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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7/01 04:58:14
Name sungsik
Subject [일반] 음대생 동생 이야기 8


너무 오랜만에 써서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네요.
마지막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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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결국 예술의 전당 인턴사원(?) 비슷한 걸로 취직을 했다.
하는 일은 공연 기획이라는데 아직 그런 관련된 일은 전혀 하지 못하고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그 일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하지만, 동생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일을 잘하고 있었다.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기에 더 열심히 하려 했던 것인지는 몰라도
낮에는 학교를 다니고 오후부터 밤까지 일을하는 동생의 생활은
쉽지 않아 보였음에도 잘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4학년 1학기 실기시험 연습을 할 때였다.
내가 한국에 살지 않게 된 뒤로 동생의 연주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방에서 연습하는 동생의 연습 방해를 각오하고 동생방에 들어갔다.

개인적으로 난 동생 연주를 듣는 걸 아주 좋아한다.
가장 많이 들었을 땐 대학 입시때 쯤으로 기억하는데
침대에 누워서 바로 옆의 연주를 듣는 다는 건
어떤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연주보다도 훨씬 더 내 마음에 다가왔고
감동적이었다.

그 느낌을 오랜만에 받고 싶었기에 연습 방해를 무릅쓰고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예전부터 느껴지던 그 감동이 이제는 느껴지지가 않는 거다.
상식적으로 지금 동생이 고등학교 시절보다 못칠리는 없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동생이 쉬는 사이에 잠깐 대화를 했다.
내 궁금증의 답을 유도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내가 대화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야기가 시작됐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동생의 이 한마디만이 기억에 남았다.

'난 정말 연습이 싫어.'


동생이 피아노에 지쳐하고 있던 건 알고 있었지만,
이 한 마디는 나에게도 조금 충격적이었다.
지금 담당 교수님이 동생이 피아노를 포기하지 않도록
아주 오랫동안 동생을 설득하고 있다고 한다.

동생이 베토벤을 가장 좋아하는데, 네가 베토벤을 좋아하면
베토벤만 치는 베토벤 스페셜리스트가 되라.
라던지 네가 한국에서의 피아노에 지쳤으면
유학비 부담이 크지 않은 외국의 대학을 소개시켜주겠다..
라는 식으로 동생을 설득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선생님의 호의를 알고 있고 너무도 고마운데
자신이 피아노를 그만두고 싶어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연습이 싫어서라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좋아하는 것도 직업이 되면 지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말 좋아하는 것이기에 그 근본 자체가 싫어지진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동생은 자긴 피아노는 좋지만, 그 연습은 진심으로 너무 싫다.
단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아무리 많은 길이 있어도 그것이 피아노라면
연습하지 않고 할 수는 없는 것인데 자긴 그것을 감수하고 싶지가 않다고 이야기했다.


자신은 그 이유를 교수님에게 설명할 자신도
이해시킬 자신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유라면 교수님조차도
답을 내주지 못할 거라고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동생의 피아노는 여기서 끝이라고 나 스스로도 납득해버렸다.
그 이유의 어처구니 없음이나 안타까움을 판단하고 싶진 않았고
다만, 그 이유 자체의 벽은 동생이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나도 높았고 너무나도 절대적이었다.

내가 8년동안 미친듯이 부러워했던 그 삶을
동생은 자기 스스로 그렇게 접었다.


여기까지가 8년간 내가 옆에서 지켜본 동생의 이야기다.
놀기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고 멍청해보이기도 하고 천재인 거 같기도 하고
소개팅할 때 영화보고 칵테일바 가는 게 너무 우스워서
삼겹살에 소주 마시러 가자고 하는 엉뚱한 아이.

피아노를 그 무엇보다 좋아하면서도
그 무엇보다 싫어하는 게 동생이다.


훨씬 더 높은 벽들을 자신의 재능과 연습으로
스스로의 고민과 성찰로 이겨낸 동생의 피아노 인생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유로 조금씩 꺼져가고 있다.

누구보다 아쉬운 것이 동생의 피아노 인생의 시작을
절대적으로 지지했던 나이지만,
4년전 동생의 침대에 누워서 들었던 그녀의 연주에서 느꼈던 감동은
내가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아무리 멋진 연주를 들어도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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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얼마전에 녹음했던 동생의 연주 동영상 하나 올려봅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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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kypapa
09/07/01 05:09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글을 올리셨군요. 동생얼굴까지 어렴풋이 기억나는데요.
제 경험인데.. 음대생중에 20대때 악기연주에 흥미를 잃었다가 30대때 다시 불붙는 경우를 몇번 봤습니다.
물론 테크닉과 레벨은 전성기를 못쫓아 가겠지만, 열정이 재점화된 퍼포먼스는 sungsik님을 다시한번 큰 감동으로 초대할수 있을겁니다.
오늘 연주 잘 들었습니다.
happyend
09/07/01 06:28
수정 아이콘
아,동생이 결국 남겨진 마지막 허들을 앞에 두고 멈춰섰군요.
힘을 내서 다시 달리길 바랍니다.
(이런 개인적인 슬럼프가 연주자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동생분도 고집을 꺾고 세상구경을 좀 다녀보면서 정말로 예술이 포기되는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네요.포기된다면 포기해도 되겠지만....)
09/07/01 08:41
수정 아이콘
저 역시 침대에 누워서 듣는 피아노 연주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가끔 딸아이가 연습할 때 딸아이 침대에 누워서 들을때면 오디오로 듣는 위대한 아티스트들의 연주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감흥이 있습니다. 한참 몰입할 때 쯤이면 삑사리가 나서 맥을 끊어 버리는 게 탈이긴 하지만...

미술에 비해 음악은 좀 불공평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대가라도 끝없는 연습으로 날을 세워 놓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죠. 일반적으로 미술 신동이라는 경우는 별로 없죠. 어릴 땐 전혀 미술을 하지 않다가 나이들어서 그림을 그려서 유명해지는 사람들도 많고. 하지만 음악은 어릴때부터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신동이 엄청난 스승들을 만나서 쉼없이 훈련해야만 명성을 얻을 수 있고 명성을 얻은 후에도 단하루도 연습을 쉴 수 없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삶이고 저것도 하나의 삶인데 스스로 그런 형벌과도 같은 삶이 싫다면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보는 것도 좋겠죠. 그런 점에서 전 클래식 연주자보다는 재즈 연주자의 삶이 더 좋아보입니다. 재즈 연주자는 그런 부담을 조금은 덜 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이고 또 연주 자체를 즐기는 것 같아서 말이죠.

음악은 잘 모르지만 동생분의 연주는 정말 힘이 느껴지네요. 거칠다고 하기도 그렇고 우악스럽다고 하기도 그렇고 하여튼 뭐라 표현하기 힘든 독특한 느낌입니다.
09/07/01 11:00
수정 아이콘
동생분이 슬럼프에 빠진 모양이네요. 스스로 이겨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텐데,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게 모르는 법이니까, 뭔가 계기가 생긴다던지 다시 열정을 찾을 기회가 있을거라 봅니다. ^^
Ms. Anscombe
09/07/01 11:11
수정 아이콘
저는 저 손목의 움직임을 볼 때마다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09/07/01 11:11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정주행이란 것을 해봤습니다.

멋진 연주 잘 보고 갑니다!
Aisiteita
09/07/01 15:38
수정 아이콘
오랜만의 글이네요. 동생분이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든, 그냥 다른 길에 정착하든 꼭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사셨음하네요^^ 연주가 감동적이라 추천한번 누르고갑니다.
09/07/01 22:25
수정 아이콘
사실 왜 안올라오나.. 기다렸었는데.. ^^;

저는 피아니스트란 직업이 그다지 행복하고 좋기만 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임동민씨 인터뷰 중 읽은 구절인데 천재소년이라 칭송받고 무난하게 나름 성공한 피아니스트의 삶을 살고 있는 그 청년이
무척이나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듯한 우울한 어조로 이야기를 하며
-피아노는 나의 자존심이고 컴플렉스다.
라고 하더군요. 저는 천재의 영역은 책으로 읽기만 했지 잘 모릅니다.
6살짜리 여자아이가 모차르트 협주곡을 한번 듣고 쳐냈다는 그런 천재의 영역은 겪지 않아 모르지요.
그러나 우리 곁에서 재주있는 보통사람들의 (그 보통사람들 중엔 영재도 있고 수재도 있고.. 그렇다 생각합니다.)
삶을 보면 재능이 있는만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재능이 더한 괴로움을 나타나기도 하더라구요.
완벽하지 못한, 처음부터 끝까지를 보장하지 못한 일반사람들의 재능은 기약 없는 노력의 댓가 앞에서 덧없이 사라지기도 하니까요.
극한의 연주나 예술의 경지에 대한 감이 없는 사람들은 차라리 행복하겠죠.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의 재주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아챌 만한 깜냥이 되지 않았다면 아마 궁정음악가로 행복하게 살았겠죠.
(아 물론 실제론 좀 다르지만 적당히 영화의 스토리를 빌리자면요)

저도 어릴 적 피아노를 쳤었고 그림을 그렸었는데
커서는 그림은 그려도 피아노는 치지 않습니다. 피아노를 전공하신 동생분을 두셨으니 저보다 잘 아시겠지만
... 그림을 늙어 시작해도 늦지 않지만 피아노는 다르지요. 음악의 영역은 어찌보맵면 너무나 가혹할 정도로 인간의 시간을 조여매니까요.
예술가에게 찾아오는 방황의 시간이 음악을 하는 이들에게는 너그럽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글을 읽어오면서도 한편으론 안타까움이 있었는데... 피아노를 계속 했으면 합니다!
라는 가벼운 응원조차 쓰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어쨌든 좋은 곡 잘 듣고 갑니다. ^^; 다른 곡도 듣고 싶지만...

암튼 동생분의 인생은 또다른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끝나지 않는 것,
좋은 일이 있기를 빕니다. ^^
BestOfBest
10/04/30 22:31
수정 아이콘
어쩌다가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찾아서 보게되었는데 정말 멋진글 멋진 연주네요.
취미로 피아노치는데요. 정말 멋있습니다.
또다른 에피소드 올려주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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