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야만인이라 여기던 일본도 오랑캐도 새로운 선진문물을 받아들인다면 얼마든지 세상을 위협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조선 시대 지배층인 양반사대부의 응답은 ‘복고적 성리학 원리주의로의 회귀’였습니다. 문명과 야만으로 세상을 보았고, 성리학외의 모든 것은 색안경을 쓰고 보는 지독한 순결주의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현실을 외면한 성리학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폐쇄적인 근본주의로 더욱더 빠져듭니다. 공자와 맹자의 사상은 주희 외에는 그 아무도 해석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 근본주의는 날카로운 칼날을 내부의 적에게 돌렸습니다.
‘단 한글자도 고쳐서는 사문난적이라 여길 것이다.’
주희의 해석에 대해 어떠한 의문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성리학 근본주의자들의 지상명령은 세상에 대한 무능함을 들키지 않겠다는 수구보수세력의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연산군의 폐위 이후, 모든 왕들에게 드리워진 트라우마로부터 숙종도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그는 영악했을 뿐만 아니라 장수하기까지 하는 천운을 얻었습니다. 숙종은 부관참시까지 벌이는 성리학자들의 싸움 앞에서 살아남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왕이 선택한 것은 내전. 서인과 남인은 환국의 시대로 접어들어 서로가 상대방의 가지를 잘라내고 줄기를 잘라내고 마침내 뿌리까지 잘라내는 일을 벌입니다.
이 치열한 싸움의 끝에서 숙종은 기진맥진해진 신하들을 향해 ‘당쟁의 종식’을 선언합니다.
서인은 남인과의 정략적 연합을 통해 인조반정을 성공했으나 컨텐츠도 없고, 패러다임도 없고 시대정신도 획득하지 못한 이 중세복고정치로의 회귀는 위기에 처합니다. 그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서로에게 칼끝을 겨눈 서인과 남인의 100년간의 투쟁은 남인에게 더 치명적이었습니다. 환국의 시대가 끝나갈 무렵, 남인은 완전히 몰락해버렸습니다.
성호 이익은 이 내전의 희생자로 아버지를 잃었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주었던 형 이잠을 잃었습니다. 한때 명문사대가로 높은 추앙을 받아오던 여주이씨가문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버렸습니다.
이익의 셋째형 이서는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떠돌기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몰락한 남인가문의 후예로서 정계에도 진출할 수 없는 불운한 천재인 이서가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그가 여주이씨가문이라는 것이었지요.
여주이씨가문에게는 특별한 재산이 하나 있었습니다. ‘서재’가 그것인데요, 이씨가문의 서재로 통하는 이 서재는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통로였고, 새로운 시대를 엿볼 수 있는 창이었습니다.
이 서재는 어린 유형원이 공부한 곳이고, 이용환, 이중환,이가환 같은 성호 이익의 제자를 키우며 성호학파를 탄생시켰습니다. 정약용은 이 서재에 자유롭게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 서재에서 이서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은 중요한 책을 한권 발견합니다. 아버지 이하진이 베이징에서 비싼 값을 주고 사들인 왕휘지의 <낙의론>이었습니다. 이서는 이후 서예를 통해 자신의 분노를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시켜냅니다. 옥동체로 이름높은 그의 서예는 <동국진체>로 완성됩니다. 이광사와 김정희로 이어지는 조선후기 서예계의 계보가 시작된 것입니다.
2.
이익이 이 서재를 통해서 동서양을 망라하는 책과 만날 무렵, 조선은 더욱더 가혹한 주자성리학을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주희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이 가진 약점을 잘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도교의 우주론에 심취했고, 불교의 형이상학으로 세상을 해석했습니다. 공자와 맹자의 사상은 과거시험 과목외에 효율성과 가치를 잃었습니다.
주희를 비롯한 송나라 신유학자들은 이민족과의 끝없는 전쟁과 패배로 지친 중국인들에게 ‘중화민족의 우수성’을 설파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지금 중국이 하려는 것과 동일한 길을 주희도 걸었습니다. ‘공자’를 절대적 가치를 지닌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
주희는 송나라 신유학자들의 태극이론을 받아들여 우주론을 보강하고, 불교의 형이상학과 도교의 우주론에서 그 형식을 취하기 위해 유교의 “예기”를 절대경전의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그래서 이 신유학을 예학이라고도 하고 도학이라고도 부릅니다.
주희에 의해 유교의 경전은 정비가 됩니다. 사서 삼경이니 오경이니 육경이니 하는 경전은 모두 주희에 의한 편집본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대학>과 <중용>이 예기로부터 분리되어 경전의 위치로 격상됨으로써 마침내 유학도 형이상학을 갖추게 되었고, 주역을 통해 우주론을 완성합니다.
주희는 이민족들의 야만성에 맞설 한족의 무기로 ‘문명성’을 벼려냈습니다. 법치의 핵심으로 국가의 법률인 <주례>중심의 유학은 예치라고 하는 관습법에 대치되었고, 이를 위해 국가는 가족의 외연적 확대로 이해되었습니다. 주희의 사상의 핵심이 <예기>에서 출발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로 표현되는 <대학>으로 완성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당연히 개인의 도덕성과 가정의례가 법치를 대체합니다.
조선 성리학, 즉 조선 주자성리학은 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주석에 주석에 주석의 나날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호이익이 아버지의 서재를 통해 성리학이 가진 편협성에 눈을 떴고, 마침내 그 성리학에 맞서기로 마음먹었을 때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바로 이 주석에 주석에 주석이 꼬리를 무는 시대에 대한 정면도전이었습니다.
한구절의 경전의 문구를 해석하는 주석이 오히려 만 자를 넘어 지나치게 많아 번거로울 지경이다. 그러하니 경전의 근본정신을 찾아 실천할 겨를도 없다.-<성호사설>중에서
3.
성호이익이 성리학을 향한 도전의 첫 번째 행위가 ‘질서’였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질서’란 말 그대로 의심이나 의문이 되는 구절을 적어둔 메모장입니다.
이익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하루에도 수십번씩 ‘공자왈 맹자왈’을 외치지만 정작 고전을 읽지도 않으며 더 나아가 고전에 대해 의심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오히려 의심하고 경전의 시시비비를 탐구하려는 성호이익에게 더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였습니다.
‘남인 집안의 선비가 감히 주석에 주석에 주석을 다는 일을 넘어 원전에 대해 의심을 갖다니!’
윤휴는 조선의 선비들이 ‘토씨하나 고치면 안되는 성인군자’로 추앙받는 주자에 대해 대놓고 비판했었습니다. 유교경전인 <중용>에 대한 주자의 해석과 다르게 보았던 것인데 이것에 대해 항의하러 자신을 찾아온 송시열에게 “경전의 오묘한 뜻을 주자만이 알고 어찌 우리들은 모른단 말이냐”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후에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윤휴는 유배를 가서 죽고, 그의 무덤은 파헤쳐지는 부관참시를 당했습니다.
사문난적,부관참시...이런 어지러운 생각들이 이익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고, 친하게 지내는 수령은 찾아와 안위를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이 위태로운 날 들 속에서 성호이익을 구해낸 것은 바로 공자와 맹자였습니다. 이익은 맹자에 대한 자신의 존경을 담아 아들의 이름을 ‘맹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익이 선택한 길은 공자의 길이었습니다.
‘내가 능히 이 임금을 요-순임금처럼 만들지 못하면 저잣거리에서 종아리를 맞는 것처럼 부끄럽게 여길 것이고, 한사람이라도 제 살 곳을 얻지 못하면 이는 나의 허물이라 말할 것이다’
공자는 그렇게 천하를 떠돌아다녔습니다. 공자가 떠돌아다닌 것은 오로지 부끄러움을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익은 전염병과 흉년으로 고통속에 빠진 18세기 조선을 부유하였습니다. 오로지 부끄러움을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하였지만 선비는 그 가난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4.
긴 여행이 끝난 것은 여든을 넘은 나이였습니다. 더 이상 돌아다닐 기력도 없게 된 이익은 자신이 그동안 여행지에서 얻은 교훈과 서재에서 취한 지식을 모아 책으로 엮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것이 <성호사설>입니다. 그리고 이 책의 서문은 그 어떤 책보다 익살맞지만 그 어떤 책보다 멋진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늙은 성호옹이 장난삼아 쓴 것이다.’
세상은 여전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책은 필요할 것입니다. 그 옛날 공자와 맹자,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경전을 지었던 것은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란걸,이제는 알 것 같았습니다.
제 욕심을 채우고 사람을 함부로 죽이던 때에 경전을 지었던 것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세상은 좋아질 것이란 걸 믿었던 것이지요. 세상이 변하는 만큼 경전도 변해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경전이 무슨 신주단지인양 한글자 한글자를 숭배하고 있는 조선의 선비들을 향해 이익은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 글만이라도 글자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일 따윈 하지 말아주게나. 단지 장난일 뿐이잖아? 그렇게 글자들을 가볍게 여겨주게나. 그래야 새로운 지식이 생기면 쉽게 고칠 수 있지 않겠는가?”
5.
요즘 느닷없이 서민정책이란 것이 쏟아져 나옵니다. 대통령은 그 정책에 대한 훈시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민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알기 위해 길을 떠났던 수천년전의 어느 성자와 수백년전의 어느 늙은 선비의 길이 위대해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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