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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6/20 23:31:44
Name 말랑
Subject [일반] 어떤 고등학생 이야기
공부를 잘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의 학생들은 당연히 수능을 위해 모의평가를 본다.
내가 거기서 기록한 성적은 학년에서도 꽤 높았고 반에서 3등 정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 반에 학년에 유명한 녀석들이 몇 있어서 그 녀석들 성적이 이름에 많이 오르내렸는데
성격 활발하고 공부 잘 하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내가 그 녀석을 제쳤다는 게 꽤나 이슈였다.
 아버지가 대학에서 업을 하시던 녀석이었는데, 리더십이 있었고 풍채도 좋았다.
물론 풍채는 나도 어디 가서 떨어지진 않았지만, 그 녀석은 농구를 좋아하는 리더였고 난 오타쿠였다.
아무튼 그녀석과 나의 성적은 고등학교를 졸업할때까지 업치락뒤치락했었다.

학부모 모임에서 우리 어머니는 이걸 나름 뿌듯해했었다.
대졸 하나 없는 집안의 노가다 십장의 아들이
학문하는 집안의 아들과 맞붙는 성적이 나온다는 걸 신기해하셨다.
내가 성적이 갑자기 폭풍처럼 오르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중학교 시절 나는 그냥 공부 좀 하는 놈이었지 그 정도일줄은 나조차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입학할 때 내 성적에 관심이 있던 사람은 애초에 없었다.
난 중간고사도 썩 잘 보는 편이 아니었고
 어디서 발표 한 번 해보라고 하면 입이 얼어서 한마디를 못하고 조원 모두를 방과후 청소를 시켰고
체육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 전형적인 안경낀 뚱뚱한 오타쿠였다.
천행으로 만화주제가라는 하늘이 내린 재능이 있어 왕따는 당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미국 애니메이션에 흔히 나오는 뚱뚱한 너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거기다 건설업으로 오랫동안 동네에서 이름을 날린 사내의 아들이고
나 역시 그 동네에서만 놀고 살아온 토박이인지라
내가 어떤 집안의 아이인지 친구들도 친구들 부모님들도 대충은 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놈이 뜬금없이 학년의 유명한 우등생들 다 제치고
전교에서 손가락 두 번 세면 이름을 걸었다.

학원을 아예 다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학 말고는 도움이 되는 것이 딱히 있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이과에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삶이니 문과수학의 최상위만 노리면 그만이었다.
사회탐구는 중학교시절부터 한 번도 성적이 떨어졌다 말 할 만큼 내려간 적이 없었다.
국사와 근현대사는 학년의 절대강자였고, 윤리는 평소 보던 책으로도 커버가 되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던 선생님이 입심이 기똥찬 탓에 세계지리를 선택했었는데 생각보다 구미가 맞았다.
국어는 문학과 어법에서 약했지만 비문학은 귀신이었다.
성적이 펄떡펄떡 날뛰는 것은 오직 영어.
외국어에 센스가 없다는 것은 이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일어를 읽지는 못해도 눈치는 있어야 하겠기에 한자를 제2외국어로 썼다.

이제 이 과목들로, 나는 한 번도 경쟁한 적 없던 사람들과 경쟁하게 되었다.

서울대에 갈 녀석들의 성적은 미친듯이 치고 올라갔다.
어차피 이과생들은 우리랑 아무 상관이 없었다.
배우는 내용이 상판이었으니 경쟁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 상대였다.
문과에서 서울대를 노리던 녀석들은 대충 몇 명 감이 잡혔다.
나는 그 수준은 아니었다. 서울대에 들어가려면 억지로 넣을 수는 있는 성적이었지만
그러느니 재수를 시키면 시켰지 지금 학년에서 관리 들어갈 성적은 아니었다.
선생들은 부모님과 상담하면서 나에게 연고대를 언급했다.

그 전까지 우리 집안 최고학벌은 사촌누나의 덕성여대였다.



나는 7차교육과정의 1세대였다.
이해찬이 폭풍처럼 휩쓸었던 세대를 넘어 노무현의 교육정책을 등에 업었다.
이 시기의 수험생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변화는 선택과목이 아니었다.
바로 대학교가 제시한 수시입학제도, 그리고 논술이었다.
대학교는 '고등학교 범위 내에서 출제' 한다는 씨알도 안먹힐 거짓말을 운운했지만
그 거짓말은 우리 집에 정확하게 먹혔다.
나는 고3시절 고려대학교 수시모집 시험을 보러 갈 때까지 글이라고는 써 본 역사가 없었다.
내가 머리속으로 기억하는 만화주제가를 노트에 옮겨 써서 학년의 유명인이 된 적은 있었다.
100페이지 정도 되는 노트를 순수하게 내 머리가 기억하는 만화주제가 가사만으로 채웠으니
요즘같은 세상이라면 방송 한 번은 탔을 만 한 걸작이었다.
그것이 내가 공부 내용 정리 이외의 주제로 글을 쓴 유일한 것이었다.

수능공부는 별다를 게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열심히 했다고 생각할 순 없었다.
우리 학교는 공립에 교육청이 1순위로 감독하는 학교라 야자가 자율이었다.
나는 야자라는 문화를 경험해 본 역사가 없다.
어지간한 불량학생보다도 더 야자를 안했고
어쩌다 참석한 야자는 전부 만화주제가 정리에 쏟아부었다.
그래도 성적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르지 않았을 뿐.

문제는 연고대급을 노리면서 경험한 수시와 논술, 그리고 최상위권 친구들과의 교류였다.



칼 마르크스
유시민
조지 오웰
박노자
헤겔
강만길
리처드 도킨스
에리히 프롬
올더스 헉슬리
시오노 나나미
마빈 해리스
한홍구
베르나르 베르베르
프란츠 카프카
안노 히데아키
알렉스 헤일리
이원복
이문열



친구들이 쌓아놓은 지식은 위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날을 위해 쌓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위해 쌓은 것이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무엇을 쌓는가.

나는 깔끔하게 논술을 포기했다.

현실적이었고, 현명했다.
나보다 높은 결과를 낸 친구들에게서, 부러움이라던가 질투라던가 하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친구들이 저걸 하고 있을 때, 나는 세일러문 한국판 주제가 3절을 외우고 있었다.
내가 한 공부는 뭔가 어긋나 있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나는 재수를 위해 1년을 소비했다.

노무현 정부는 내 세대에 등록금 폭탄을 퍼붓고 장렬하게 이명박 정권으로 산화했다.
내가 보낸 1년은 결코 싸지 않았다.
성균관대에 수능성적만으로 논술이고 뭐고 없이 논스톱 장학금 입학을 했다.
그리고 지금 취직했다 퇴사하고 다시 취직을 노린다.




공부는 노력인가, 유전인가.
내가 부었던 것은 노력이었는가.
내가 보였던 것은 노력이었는가, 못 다 이룬 집안의 포텐셜이었던가.
내 재능은 어디까지의 공부였던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아직도 무작위 만화주제가 배틀만큼은 어디서 져 본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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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햄토리
15/06/20 23:39
수정 아이콘
마지막 줄을 보니 갑자기 피카츄 라이츄 파이리 꼬부기가 생각납니다..크크
Alsynia.J
15/06/20 23:46
수정 아이콘
마지막에서 두 번째 문단이 가장 가슴에 남지 않을까 싶네요
WeakandPowerless
15/06/20 23:48
수정 아이콘
무작위 만화주제가 배틀이라는 게 뭔지가 참 궁금해지네요. 가사 맞추면 이기는 건가요???
근데... 그걸 함께 '겨룰 사람'이 존재하나요? 신기하고 궁금한 배틀일것 같습니다 흐흐... 저도 참여하고 싶...
15/06/20 23:51
수정 아이콘
자기가 아는 만화주제가를 아무거나 불러서

먼저 몇 분 넘게 끊기면 집니다
15/06/21 01:15
수정 아이콘
실례가 안된다면.. 어느 업계에 취업하셨었고, 다른곳은 어디를 희망하시는지 궁금합니다.
15/06/21 08:27
수정 아이콘
사실 대학교생활을 안써서 그렇지 대학교에서 뭐 딱히 한 게 없어서

취직을 했던 곳은 사람관계로 나온 탓에 말씀드리기 힘들고... 할 줄 아는 게 없어놔서 어디를 뚜렷하게 희망한다는 구체적인 것도 없는 상태네요

전형적인 찔러보는 구직자...
15/06/21 10:06
수정 아이콘
전체 논지에 약간 안 맞는 글이긴 한데
최소한 전국 상위 1% 까지는 노력으로 커버됩니다..
아이큐 2자리로 치대를 간 제 친구 케이스가 있어서..
만약에 그 친구가 문과였으면 더 잘했겠죠. 노력만으로 이과수학을 커버하는게 정말 장난이 아니더군요..
증오스런물리
15/06/21 10:33
수정 아이콘
이글에서 성적만 하향하면 제이야기네요 흐극 사실 공부에 별 관심도없었고 대학같은거야 남들 다 가는거 그냥 구색맞춰가면 된다고 생각해서
그냥저냥 남들보기에 성실하게만 해오고 그냥저냥한 성적에 서울에 붙어있는 대학 갈성적은 됬다. 그이상을 바라지도 않았고 그정도면 충분하고 차고넘친다고 생각했고 그러다보니 지금은 그놈의 서울에 있다는 대학에 왔으나 열성적으로 할생각도없고 하지도 않는데 하긴 해야되니깐 할 때마다 지치고 효율도 안나오는 노력은 쏟아 붓고 있고 이걸 왜하나 싶으면서도 현실때문에 놓지는 못하고 또 붙잡고는있고 그러는 와중에 내가 진짜 하고팠던게 뭔지 있긴있었는지 기억조차 안나게 저편으로가있고 ....시간만 흘러가는 느낌이네요

글에서 성적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르지 않을뿐..

공부는 노력인가, 유전인가.
내가 부었던 것은 노력이었는가.
내가 보였던 것은 노력이었는가, 못 다 이룬 집안의 포텐셜이었던가.
내 재능은 어디까지의 공부였던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차라리 아예 성적이 밑바닥을 처음부터 후려쳐서 공부에 대한 관심이 0으로 수렴한 상태였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흑흑
진짜 내가 지금 쏟고 있는게 노력은 노력인건지 뭘 위해 이 노력을 쏟는건지 참
정말 마음을 후벼네요 흑흑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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