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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6/03 08:56:21
Name nickyo
Subject [일반] 정의를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아집니다.
네 바람직합니다.
상당히 고무적인 현상입니다. 이게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서 그렇게 된 것이든 아니든 간에
부당한것을 부당하다 하고 정의로운것을 정의롭다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아니, 자기 이득에 있어서 조금 손해보면서 조그만 선행 하나 하는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오늘은 피시방 야간알바를 하는 날입니다. 노숙자 부부가 새벽에 들어와서 컴퓨터를 한시간만 하겠다고 했습니다. 저 짐들, 더러운 옷들. 그 순간 드는건 '청소하기 짜증나겠네'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치만 피시방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건방지다고 할 수 있지만 저는 이 분들보다는 조금 여유로운 상황에 있는 상대적인 사회적 강자였습니다. 저는 웃으면서 그들을 대했고, 1300원의 요금을 받고 1시간을 넣어드렸습니다. 보통 손님들에게 드리듯 커피도 드리고요.

시간이 끝났는데도 이분들은 가지 않았습니다. 곤히 주무시더군요. 그치만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아침까지는 손님이 많지 않습니다. 특히 금연석은 더 그렇죠. 다행히 이분들은 금연석에 계셨기에 '어차피 귀찮아 진 일' 계속 쉬시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길바닥에 비하면 훨씬 나은 잠자리였겠죠.

그리고 아침 8시. 부부싸움을 시작합니다. 싸움이라기보다는 부인분의 일방적 갈굼이죠. 이 아저씨가 일하러 나가기로 해 놓고는 그렇지 않은 것 입니다. 투닥투닥대더니 이제는 여기서 씻고 화장까지 합니다. 그래도 제 손이 조금 더 귀찮아질 뿐입니다. 근데 조선족인지 한국에선 그러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는 컴퓨터 부품을 훔쳐가거나 하지는 않을까 가끔 시선을 주었는데, 일개 알바생의 입장에서 이정도면 ..양호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가게 분위기에 있어서 썩 좋은 모습은 아니니까요. 아무튼, 남편분은 그게 꽤나 불쾌했는지 저를 자꾸 노려보십니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분들은 방금 막 나가셨습니다. 예상대로 화장실과 자리는 굉장히...새벽에 한 화장실청소는 무의미할 정도입니다. 게다가 휴지랑 재떨이(?)까지 챙기셨습니다. 머리가 아파옵니다. 그렇지만 이 정도는 별거 아닙니다. 손님이 많아서 쓴걸로 무마할 수 있으니까요. 재떨이야 어물쩍 거리면 그만입니다. 거 얼마 한다고.

그치만 사람은 참 간사하다는걸 깨달았습니다. 정의에 크고작음은 없죠. 약자를 위해 싸우는건 대의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정말 쉽지않네요. 청소하러할때는 솔직히 뭐 무단으로 먹거나, 금고에서 돈을 몰래 훔친다거나 하는 근심이 생겨서 금고도 잠그고 청소하고, 수시로 슬쩍슬쩍 보고. 제가 생각해도 참 비겁한 짓입니다. 저 분들이 태어날때부터 노숙자는 아니었을텐데.

그런데 사람이 참 그렇습니다. 자기가 피해보기 싫고, 자기가 책임지기 싫고. 그렇다보니 선행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한 일이 선행이라기보다는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저 조금 귀찮아지는 것 빼고는 아무 문제도 없어서 만족합니다. 그치만 마음이 상당히 피곤해지는건 어쩔 수 없습니다. 아마 타고나길 착하게 태어나지는 않았나 봅니다.


별거 아닌 일인데도 심력이 꽤나 소모되네요. 과연 제가 정의를 외치고 이득앞에 인간이길 포기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욕할 자격이 있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 새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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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토스
09/06/03 09:02
수정 아이콘
님 스스로 그런 자격을 논한다는 자체가
님에게는 최소한의 정의를 외칠 자격은 충분히 있는게 아닐까요.
그런데 노숙자부부를 생각하니 왜 괜시리 웃음이 나올까요;
닥터페퍼
09/06/03 09:04
수정 아이콘
그것을 다시한번 되짚어보실만큼의 사려가 있으신 분이라면 그걸로도 충분한 것 아닐까요.

세상 모든 이가 성인 군자라면.. 세상 재미없잖아요^^
09/06/03 09:24
수정 아이콘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설 때 주의할 점...
그들이 나에게 고마워 하거나, 나의 편에 서서 힘이 되어줄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라는 것 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나를 이용하려 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로 인해 위험(?)한 상황에 빠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설 때 나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은 대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적 약자가 아닌 사람들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편이 된다는 것은 기득권자들과도 싸우면서 사회적 약자로부터도 스스로를 안전하게 보호해야 하는...
사실 굉장히 피곤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duinggul
09/06/03 09:27
수정 아이콘
자신의 손에 먼지가 좀 묻었다고 해도, 노숙자에게 '지저분하니 좀 씻으라' 고 말할 수 있듯이,
자신이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도, 도덕적으로 많이 지저분한 사람을 비난 할 수 있는 겁니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지만 '정도의 차이의 크고작음' 은 존재하니까요.

그런데
'어차피 세상에 완벅한 선은 없다' 는 이 당연한 명제가,
'이도 저도 아닌 중간은 의미없어' 라는 이분법적 사고와 합쳐지게 되면,

종교를 믿어야 한다는 논리에도 쓰이고,
도덕적으로 극도로 지저분한 사람들의 자기 합리화에도 쓰이게 됩니다.
나두미키
09/06/03 09:32
수정 아이콘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 관련해서는 현실에 존재해서는 안되죠.
토스희망봉사
09/06/03 10:57
수정 아이콘
그런 생각과 심리적 갈등을 느낀다는 것 부터가 정의를 생각 하는 마음이 있다는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이런 소소한 일에 마음을 쓰고 갈등 하고 있을때 어디선가는 수천억 혹은 수조원의 세금을 마음껏 포탈 하면서도 수십억을 포탈한 사람과 우리는 별다를것 없다는 기가 막힌 논리를 펴면서 수십년째 집권해오는 세력도 있으니까요
우리의 이런 마음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짓밟으며 말도 안되는 일을 벌이는 사람들이 허다 합니다

이 세상에 정의는 없다고 생각 합니다 다만 정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 하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지지할 뿐입니다.
헐렁이
09/06/03 13:25
수정 아이콘
Agnosia님 말에 상당히 공감합니다.

희생과 봉사, 정작 그걸 받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 감사하기는 커녕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부터 십자가행이었데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이런 비극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죠.
얼마전에도 있었잖아요.

아무튼 피곤한 일이죠.

간사함 또한 구원받아야 할 이유이지 외면당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는 경구를 새기며 참는 수 밖에요.
물론 저 같은 소인배야 한시간 딱 기다렸다 쫓아내고, 몇마디 욕도 잊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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