에 빠진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요? 저그에게 시간이란 선물을 안겨준 홍진호 선수나, 파워풀한 공격력을 안겨준 박성준 선수가 늘 좌절하여야 했던 테란이라는 벽앞에 감히 도전장을 던지게 만든 저그의 매력이 무엇일까요?
스스로는 그 매력에 대해서 ‘물량’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홍진호선수는 시간을 지배했지만, 그 시간을 버텨낸 테란에게 뒷심을 보여주지 못했고, 박성준선수는 파워를 보여줬지만 그 파워를 버텨낸 테란의 역공을 감당할 수비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간을 버텨내는 것이 뒷심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고, 파워를 보여주는 것이 상대에게 공포를 몰아넣어 감히 공격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단이란 것을 깨달은 현명한 제3세대의 탄생은 지극히 당연했을지도 모릅니다. 공포와 시간으로 무장한 물량형 저그.
변한 것은 저그의 제 3시대의 도래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KTF에게 지옥을 보여주면서 화려하게 데뷔를 한 그 순간부터 스타크래프트의 역사는 변했습니다. 비록 악마일지라도 승리한다면 그가 진정한 승자이며 그야 말로 찬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성군이라 불리던 스타판의 아이돌들을 잔인한 웃음기와 함께 짓밟아버린 악마의 진화를 바라보는 스타크래프트 팬들과 관계자는 경악해야 했습니다.
4.
그리고 그제야 스타판은 비로소 이 악마에 의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저그의 반란은 번번히 테란의 군화발에 진압되어왔습니다. 홍진호의 폭풍은 히스클리프가 접속한 비극과 같은 지점을 향하고 있었고, 박성준의 열정은 스파르타쿠스가 보여준 반란의 리바이벌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임요환, 이윤열, 최연성....시대를 지배하고, 시간을 지배하고, 상대를 압도하는 빛의 군주에 맞설 어둠의 군주, 지옥의 제왕. 그의 탄생은 모두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선 무대는 늘 고독했고, 그가 쓴 왕관은 낯설었고, 그에게 패배하여 고개를 떨군 선수들에겐 따스한 방갈로 불빛이 기다렸습니다. 패자는 늘 위로받았고, 승자는 늘 어둠속에 자신의 모습을 숨겨야 했습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처럼.
그가 만일에 실드가 두꺼운 GO군단 출신이 아니었다면, 어찌되었을까요? 인간에게 어려운 숙제만 내고, 그 댓가로 패자의 자리로 내몰린 조커의 삶과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요?어둠의 군주인 그에게서 조금의 곁불이라도 얻어 쬔 그들은 GO의 실드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신은 이 악마에게 잠시나마 시간을 허락했습니다.
서지훈 선수와 이재훈 선수의 눈물겨운 라면일기와 그 덕분에 얻은 CJ스폰서,그리고 덤으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공표한 수퍼파이트!
악마는 그렇게 빛의 세계로 이동해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홍진호, 박성준이 얻지 못한 왕관을 위해 악마와 영혼을 거래한 그를 진정으로 ‘사비어’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악마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것뿐이면 족했을지도 모릅니다. 7일.......................그 황홀한 지옥!
시간의 문은 다시 닫혔고, 그는 다시 어둠속에 갇혔습니다.
5.
진심으로 정말로 진심으로 이스타즈 헤리티지 우승으로 불멸의 이름들 가운데 마침표를 찍게 된 그의 우승을 축하합니다.
6.
네 인생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아들아...
아들이라고 불러도 될까?
네, 당신은 나의 아버지니까.
널 오래 기다렸다
아들아, 백호를 오래 보는 건... 생명을 거는 짓이다.
“一物一數 作一恆河
一恆河沙 一沙一界
一界之內 一塵一劫
一劫之內 所積塵數 盡充為劫”
세계 모든 것들의 수를 세어 그 수 만큼의 항하(갠지스강)가 있다고 하고,
이 항하의 모든 모래 수 만큼의 세계가 있으며
그 숱한 세계 안의 한 먼지를 한 겁으로 치고
그 모든 겁 동안에 쌓인 먼지 수를 다시 겁으로 칠지라도...
(BGM으로 모짜르트의 레퀴엠을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